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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9월이 었다 드넒은 들엔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나의 유년기엔 가을에 메뚜기가 많이 나왔다.
옛날엔 농약을 안 하기 때문에 농민이 농사를 지어도 하늘에 맡긴다.
왜냐하면 그 시절엔 오늘날 처럼 전기모터 라는 것이 흔하지가 않았었다.
농경사회에서 어느집이든지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즉 건답직파 였다.
몇몇 부자들이나 자기들 집에서 전기 끌어다 비가 안오면 농업용수를 지하에서 끌어다 사용했다.
가물면 할 수 없었다.하늘이시어 하고 있던 시절이다
그냥 하늘에 맡기고 벼가 마르면 마르는대로 농민 마음만 동동 구르고 그저 그렇게 살았다.
채독 걸려 죽었다는 중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비료가 없어서 농민들이 인분을 밭에 뿌리고,
그자리에다가 야채를 심고 과일을 심어 먹었다.
그 시절엔 화학비료가 없었다.
농사를 많이 짓는 어느 부잣집에는 겨울에 문간방 나그네 쉬고 가는 방을 따뜻하게 불을 때놓고,
나그네가 쉬고 잠좀 개워 주슈 하면 재워주면서 긴긴밤 늦은 밤에 배고프고.....
출출할때 고구마, 감자를 쪄서 김치, 동치미랑 내어 놓았다 그러더라구요.
나그네는 맛있게 먹고 배설은 주인장 뒷간에 배설을 하고 가야지 그냥가면 안된다.
그렇게 인분도 버릴것이 없이 천연비료로 다 사용했다.
나의 어린 유년기엔 참 우리아버지 직업은 군의관이셨다.
그래서 이사를 좀 그 시절 남보다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 때 경기도 용인의 김량장리로 이사를 갔다.
우리 친정 엄마의 고향이다.
우리 뒷집엔 능수라는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집엔 능수 위로 언니 2명, 그 중에 화수라는 언니가 머리는 짧게 깍고 ,지금 생각하니 컷트 머리였다.
키는 173cm정도 였고, 얼굴은 이쁘고 좀 약간 썬텐한 사람처럼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멋 있었다. 화수언니 나이는 내가 12살이니깐 그언니는 15~16살 정도로 짐작한다.
언니네는 5남매인데 언니위로 1명 아래로 여동생,남동생3명이 있었다.
나이에 관계없이 우리는 서로 같이 어울려 잘 놀았었다.
그 시절엔 웬만한 집에서는 여자는 교육을 않가르쳤다.
너무 우리나라가 가난한 농경사회였다.
교육열도 남아선호 사상 위주로 세상이 앞서 가고 있었다.
여자는 좀 등한시 하는 사회 였었다.
즉, 인간 차별 이 많이 심했었다.
어떤 여자아이는 친정이 가난해서 어린 나이에 나이 차이 많은 남자에게 한입 덜을라고 일찍 논 몇마지기 받고 친정에서 시집을 보낸다고 하는 둥, 그런말이 동네에서 이슈화 되곤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남아선호사상이 굉장히 심한 시절이였다.
우리동네 뒷집 화수 언니는 그언니는 정말 모델감이었는데....
지금 국내 모델 중에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 변정수를 닮았다.
우리는 언니 나이나 우리나이나 서로 나이차이 관계 없이 5~6살 차이정도로 나이 차이가 나도 잘도 서로 어울려 놀았다.
여름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그 비를 맞고 비닐 우산을 가지고 가서 소낙비를 맞으며 우리 5~6명이 함께 시뻘건 개울물이 출렁출렁 막 대지를 집어삼키듯 무엇이든 훑어 내려가는데.....
무서운줄 모르고 벌거 벗고 추워서 입술을 퍼렇게 질려있으면서도
그 넓은 시벌건 물살이 세게 출렁이는 파도같이 넒은 개울을 집어삼키듯 흐르는 장마비에 섞여 더러운 시벌건 흑물살에 무엇이 좋다고 아이들은 목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헉 열살 .열한살 열두살 .머슴애 .계집애 .할것없이 어린 아이들이 개헤엄을 치면서
둥실둥실 죽을등 살등 모르고 지네들이 무슨 오늘날의 수영 선수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처럼 그 넓은 개울물을 왔다 갔다
소위 수영이라고 하면서 개 헤엄을 치면서 넘나 들었다.
지금 어른이 되서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온몸에 돋는다.
한번 뿐이 없는 목숨을 장마통에 목숨걸고 닐리리맘보 전지랄 트위스트 를 치고 홀랑 벗고 어린것들이
소낙비를 맞으며 비닐 우산을 비 안맞게 비스듬히 놓고
입고 온 옷이 소낙비에 안 젖게 우산 속에다가 아무렇게나 벗어서 돌돌 말아 던져놓고 무엇이 좋다고...
멱을 감으며 개헤엄 치면서 서로 한참 놀면 체온이 떨어져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닭살 처럼 돋는데
우둘두투둘 소름이 돋아 덜덜 떨면서 비를 맞고 집에 가서 엄마한테 많이 혼났었다.
그 시절엔 세탁기와 탈수기가 있는 집이 없다 모두였다. 그냥 자연에 맏기고 옷들을 말려 입었다.
내 나이 57살이니 지금부터 46년 전 이다.
여름에 장마통에 빨래 말리려면 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부모님은 자식은 많지 올망졸망 너져부리 어질러 놓아서 해마다 찾아 오는 여름 장마통에 구적 구적 한 시절 이었다.
며칠 지나 날이 개면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오재미 남자 아이들은 딱지.구슬치기를 하고 놀았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초가을이 지나 가을이 오고 들엔 곡식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 시절엔 우리나라가 농업국가여서 누구는 가난해서 학교도 못가고 14~15살 논 몇 마지기 받고 시집을 갔다는 등 말들을 믾이 했고 사실이 었다 불쌍한 그녀들 이그 누구던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나야 하는데 그녀들이 넘 불쌍했다 .
그 시절엔 공장도 없고 여자아이들 취직이래야 경남마산 방직공장이나 서울에 있는 집으로 식모살이 가는 것,
가발공장 입사 하는것 그런 것들 이었다.
화수 언니네 아버지는 그 시절 소위 엘리트 공무원 교사들에게 책을 팔았었다.
그래서 그러신지 아저씨는 다른 부모보다 조금 세상을 아시는지 그 언니들은 집에 있었다.
공장도 않가고 그날은 날씨가 쾌청했었다.
9월 중순 벼가 누렇고 파래던 어느 일요일 우리동네에 큰 개울에서 25분~30분 지나가면 논들이 있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유일하게 다리가 있고 그 위엔 차들이 지나 다녔고 인도 , 국도였는데
화수언니, 내 친구 능수, 나 ,내 동생들이랑 놀다가 내가 메뚜기를 잡으러 가자고 했었다.
그 시절엔 메뚜기가 단백질 공급원으로 가을엔 정말 많아서 우린 메뚜기를 잡아 볶아 먹었다.
빨갛게 익어 누렇게 됐을때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
지금 나이가 먹었어도 그때 볶아 먹었던 메뚜기 의 그 맛을 잊을수가 없다. 고소 하고 맛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나이 에 메뚜기 못 먹어본 아이 있으면 나와봐요 .내가 돈줄께요 .얼마냐구요.달라는데로 주어야지요 . 그 정도로 다 먹었엇다구요 .그러니깐요 논 밭 주인은 농약을 뿌릴 이유가 없어요 .인간들이와서 다 잡아주는데요 우렁도 잡아주지 .논두렁 쑤셔 놓는 웅거지 (뱀의일종) 뱀장어 같은것 메뚜기 잡아주지 미꾸리 잡아주지 무엇이 걱정 이냐구요 걱정도 팔자여 나원참 !
우리는 아버지가 마시고 버린 소주병, 찌그러진 주전자 . 주둥이가 깨진 조그마한 기름병 같은 항아리를 가지고 들로 메뚜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 시절엔 농경사회여서 논도 밭도 시내와 가까웠었다. 개발이니 그런것이 없던시절이다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집에서 걸어서 20~30분 거리는 누구던 걸어 다녔다 개울 건너에 논이 있었다
우리들은 집을 나서는데 그 날 따라 화수언니는 그 시절 보기드물게
스타킹에 빨간색 미니스커트와 노랑색 윗옷을 입고 있었다.그 나이에 화수언니는 이상하게 그날은 멋이라는것을 엄청 부리고 나섰다 나는 속으로 너무 웃스웠다 메뚜기 잡으러 가는데 허~ 얼 하고 어린 나이의 나는웃음을 참느냐고 ㅋㅋㅋㅋㅋㅋ
언니는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기 싫다고 안간다고 했지만
그때 내가" 언니 제가 업고 건널께요" 했더니 언니가 절 쳐다 보더니 약간은 미심적은 눈빛으로 "정말 니가 나를 업고 건널 거지?" 하고 말했었다.
그시절 나는 또래보다 키가 크고 발육 상태가 좋았다 사실 좀 컸었다. 키가 목이 한컷이 더 컷다 다른 아이 내또래보다 그래서 생뚱맞게 모델을 꿈구기도 했다 ㅋㅋㅋ 학교에서도 항상 뒤에서 3ㅡ4번에 서 있었다. 우리 엄마 아버지가 좀크신 편인지 잘먹고 잘자란 탓 같았다.지금생각하니 아버지는 매일 맛있는것을 사다 주셨다 항상 다른것을 누런
종이 봉투 항상 퇴근후에 찝차에서 내리시면은 커다란 봉투에서 맛있는것을 많이 사오셔서 나누어 자식들을 주곤하시었다 .우리 동기간들에게 즉 당신의 자식들에게 예쁘다 하시면서 많이 먹고 얼른 크라고 하시면서 아버지 보고 싶어요 ! .그래서 그런 키가 컸다 .화수언니는 날 의심을 안하고 자기를 잘 업고 개울물을 건너라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언니 걱정하지 말어.내가 언니 옷 않 버리게 할께!" 하고 우리들은 소주병 빈것, 아버지가 잡수시고 두신 빈병. 옛날엔 피티병이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석유를 유용 하게 쓸줄 몰랐지요 오늘날 처럼 특히 우리나라는. 개발 도상국 이라구요 그당시 만하여도 그런 소리도 발명도 못하고 못듣는 나라 였다니깐요 .가난 하고 비운의 역사를 가진나라 였다구요 참나원 지금은 정말 살기좋은 세상이지요 우리들은 여럿이서
쭈그러진 주전자 오목한 주둥이가 깨진 옹기를 가지고 걸어가서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난 바지를 걷고 미리 개울에 들어가서 돌을 낑낑 거리면서 들어 올리고 내가 건너기 좋게 돌을 잘 놓고 언니를 업었다.
업고 중간쯤 건너는데 중간쯤에 개울 물살이 제법 세어서 내가 감당 하기엔 힘이들고 업은 언니가 너무 무거웠어요 힘이 무척 들었다.난 어린 나이에도 언니를 무사히 업고 건너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책임감 때문에
낑낑 거리고 언니를 업고 건너다 그만 징검다리에 낀 이끼 때문에 하필이면 개울 물살이 센곳에서
아뿔사! 화수언니를 업고 나 뒹굴었다.
물속에서 언니는 울고 불고 난리가 났고,
어린 난 정말 몸 둘바를 몰랐고 너무 너무 그순간엔 어디라도 숨고 .피하고 싶을 정도로 미안 했었다.
언니가 막 우는데 언니 얼굴에서 그 때 무엇인가 조그만것이 까만것이 떨어졌다.
언니하고 잼싸게 흐르는 물살에 고사리 손으로 주워 주는데 난 그날 처음 인조 속눈썹을 보았다.
그날따라 화수언니는 윗도리는 노랑색 치마는 빨강색으로 입고 .스타킹에 속눈썹. 뽀족구두까지 신고 다 갖추고 진짜 나들이 가는 사람 처럼 한껏 멋을 부리고 메뚜기 잡으러 나왔었는데, 12살 여자애가 "업고 건너겠다"고 자신있게 말한 나도 우습지만,
조그만 12살 여자애 등에 업힌 키가 꽤 컸던 화수 언니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니 우스꽝 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화수언니는 그 이듬해에 방직공장에 간다고 하더니 돌아 오지 않았다.
방직공장에 취직을 해서 집을 떠나간 언니는 몇해가 지나니 화수언니는 아기를 등에 업고 왔다.
좋은 사람이 있어서 시집을 가고 우리도 화수언니네 동네 살다 아버지가 수원 에서 좀 먼곳으로 으로 전근 가시는 바람에
우리 식구를 이사를 가게 되었다.
화수언니 세월이 엄~청 많이 지나 난 이렇게 늙어 있어도
어린 유년 시절 생각이 문득 나면서 그래도 어린 시절의 그시절이 재미있었던 일들이 많았었다.
화수언니도 이제 60이 넘었겠다.
그때 그시절이 다시 생각 난다.
화수 언니 보고 싶어!..........
후기:
이글은 사실은1994년도에 충청남도 충남 전체보이스카우트 단합대결에 가는중 200자원
고지 5장분량으로 써 내라 하여서 시간이 너무 없어서 부여에서 천안쪽으로 가면서 버스안에서 글을 써낸 나의 어린
시절 우리옆집 화수언니 이야기와 내 이야기 추억의 언니 타이머신 타고와요 보고 싶다 .모두 어린시절 친구들이 충남 전체 보이 걸 스카우대회
장기 자랑에서 장례상을 탄 나의 첫작품 이에요 상장과 상금은 얼마인지 궁굼 하셔요 ? 3만원이요 1994년 3만원이면 괜찮은것 보다도 글을써서 당선 되었다는기쁨에 저는그돈으로 모두다 부여 다와서 정동리 꼭대기 식당 있어요 일행에게 닭도리탕 두 남비와 소주 사주고 달랑 소중한 증거 인 상장만 들고 왔어요 거기는 왜 같냐구요 무슨 단체 걸 보이 스카웃트인지 우트인지 단체에요
부여 군청에서 후원해 주어서 같지요 집엔 지금도 상장만 있음 그날 장기 자랑 노래. 춤. 음 악 ' 문학등 (악기다루기) 자기가 할수있는것 하라고 해서 흔들이는 버스 안에서 썼어요 원고지 에다요 써내고 관광 버스 운전 기사들하고 고스톱 치고 있었는데 부여팀이 알려 주더라구요 문학 부분에서 장례상 탓 다고 얼른 가서 상장 받으러고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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