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적 치료
박진우(중앙대학교 의과대학 6학년)
소설 ‘2020년’은 강렬했다. ‘발단’부터 COVID-19로 시작되어 첫 PK 실습이 시작될지도 미지수였다. 우여곡절 끝에 가운에 ID 카드를 달고 병원 실습을 시작하며 의사 흉내도 처음 내보았고 PK학생은 병원의 충수와도 같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기능은 없지만 문제를 일으키면 많이 번거로운 존재란 뜻이다. 염증만 일으키지 말자는 일념을 가지고 병원이란 큰 그림 속에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녹아들어가는 법을 깨우칠 여름 무렵엔 끓는 날씨보다 뜨거운 의지로 여의도 길거리 한복판에 나앉기도 하였다. 하지만, 1년치 소설 ‘2020년’ 속에서 ‘절정’일 줄 알았던 땡볕의 시위는 아직 ‘전개’에 불과했고 ‘절정’은 10월에 찾아왔다.
5년 만에 일본에서 귀국하신 아버지가 자가격리 중 밤에 열이 나고 땀을 많이 흘리셨다. 실습생의 얕은 지식으로는 결핵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만성 신부전으로 관리 중이시던 아버지에게 결핵도 정말 큰 병이라 생각했고 아버지는 자가격리가 끝나자마자 내 강력한 권유로 검사를 받으셨다. 검사 다음날, 아빠의 격리해제 기념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응급실에서 급하게 전화가 왔고 아버지는 필라델피아 양성 급성림프모구성 백혈병으로 진단받으셨다. 본과 2학년 때, 동기들과 필라델피아는 크림치즈 아니냐고 웃으며 암기하던 기억이 선명한데 우리 아버지한테 그런 일이. 그런 병은 머나먼 미국에서 희귀 백혈병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보는 건 줄 알았다.
현실은 시작됐고 우리 가족에게 하늘은 냉혹했다. 아버지는 10명 중 3등 안에만 들면 생존할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독한 항암치료와의 사투를 시작하셨다. 3차 항암 중 패혈증과 섬망증이 심한 상태에서도 “우리 아들 최고!”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 결국, 아버지는 세상 모든 아버지 중에는 1등이었지만 ALL 환자 10명 중에서는 3등에 들지는 못하였다. 운전하실 때도 항상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시던 아버지의 성격일까, 아버지는 동메달마저도 다른 백혈병 환자분께 양보하신 거 같다.
한동안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상태가 악화되고 이벤트가 한 가지씩 생길 때마다 아버지가 떠올라 공부할 수 없는 단원이 늘어갔고 본과 4학년 실습이 끝나갈 즈음엔 공부할 수 있는 단원은 산부인과와 소아과말곤 없었던 것을 반영하듯 아버지의 상태도 심각했다. 내가 펼치는 모든 챕터마다 아버지 몸에 각인되어 있었다. 백혈병 단원은 물론이고 패혈증, ARDS, 만성 신부전, 급성 신손상, 당뇨병, 뇌출혈, 위장관 출혈, neutropenic fever, 섬망증, 수혈 부작용, 아나필락시스, 황달, 고혈압, 칸디다증 어떤 단원을 펴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중심정맥에 히크만 카테터를 넣고 계셨다. 2~3일에 한 번씩 드레싱이 필요했는데 핸드폰에 아들을 ‘주치의’로 저장해두신 아버지는 항상 나한테 드레싱을 맡기셨다. 나는 최선을 다해 드레싱을 진행했다. 집에서 ‘외과적 손씻기’로 손을 씻고, 아는 선배에게 부탁하여 무균 장갑을 몇 세트 빌려 착용하고 소독도 동심원 모양으로 안에서 열심히 해보려 노력했다. 물론 가위, 드레싱 키트도 소독 안하고 막 쓰는 엉터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라 내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항암치료를 거듭할수록 아버지 피부 밑을 지나가는 카테터는 선명해졌다. 임종 순간에는 얇아진 아버지의 다리만큼이나 카테터의 주행이 선명하였고 나는 결국 끝까지 감염되지 않은 깨끗한 카테터를 붙잡고 현실만큼이나 차디 찬 아버지를 잡고 한참을 울었다.
공부할 때, 보존적 치료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어려운 치료법을 외울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존적 치료의 무게는 가벼울 줄 알았다. 강력한 항암치료, whipple’s operation과 같은 무서운 치료의 무게보다 가벼울 수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환자와 손을 잡고 병과 싸워본 사람으로서 치료의 정해진 무게는 없는 거 같았다. 패혈증이 심해져서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보존적 치료를 진행하며 면역이 돌아오길 지켜보잔 교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이전에 들었던 보존적 치료와는 그 무게가 많이 달랐다. ‘보존적 치료’ 한 줄에도 수많은 눈물과 기도가 담겨있을 수 있고 그 간절한 눈물과 기도는 다른 사람이 가늠하기 힘들만큼 무거웠다.
간호사 선생님이 3일마다 카테터 드레싱을 진행하라고 가볍게 말씀하셨을 때도 이토록 환자의 가족이 드레싱에 대해 고민하고 울고 웃었을지 모르셨을 거다. 가족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게 극히 제한적이고 무기력함을 느낀다. 소중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작은 보존적 치료라도 필요 이상의 정성을 쏟고 최선을 다하고 싶다.
비록, 나의 과도한 드레싱이 감염률을 낮추거나 생존가능성에 전혀 영향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환자 가족의 마음은 가족 몸으로 들어가는 수액과 타이레놀이 암세포를 모두 없애고 모든 세균을 죽이는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에 있는 치료방법이 간결하고 쉬워보여도 행간에 있는 무게는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실습을 돌면서 지켜보았던 수많은 보존적 치료가 떠오른다. 4기 담관암으로 보존적 치료만 진행하던 50대 아주머니도,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39도로 펄펄 열이 나서 보존적 치료를 받고 있는 4살 꼬마도 있었다. 커튼 뒤에서 펑펑 울던 내 나이 또래 아주머니 딸도, 열 나는 꼬마의 손을 꼭 잡고 계시던 꼬마의 부모님이 감당하는 보존적 치료의 무게를 함부로 판단했던 나를 반성하며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드렸다.
겨울과 더불어 추웠던 투병기간이 끝나며 소설 ‘2020년’의 ‘결말’이 정해졌다. 계절이 바뀌어 매미가 밤낮없이 운다. 다시 국가고시도 마음잡고 공부하고 수개월 동안 얕은 잠을 잘 수밖에 없던 불안한 내 마음의 염증도 많이 가라앉았다. 산 사람은 살고 있었다.
문득 공부하다가 백혈병 문제가 나오거나 아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지나칠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시큼시큼 아파온다. 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을 놓아버리면 걷잡기 힘들기 때문에 열심히 보존적 치료로, 그리움이란 통증이 내 몸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버틴다.
가끔 참을 수 없이 심해지면, 가슴을 열어 후련하게 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그리움이란 감정을 만성질환이라 생각한다. 완치되긴 힘들지만 통증이 올 때마다 적절한 대증치료로 달래고 마음 한구석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두기로 했다. 효과적인 대증치료도 점점 개발해내고 있다. 예를 들면, 가족들과 이전보다 자주 대화를 나누고 운전을 배워서 추모원에 혼자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공부하기 위해 책을 폈다. 보존적 치료라는 다섯 글자는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소설 ‘2021년’은 주인공이 한층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면 좋겠다.
첫댓글 지친 중에서도 부친의 죽음은 참으로 애타는 설움이고 충격이지요!
요즘 학생들은 간호사를 선생님으로 부르는군요! ㅎㅎ
또 한 명의 수필가 탄생을 축하하며, 미래 우리 협회의 기둥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