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조상" 부끄러운 후손
서동석/전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
서울의 관문 서울역 뒤편, 서부역 근처 동네에 오래 된 성당이 하나 있다.
19세기 중엽 이후 서세동점의 시대가 조선 땅에 몰아치던 무렵 조선왕조는 마침내
외래 종교인 천주교를 탄압할 힘마저 잃게 되었다.
그 무렵 한 서양 천주교인이 조선사람을 내세워 서대문 밖 만리재,
지금의 중림동에 있는 한 집안의 종가집을 사들였고 이윽고 그 집을 흔적도 없이
헐고는 이내 성당을 지었다.
「약현성당」이라 불리는 이 성당은 역사도 역사려니와 그 건축양식으로 인해
서울시의 사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내가 사는 구로동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시내에 들어가려면 그 노선이 약현성당을
지나기 때문에 자주 보게 된다.
하지만 그 성당이 들어서기 전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설령 어느
종가집을 허물고 성당이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하고 연관이 있으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후손으로서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최근에 알게된 바에 따르면, 서양인이 사들여 허물어버린 종가집은 우리 집안의
13세조상님이신 휘가 해자인 어른의 비(妣)되시는 정경부인 고성 이씨께서 지으신
이래 양인의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 이백칠십여 년 동안 역사의 풍상을 이겨낸 집이었다.
약현성당이라 이름한 것도 우리 집안의 약현종가(藥峴宗家)에서 유래된 이름이요,
또한 약현이라 한 까닭은 십삼세조비 고성 이씨의 기가 막힌 사적(事績)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호라, 자랑스런 조상의 얼이 배인 곳을 알지 못하고 그저 지나친 이
못난 후손의 불초함을 어찌 할꺼나.
고성 이씨께서는 청풍군수{휘;고(股)}의 따님으로서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당숙께
의지하여 자라셨다. 그런데 강보(襁褓)에 계실 때 흑함병으로 시력을 잃어
폐맹(廢盲)이 되셨다.
앞을 보시지는 못하나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천안제일 아나율처럼
‘마음의 눈’을 열으셔 일찍이 자상한 마음과 슬기로움을 겸비하신 분이다.
이미 4대조부터 상당한 벼슬을 대대로 누리신 집안인 까닭에 비록 조실부모에
폐맹이라는 비운이 닥쳤으나 그를 넘어 학식과 지혜를 터득하실 수 있었다.
13세조 되시는 함재공{휘;해(嶰)}어른도 조실부모의 비운을 겪기는 매 마찬가지였다.
아홉살 이전에 어머님과 맏형을 여의고 둘째 형님이신 춘헌공{휘;엄(崦)}의 자상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시다가 십사세 이르던 해 아버님이신 참의공{휘;고(固)}께서
중국의 사신으로 갔다 오시는 길에 뜻하지 않게 세상을 뜨셨다.
춘헌공께서는 아버님이 돌아기시전부터 이미 성균관의 중요한 소임을 맡으실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32세에 대과급제를 하는 등 명성을 떨치셨다.
또한 워낙 성품이 곧아 시국정치의 폐해를 낱낱이 비판하고 그 대안을 밝히는 글을
상소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러한 형님의 가르침을 받아 함재공께서도
문순공 퇴계 이선생(文純公退溪李先生) 문하에서 공부하시던 중 십팔세에 이르러
퇴계선생께서 공의 출중함을 귀히 여겨 고성 이씨와의 혼사를 넣게 되었다.
두분의 혼례는 참으로 감동을 준다. 함재공을 데리고 혼인길을 떠난 형님 춘헌공께서
규수댁의 동구 앞 주점에 잠시 들러 하인들의 요기거리를 시키고자 주점노파를 부르는데
노파의 행동이 괴이쩍었다.
노파가 슬그머니 함재공의 가마를 드려다보며 혼자말로 “신랑은 이리 훌륭하시다
마는 …”하고는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언뜻 들으신 춘헌공께서 노파를
다그치니 몇 번을 고개만 주억거리던 노파가 하는 수 없이 신부의 폐맹
사실을 실토하였다.
애석하게 함재공은 천재박명이라는 말처럼 슬하에 갓난 아들 한분을 두고 23세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공의 학문과 인품을 안타까이 여긴 조정에서는 후일 영의정 벼슬을 하사하
니 당시 공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나를 쉬히 짐작하리라. 공과 조비의 적선지덕(積善之德)
은 독자이신 충숙공 {휘; 성(渻)} 어른으로 이어져 이 나라 선비의 귀감으로 길이 남는다.
충숙공어른은 명재상으로, 임진란을 대비하여 군비강화를 주장하신 전략가로, 광해군의
황음무도한 폭정에 죽음도 불사한 충절과 의리로 마침내 반정을 이끌어내신 분이다.
고성 이씨께서는 미망인이 되신 후 먼 미래를 내다보시고 유복자나 다름없는 아드님과 함
께 서울 만리재에 새로운 종가를 지으셨다. 이곳에 터를 잡게된 사연이나 종가를 지으면
서 목수들이 심술을 부려 기둥을 거꾸로 세웠다가 고성 이씨께 들통나 잡도리된 일, 목수
들이 그후 당신의 인품에 끌려 훌륭한 종가를 지었다는 얘기들은 여기서 생략한다. 다만
이분께서는 특별히 약재를 잘 다루셨고 약재를 이용한 일용음식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꼭
붙히고 싶다. 우리가 제사를 올릴 때 쓰는 약주, 약식, 약과를 만드셨으니 선조 임금은 이
음식에 탄복하여 성(渻)자 어른의 호를 친히 약봉(藥峰)이라 내려주셨고, 이에 사시던 종
가집도 약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연히 약현종가집에는 늘 사람의 발길이 잦았는데 특히
가난한 백성이 약으로 만든 음식을 얻고자 구름같이 모였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조상의
음덕은 삼백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서세동점과 더불어 서양인의 손에 넘어가고 이어 그곳
에 서양의 종교시설이 들어서고 말았으니 후손된 처지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