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한국시니어과기협회 회원 2023년 4월 4일
미군정 때 1946년 박헌영이 주도하는 남로당이 일으킨 대구 10·1 폭동은 남로당과 이를 따르는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시작하여 경북에서만 22개 군청과 경찰서가 폭도들에게 점령당하고 경찰 가족들은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저자는 조선방직 사택에 살고 있었는데 어릴 때라 ‘군인과 노동자는 우리 편이고 미군과 경찰은 적이다.’ 하면서 놀았다. 내 친구는 달성공원에서 어린애 안고 있는 경찰 가족이 폭도들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제주도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에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무장대를 조직해 경찰서 기습을 감행하는 등 반란을 일으켜서 발생하여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토벌 동안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마을을 장악하고, 밤에는 인민 유격대와 좌익 세력들이 점령하기를 반복하여 애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다.
저자가 제주 성읍 마을을 들렀을 때 안내원이 “제주에 여자가 많은 이유는 4.3 사건 때 남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남자가 귀해서 남자가 밖에 나가면 다른 여자를 만나 떠나기 때문에 여자가 바깥일하고 남자는 집에만 있게 되었다.”라고 소개하는 말을 듣고 놀랐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했는데, 이 대대는 제주 4·3사건 진압을 거부하면서 대대원의 호응을 얻고 남조선노동당 일원인 상사 지창수가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면서 반대자 3명을 사살하여 부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여수 읍내로 진격해 관공서와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이어서 순천을 점령하고 연이어 남원·구례·보성을 장악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과 우익인사를 처형하면서,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 지역 전체를 장악했다. 정부는 광주에 반란 토벌사령부 설치하고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토벌군은 10월 22일에서야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그해 12월에 보안법을 제정하여 남조선노동당원들의 색출에 나섰다. 이때 친일 수사 전문가들을 동원하였다, 이듬해 군부의 숙군이 본격화되었다, 그러자 남한에서 공산 폭동을 획책하던 박헌영이 심은 남로당 노동당원들은 견디지 못하고 지리산 등지로 흩어지거나 북한으로 넘어갔다. 이를 두고 북한과 남한 종북세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친일 인사를 정리 안 했다고 매도하고 있다,
이때 춘천 8연대 소속인 박정희와 한신은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작전사령관 송호승 장군의 발탁으로 송호승 장군과 같이 광주로 내려왔었다. 박정희는 토벌군 사령부 정보장교로 근무했다. 그러나 박정희 셋째 형 독립운동가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인 이재복 재량으로 남로당 입당원서에 이름이 올려져 있었으며, 수사팀장 김창룡은 박정희가 남로당 고위 간부일 가능성을 의심하여 1948년 11월 11일에 박정희를 체포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남로당에서 실질적으로 한 행동은 전혀 없었다, 1949년 2월 8일 군사재판 1심에서 박정희는 무기징역과 파면, 급료몰수를 선고받았고, 백선엽 등 만주 출신 장교들의 노력으로 15년 감형되었으며, 백선엽 대령, 김안일 방첩 과장, 김창용 대위 세 사람의 보증을 받아 집행정지를 받고 민간 신분이 되었다. 당시 숙군 수사 총책임자는 육군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이었다, 백선엽은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는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간절히 애원했다, 이 때 백선엽은 박정희와 사관학교 동기 김안일로부터 박정히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들은 상태였다. 백선엽은 무심코 “도와드리지요.”라고 대답했다. 박정희의 진지하고 측은한 모습에 문득 대답이 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종북세력은 박정희는 동료 남로당 사람을 일일이 밝히고 살아남았다고 매도했다.
1964년 12월 에르하르트 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이야기다. 에르하르트가 보기에 깡마른 박정희가 국가 경제를 살리겠다고 열심히 뛰는 모습에 감명받았다. 그래서 박정희에게 충심 어린 충고를 했다. "우리가 프랑스와 몇 번 싸웠는지 아십니까? 열여섯 번입니다. 그래도 전후에 양국은 손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성장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울컥 화를 내면서 말했다. “한국은 일본에 당하기만 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각하, 지도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패전국 독일의 부활에 프랑스의 지원이 컸음을 의미하는 충고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했다. 그 반년 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협정(1965년 6월)이 체결했다. 지금도 일각에서는 이 결단을 두고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며 상식을 벗어난 구호를 외치고 평화선을 파기하여 일본을 도왔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그 청구권자금으로 1970년 포항 종합제철소가 착공됐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포항제철이 생산한 '강 제품으로 5년 후엔 포니(현대자동차)가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이를 두고 북한과 종북세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일 정상화 그리고 평화선 파기등을 들어 친일파라고 매도하고 있다.
이렇게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늘 극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소신이 있게 추진했던 확신에 찬 지도자였다. 이 과정에서 개발 독재라는 후진국 경제성장 모델을 성공하였으며, 세계는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이라 일컫고 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경제개발을 배우려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이를 두고 종북세력은 박정희를 독재자로 호도하고 있다. 박정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유주의자는 나와 보라! 박정희에게 돌을 던지는 자는 종북세력밖에 없다.
손자는 적을 이기려면, 먼저 전략을 잘 수립해야 하며 다음은 적을 고립시켜야 하고 그 사람 다음에 적 주력을 무찔러야 한다고 했다(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적을 고립시킨다는 말은 적의 외교관계 및 군사동맹 관계를 끊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일본과 나쁜 감정을 이용하여 끝없이 한일관계를 끊으려 하는 풍조는 바로 북한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이가 원하는 바이고 최근에 여중생이 미 장갑차 치여 죽은 사건과 미국 수입 소고기를 터무나 없는 광우병으로 매도하여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끊으려 했다. 그리고 해방 후 반일 감정을 이용하여 한일관계를 끊으려 발버둥 치고 있다, 현재 윤 대통령 한일관계 복원하고 자유세계인 미국 및 일본과 경제교류를 확대하고 군사동맹으로 발전시키려 하고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종북세력에 편승하여 한일관계를 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김정은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현재 러시아, 중국 그리고 북한이 자유세계에서 벗어나 독재체제를 굳히고 있고 무력으로 자국 내 주민들을 억압하고 밖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차제에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 자유국가 연합으로 이어갈 필요가 절실하다. 윤 대통령은 이점을 알고 일본과 화의를 한 것임을 국민은 알아야 한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단합함으로써 독재국가들의 세력 확장을 막고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