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눈에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려는 것이 간판의 속성인데, 자신을 오히려 감추려 드는 간판이 있다. 흰색 플렉스 천에 노란 작은 시트지를 붙인 민들레국수집 간판이다. 화려하고 눈에 도드라지는 간판 속에 있었다면 무심코 스쳐 지나갈 법한 소박한 간판이지만, 이 간판은 많은 사람들과 인연 맺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눈에 띄지도 않은 작은 간판을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민들레국수집은 언제나 장사(?)가 잘 된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하는 TV에 나온 소문난 맛집처럼 줄을 기다리는 것도 다반사인 민들레국수집의 독특한 영업 비밀을 들어봤다.
글·사진 | 한정현 기자 hjh@popsign.co.kr
착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착한 가게’의 ‘착한 간판’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 높은 언덕배기에 간판을 걸고 영업하고 있는 민들레국수집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친다. 영업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인데 미리 오거나 조금 늦게 온 손님일지라도 야박하게 내치지 않고 서둘러 음식을 차려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식사를 마치고 가게 문을 나서는 사람들이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말 만을 남긴 채 값을 치른 양 당당하게 문을 나선다는 것이다. 음식을 내주는 식당 사람들 역시 음식 값을 받을 생각조차 없는 듯하다. 외상 장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이 오고 가지도 않는데 쉴 새 없이 손님들은 드나들고, 음식이 차려진다.
민들레국수집은 배고픈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음식이 제공되는 식당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이름 없는 누군가가 찾아와도 조건 없이 음식을 제공한다. 복지의 개념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진행되는 이른바 ‘무상급식’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2003년 민들레국수집 문을 연 서영남 대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조건인 먹는 것 만은 아무런 조건 없이 제공하자는 뜻에서 식당 문을 열었다. 한 개인의 힘으로 민들레국수집을 운영한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사의한데 놀랍게도 2003년부터 지금까지 정부의 지원 없이 식당을 꾸려나가고 있다.
“민들레국수집을 시작하면서 안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정부지원을 받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민들레국수집은 예산 확보를 위해 프로그램 공모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후원회 조직을 만들지 않는 것, 부자들이 생색내면서 내는 돈은 받지 않는다는 처음의 다짐을 지금까지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후원회 조직도 없이, 부자들의 생색도 받지 않는 서영남 대표는 착한 사람들이 착한 마음으로만 내주는 후원은 감사히 받는다. “십시일반 모아진 착한 마음으로 빠듯하지만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어요. 진짜 내가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죠.”
민들레국수집 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이 가게의 메인 메뉴는 정식이다. 국수는 배가 너무 쉽게 꺼지기 때문에 밥을 줬으면 한다는 손님들의 요청 사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한 발 비껴서니 간판 속에 사람이 보인다
소박하고, 어찌 보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간판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서영남 대표는 간판을 처음 만들 때 간판이 최대한 잘 눈에 띄지 않도록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민들레국수집에 ‘무료급식소’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고 생각해보니 왜 간판을 최대한 감추려 했는지 짐작이 갔다.
서영남 대표는 민들레국수집 문을 열면서 전에 있던 간판을 재활용했다. 프레임은 그대로 사용하고 흰색 플렉스 천을 깔고 그 위에 민들레꽃을 나타내도록 노란색 시트지로 ‘민들레국수집’을 붙여 넣었다.
“흰색 배경에다 노란글씨로 글자를 넣으면 잘 안보이겠다 싶었죠. 글자가 최대한 안보여야 찾아오는 손님들이 속상해하지 않고 무료급식소란 표시도 안 나겠다 싶었죠. 간판을 만들어 주신 분이 말하길 간판쟁이 10년에 이런 간판은 처음이라고 말하더군요”라고 웃음 지었다.
그는 간판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풀어냈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는 자본주의의 욕심이 간판에 투영되기 때문에 속에 든 게 없을수록 간판을 요란하게 만들게 된다고 말했다. 간판이 요란하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간판으로 욕심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민들레국수집 간판으로 표현해보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만듦으로써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배려하는 민들레국수집의 간판에는 우리사회의 소수와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다.
|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 |
밥집에서 시작된 무료 봉사, 이제는 의식주 모두를 제공
민들레국수집에는 플렉스 간판 외에도 아크릴로 제작한 작은 명판이 있다. 민들레꽃이 디자인된 이 명판은 민들레국수집의 ‘사업확장’을 나타낸다. 서영남 대표는 민들레국수집을 시작으로 ‘계열사’를 늘려가고 있다.
민들레국수집으로 먹는(食)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살아갈 곳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두 번째로 시작한 것이 ‘민들레의 집’으로, 노숙하는 사람들이 방 한 칸 얻어 따로 살 수 있도록 했다. 자는(住) 문제를 해소했으니 의식주 중 이제 남은 것은 입는(衣)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서영남 대표는 기자의 마음을 읽었는지 “언제든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누어 입을 수 있도록 올해 1월 15일에 ‘민들레 가게’를 열었어요”라고 말을 이어나갔다. 비로소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조건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2003년 민들레국수집 간판을 단 지 7년 만이다. 그것도 정부의 지원이나 기업의 후원 없이, 보통 사람들이 십시일반 정을 모아 이뤄낸 기적 같은 일이다.
서영남 대표는 독서를 통한 사고의 힘을 믿는다.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꾸는 계기를 독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주를 위협 받으면 삶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문화적인 혜택을 받고 의식주의 위협이 없을 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문화적인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해서 만든 것이 ‘민들레 희망지원센터’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책을 읽고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물론 민들레 ‘계열사’답게 모든 게 공짜다.
민들레 홀씨처럼 퍼지는 사랑, 어린이 지원으로 ‘꽃’
자본주의의 병폐가 심해져 빈부의 격차가 커질수록 빈부는 대물림되는 경향이 짙어진다. 그래서 서영남 대표가 생각한 것이 어린이 지원 활동이다.
“노숙하는 분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를 고민해보니 어렸을 때 불우한 가정에서 살아온 경우가 많더군요.” 그래서 ‘민들레 꿈 어린이 공부방’이 문을 열었다. 공부방을 시작하다 보니 배고픈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고 한다. 동네 아이들을 위한 무료식당을 만들어 부자아이든 가난한 아이든 차별 없이 누구든지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을 수 있도록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을 열었다. 이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이 도서관인 ‘민들레 책들레 어린이 도서관’을 2010년 11월에 열었다.
어린이들에게 무상으로 공부와 음식을 제공하는 서영남 대표에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무상급식에 대해 견해를 물었다.
“무상급식의 쟁점이 눈칫밥을 주지 말자는 건데, 자신들이 눈칫밥 먹어보라고 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민들레국수집을 시작하면서 항상 염두에 둔 것이 있다고 말했다. 배고픈 분들에게 절대 눈칫밥 주지 말자는 것이다. 그는 “어른들도 눈칫밥을 먹어서는 안 되는데 아이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아이들이 눈치 보며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고 무상급식이 논란이 되는 현실 자체를 안타까워했다.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부와 봉사
민들레국수집을 열기 전까지 서영남 대표는 25년간 가톨릭 수사의 삶을 살았다. 교회의 담 밖으로 나온 그는 세상 속에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민들레국수집에서는 십자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조심해야할 것은 봉사를 하면서 조건을 다는 것”이라고 말한 그는 “밥 한 술 주면서 예수를 믿고, 성당에 다니라고 하면 나쁜 짓이죠. 사랑은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라고 종교를 넘어선 보편적 봉사를 강조했다.
민들레국수집이 가꾸어가는 민들레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기존 조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하는 기본적 가치를 민들레 홀씨로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편견 없이 홀씨로 퍼져나가는 민들레국수집의 사랑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려 새로운 희망을 싹틔우고 있다. 민들레국수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형편이 나아져 쌀 한가마를 놓고 가기도 하고, 이름 없이 후원하기도 한다. 민들레국수집에 후원하면 영수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 환급을 받지 못하니 후원 역시 조건 없는 마음이어야 한다.
민들레국수집의 간판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가려져 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조건 없는 사랑, 자칫 잊고 살 수도 있는 삶의 가치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