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을 노래하는 시 모음> 나태주의 '게으름 연습' 외
+ 게으름 연습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 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의 식솔들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 대신 가끔 가야금이든 바이올린이든 함께 듣기로 했다. (나태주·시인, 1945-) * 진객(珍客): 귀한 손님
+ 새해 첫 기적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시인)
+ 너도 느리게 살아봐
수술과 암술이 어느 봄날 벌 나비를 만나 눈빛 주고받고 하늘 여행 다니는 바람과 어울려 향기롭게 사랑하면 튼실한 씨앗 품을 수 있지. 그 사랑 깨달으려면 아주 천천히 가면서 느리게 살아야 한다.
너울너울 춤추며 산 넘고 물 건너는 빛나는 민들레 홀씨 그 질긴 생명의 경이로움 알려면 꼭 그만큼 천천히 걸어야 한단다.
번쩍 하고 지나가는 관계 속에서는 다사로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사랑 한 올 나누지 못한다 쏜살같이 살면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할 것 볼 수 없단다.
마음의 절름밭이일수록 생각이 외곬으로 기울수록 느리게 살아야 하는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한단다. 아이야 , 너도 느리게 살아 봐. (장영희·영문학자, 1952-2009)
+ 곡선
빠른 길 놔두고 돌아가길래
비이잉 서두를 줄 모르길래
시간 낭비한다고 발 동동 굴렀는데
그게 아니구나
지름길 서두르다 웅덩이 빠질까 봐 돌부리 걸릴까 봐
돌아갔구나 서두르지 않았구나. (최향·아동문학가)
+ 산토끼랑 달팽이랑
허둥지둥 언덕길 뛰어가던 산토끼가 글쎄 달팽이 보고 혀를 찼대.
너처럼 느릿느릿 가다간 언덕 너머 산비탈 뒤덮은 진달래꽃 잔치 못 보겠다.
달팽이도 글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대!
너처럼 빨리빨리 가다간 제비꽃 깽깽이풀 얼레지 족두리풀 매미꽃 봄까치꽃 애기풀 들바람꽃…… 언덕길 따라 줄줄이 핀 풀꽃 잔치 하나도 못 보겠다. (오은영·아동문학가, 1959-)
+ 빨리
빨리 일어나고 빨리 밥 먹고 빨리 학교에 갔다. 그러나 수업은 빨리 시작하지 않았다.
빨리 놀고 빨리 배우고 빨리 싸웠다. 그러나 키는 빨리 크지 않았다.
빨리 물 주고 빨리 해 주고 빨리 꽃 피라고 빌었다. 그러나 선인장은 죽어 버렸다. (이옥용·아동문학가)
+ 여유
그것이 무슨 인생인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 서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면.
나뭇가지 아래서 양과 소의 순수한 눈길에 펼쳐진 풍경을 차분히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숲을 지나면서 수풀 속에 도토리를 숨기는 작은 다람쥐들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대낮에도 마치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가득 품은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다정한 눈길에 고개를 돌려 춤추는 그 고운 발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된 그녀의 환한 미소가 입가로 번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면.
얼마나 가여운 인생인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 서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면. (헨리 데이비스·영국의 방랑걸인 시인, 1871-1940)
+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 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피에르 쌍소·프랑스 철학자)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