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유
누가복음 22장 31-46절
저희집 큰 아이와 둘째 아이의 취침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것을 요즘엔 봅니다. 한 번은 11시 조금 넘어서 아이들이 자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거실에서 새벽 설교를 준비중이었습니다. 그때 하윤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빠, 아빠는 이렇게 늦게 자고 어떻게 새벽에 일어나?”
속으로
‘난 목사야, 안 가면 안 돼’
자, 대답은 각자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기도, 특별히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3대 사역을 [마 4:23]에 근거하여 가르침, 복음 전파, 치료라고 합니다.
실제로 복음서를 읽어보면 그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서 4대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 하나는 무엇일까요? 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사역 중의 하나라고 하면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기도하셨기에 가히 사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났고, 그 사이 사이 공생애 상당한 기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기도하셨을까요?
며칠 전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주님께서 저에게 이 부분을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연아, 내가 왜 그렇게 기도했는지 그 이유를 아니?” “기도에 담긴 내 마음을 너는 아니?” 이 질문은 저에게 성경 지식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 세계와 주님의 마음에 저를 초대하시는 초청과 같았습니다. 그 순간 주님의 사랑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이유들이 성경 말씀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저는 오늘 그것을 성도님들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다음세대와 함께 하는 특별새벽기도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물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은 이때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기록합니다. 40일동안 주님은 금식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시험을 이기고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티칭과 프리칭과 힐링에 있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기를 원하신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권능으로 나타났으며 성령의 권능은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막9장의 다음 말씀을 다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또한 주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 방울이 피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의 죄의 형벌을 받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미리 기도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기에 기도로써 미리 죽음을 맛보며 일사각오를 하게 됩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는데, 그 죽음 앞에서 주님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만 받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잡히시기 전 베드로의 말을 들어볼까요?
눅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 말을 한 베드로는 주님이 함께 기도하자고 했는데 잠만 잤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죽기를 각오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앞두고 그 십자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세우실 때도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12제자를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2제자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도 있었지만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으며 교회의 터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제자들을 세우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명이셨고 주님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명 감당을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바로 우리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불신자들과 우리가 일을 하는 방법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조직을 만들고 계획을 세우며, 여러 사람을 만나며, 때로는 밤을 새며 일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 할 것은 없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것 이상으로 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자원이 땅에 흘러오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힘과 내 노력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자리와 기회를 드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운이 따라서 노력한 것 이상으로 결과가 나오면 야호 그런 환호성 외치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즈음에서 우리 사명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명이 있으십니까? 보통 우리는 사명하면 아주 거창하고 목숨 내걸고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사명’이라는 복음성가 가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험한 산, 바다 끝도 괜찮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만이 사명은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 교회에서 하는 일, 목장과 옆에 있는 지체를 위해서 하는 아주 작은 일들도 사실은 사명입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하는일도 우리의 사명입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가볍고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하는 태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 일이 사명이 아니기에 그 일을 하는 자신을 당연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맡고 있는 일이 중요하며 그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니다.
이 예배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사명이며 우리가 중요한 사람임을 알려 줍니다. 왜냐면 가장 존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분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매주 보는 사람들, 익숙한 예배당 모습들, 내가 잘 알고 있는 예배 분위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적 요소들에 스스로 속아서, 기대감 없이 예배의 자리에 오고, 마음을 다해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주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 음성 들어야지, 나의 갈 길에 대한 빛을 찾아야지 하는 절박한 심령이 약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늦게 오고,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에 주님께 없고, 죄를 쉽게 용납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기대감이 적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들은 중요한 분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의 피와 살과 생명과 맞바꾼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사명이 있고, 죄를 이기고 거룩함을 이루어야 할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리고 저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체 할 거라는 걸 아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위해서 이미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부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마이크 비클이 쓴 <하나님을 연인으로 사랑하는 즐거움>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주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그가 주님을 배반하더라도 타락하지는 않도록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당신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잠깐만요! 넘어진다는 것이 곧 믿음의 실패와 타락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요?”
실제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육신의 연약함에 부딪히는 사람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마음을 가지고 단순히 넘어지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믿음이 타락해버리는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주님의 말씀은 그 두 가지 영역을 구별하고 있다. 그 두 가지 마음 상태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넘어져서 주님의 기대를 저버릴 때 종종 우리 자신에게 배반자라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성숙함과 반역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미성숙한 신자는 믿음에 있어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주님께 순종하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나 행동까지도 할 수 있다…. …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그 안에 있는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끄집어 내어 그것이 실패감과 위선자와 같은 느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연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이다.
베드로의 연약한 믿음이 세워지도록, 정말로 타락해 버리는 믿음이 되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베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유다를 위해서도 그런 사랑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마 유다가 자살을하지 않았으면 그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서 회복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했던 주님의 마음과 기도는 지금 우리를 위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 죄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한결같은 태도로 대하시며 우리가 변화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렇게 우리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널 위해 기도해왔다” “ 나는 지금도 널 위해 기도한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이렇게말합니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날 위한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실패들을 다 아시지만 심지어 부인할 것도 아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그 마음. 이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시려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사역하셨을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어떠했을까요? 주님은 감람산(예루살렘 바로 옆)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눅22:39-41)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지역을 바꾸어도 기도의 처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습관적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기도의 장소를 발견하여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도 무리와 제자들을 보내고 기도하러 산에 따로 올라가십니다. 그때는 저물 때 즉 어둑어둑해질 때입니다.
변화산에 제자 3을 데리고 가셨을 때에도 누가복음9장에 의하면 기도하러 그 산에 올라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과정 과정에 기도는 빠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모든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므로 제자들의 행전이라고 볼 수 있는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기도에 상당한 힘을 쏟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1:14 (제자들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왜 제자들이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는지 이제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때문입니다. 보고 배우는 것만큼 영향력이 크고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성령받은 제자들은 비로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도의 모범을 자기들의 것으로 취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는 마땅히 스승의 따라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도 다음 세대와 자녀에게 있어서 기도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나도 못하는데” 하는 말이 먼저 나오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자녀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육과 학교 성적에 뒤쳐지지 않도록 환경을 제공해주고, 좋은 옷 입혀주고, 필요한 것들을 사주고, 좋은 경험들을 쌓게 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있다면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경건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는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분들입니다.
어머니의 새벽기도라는 곡이 있습니다. 한웅재 목사님('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해' 작곡자)이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니며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곡이라고 합니다.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짙은 겨울 새벽녘 아직 사방은 어둔데
밤새 식은 전동 휠체어 내 어머니
새벽 시골길 따라 어머니 가시는 그 길
언덕 위에 내 고향 예배당
우리 아이 바르게 이 길 잘 가기를
참되고 행복하기를 그 분의 기쁨 되기를
일찍 서둔 착한 사람들 사이 어딘가
내 어머니의 기도 소리 아침처럼 피어나리
우리가 기도하는 어머니, 기도하는 아버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헌 목사님이 지금 계신 교회에 저의 대학교 과 선배 한명이 집사님으로 계신데 새벽기도 지킴이라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대학교때는 신앙이 없었고 운동권이었는데, 지금은 새벽기도를 매일 하는 집사님이 되었으니 그 이야기를 듣는 저는 무척이나 기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일부터 있는 다음세대와 함께 하는 특별새벽기도회는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녀에게 참 신앙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이들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교회와 학교가 신앙 안에서 분리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새학년을 기도로 준비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이것이 교회와 성도들 가정에 좋은 문화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문화란 분위기를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찾고자 기도하는 문화, 가정에서 함께 합심 기도하는 문화, 힘들 때마다 새벽에 와서 기도하는 문화, 밋밋한 나의 삶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 댓가지불하며 발걸음을 기도의 자리로 향하는 문화,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만 아니라 자녀들, 다음세대도 함께요 ^^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