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2:1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의 비비안 리가 속치마에 걸었던 자존심은 성도 노아의
고고한 자존감과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의 자존감과 정체성 역시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속치마와 같은 내면에 있습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존재들
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 누가 더 자존감이 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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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에 빵빵한 지갑을 들고 다닐 때 살맛났던 나는, 내면의 힘보다 드러난 것에 의존
하는 어리석은 가난뱅이입니다. 도대체 답이 보이지 않는 불황은 나를 불안하게 하고
돈이 없으면 안 된다고 겁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탐욕을 경계하십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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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게 하소서(13).” 그의 형이 부모의 유산을 다 가지려 했던 것 같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모의 유산은 비록 장자가 동생보다 두 배를 얻지만(신 21:17) 동생도
유산의 3분의 1을 갖게 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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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14)” 주께서는 마지막 날
인간의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 형이 유산을 정당하게 분배했는지도
심판하실 것이나 예수께서는 지금 그런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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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쟁의 중재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탐심에서 우리를 건져 내는 구원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15).” 형만 탐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생도 탐심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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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청탁(13)
물질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예수(14-15)
비유에 등장하는 한 부자(16-17)
물질을 쌓아두려는 부자의 계획(18-19)
부자가 보지 못한 하나님의 계획(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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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탐심이 없었다면 주님께 그런 문제를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탐심은 부자들에게만 있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애착은 탐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은 탐심이 있을 때 돈을 사랑하게
되고 부 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은 부 하려는 마음이 모든 악의 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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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말했습니다(딤전 6:9-10). 실상 물질적 부요는 우리에게 큰 시험거리입니다.
사람은 부요할 때 마음이 해이해지고 물질을 더 의지하기 쉽고 교만해지고 쾌락에
빠지기 쉽고 외도하기 쉽지요.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습니다.
부자는 “내가” “내 곳간에“ ”내 소출“을 ”나“를 위해 쌓을 궁리만 합니다(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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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말은 유독 많지만 단 한 번도 이 풍요를 주신 하나님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는 이때에 나는 얼마나 베풂을 통해 사랑과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가? 이웃과 고통분배는 커녕 구차하게 구걸하면서 부모 형제를 원망하는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부자는 창고에 쌓아둔 그 소유가 자신의 생명까지 보장해준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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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소유로 행복하고 풍요로운 내일을 장담했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인줄 몰랐습니다.
부자는 자기 생명도, 소유도, 미래도 자기 것이고 자기가 경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고 불신앙입니다(20-21). 예수를 모르는 어리석음,
나만 아는 어리석음, 한계를 모르는 어리석음,
나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 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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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을 안다면 소유에서 생명의 안녕을 찾지 않을 텐데
여기 어리석은 부자가 또 있나이다. 바라기는 이 땅에 대한 꿈을 제발 깨버리고
하늘의 소망을 꿈꾸게 하옵소서. 내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2016.2.13.sun.헤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