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대 |
석호공 해구 |
남간공 해봉/국역남간집 발췌 |
1581 /선조14 |
10월1일 錦溪里에서 탄생 |
|
1584 /선조17 |
|
7월25일 錦溪里에서 탄생 |
1587 /선조20 |
7살, 효경을 읽고 시를 짓다. 동생 남간이 곁에서 구절을 외워댔다 |
|
1589 /선조20 |
|
6세, 글에 토를 달고 문장을 짓다 |
1592 /선조25 |
11살, 아버지 통정공이 임란의병으로 김천일과 출병할 때 가족을 金市西에게 맡김. |
9세
|
市西 金璇을 따라 황해도 장련으로 피난가다. | ||
1593 /선조26 |
|
10세, 시서의 가르침을 받아 詩賦를 짓다 |
1599 /선조37 |
19세 |
16세 |
가을에 황해도 장련에서 돌아와 집을 수리하다 | ||
1602 /선조33 |
|
19세, 함풍이씨에게 장가들다 |
1604 /선조37 |
24세 |
21세 |
영광 수은 강항 선생 문하로 학문을 하다 | ||
1605 /선조38 |
|
22세 進士 鄕試에 합격하다 |
1606 /선조39 |
|
23세, 進士 會試에 합격하다. 이때 谿谷張維와 함께 합격하여 평생 벗이 되다 |
1607 /선조40 |
|
24세 小學의 節目을 수정하다 |
1608 /선조41 |
|
25세 普光寺에서 禮敬을 주해하다 二烈女傳을 짓다 |
1609 /광해1 |
29세 |
26세 河圖의 괘의 이치와 天文과 仁說을 강론하다 |
사계 김장생 문하로 들어가다 | ||
1610 /광해2 |
|
27세, 사계선생에게 喪禮要儀를 받다 |
1611 /광해3 |
|
28세, 易學啓蒙의 도설을 강해하다 |
1612 /광해4 |
31세, 중용을 가르치는 席講의 훈장 자리를 받다. |
寒溪堂記를 짓다 |
1613 /광해5 |
|
30세, 文章歌를 짓다 |
1615 /광해7 |
|
32세, 大舜賦를 짓다 |
1616 /광해8 |
|
33세, 시묘하는 의례를 논의하여 정하다 |
1617 /광해9 |
37세, 서울로 올라와 소를 올려 폐모론을 극력반대하다. 동생 남간이 반제에 있었는데 함께 규합했다. 停擧의 벌이 내리자 시를 지어 항변하다. 동생 남간은 별시에 수석으로 뽑혔으나 시험관에 의해 취소되니 형제는 손을 맞잡고 고향으로 내려오다. 과거를 포기한 채 부모봉양에 힘썼다.
|
34세, 가을에 별시 魁科하였으나 정론(正論)을 썼다는 이유로 시관 권진(權縉)이 합격자명단에서 빼버렸다
太學에 거하면서 폐모론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학적에서 삭제 당하다 |
1618 /광해10 |
38세 |
35세, 수은 선생의 부음을 듣다 |
부친 통정공이 병을 앓게 되자 2년 동안 병수발을 들었다. 탕약을 올리고 그 약과 대변을 맛보고 밤이나 낮이나 자신이 그 병을 대신하도록 하늘에 빌었다. 그해 여름이 시작하는 사월 스무이렛날 아버지의 상을 당해 너무 슬퍼서 거의 몇 차례나 혼절을 하였다. 구월에 할아버지 호군공(護軍公) 묘 아래에 이장을 하였다. 초가를 짓고 묘 곁에서 형제가 함께 조석으로 통곡하였다. 김시서(金市西)가 묘의 초가에 글을 붙였는데, 동벽은 영모(永慕), 서벽은 종모(終慕)라고 했다 | ||
1623 /인조1 |
|
40세, 3월에 인목대비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문을 만들다 여름에 경기전 참봉을 제수받다. 白江 李公敬輿의 천거로 遺逸로 경기전 참봉에 제수하다.(족보에는 不就로 됨) |
1624 /인조2 |
44세, |
41세, 募義穀有司가 되다. 가을에 別試에 합격하다 |
역도 이괄이 서울을 침범하자 임금이 피난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동생 남간을 의병의 행렬에 보내고, 영광 원두표(元斗杓)와 읍의 유생인 신유일(辛惟一)에게 편지를 보내 곡식을 모으자는 계책을 논의했다. | ||
1625 /인조3 |
|
42세, 沈判書에 편지를 보내 時務를 개진하다 |
1626 /인조4 |
46세, 삼월 열사흗날 어머니 숙부인 이씨가 돌아가셨다. 사월에 통정공 묘에 합장하였다. 동생 남간과 함께 초가에 살면서 전과 마찬가지로 시묘살이를 했다 |
43세, 태학생과 함께 상소하여 오랑캐 사신의 목벨 것을 청하다. 張維에게 편지를 보내 邦禮를 논의하다. |
1627 /인조5 |
47세,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했을 때 사계 김선생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격문을 돌렸다. 각 도에서 의병을 소집했고 특히 공의 형제를 불러들였다. 공이 마침 시묘살이를 하는 중 병이 나서 일어나 소집에 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 남간에게 “나라가 위태하고 스승님이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우리 형제는 마땅히 앞으로 나아가 적과 싸우다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병이 들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지금 시묘살이를 하는 중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다. 형이 시묘하는 동안 동생이 나라의 난리에 의롭게 싸우러 나간다면, 우리 둘은 모두 임금을 위해 힘쓴 것이 되리라”라고 말하였다. 동생은 하는 수 없이 형을 남겨두고 의병을 모으러 나갔다. |
44세, 2월에 다시 모의장이 되어 완부로 나아가 오리 김원익과 군비계책을 정하다. 여산에 이르러 왕세자를 호종했으나 조정의 명으로 의병을 해산하다. 묘당에 편지를 보내 척화를 주장하다. |
1628 /인조6 |
|
45세, 聖齋庵에 들어가 兵抄陣訣을 읽다 |
1629 /인조7 |
|
46세, 겨울에 東堂別試에 합격하다. 장유와 수창한 시를 남기다. |
1630 /인조8 |
50세, 화재로 인하여 석현림(수풀림) 몽탄담(술단지 담)에 별장을 지었다. 동야(東野)임간(林 土+柬), 청원(靑原)유지경(柳持敬), 지주(知州)원두표(元斗杓), 시서(市西) 김선(金璇), 참봉 유평(柳坪), 하월당(荷月堂)강시언(姜時彦), 목사 김효성(金孝誠)은 서로 왕래하며 한 잔 술에 시 한편씩을 지음으로써 <수창록>을 남겼다. 동생 남간은 평상시에도 형 옆을 지키며 시를 가지고서 바꾸어가며 말을 만들었다 |
47세, 南磵精舍를 건립하고 而樂堂이라 편액을 달다 |
1632 /인조10 |
|
49세, 봄에 承議郞 修城禁火司別座를 제수 받고 부임하다. |
1633 /인조11 |
53세,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승사랑(承仕郞)의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희릉참봉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지천(遲川) 최상공 명길(鳴吉)은 시험을 관장하고 있었다. 공은 명성과 이익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사의를 올리고 동생 남간에게 글을 써서 말하길, “타향 땅에서 벼슬을 구하려 하는 것은 형제가 함께 즐기면서 남은 생을 다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느냐? 뜻밖의 명을 받아 비록 축하할 일이긴 하나 본래부터 명성과 이익에 별다른 생각이 없으니 다음 달에 그 명을 받들 수가 없다. 다 그만두고 시골의 별장으로 돌아가 모든 생각을 접고자 하는 것을 그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 또한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가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도록 하자”고 했다. 남간은 공의 편지를 받고 그날로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갔다. |
50세, 1월에 別提로 승진하다. 3월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다. |
1634 /인조12 |
54세, 사계선생에게 글을 올리다. |
|
1635 /인조13 |
55세, 청나라 군사가 서울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히 북쪽으로 머리 돌려 적과 싸우다 함께 죽겠다는 각오를 했다. 의병을 모으고자 경내에 통문을 돌렸다. 동생 남간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게 했다 |
52세,
|
1636 /인조14 |
56세, 12월 병자호란 발발 |
53세,가을에 蘇武辭를 짓다. 12월에 오랑캐 변란을 듣고 경내에 창의문을 띄우다 |
1637 /인조15 |
57세, |
54세, 정홍명 부대와 합류하다.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하다. 가을에 압해도로 숨어 버리다. |
1638 /인조16 |
58세, 동생 남간의 상을 당해 비통한 시 수백자를 지었다.
|
55세, 5월28일 남간정사에서 숨을 거두다. 12월16일에 나주 동쪽 석현에다 장사지내다.
|
1638 -1645 |
세자가 서울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헌하시(獻賀詩)를 지었다.
청음 김상헌이 심양으로부터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 바쳤다 |
|
1642 /인조20 |
62세, 동생 남간의 기일을 맞아 통곡하며 율시 한수를 읊다. |
|
1652 /효종3 |
72세, 임판서가 몽탄에서 북경으로 가는 것을 송별하다 |
|
1653 /효종4 |
73세, 심경을 읽으며 그 느낌을 시로 읊다. |
|
1655 /효종6 |
75세, 시를 지어 아들을 타이르다. 손자 碩器의 시를 보고 조선8도에 韓退之가 다시 태어났다고 극찬하다. |
|
1656 /효종7 |
76세, 큰아들 佖에게 영남의 소회(䟽會)를 가도록 명하다 |
|
1660 /현종1 |
80세,5월 꿈에 우계와 율곡이 해와 달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시를 지었다. 10월11일 석호정사에서 돌아가셨다.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에 관명을 쓰지 말라. 석호처사란 이름으로 제사를 지내되, 내 뜻을 거슬림이 없도록 하라”하셨다. |
|
1) 남간공의 문과 벼슬의 재조명
남간공의 행록을 보면 별시 합격, 동당별시 합격이란 기록이 3번 나온다. 그러나 남간집 서문에서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였다고 스스로 글을 썼다.
남간공이 돌아가실 때에 시서 김선이 쓴 제문에서도 과거공부를 폐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후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조선조 시대 과거의 종류로는 식년시, 증광시, 알성시, 별시 등이 있으며 문과 대과를 한때 동당시라고도 하였으며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식년시; 3년에 한 번씩 보는 시험.
증광시; 임금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
알성시;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 성균관 학생에게 보였던 시험.
별 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였던 시험.
외병별시;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보던 별시이다.
조선조 과거 문과 대과(식년시, 일성시, 별시 등)의 시험은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단계로 보게 된다.
초시는 복시, 전시를 치루는 전해의 가을에 각 지역에서 시험을 보 았으며 합격정원은 전국 240명(경국대전), 222명(속대전)이다.
복시는 사실상 합격, 불합격을 정하는 시험이며, 전시는 복시 합격자들이 임금님이 참석한 앞에서 시험을 치루는데, 이것은 합격 불합격이 아니고, 서열을 정하는 시험이다.
오늘날에도 고시 1차, 2차 시험을 거쳐 면접이라는 3차를 거치는 것과 같다.
❍남간공 행록 34세(광해9년)
가을에 별시에 장원하였으나 정론(正論)을 썼다는 이유로 시관 권진 (權縉)이 합격자 명단에서 빼버렸다.” 기록이 있다.
남간공께서는 문과 초시에 합격한 것이다.
초시는 지역에서 치루는데 여기에서 최고점수를 받은 것이다.
필자가 생각건대, 시험문제가 광해군의 치적과 관련한 문제인데, 남간공은 시시비비를 가려서 정론을 썼던 모양이다.
국가백년대계로는 맞는 답안이지만 광해군에게는 탐탁지 않은 답안 이라 점수로는 장원의 점수로 채점되어 발표된 시험을 중앙에서 파 견 된 시관이 빼어버린 것 같다.
O 남간공 행록을 보면 41세(인조2년)
「가을에 별시에 합격하다」 란 글이 있다.
이때에도 문과 초시 합격을 하였지만 이듬해에 복시, 전시를 보았다 는 기록이 없는 것은 불합격이었던지, 아예 시험을 보지 않았던 것 으로 이해된다.
O 남간공 행록을 보면 46세(인조7년/1629)
「겨울에 동당별시에 합격하다」라는 글이 있다.
이 시험이 가을에 보았다면 문과 초시라고 곧바로 이해할 것인데, 겨울에 보았다고 하여 복시인 것으로 해석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복시는 전국에서 33명 정도 합격하여 적어도 복시 합격에서는 합격의 서열까지 나오는데, 갑과 수석(장원), 갑과 2명, 을과 합격자 5~7명, 병과 합격자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겨울 동당별시”는 복시가 아닌 초시인 듯하다.
그로부터 3년 후 49세에 초임으로 수성금화사별제(修城禁火司別堤)를 제수 받고 부임하는데, 별제는 정,종6품의 벼슬인바, 초임으로 6품을 받은 것이다.
조선시대 문과 시험합격자 초임 관직을 보면
일반적으로 정, 종6품부터 정, 종9품까지의 벼슬을 주는데 6품의 벼슬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문과 합격자가 현직에 근무하면서 차후에 다시 문과에 도전하여 장원급제할 경우 당상관 정3품의 벼슬을 주는 예도 있는 바, 이는 문과에 두 번 합격에 장원한 것을 예우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남간공의 초임은 6품인 별제를 받았으니 과거시험 합격의 후속 조치로 성적순에 따라 벼슬을 준 듯한 느낌이 든다.
후손들은 여기에서 상당한 혼란에 빠진다.
이듬해에 별좌(정,종5품)에 승진하였다.
그런데 남간공 행록 원본에서 이를 거꾸로 기록하였다.
초임이 별좌(5품)로 발탁되어 별제(6품)으로 승진하였다는 기록은 맞지 않다.
조선시대 무과 시험 합격자 초임 관직을 보아도 문과와 마찬가지로
갑과 수석을 한 사람은 초임 품계가 종6품, 갑과 나머지 두 명은 정7품, 을과 합격자 5~7명은 정8품, 병과 합격자는 9품이 수여되었다.
즉 합격 순위에 따라 관직이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종6품 ; 절제도위(節制都尉), 종사관(從事官), 부장(部將), 부사과 (副司果), 수문장(守門將=종九품까지 있음) 등
-정7품 ; 참군(參軍), 좌부솔(左副率), 우부솔(右副率), 수문장(守門 將) 등
-종7품 ; 좌종사(左從史), 우종사(右從史), 부사정(副司正) 등
-정8품 ; 좌시직(左侍直), 우시직(右侍直), 별검(別檢=종八품까지 있 음) 등
-종8품 ; 별검(別檢), 부사맹(副司猛) 등
-정9품 ; 좌세마(左洗馬), 우세마(右洗馬), 사용(司勇) 등
-종9품 ; 권관(權管), 부사용(副司勇), 초관(哨官) 등
똑같이 문과, 무과 합격을 하였으나 시험 성적순에 따라 무려 7계급의 차이가 난 것이다.
남간공 본인 스스로 대과에 합격 못했다고 자서전에 썼으니, 6품 초임벼슬은 대과합격의 후속 조치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라고 보아진다.
o 1634년 공의 생전에 둘째아들 휴(休)를 통하여 남간집을 만들게 하여 스스로 서문을 썼던바, 그 내용 중에는 대과(大科)에 합격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영화를 못 보여 드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부분이 있다.
남간집 자서전 서문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만모이상부중대과(晩暮而尙不中大科) 불급위부모영(不及爲父母榮)” 이 부분은 「늘그막의 나이에 대과에 합격하지 못해, 부모를 영화롭게 하는 것에 미치지 못해」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도 의문점은 또 하나 더 있다.
남간공이 돌아가시자 시서(市西) 김선공(金璇公)께서 제문(祭文)을 지었던 바, “때가 좋지 않은 때를 만나 과거 공부를 폐하고(廢擧業) 문을 닫고 나가지 않다가 성명(聖明)이 자리에 임하시자 자그만 녹을 받게 되어 잠깐 서울에 나갔으니”란 글이 있다.
이 말은 임금이 직접 벼슬을 주었다는 뜻인데, 어떤 이유로, 그것도 6품 벼슬의 높은 자리를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대동보 기록에 약간의 자료가 있다.
대동보의 기록에는 도백(道伯)이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승사랑(承仕郞)에 있다가 승의랑(承議郞) 수성금화사별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종8품 승사랑으로 벼슬길에 올라 훗날 6품 별제를 한 것이라는 뜻인데, 40세 때에 경기전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이 벼슬을 취하지도 않았고, 계속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 중이었으며 수시로 별시(초시)를 치러 합격한 바 있다. 또한 승사랑은 종8품인데 참봉은 종9품이라 이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
그로부터 9년 후에 6품 별제로 관문에 들어간 것도 9년 전 도백의 행의(行誼) 천거의 연장선으로 대동보의 기록은 그러한데, 이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고 본다.
남간공은 과거 공부를 폐한 것은 아니었다. 기회가 되면 별시 시험을 치렀고, 별시(초시) 두 번 합격에 동당별시(이것도 초시였음)에 합격하였다. 이것이 모두 초시였다고 하여도 이것 자체가 과거 공부 아닌가. 5품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기 전까지는 과거의 집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공부를 폐한 것이 아니라 벼슬을 폐한 것이다.
물론 조선조 시대에 효행(孝行)과 행의(行誼)와 인덕(仁德)으로 천거(薦擧)에 의한 벼슬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선조 때에 나주인 金千鎰 선생도 유일로 천거되어 첫 벼슬이 6품 군기시 주부로 관직에 들어가 수원부사로 퇴임하여 훗날 임진왜란 시에 창의사 의병장이 된 사례도 있고, 우리 문중에서는 금호 사침(士忱)께서도 효행으로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과 선능참봉에 이성현감을 한 사례도 있다.
금성읍지의 기록을 보면
남간공은 사마안(司馬案), 음사(蔭仕), 인물(人物), 충절(忠節), 일덕(逸德), 문장(文章), 효행(孝行)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고 다만 문과안(文科案)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문과 초시 합격은 하였지만 최종시험인 복시에서는 합격치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동 기록 蔭仕란을 보면 참봉에 별제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성금화사에 잠시 들어간 것이 음사직(蔭仕職)인 듯 하다.
o 남간공 47세 3월
남간공이 벼슬길 들어선지 1년 2개월 만에, 5품 별좌로 승진된 지 2개월 만에 중형 석호공께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선비정신으로 살자고 말하자 그 즉시 벼슬을 훌훌 벗어 버리고 낙향하였다.
석호공의 권유로 함께 낙향해 버린 것이다.
동생은 형을 존경하고 신뢰하였다. 형은 학문의 동창생이요 사귀는 친구가 같아 형제이면서 친구 같다. 형도 동생을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 한이 없었다. 이제 동생이 우여곡절이 많았던 벼슬길 진출에 겨우 안착했는데, 광해군의 폐모론이라는 추악한 정치 싸움에 염증을 느낀 두 분은 벼슬 그만두자는 뜻에 의기가 투합하여 아무 미련도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것이다.
중국 북경대학교 역사학자 갈진가(葛振家) 교수가 조선시대 선비 정신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을 충열공 나덕헌과 금남공 최부를 들고 있다.
충열공은 소국 조선의 사신으로 대국 후금에 나가, 후금 황제 앞에서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던 분이다.
최부 선생은 상복윤리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성종조 때에 제주도 추쇄경차관으로 일을 보던 중에 부친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도해 중에 풍랑을 만나 중국 절강성 임해현으로 표착하여 장장 6개월간을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귀국하였다. 귀국 전에 명나라 황제가 있는 자금성에 입궐하여 명황제로부터 포상을 받았는데, 이 황제 앞에 상복을 입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최부의 정신이었다. 이 정신을 갈(葛)교수가 조선의 대표 선비정신으로 꼽고 있다.
필자가 만약에 여기에 더 보탤 선비정신의 대명사를 꼽으라 한다면 필자는 감히 석호 남간 형제를 꼽을 것이다.
조선의 선비 정신을 보여준 인물, 모두 나주나씨요, 나주나씨와의 관계되신 분들 아닌가.
최부는 감찰공 질(晊)의 장인이요, 금호 사침의 외조부이시다.
충열공은 덕헌은 사침의 아들이니 질(晊)의 손자이다.
석호 남간은 한림공 창(昶)의 후손이니 곧 질(晊)의 종후손이 되는 것이다.
2) 단산(丹山)의 봉(鳳)
계간수창 시문 “봉(鳳)”에서 보면 남간공 스스로 자신의 위치가 단산(丹山)에 있음을 시사하였다.
석호공 61세에 쓴 남간 동생을 그리워하며 쓴 시문에 보면
“단산(丹山)에 봉(鳳)이 들어간 후로,
구(龜) 나만 홀로 사무친 정에 가슴 아파한다.”하며
동생 해봉이 죽은 후에 동생을 그리워하는 글에서 「봉(鳳)이 단산으로 들어갔다」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나오는 단산은 어디인가.
초의(草衣) 스님 동다송(東茶頌)에 건양단산벽수향(建陽丹山碧水鄕)이라 글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단산(丹山)은 중국 복건성 창포현 동남쪽 무이산(武夷山) 경내에 자리한다. 산봉우리가 평균해발 350m이며 무이산에서 강물을 옆에 끼고 건양으로 흘러가는 푸른 강물이 우리나라 산수와 너무 닮아서 마치 영월에서 남한강을 따라 단양으로 가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초의가 동다송에서 그리 말한 것이다.
중국에는 단산이 여러 곳 있으나 초의스님이 말하는 단산을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으로 보는 것은 만감후(晩甘侯)가 있기 때문이다.
만감후는 쓰게 마셔도 나중에 목에서 단맛이 도는 차를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남간정사 계정(溪亭)은 서수구 밖의 한계(寒溪) 물 흐르는 하천변에 위치하고 한계의 물은 해발 350여m의 월정봉, 장원봉을 돌아 흘러내려 서수구를 지나 동 수구를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 가는데 이 모습이 복건성의 단산의 모습과 너무 같다고 하여 남간공 스스로 단산의 한사람으로 표현하였고, 형 석호공은 그것을 존중하여 동생이 죽은 후에 단산으로 들어갔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살아서도 형제간의 화합이 잘되었는데 죽은 후에도 시문의 언어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있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석호 남간 형제뿐일 것이다.
3) “모든 조카들은 아들과 다름없이 교육을 시켰는데 모두 유명한 선비가 되었다.”의 기록으로 본 남간공의 자녀현황
남간공이 55세 때인 1638년(인조16년) 돌아가셨다.
이때에 장자 준(俊)은 30세(선조 무신1608, 8월10일생)였고 차자 휴(休)는 26세(광해 갑인생 1614), 삼자 임(任)은 20세(광해 무오생 1618) 사자 탁(倬)은 16세(광해 임술생 1622, 5월9일생), 오자 인(仁)은 15세(인조 계해생 1623년)였다.
장자 俊은 이미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둔 상태였으며, 休, 任, 倬, 仁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안한 상태였다.
남간공 살아생전에 손자는 오직 俊이 낳은 원기(遠器/2세)뿐이고, 俊의 자 세기(世器), 중기(重器)와 倬의 자 단기(端器), 면기(冕器), 정기(鼎器), 구기(九器) 그리고 仁의 자 여기(汝器)는 사후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석호공께서 남간동생을 대신하여 조카 휴, 임, 탁, 인의 혼사문제 해결과 생활문제, 교육문제 등을 뒷바라지 했을 것이며 남간공 사후에 태어난 세기, 중기, 상기, 단기, 면기 정기의 교육 뒷바라지도 했을 것이다.
남간공 돌아가실 때의 석호공 자녀로는 장자 필(佖) 23세(1615년생) 차자 길Z(佶) 14세(1624년생) 삼자 심(伈) 11세(1627년생)로 자녀 출생으로 보면 석호공의 결혼이 매우 늦어진 것 같다.
1660년 석호공 돌아가실 때의 가족상황을 보자.
필(佖)의 자녀 하기(夏器), 길(佶)의 자녀 석기(碩器), 운기(雲器), 양기(良器), 준(俊)의 자녀 원기(遠器), 세기(世器), 중기(重器), 휴(休)의 자녀 상기(相器), 탁(倬)의 자녀 단기(端器), 면기(冕器), 정기(鼎器), 인(仁)의 자녀 여기(汝器)가 한솥밥을 먹었다. 비록 길(佶)이 고창으로 처가살이 간 때가 어느 해인 줄은 모르나, 석호공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틀 속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석기, 운기, 양기와 원기, 세기, 중기는 6촌간이 된다.
이러한 인적 관계 때문에 석호공의 제2자 길(佶)이 고창 처가살이로 고창에서 살 때에 6촌 중기가 고창현감으로 부임해 와 고창 옥녀봉의 일대 토지를 6촌 형제들에게 주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 이 부분은 별도 고창 선산이야기에서 기록코자한다.
옛말에 한솥밥에서 고손자까지 본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풍습은 대가족제도여서 결혼을 하여도 분가하기 보다는 대가족으로 살았다. 13세 사음(士愔)공께서 금계리에 사시면서 덕겸, 덕양의 두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금계리에서 살았다.
덕겸의 자 해륜도, 덕양의 자 해구, 해봉도 모두 금계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한솥밥의 사촌간인 해륜, 해구, 해봉이 똑같이 영광의 수은 강항 선생 밑에서 수학한 것이다.
해구, 해봉의 자녀들도 모두 금계리에서 살았다.
거대한 핵가족이 한솥밥을 먹으면서 살았을 것이다.
한솥밥을 먹고 산다면 그중에서의 연장자가 가족의 중심에서 가족을 운영했을 것이다. 금계리라는 동네는 나주나씨 직장공파가 세거하는 터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석호공은 80세까지 건강하게 사신 덕분에 석호, 남간 전가족의 중심에서 대가족을 화목하게 이끈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된다.
4) 계곡 장유 선생집에 기록된 남간공 자료들
❍ 제29권 5언율
나응서기석류유시차운이사(羅應瑞寄石榴有詩次韻而謝)/나응서가 석류와 함께 시를 부쳐왔기에 차운하여 사례하다
❍ 제31권 7언율시
차운제나동년해봉계정(次韻題羅同年海鳳溪亭)/나동년해봉의 시냇가 정자에 차운하여 제하다.
차운기응서래시유몽리상심지(次韻寄應瑞來詩有夢裏相尋之)/꿈속에서 어울려 노닌다는 나응서의 시를 받고 차운하여 부치다
❍ 제33권 5언절구
화나응서(和羅應瑞)/나응서에 화답하다
차화이절(叉和二絶)/또 화답한 절구 두수
임진왜란 義兵 運糧使 羅德讓 다시보기
글/나천수
1. 서두에
국가가 난을 겪고 나면 난에 공을 세운 공신록을 작성한다.
대체로 공신의 최고 명예는 최고 벼슬을 가진 자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충효교육에 가장 잘못하는 사례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7년 전쟁 중에 오직 거북선 타고, 큰칼 차고, 홀로 왜적을 물리친 듯 교육되어 왔다. 제 장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 광화문도 이순신 동상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충효교육은 국가를 좀먹는 결과를 초래케 한다.
팀웤은 필요 없다. 오직 영웅 1인만이 살아남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축구 대표 감독 히딩크가 한국에 와서 1인 영웅을 키워낸 것이 아니라 팀웤을 강조 했었다. 그래서 월드컵 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히딩크가 우리나라에서 보여주는 시사점은 너무 많다.
2. 임진왜란 거꾸로 보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결과는 어느 때 부터인가 성웅 이순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영웅을 넘어서 성웅에 다다른 것이다.
누가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들어 낸 것인가. 그것은 호남 어부 출신 제장졸들의 작품이었다.
축구는 감독과 선수가 잘 호흡을 맞추어야 승리하듯, 아마 수군장 이순신과 어부출신 제장졸들 간에 호흡이 잘 맞았을 것으로 본다.
잘 맞았다는 것은 바다의 귀신 호남 어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투 계획을 짰을 것이다. 해남 울돌목 전투의 승전도 어찌 배 13척으로 300여척의 왜적선을 섬멸할 수 있었던 울돌목 전투를 이순신의 머리에서 나왔겠는가.
그것은 해남, 진도 출신 어부 군인이 하루에도 두 번씩 울돌목 해류의 거셈을 알았던 아이디어였을 것을 장군이 수용하였을 것이다.
역사를 거꾸로 보면 곧 호남인의 혼에 의해 국난을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호남인의 혼을 이순신은 “약무호남 시무국가”라 하였던 것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이 이충무공의 편지글에서 찾아낸 문구이다.
1593년(선조26년) 7월16일자로 사헌부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답장의 글 속에 있었던 것이다.
1593년 6월 20일 즈음에는 김천일 의병장이 이끈 진주성 제2차 혈전이 시작되는 즈음이다.
아군 3천명 대 왜군 10만명의 전투로서 이미 패전이 기약되는 전투였을지 모른다. 이에 영남 의병장 곽재우는 호남 의병장 김천일간에 병법상의 문제로 이견을 나누고 있었다.
곽재우는 중과부적이므로 성을 비우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의견이고, 김천일은 진주와 호남 곡창은 순치(脣齒)의 관계이므로 만약에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 곡창이 무너지고, 호남 곡창이 무너지면 곧 우리나라가 무너진다는 논리의 의견이었다.
필자가 지금 시사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은 살상의 무기로 하지만 그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량의 보급은 병참 무기의 보급보다도 더 중요했을 것으로 본다.
이순신이 보는 호남은 무엇인가.
바다의 경험이 전혀 없는 이순신, 여수 수군장으로 오기 전에 잠시 발포 수군만호 재직시절 군기경차관(서익)이 군기보수를 소홀히 했다고 상부에 보고하여 파직을 당한 전례가 있었던 이순신, 해풍을 읽을 줄 모르고, 해류를 알 수 없는 수군장이었다.
원균의 관할지역인 영남지방이 왜적에게 도륙 당할 때에, 호남 제장졸들이 원병으로 가서 싸워야 한다고 할 때 이순신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자신의 관할지역 밖이라는 이유에서다.
부산 앞바다가 무너지면 다름은 호남바다로 처 들어오니, 오기 전에 가서 막아야 한다는 호남 수군제장들의 건의에 부산 앞바다 쪽으로 출전한다.
해전은 육전하고 다르다.
해류와 해풍을 읽을 줄 알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파도에 움직이는 배를 타고 전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육전의 경험은 있었지만 해전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더더욱 원균이 연전연패하는 중에 호남수군의 출전을 총지휘하는 이순신도 가슴이 떨렸을 것이다.
그런데 첫 전투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하였다.
두 번째 전투 적진포 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세 번 째 전투 사천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그 후 당포해전 승리, 율포해전 승리, 부산포 해전 승리를 하였다.
연전연승을 거둔 이순신은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똑같은 수군인데 원균의 수군은 연패하면서, 자신의 수군은 연승하는지를..........
그것의 답은 곧 호남이라는 것이다.
호남의 어부 출신 제 장졸들의 뛰어난 바다정보에서 시작된다.
다도해 섬이 많은 남해 바다는 각 바다마다 해풍, 해류가 다르다.
그것을 정확히 아는 호남 수군이 연전연승을 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배에 동력이 있어 배를 마음대로 운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총지휘관의 공이 크겠으나, 임진란 때의 해전은 그야말로 각배를 지휘하는 함장에 의해서 각개전투식 전투를 치러야 했다.
후미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순신은 이미 출격한 각 함선에 아무런 연락을 하거나 지휘를 명할 수 없다.
무전도, 핸드폰도 없다. 뒤에서 크게 지휘를 할 수 있는 도구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후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독전(督戰)의 북을 치는 일이나 퇴각을 명하는 북을 치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미에서 바라보는 이순신 눈에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는 것을 마치 관객이 무대를 보듯 보았던 것이다.
도대체 승전의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호남 어부출신 제장졸들의 해상 전투력이었고
또 하나는 군량미를 대체로 자유롭게 확보 할 수 있었던 점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앞서 필자가 언급한바, 의병장 김천일은 호남 곡창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하였다. 그래서 죽음으로 진주성을 사수하였다. 곽재우 의병장은 이미 진주성을 떠나 가린 무원고립의 진주를 지킨 것이다.
고문헌과 조선왕조실록 선조조를 보면 전투에 필요한 군량을 확보하고, 이를 전쟁지역으로 보내는 것에 대한 임금과 신하들의 고심이 엿 보였다.
①선조 35권, 26년(1593년) 2월 10일(을미) 5번째기사
「강화(江華)는 경성과의 거리가 아주 가깝고, 비축해 놓은 양식과 마초가 쓰기에 부족하지 않는데도 배를 사사로 다른 데로 빌려 주었기 때문에 때맞추어 운송하지 못하여 병사와 말들이 굶어 죽고 심지어는 퇴진하게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운량사(運糧使) 권징(權徵)이 여러 장수와 본 고을 수령을 미리 단속하지 못해 일에 인해 궁핍을 초래했으니 사정(私情)을 따라 공도(公道)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추고를 명하소서. 제멋대로 사사로 빌려준 자들도 아울러 계문(啓聞)하고 치죄하게 하소서.”」
②선조 40권, 26년(1593년) 7월 6일(무오) 3번째기사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이 전에 운량사(運糧使)로 임진(臨津)에 있을 적에는 겁을 먹고서 안장도 없이 말을 타고 먼저 도망하여 온 진영(陣營)이 궤산(潰散)되게 하였으니, 지금 호남의 변란에 다시 전진(戰陣) 중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체직시켜 오게 하소서.」
③宣祖 99卷, 31年(1598年) 4月 29日(癸未) 1번째기사
「유성룡이 아뢰기를, “다른 말은 할 겨를이 없고 다만 군량에 대한 일로 군하(群下)가 민박할 실정입니다. 달리는 좋은 계획이 없고 오직 최후의 의주의 군량을 수송하여 접제(接濟)하는 것만이 지금으로서는 첫째로 해야 할 급무인데, 민력이 이미 바닥이 나고 게다가 농사철까지 되어 육운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비록 조금씩 운반해 오는 것이 있다 하여도 거기에서 덜어내어 이곳에서 쓰고 나머지를 양남(兩南)으로 나누어 보내는 실정이니......
....지금 경창(京倉)에는 소미(小米) 2천여 석이 있을 뿐이고 대미(大米)는 전라도에서 올려 올 것 7천여 석뿐입니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에는 달리 선운(船運)할만한 곳이 없어 반드시 여기에서 수송해야 되는데 좌도(左道)는 죽령(竹嶺)을 통해서만, 그리고 우도(右道)는 조령(鳥嶺)을 통해서만 수송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수만 석의 곡식을 반드시 충주(忠州)에다 실어다 두어야지만 가져다 먹을 수가 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가 모두 동이 났으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애당초 군대를 보낼 때 식량을 계산하여 보내고 보리가 익기를 기다려 계획을 세웠더라면 그런대로 3∼4개월은 지탱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계책이 없습니다.”
......... 도 통판(陶通判)은 또 군량 수송을 독촉하는 자문에서 승군(僧軍)을 징발하여 군량을 운반하도록 일찍이 분부하였는데도 끝내 아무런 동정이 없었으므로 만홀(慢忽)하다고 하였다 합니다.”
... 김수가 아뢰기를,
“전라도에 현재 있는 곡식으로 계산하면 40∼50일은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수병(水兵)의 군량은 나주(羅州)에 준비하고 육병(陸兵)의 군량은 전주(全州)에 준비해 두어야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각처에 분산되어 있어 얼마 안 되는 것들을 한 데 모은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또 함경남도의 곡식 1만 석을 경상도로 수송하도록 한 것도 물론 그것이 부득이하여 취한 조치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사정도 매우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④宣祖 100卷, 31年(1598) 5月 2日(丙戌) 4번째기사
「현재 군량미를 운반하는 것이 매우 긴급한 일이니, 반드시 온 극력을 기울여 주야로 신속히 운반해야 할 것이다.
지금 듣건데, 상주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이미 군량이 떨어져 나물 뿌리와 버들 순만 먹는다고 한다. 급히 방법을 강구하여 운반 해다가 접제(接濟)하도록 도모해야할 것이다.」
임진란 때에 일본군이 실수한 것이 몇 가지 지적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첫째, 관군만 격파하면 모두가 항복할 줄 알았는데, 관군이 무너지면 민간인이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 정규군과 접전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 문화로는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었을 것이다.
둘째, 부산에서 함경도까지 전열이 길어짐에 따라 군량과 병참 보급에 실패한 것이다. 물론 군량미는 조선 땅에서 노략질하여 얻어내었을 것이지만 결국 군량미 부족으로 전의를 잃어 가게 된 것이다.
셋째, 조선의 겨울이 살을 베어내듯 강추위일줄 몰랐다는 것이다.
전투로 죽은 것보다 동사한 병사가 많았다는 것도 그것이다.
임진란이 4월에 발발하자, 호남 최초의병을 기병한 것은 나주에서 김천일 의병대 300여명이 북상 출병한 것이다.
북상이라는 것은 근왕과 서울 수복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먹지 않고 어찌 싸울 것인가.
전투 병참인 칼이나, 활은 각자 지참한다 하지만 먹어야 하는 식량은 후방에서 계속 조달 되어야 한다. 만약에 후방에서 조달이 끊어지고 굶고 있다고 하면 무슨 전투의지가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도로가 사통팔달로 잘 뚫려 있다면 수송에 덜 애로 사항이 있겠지만 과거의 육로 수송은 더디기만 하였을 것이다. 기껏 해야 소 달구지에 싣는 정도였을 것이다.
배로 수송하는 것은 편리하였겠지만 전쟁에 육지 내부에서 하니 어느 지점까지는 수운으로 하고 하선한 양곡은 거기서부터 육로 수송을 해야 한다.
일본군도 군량미 확보 차원, 조선군 사기를 꺾기 위해 군량미 탈취작전을 하였을 것이다. 평화 시의 양곡운반이 아니라 전쟁 중에 양곡 운반이니 어찌 보면 직접 전투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3. 족보 기록으로 본 운량사 나덕양의 활동사항
의병장 김천일은 1589년 수원부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나주에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덕양은 김천일이 사는 흥룡동 마을과는 1km거리도 안 되는 금계리에서 살았다.
미암일기를 보면 미암 유희춘이 중앙요직에 있을 때 김천일의 병약함을 보고 수시로 어의 허준으로 하여금 김천일 약을 처방받아, 이종사촌 동생인 나사침에게 전달토록 하였다.
고문헌에 보면 김천일과 나사율이 노수신을 함께 찾아갔는데,
노수신(蘆守慎)의 소재집(穌齋集)에 보면 김천일과 나사율이 함께 노선생을 방문하였던 기록이 있다.
「 羅金二生來訪。相與醉歌。羅士慄, 金千鎰。俱居錦城裏。遊一齋門者。
나사율, 김천일 두 유생이 찾아와서
서로 술을 주고받고 하여 취해 노래를 불렀다.
나사율, 김천일은 금성의 외곽에서 사는데
一齊 李恒(1499-1576) 문하에서 배우던 자들이다.
不夢一齋久。還逢二妙新。相傳只餘論。自警獨孤臣。錦里淸琴夜。燕京白菊辰。醉歌猶有和。老興豈無神。抱琴又盆菊以相慰
一齊가 간지 오래되어 꿈도 꾸어지지 않는데
둘이 다시 만난다니 새로운 불가사의로다.
지금은 서로 전할 남은 의론이 있을 뿐
스스로를 경계하는 외로운 신하로다.
나주의 야밤 맑은 가야금 소리는
북경에서는 흰 국화 필 때로다.
취한 노래가 오히려 화목하게 하고
노인의 흥은 어찌 신기가 없다하랴.
가야금과 국화 분을 보듬으니 서로 위안 되구나.」
이와 같이 김천일은 나주나씨와의 매우 절친한 관계에 있었음을 고문헌 기록을 통해 필자가 확인하는 바다.
나사율은 나덕양의 종조부 된다.
호남절의록에 나덕양은 분명 군량미 운송의 공을 기록 하고 있다.
대동보와 묘갈명의 기록을 보면
「섬나라 오랑캐들이 창궐함에 이르러 종묘사직과 생명의 위급함이 조석에 있었다.
공은 통분하여 마침내 의로움을 바탕으로 건재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의병을 모집하였다. 깃발을 세워 부분적으로 양식을 운반하는 책임을 스스로 맡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 이러한 양식이나 기기를 사정에 맞게 수원으로, 강화의 진으로, 진양을 지키는 곳으로, 선산의 부병소(夫兵所)까지 음식을 보내어 접대하는 적절한 처리는 역시 공의 큰 조운(漕運)의 힘에 의한 것이다.」
안무사 학봉 김성일이 삼남의 조운에서 호남이 가장 잘했다는 것을 아뢰어 벼슬에 천거하였다. 그것도 겨우 궁궐도감의 어느 직에 천거된듯하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에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였으니 아마 여기에 어느 직책을 주었을 것 같다. 궁궐도감은 벼슬이 아니라 임시관청명이다.
나덕양의 묘갈명을 지은 은진 송재성(恩津 宋在晟)은 「난이 평정 된 후 매양 한스러운 것은 촉석루 바위 절벽에서 투신 자결하여 절염의 진취로 순절한 삼장사(三壯士)와 더불어 같지 않게 보는 것」을 한탄하였다.
4. 마무리의 글
우리나라 사람의 숭조사상은 대체로 벼슬 지향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벼슬을 했다는 흔적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필자가 고문헌을 섭렵하면서 느낀 것은 과거의 벼슬 보다는 살아생전에 보여 주었던 정신, 살아생전에 남겼던 글이 더욱 빛나 보였다.
벼슬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선비의 정신으로 보았다.
고문헌 속에 숨겨진 선조님의 시 한수 발견하면 그리 기뻤다.
그래서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나덕양 선조님의 입비 비문을 바꾸었으면
한다.
淑夫人咸平李氏를
「壬辰倭亂 義兵 運糧使 羅州羅公
德讓之墓 淑夫人咸平李氏」로
벼슬 이름도 아닌 임시관청명인 궁궐도감
보다 훨씬 값지고, 빛나 보인다. 후세에
자랑할 만하다.
넣은 신도비는 단 하나 있음을 발견하였다.
奇宇萬의 松沙先生文集卷之二十四에
천만리(千萬里)의 신도비이다.
「皇明欽差北路總節使內衛鎭撫太淸殿
守衛使兼總督五軍帥中司馬摠督將調兵
運糧使朝鮮封花山君思菴千公神道碑銘」
천공(千公)은 중국인이다. 임란 때에 명나라 李如松장군을 따라와 領糧使로 종군하고 그의 아들도 함께 참전하였다.
그리고 전후에 조선에 영주하기를 희망하여 조정에서는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시호를 충장공(忠壯公)이라 하였다.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石壕羅公墓碣銘
번역과 해설/나천수
본 묘갈명은 나주나씨 대동보에 없는 것으로 필자가 고문헌을 뒤지다가 발견한 석호공의 묘갈명이다. 내용으로 보면 현손 정윤이 송상덕에게 간청하여 받은 글인데 후세에 왜 잊어졌는지 궁금하다. 이에 필자가 해석과 해설을 붙인다. |
과암집(果菴集) > 果菴先生文集卷十一 > 墓碣銘 >
1. <원문>
羅州羅氏。自高麗上將軍富。簪纓不絶。工曹典書璡。門下侍中公彥尤大顯。入我朝縣監自康。自京始居羅。其後有諱昶官弼善。賜暇湖堂。中廟嘗賜御硯以奬。是生宣略將軍士愔。其子曰副護軍德讓。娶佐郞咸豐李絳女。萬曆辛巳十月初一日生公。諱海龜字應疇。慷慨有大節。値光海時。羅之儒生金佑成,辛光業等擧付爾瞻,筠倡讎母論。公秉義斥折不少假。金辛心銜之。時公發鄕解。將赴省試。乃交訐爾瞻。罰公停擧。旋解停。從而誘脅。俾從己。公終不撓。爾瞻益怒。使東庠官呼公名又停其科。末乃迫出禮闈外。公悠然不以介意。遂廢博士業。築小亭於石壕江上。謝跡京輦。優游以卒。凡世之知公者。語到公。莫不欽歎。必稱以石壕處士。若公可謂遯世不悔。皭然不滓者歟。公容儀端嚴。器度沉毅。自幼誠孝出天。五六歲隨王考喪。呼哭若成人。力貧奉親。志物之養。無所不至。父疾公憂遑不解帶。積歲如一日。及喪毁幾不全。書永慕二字。扁所居室。以寓終身慕之意。與弟南磵公某。師事姜睡隱沆。勵志爲學。堅固進修。睡隱贈詩稱以瓊樹枝。其期許可知也。身在韋布。憂深宗國。見丁丑虜亂。憤慨不自勝。詩以見志。公細行甚備。忠孝志節旣偉然。他可略也。公卒以顯廟庚子十月十一日。得年八十。配南平文氏。其父益新。祔公葬。男佖,佶,伈。女婿閔志在。玄孫廷尹將豎石于墓。來謁余文。辭不獲。遂書此以與。而系之以辭曰。錦城之西長興麓。枕丙面壬封崇四尺。是惟高士之藏。過者必式。
2. <해석>
石壕羅公墓碣銘(석호나공묘갈명)
이 묘지명은 果菴 宋德相이 지은 글이다. 과암의 부친은 宋婺源으로 溪齋공 世器의 아들 炳奎의 묘표를 지은이 이다. 과암은 송시열의 현손이다. 이 묘표는 과암집(果菴集) > 果菴先生文集卷十一 > 墓碣銘 란에 있다.
|
羅州羅氏。(나주나씨)/나주나씨는
自高麗上將軍富。(자고려상장군부)/고려상장군 富로부터
簪纓不絶。(잠영불절)/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工曹典書璡。(공조전서진)/공조전서 璡과
門下侍中公彥尤大顯。(문하시중공언우대현)/문하시중 公彦은 더욱 크게 영달하였다.
入我朝縣監自康。(입아조현감자강)/조선조에 들어와 현감 自康은
自京始居羅。(자경시거라)/서울을 떠나 처음으로 나주에서 살았다.
其後有諱昶官弼善。(기후유휘창관필선)/그 후 昶의 관은 弼善이요
賜暇湖堂。(사가호당)/왕명으로 휴가를 받아 호당에서 공부를 할 때
中廟嘗賜御硯以奬。(중묘상사어연이장)/중종 임금이 쓰던 벼루를 주어 칭찬하였다.
是生宣略將軍士愔。(시생선략장군사음)/이때에 선략장군 士愔이 태어나고
其子曰副護軍德讓。(기자왈부호군덕양)/그의 아들 부호군 덕양은
娶佐郞咸豐李絳女。(취좌랑함풍리강녀)/함풍이씨 좌랑 항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萬曆辛巳十月初一日生公。(만력신사십월초일일생공)/1581년 신사년 11월1일에 공은 태어났으니
諱海龜字應疇。(휘해구자응주) /이름은 海龜요 자는 應疇로
慷慨有大節。(강개유대절)/의를 따르는 대절의 소유자였다
値光海時。(치광해시)/광해군 시절에
羅之儒生金佑成,辛光業等擧付爾瞻,筠倡讎母論。(나지유생김우성,신광업등거부이첨,균창수모론)/나주의 유생 김우성과 신광업 등이 이첨의 주청에 따라 폐모론 즉 어미에게 복수하는 미친 짓을 하려할 때
公秉義斥折不少假。(공병의척절불소가)/공은 작은 거짓이라도 물리치고 의를 따르려 하자
金辛心銜之。(김신심함지)/김우성과 신광업은 마음에 재갈을 물리고자 하였다.
時公發鄕解。(시공발향해)/이때에 공의 지역에 향시가 있어
將赴省試。(장부성시)/이듬해에 성시에 오르고자 하였는데
乃交訐爾瞻。(내교알이첨)/이에 이이첨의 교활한 비방으로
罰公停擧。(벌공정거)/공에게 과거 시험을 볼 수 없는 정거의 벌을 내린다 하였으며
旋解停。(선해정)/정거의 벌을 풀려면 마음을 돌려
從而誘脅。(종이유협)/ 따르도록 이에 협박회유 하였으나
俾從己。(비종기)/그는 따르지를 않았으며
公終不撓。(공종불요)/공은 끝끝내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爾瞻益怒。(이첨익노)/이이첨은 분노하여
使東庠官呼公名又停其科。(사동상관호공명우정기과)/동상관으로 하여금 공의 이름을 과거에서 정거를 하도록 하였으며
末乃迫出禮闈外。(말내박출례위외)/끝내는 궐문 밖으로 끌어내어지게 되었으나
公悠然不以介意。(공유연불이개의)/공은 유연히 이러한 것에 개의치 않았다.
遂廢博士業。(수폐박사업)/과거 공부를 폐하고
築小亭於石壕江上。(축소정어석호강상)/강위에 작은 석호 정자를 지어
謝跡京輦。(사적경련)/서울 생활의 자취를 지우고
優游以卒。(우유이졸)/한가로이 놀면서 죽고자 했다.
凡世之知公者。(범세지지공자)/무릇 세상에서 공을 아는 사람은
語到公。(어도공)/공의 이야기를 하였으며
莫不欽歎。(막불흠탄)/아름다움을 감탄하지 않은 자 없었으니
必稱以石壕處士。(필칭이석호처사)/이에 석호처사로 일컫게 되었다.
若公可謂遯世不悔。(약공가위둔세불회)/만약에 공이 세상에 숨어 후회가 없다면
皭然不滓者歟。(작연불재자여)/더러운 놈이 아닌 맑고 깨끗함이다.
公容儀端嚴。(공용의단엄)/공의 얼굴과 거동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器度沉毅。(기도침의)/才器와 度量은 침착하고 굳세어
自幼誠孝出天。(자유성효출천)/어려서부터 하늘이 내린 효를 다하였다.
五六歲隨王考喪。(오륙세수왕고상)/5-6세 때 할아버지 상을 치루는데
呼哭若成人。(호곡약성인)/어른처럼 소리 내어 울고
力貧奉親。(력빈봉친)/가난하지만 힘써 부모를 봉양하고
志物之養。(지물지양)/부모의 뜻도 어지지 않고 진휼하니
無所不至。(무소불지)/못 할 것이 없었다.
父疾公憂遑不解帶。(부질공우황불해대)/아버지가 아팠을 때 공은 걱정이 되어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積歲如一日。(적세여일일)/이와 같은 세월을 하루처럼 하였다.
及喪毁幾不全。(급상훼기불전)/그리하여 상을 당하여 거의 몸을 돌보지 않았으며
書永慕二字。(서영모이자)/여막에 글자 永慕라는 두 글자 붙여놓고
扁所居室。(편소거실)/한쪽에 방을 만들어
以寓終身慕之意。(이우종신모지의)/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리움을 뜻을 품었다.
與弟南磵公某。(여제남간공모)/동생 남간과 같이
師事姜睡隱沆。(사사강수은항)/수은 강항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勵志爲學。(려지위학)/뜻을 세워 학문을 하게 되었으니
堅固進修。(견고진수)/진덕 수업은 견고했으며
睡隱贈詩稱以瓊樹枝。(수은증시칭이경수지)/수은 선생께서 경수의 가지라 시로 칭찬하였으니
其期許可知也。(기기허가지야)/그 기대에 부응함을 알았도다.
身在韋布。(신재위포)/몸은 비록 가난한 자의 복장이지만
憂深宗國。(우심종국)/나라를 깊이 걱정하고
見丁丑虜亂。(견정축로란)/정축년 정묘호란에서 보면
憤慨不自勝。(분개불자승)/분개하여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詩以見志。(시이견지)/이에 시를 지어 뜻을 보였다.
公細行甚備。(공세행심비)/공은 작은 행동에서도 잘 갖추어졌다.
忠孝志節旣偉然。(충효지절기위연)/총효지절이 이미 비범하니
他可略也。(타가략야)/여타는 생략해도 무방하리다.
公卒以顯廟庚子十月十一日。(공졸이현묘경자십월십일일)/공은 1660년 현종1년 경자년 10월11일 돌아갔으니
得年八十。(득년팔십)/향년80세라
配南平文氏。(배남평문씨)/배는 남평문씨요
其父益新。(기부익신)/익신의 따님인데
祔公葬。男佖,佶,伈。女婿閔志在。(부공장。남필,길,심。녀서민지재)/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佖, 佶, 伈 세 아들에 사위는 閔志在이다.
玄孫廷尹將豎石于墓。(현손정윤장수석우묘)/현손 廷尹이 묘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來謁余文。(래알여문)/와서 여쭈기를 나에게 글을 청해
辭不獲。(사불획)/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遂書此以與。(수서차이여)/이와 같이 기록 한다.
而系之以辭曰。(이계지이사왈)/연이어 말로서 이어지는 것은 가로되
錦城之西長興麓。(금성지서장흥록)/나주의 서쪽 장흥동 산록에
枕丙面壬封崇四尺。(침병면임봉숭사척)/병면북방 베개 자리에 넉자 높이로 추봉하는 것은
是惟高士之藏。(시유고사지장)/이는 다만 고결한 선비의 무덤이니
過者必式。(과자필식)/지나가는 자는 반드시 인사를 하면서 예를 갖추라.
3. <역사 접목의 해설>
〇 잠영(簪纓)이란 관원이 쓰던 비녀와 갓끈이란 뜻으로 양반이나 지위가 높은 벼슬아치 또는 그 지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〇 사가호당은 조선조 때 인재를 기르고 문풍을 떨칠 목적으로 양반 관료, 지식인 가운데 총명하고 젊은 문신들을 뽑아 여가를 주고 국비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〇 위포(韋布)는 가죽 띠와 베옷으로 가난한 자의 복장을 의미
〇 玄孫 廷尹은 석호 해구- 필 - 하기 - 혁규 -정윤으로 가계가 이어지고 있다. 고조부(高祖父)와 고손(高孫)인데 왜 고손이라 하지 않고 현손(玄孫)이라 하는가.
직계 비속(卑屬)에게 높을 "高" 자를 쓰는 것이 외람 된다 하여 대신
'玄'자를 쓴다고 한다.
〇 경수지(瓊樹枝)에서 경수(瓊樹)는 구슬나무를 말한다. 인품이 고결함을 뜻하는 말이다.
〇 枕丙面壬封崇四尺(침병면임봉숭사척)을 “병면북방 베개 자리에 넉자 높이로 추봉하는 것은”으로 해석하였지만 가장 어려운 해석문구라고 본다.
〇 「必稱以石壕處士。(필칭이석호처사)/이에 석호처사로 일컫게 되었다에서」 石壕라는 號를 처음 대하게 된다.
石壕라는 단어의 고사를 찾아보니 杜甫의 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두보의 시에 石壕吏 즉 石壕의 관리 또는 石壕마을의 벼슬아치라는 뜻으로 당시의 서민들의 아픔과 위정자들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시이다.
이 시는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고통을 받는 인민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지식인의 분노가 담겨 있다. 후대의 위정자에게 우국애민의 사상을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아마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하여 號를 석호로 한 듯하다.
號란 본인의 대명사인 만큼 號 속에 자신의 모습을 담아 넣어야 한다.
석호라는 두 단어를 나누어 생각하면 돌 石에 도랑 壕이니 석현 마을의 옆으로 흐르는 냇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송상덕의 묘갈명 내용과 역사를 접목시켜 보니 고사의 배경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石壕吏(석호리)
-杜甫(두보)-
暮投石壕吏(모투석호리) : 날 저물어 석호촌에 투숙하니
有吏夜捉人(유리야착인) : 관리가 나타나 밤에 사람을 잡으려 왔네
老翁踰墻走(노옹유장주) : 할아버지는 담 넘어 달아나고
老婦出門看(노부출문간) : 할머니가 문 밖에 나가본다.
吏呼一何怒(리호일하노) : 관원의 호출이 어찌 그리도 노엽고
婦啼一何苦(부제일하고) : 할머니의 울음은 어찌 그리도 고통스러운지
聽婦前致詞(청부전치사) : 할머니가 관리 앞에 나아가 하는 말 들으니
三男鄴城戍(삼남업성수) : 셋째 아들은 업성에 수자리 가고
一男附書至(일남부서지) : 맏아들이 편지를 부쳐왔는데
二男新戰死(이남신전사) : 둘째 아들은 새로운 전투에서 죽었다오
存者且偸生(존자차투생) : 살아있는 자는 억지로라도 살아가겠지만
死者長已矣(사자장이의) : 죽은 자는 영영 그만이로다.
이하는 생략〜
〇「乃交訐爾瞻。(내교알이첨)/이에 이첨의 비방으로」의 이첨은 이이첨(李爾瞻)을 말한다.
이이첨은 조선조 광해군 때의 권신으로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
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라 소북 일파를 숙청하고 이어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폐
모론을 일으켜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폐륜 행위를 자행하다가 인조반정 후
세 아들과 함께 참형 당하였다.
석호공과 남간공 등 전국 많은 유림들은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목대비가 선왕의 正妃이므로 비록 광해군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어머니 격
인데 자식이 어머니를 폐위한다는 것은 인륜을 저버린 것으로 유생들의 반대
를 초래한 것이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조선의 제15대 왕으로 재위 1608년부터-1623년
까지 15년 동안에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국가시설 복구와 안위를 위해 많은 공
을 세웠는데, 왕으로 등극하면서 군왕의 자질을 벗어난 행동을 하여 역사는
광해군을 두 개의 면에서 평가를 하고 있다.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풀려난 인목대비가 천도를 어기고 인륜을 폐하였다는 죄
목 여러 가지를 들어 왕(王)의 지위를 박탈하고 군(君)으로 강등 해 버린 것
이다.
○東庠官은 성균관의 四學(東庠, 西庠, 南庠, 中庠)이 있는데 사학은
비사학 출신의 유생들이 답안지를 누가 작성했고, 또 얼마의 점수를
받았는지 등을 관리하였는데, 아마 동상의 한사람을 동상관으로 지칭
하는 것 같다.
〇 枕丙面壬封崇四尺。(침병면임봉숭사척)을 「병면북방 베개 자리에 넉자 높이로 추봉하는 것은」으로 해석하였는데,
분명 비석을 세우기 위한 묘갈명을 현손 廷尹이 宋相德에게 청한 것으
로 보아, 4자 높이의 비석을 세우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지나, 碑나 石
의 글이 없어서 단지 위와 같이 해석하였는데, 우려스럽다.
4. 마무리의 글
묘갈명을 한 눈에 조감해보면 석호공의 인생 드라마를 시 한편으로 보는 것
같다.
평생을 나주 시골에서만 은둔생활한줄 알았는데, 젊어서는 동생 남간과 같이
서울에서 살았다는 것이 발견된다.
임진왜란 의병 運糧使를 하신 덕양공께서 없는 살림에 서울로 유학을 보낸 듯
하다.
남간은 그때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시절이다.
필자가 고문헌를 뒤지면서 선대의 글을 찾는데, 이 묘갈명도 찾아진 글이다.
특히 남간공의 글은 상당히 많이 고문헌에 있음을 보고 후손으로 참으로 기쁘
다.
남간공은 비록 벼슬을 잠시 동안 하였지만, 시문으로는 전국에서 으뜸가는 문
장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후세의 많은 문장가들이 남간공의 서
책에 발문을 썼던 것이다.
학맥과 인맥으로 世誼를 이어오는 선대의 얼이 가슴으로 느껴진다.<終>
남간(南磵)과 계곡(谿谷)의 號 이야기
글/나천수
1. 서두에
필자가 계간수창의 시문을 재벌 번역하면서 두 분의 시문을 가능한 한 시의 밑바닥까지 드려다 보려 하였다.
그런데 밑바닥에는 오직 골짜기 계곡뿐이란 것을 느꼈다.
호가 南磵인 南磵의 글자를 풀어 보면
남녘 南에 溪谷의 시내 磵이다.
溪谷과 谿谷은 같은 의미이니, 남간은 곧 남쪽의 谿谷으로 장유의 호와 같은 것이다.
호가 谿谷인 谿谷의 글자를 풀어보면
시내 谿에 골짜기 谷이다.
谿谷은 곧 溪谷과 같으며 골짜기란 뜻이다.
무언가 같아 보이지 않는가.
계곡이란 위치가 같고, 둘 다 물줄기가 흐르고, 둘 다 깊이 파여 있다.
2. 남간이란 호와 금계리 그리고 한계천
남간의 태어난 터는 錦溪里로 나주나씨 직장공파 가기의 터이다.
錦溪가 뜻하듯 비단같은 시냇물이 집 앞으로 흐르고 있다.
남간의 첫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한계당기를 보면
「기수지북애(其水之北涯)/그 물의 북쪽 물가에
유구궁륭연고장이(有丘穹隆然高丈二)/언덕이 있어 우뚝 솟은 높이가 2丈인데
가이롱이전지(可以籠而專之)/(이 땅을) 차지해 독점할 만하여
여내입옥이간우기척(余乃立屋二間于其脊)/내가 두 칸 집을 지었는데
등성마루로 칸을 나누어
일간방(一間房)/방 한 칸은
동가거(冬可居)/겨울에 살만하고
일간상(一間床)/평상 한 칸은
하가처(夏可處)/여름에 거처할 만하다
두기면타(頭旣免打)/머리는 천장에 부딪치지 않을 만하고
슬역근용(膝亦堇容)/무릎은 겨우 펼만하다.
어시이연와(於是弛然臥)/누우면 활처럼 구부려야 한다.」이 있다.
남간이 최초에 한계천 인근에 茅屋을 지었다는 글이다.
이 시기가 1612년 29세 때이다.
이 말은 29세 때에 남간이 평생 즐기는 別業 터를 한계천 물가로 정한 것이다.
47세 때 금계리 본집에 화재가 나서 형 석호는 석현마을로, 동생 남간은 서수구 밖 한계천변에 남간정사를 지어 이락당(而樂堂)이라 편액을 달았다.
남간정사의 터가 29세 때부터 모옥을 지어 관리하던 그 터라고 필자는 그리 생각한다.
남간정사 상량문에서 보면
정사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繚曲山川(료곡산천)/ 굽어 감고 있는 산과 냇물이 좋아
幾年富媼所畜(기년부온소축)/몇 해 동안 토지 신의 돈을 모았는가.」
한계당기와 남간정사 상량문을 종합해 보면
정사의 위치는 나주시 교동의 나주천과 장원봉, 월정봉 3지점이 만난 곳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은 이미 토지가 형질이 변경되어 과거의 모습을 찾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필자는 유년시절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에 남간 정삭 어렴픗이 보이는 듯하다.
3. 장유와의 인연
남간과 계곡은 1606년 진사 會試(2차시험)에 최종 합격하여 그때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게 된 배경이다.
남간은 계곡보다 3살 위이다.
계곡과 남간은 사마시 동년의 사이지만 남간집 해제를 보면 1626년 장유에게 편지로 邦禮(나라의 吉凶의 儀式)를 논의하였다는 기록이 최초의 서신인 듯하다.
그리고 1629년부터 상여수창의 시를 나누었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계간수창 문집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1630년부터의 수창 시문이 많이 발견된다.
1630년은 어떤 해인가.
남간정사를 건립한 해이며, 계곡 장유가 나주 목사로 부임한 해이다.
그리고 많은 상여수창의 글을 자세히 보면
남간을 羅同年, 羅同年應瑞, 羅年伯으로 3살 연상인 나해봉을 깍듯이 높여 부르다가, 奉謝南磵이라는 제목을 붙이 시문이 드디어 나타난다. 이때가 臘초5일이라 기록되었는데, 계간수창 집을 보면 乙臘이란 표현으로 보아 1635년 을해년인 듯하다.
이후 呈南磵年伯, 謝狀南磵年伯, 次韻酬南磵, 奉和南磵寄韻, 奉酬南磵,
和呈南磵年伯이란 표현으로 보아, 남간이란 호는 장유d에서 비롯된 듯하다.
字는 부모나 집안 어른이 지어주는데, 字가 있으면 어른이 되었다는 증표이다. 字는 한 개만 갖는다.
號는 남이 지어주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짓기도 한다.
號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단어를 주로 쓴다.
號는 사회활동에 따라 여러 개 가질 수 있다.
諡號는 국가가 내리는 호이다.
4. 같은 해에 두 분이 돌아가심.
금슬 좋은 부부는 죽어도 같이 죽는다 하였다.
즉 한쪽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다.
남간과 계곡의 상여수창 시문을 보면 마치 두 사람이 연인이 되어 연애하듯 시문을 나누었다.
두 분 다 스트레스 우울증으로 시달리다가 1638년에 돌아가셨다.
장유가 두 달 먼저 떠났고, 장유의 운명 소식을 모른 체 남간도 5월말에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이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이나 한 듯 같은 해에 가신 것이다.
號의 의미가 같더니 삶과 죽음마저도 같아진 것이다.
첫댓글 총84페이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