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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역폭발사고
전라북도 익산. 1995년도에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며 도농복합시인 익산시가 됐다. 호남의 관문으로 호남선과 전라선, 장항선이 분기하는 철도교통의 요충지이다. 보석 가공 분야의 특화 도시이고 수출자유지역으로 산업이 발달된 도시이다. 호남평야의 중심지로 대한민국의 대표적 곡창이기도 하다. 익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구 지명인 ‘이리’ 혹은 ‘솜리’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광주와 전주가 호남에서 첫째와 둘째가는 대도시라는 사실은 대부분 잘 알지만 익산이 세 번째 도시라는 사실은 모르는 이들이 많다. 군산, 여수, 목포, 순천 등 전라도의 내로라는 도시들이 익산보다 작은 도시이다.
나 역시 익산이라는 이름보다 이리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지금도 이리라는 지명을 많이 사용한다. 익산은 내게 많은 추억이 간직된 도시이다. 외가가 익산이고 내가 어려서 5년 넘게 살았던 도시이다. 어머니는 전북 부안군 줄포면이 고향이시다. 사업하시는 외할아버지를 따라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이리로 터전을 옮겨 오래 사셨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중년 이후의 삶을 이리에서 보내셨다. 그래서 내겐 이리가 외가동네이다. 내가 어렸을 때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부모님이 외가동네인 이리로 이사하셨고, 형제들도 졸망졸망 따라붙어 이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네 살 무렵 아버지의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에서 이리로 이사했고, 거기서 초등학교 3학년 4월 4일까지 살았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식목일에 이사를 해 지금도 이사한 날짜를 기억한다.
이리에 사는 동안 창인동-어양동-마동으로 세 번 이사를 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또렷이 기억난다. 어양동에 살면서 이리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창인동이나 마동은 시내 중심부에서 가까운 곳이었지만 어양동은 외곽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 거리였다. 이리 시내에서 최초의 아파트 두 동이 어양동에 들어섰고 그곳에서 살면서 학교에 입학했다. 아파트에서 얼마 살지 않았고, 마동 남중학교 앞으로 이사를 했다. 마동 남중학교 앞에서 이리국민학교까지는 15분 남짓 걸어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동을 끝으로 이리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다시 되돌아 왔다. 그렇게 이사를 다닌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어려서 잘 알지 못했다. 그저 할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간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이리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이 1976년으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76년도에 1학년, 77년도에 2학년 이었다. 내가 2학년이던 77년 늦가을 ‘이리역폭발사고’가 터졌다. 1977년 11월 9일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가던 한국화학공업주식회사의 화약열차가 10일 11시 31분에 다른 열차와 함께 이리역에 도착했고, 1605호 화물열차에 중계되어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하기 위해 머물러 있었다. 한국화학공업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 씨는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고 있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화약열차에 들어갔다. 그는 화물열차 내부가 어두워 논산역에서 구입했다는 양초에 불을 붙여 화약상자에 세워 놓은 뒤 침낭 속에 몸을 묻고 잠에 빠져 들었다. 끄지 않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어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폭발한 열차에는 당시 다이너마이트 상자 914개(22톤), 초산암모니아 상자 200개(5톤),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등 모두 1250상자 30톤 분이 실려 있었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이리역 구내에는 깊이 15m, 직경 30m의 큰 웅덩이가 생겼다. 역 구내에 있던 객차·화물열차·기관차 등 30여 량 남짓이 파손되었고 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공식 집계된 열차 폭발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 총 1402명에 이르렀다. 피해 가옥 동수는 전파가 811동, 반파가 780동, 소파가 6042동,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 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 수만도 1674세대 7873명이나 되었다.
요즘에야 초대형 사고가 워낙 많아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큰 사고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사회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리역폭발사고는 엄청난 규모였다. 몇 날을 두고 긴급뉴스가 보도됐고,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이리에 집중됐다. 재해대책본부가 꾸려져 국가적으로 재난에 대처했다. 전라도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던 이리는 내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도시가 됐다. 외가 쪽 친인척들이 이리에 많이 살고 있었지만 당시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대개 이리역 근처에 살았는데도 아무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니 천우신조였다. 고향 음성에서도,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인척들에게도 안부를 묻는 연락이 끊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함께 이리에 살다가 새로운 일을 구상하기 위해 먼저 고향으로 올라가 계셨다.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 아버지가 급히 내려와 우리의 안부를 확인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77년 11월 9일 이리역폭발사고 당일이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난다. 밤11시가 넘어 초대형 사고가 터졌건만 어린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잠을 잤다. 30톤 분량의 화약이 동시에 터지는 대형 폭발사고가 터졌지만 어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잠을 잤다. 당시 우리 집은 이리역에서 2㎞ 조금 넘게 떨어져있었다. 꽤 가까운 거리였다. 30㎞ 이상 떨어진 전주에서도 폭발음과 진동을 느꼈다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잠을 잤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이 난리였다. 나와 가족들이 함께 잠을 잤던 안방은 문풍지가 모두 날아갔다. 사람들이 둘 셋씩 모여 웅성웅성 사고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그 때까지도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아침밥을 먹고 학교로 나서는데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아이들이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휴교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고, 휴일도 아닌데 학교를 가지 않는다고 기뻐 날뛰었다.
오전 중에 가깝게 사시던 외할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에 오셨다.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하러 오신 것이다. 할아버지 사시던 집으로 기차레일이 날아와 지붕이 모두 날아갔다고 얘기 하시는 걸 들었다. 그로부터 몇날 며칠 동안 TV만 켜면 온통 이리역폭발사고와 관련된 뉴스가 나왔다. 시청 앞에 텐트촌을 마련해 이재민들이 임시 살 수 있도록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전국 각지에서 구호품이 답지했다. 우리 집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당시 이리시내는 전쟁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시청으로 이재민 텐트촌을 구경 갔던 일도 기억난다. 전국에서 몰려든 취재차량이 즐비했고, 구호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모습도 기억난다.
많은 사람이 죽고 엄청난 재산피해가 발생했지만 어린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방송에서 ‘이리’가 집중 보도되고 내가 아는 공간이 화면에 나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해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 음성을 찾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가족을 보면 모든 관심사가 이리역폭발사고였다. 별일 없던 거냐고 안부를 묻는 것은 기본이고 “이리 이재민 왔네”라고 농담 섞인 인사말을 건네는 이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누구네 집 누가 객지 어디에서 산다는 것을 다 알고 지내던 상황이었을 텐데 이리에서 그토록 큰 사고가 났다니 마을 사람 모두가 우리 가족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 때 참 인사 많이 받았다.
이리역폭발사고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것인지는 제대로 알 수 없으나 사고가 발생하고 5개월 후 우리 가족 모두는 이리생활을 접고 고향인 음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리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고향 대소면에 있는 대소국민학교로 전학을 했다. 전학한 후에도 내가 이리에서 이사 왔다는 사실은 여러 사람의 관심사였다. 선생님들도 “이리역폭발사고 때 무사했느냐”고 묻는 일이 많았고, 일부 아이들도 “이리에서 이재민이 이사 왔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이리역폭발사고라는 엄청난 규모의 사고 탓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익산을 이야기 할 때 이리역폭발사고를 말하곤 한다.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리역폭발사고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얼마 전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이리역폭발사고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방송은 당시의 참혹했던 사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하춘화가 이리 삼남극장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하던 중 폭발사고가 발생해 극장 지붕이 무너지고 무대가 아수라장이 된 상태에서 보조 사회자였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그를 업고 나와 살려냈고, 그 인연으로 둘이 오랫동안 가수와 진행자로 파트너십을 발휘했다는 내용이었다. 무명의 이주일이 이 사건을 계기로 인기스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아마도 방송이 전파를 탄 날이 이리역폭발사고가 발생했던 그날이 아닐까 싶었다. 라디오를 통해 전해들은 뒤 인터넷을 뒤적이며 이리역폭발사고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날 하루 이리에 살던 어렸을 때의 추억을 많이 끄집어냈다.
외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적어도 1년에 한두 번 익산에 갔다. 그러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익산에 갈 일은 없어졌다. 어머니 형제들은 서울과 대전, 전주에 살고 있고, 익산에는 먼 친척들만 살고 있다. 그러니 익산에 갈 일이 없다. 외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저 문안차 찾아뵙기도 했다. 어려서 5년 가까이 살았던 기억 때문에 익산은 추억이 있는 반가운 도시이다. 지금도 방송에서 익산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유심히 보게 된다. 호남선 기차를 타고 남도로 내려갈 때도 익산역을 통과할 때면 아련한 추억이 밀려온다. 대량의 화약폭발이라는 대형 사고를 극복하고 도시를 재건해 이제는 호남 제3의 도시가 된 익산. 그곳은 내게도 추억의 파편이 남아있는 도시이다.
2년 전 하루 날을 잡아 큰아들하고 둘이 대전 신탄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익산을 갔다. 외할아버지가 사시던 집도 가봤고, 외할아버지가 장사하시던 중앙시장 점포도 둘러보았다. 40년 만에 어려서 살던 마동 판자 집을 찾아가 봤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그 판자 집은 허물어지고 없었다. 길을 내기 위해 부지를 닦아둔 상태였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입학식을 했던 이리국민학교도 찾아가보았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간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발품을 팔자니 아들 녀석은 지겨워하며 투덜거렸다. 아비가 아련한 추억을 더듬든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했기에 달래고 도닥여주었다. 아들에게 아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려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천지가 개벽을 했다. 하지만 중년 이상의 많은 국민들은 이리역폭발사고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너무 어려서 많은 것을 기억에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분명 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큰 사고에 사람들이 애통해 하던 모습, 전 국민이 뜻을 모아 구호의 손길을 뻗던 모습들이 아련하게나마 기억에 남는다. 2015년 4월 1일, 오늘은 역사적인 호남고속철도 개통일이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2시간 33분 만에 달려갈 수 있게 됐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철도교통의 요지인 익산은 서울과의 거리가 1시간 20분으로 좁혀져 교통도시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됐다. 아픔을 간직했던 익산역은 초현대식 건물로 신축돼 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호남고속철도가 공식 개통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경축의 분위기가 한창이다. 온 나라가 경축 분위기 속에 휩싸인 가운데 나 홀로 이리역폭발사고에 얽힌 추억을 더듬으며 여덟 살의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첫댓글 유아기적 경험은 평생 따라다니는 거머리 같습니다~~더 나이 들어야 잊혀질까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