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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 3차, 2020. 8. 19.~20.(수,목) - 음력 (7. 1.~2.), 일몰 19:16, 일출 05:49
- 4차 졸업, 2020. 8. 23.~24.(일,월) - 음력 (7. 5~6.), 일몰 19:10, 일출 05:59
●산행지: - 3차 한강기맥 3구간(삼마치-비솔고개),
- 4차 한강기맥 졸업(비솔고개-두물머리)
●산행코스: 삼마치-상창고개-금물산-성지지맥분기점-시루봉-발귀현-조망바위-갈기산-신당고개-밭배고개-송이재봉-소리산-비솔고개-도일봉갈림길-싸리봉-싸리재-단월산-천사봉-용문산가섭봉-배너미고개-유명산-소구니산-선어치고개갈림길-농다치고개-노루목-옥산-말머리고개-된고개-청계산-송골고개-벚고개-갑산공원-진고개-골무봉-소리개고개-양수역-두물머리
●먹거리: 생수2리터, 제과점빵7, 약과2, 쏘시지1, 자유시간1, 사탕30, 게비스콘2 (4차 + 삘참, 캔맥, 주먹밥)
●준비물: 스틱, 충전지2, 충전짹, 헤드랜턴, 구급약, 경광점멸등, 손수건, 휴지, 물티슈, 팔토시, 부직반창고, 마스크 (4차 + 긴팔, 자켓, 침낭커버)
●거리: 41.1km + 43.7km
●소요시간: 17.16h + 23.40h
●누구랑: 나홀로
●경비: - 3차, 직행버스7,400, 택시16,000, 뒤풀19,000,
- 4차, 기차3,800, 버스1,500, 택시12,400, 뒤풀11,000
●날씨: - 3차, 24~33, 대체로 맑음, 구름 많음.
- 4차, 21~31도, 구름 많음.
●산행경과:
* 3구간
- 00:14 : 삼마치고개
- 01:19 : 상창고개, 장수마을
- 03:14~03:31 : 양지봉
- 04:26 : 금물산(775.3m)
- 04:31 : 성지지맥분기점
- 05:34 : 시루봉(504m)
- 06:50 : 발귀현, 민가 식수보충
- 08:56 : 조망바위
- 08:59 : 갈기산(685m)
- 10:29 : 신당고개, 폐휴게소
- 11:50 : 새나무고개
- 13:04 : 통골고개, 벤치
- 13:54~14:14 : 밭배고개
- 16:07 : 송이재봉
- 17:02 : 소리산
- 17:30 : 비솔고개
* 4구간 졸업
- 20:08 : 비솔고개
- 21:02 : 도일봉갈림길
- 21:07 : 싸리봉(811.8m)
- 21:45 : 단월봉
- 22:03 : 중원산삼거리
- 23:43 : 헬기장
- 23:47 : 천사봉(1002.5m)
- 00:33 : 용문봉갈림길
- 01:30~06:18 : 용문산(1157.1m, 가섭봉)
- 07:55 : 배너미고개, 매점, 식수보충
- 09:30 : 유명산(862m)
- 09:58 : 소구니산(800m)
- 10:10 : 선어치갈림길
- 10:35~51 : 농다치고개 수도, 식수보충
- 11:26 : 옥산(578m)
- 11:06 : 말머리고개
- 13:07 : 된고개
- 13:15 : 청계산(658m), 평상, 막걸리
- 15:25 : 벚고개, 우측 인가 300m 식수보충 가능
- 17:27 : 갑산공원묘지
- 18:51 : 양수역
- 19:47 : 두물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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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기맥: 107.6km (싸리봉~구드레)
* 한강기맥: 167km (두로봉~두물머리)
* 진양기맥: 156.6km (남덕유산~진양호 남강댐)
* 영산기맥: 159.5km (새재봉~유달산 다순금)
* 땅끝기맥: 123km (바람봉~땅끝마을 토말)
- 삼마치~신당고개 23.5km
-. 삼마치~금물산 9.58km
-. 삼마치~발귀현 15.7km
-. 금물산~신당고개 14km
- 신당고개~농다치고개 36.7km
-. 신당고개~밭배고개 8.8km
-. 신당고개~비솔고개 15.8km
-. 신당고개~용문산 25km
- 비솔고개~농다치고개 20.9km
-. 비솔고개~ 용문산 10.8km
-. 비솔고개~배너미고개 14km
- 농다치고개~두물머리 24.57km
-. 벚고개~두물머리 12.7km
-. 갑산공원묘지~양수역 4.8km
* 교통 및 식수 공급지
- 상창고개 : 0.5km직전 임도에서 우측으로 임도따라 650m 계곡수 있음.(고개에서 250m 지나 임도삼거리에서 왼쪽)
- 상창고개에서 좌측 삼거리로 내려가면 민가 있음
- 발귀현: 도착 직전 좌측 100m 인가 수도, 발귀현 우측 건물 뒤편 수도, 0.2km
- 발귀현 : 우측 홍천 남면 신대리(→0.75km 동운승강장BS, 17:40)/ 좌측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1.3km 새터종점BS, 18:20)
- 갈기산 : 정상 직전 전망바위
- 용문버스터미널 : 031-773-3100 출발 석산리행(비솔고개) : 08:55, 13:40, 17:50
- 비슬고개 : 양평시내버스 2-11번, 2-2번, 2-3번이 비슬고개를 지난다. (용문까지 0.35h)
- 단월택시 : 031-774-5070, 용문까지 12,000, 비솔고개까지 12,400
- 용목쌍가마불한증막 숙박 : 비슬고개에서 남동쪽으로 2.5km 아래 향소리 방촌말BS인근 위치(031-773-0502, 010-3008-4842), 식당(19시까지)
- 배너미고개 : 매점(막걸리, 감자전, 도토리묵) ※안 열을 때가 많음.
- 농다치고개 : 수도(지하수), 포장마차(바지락칼국수, 파전, 010-8285-6927) ※매점 가끔 열지않음
- 농다치고개 : 6-6번, 6번 버스가 경의중앙선 양평역, 아신역(08:43경)을 경유
- 중미산휴양림BS : 양평시내버스 6-6번, 6-10번 버스가 정차
- 중미산휴양림BS에서 남쪽으로 한화리조트입구 신록3리BS(동막골입구)까지 4km
- 청계산 : 주막 ※안 열을 때가 많음.
- 벚고개 : 황순원소나기마을쪽(우측) 300m 마을에서 식수 보충 가능
* 서울에서 삼마치 가는 길
- 동서울~홍천: 06:15, 06:40, 07:00, 07:15, 07:40~22:30, 1h, 7,400
- 청량리~용문: 06:40, 0.37h, 3,800, 용문~홍천
- 홍천택시: 터미널앞 많음. (무조건 메타찍고)
* 서울에서 신당고개 가는 길
- 동서울~용두(양평): 06:15, 1.30h, 8,200
- 경의중앙선: 청량리역~용문, 용문터미널: 용문~용두리 버스
* 신당고개에서 서울 오는길
- 신당고개 홍천폐휴게소에서 용두리방향으로 1.2km, 중앙분리대 끝나는 지점 횡단보도 건너 차차차휴게소앞 삼성리B/S, 버스: 15:20
- 신당고개에서 택시 불르면 홍천쪽으로 넘어가 주유소에서 유턴하여 용두리로 옴.
- 신당고개 → 1km 유목정이BS, (홍천BT~용문터미널)간 홍천 농어촌버스 5회 운행
- 신당고개 → 3km 양덕원에서 홍천행 버스편 많음.
- 양평 청운콜택시: 031-772-8258, 양평경찰서 청운파출소: 031-773-9112 (용두리)
- 용두리 버스터미널~동서울행 고속버스 정차, (한밭슈퍼에서 표구매)
- 용두리~용문, 용문~청량리(전철 직행 40분)
*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버스터미널 시간표
* 양수리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경의중앙선 양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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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군
경기도 동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으로 강원도 홍천·횡성·원주와 접하며 도계를 이루고 있다. 면적은 도 내에서 가장 넓지만 인구밀도는 가평군, 연천군과 함께 매우 낮은 편이다. 광주산맥의 영향으로 높은 산지에 둘러싸여 있어 산업의 발달이 미약하고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을 인구 감소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서울과 강원도로 연결되는 국도가 나 있으나, 군내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행정구역은 양평읍·강상면·강하면·양서면·옥천면·서종면·단월면·청운면·양동면·지평면·용문면·개군면·국수출장소 등 1개읍 11개면이 있다. 군청소재지는 양평군 양평읍 군청앞길2이다.
양평군은 옛 양근군과 지평현이 합해져 이루어진 곳이다. 양근군은 지금의 양평군의 동부에, 지평현은 서부에 위치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의 남하로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고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의 세력확장으로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빈양현(濱陽縣)·지평현(砥平縣)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 양근지역은 양근현(楊根縣)·익화군(益和郡) 등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나, 지평현은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다.
조선 초기의 군현제 개편으로 양근군과 지평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 춘천부 양근군·지평군, 1896년에 경기도 양근군·지평군이 되었다. 1908년에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하고 각각의 머리글자를 따 양평군이라 이름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고읍면·서종면·갈산면·양서면·설악면·용문면·지제면·청운면·단월면·강상면·강하면·양동면으로 재편되었다. 1931년에 고읍면을 옥천면으로, 1938년에 갈산면을 양평면으로 개칭했다. 1942년에 설악면을 가평군으로 이관했으며, 1963년에는 여주군에서 개군면을 편입받았다. 1979년에 양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양서면에 국수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98년에 폐지되었다. 2006년 지제면이 지평면으로 개칭되었다. 한강기맥의 한 줄기에 군내 최고봉인 용문산(1,157m)이 솟아 있으며, 그 산세가 군내 곳곳으로 미쳐 험한 산지를 이룬다. 군은 대체로 이들 산지로 둘러싸인 침식분지를 이룬다. 군의 북부에 화야산(755m)·통방산(650m)·중미산(834m)·유명산(862m)·봉미산(856m)·갈기산(685m)·시루봉(504m) 등이 가평군과 강원도 홍천군의 경계를 이루고, 동부에 금물산(780m)·성지봉(791m)·당산(541m) 등이 강원도 횡성군·원주시와 경계를 이룬다. 남부에는 옥녀봉(419m)·고래산(543m)·우두산(480m)·파사산(231m)·양자산(710m) 등이 여주군과의 군계를 따라 솟아 있다. 서쪽 남양주군과 경계를 이루면서 남류하는 북한강과 남서부에서 북류하는 남한강이 양서면 양수리에서 합류해 한강의 본류를 이룬다. 북한강에는 중미산 일대에서 발원한 수입천과 문호천 등의 지류가, 남한강으로는 흑천·금당천·삼산천·신내개울 등이 흘러든다. 양수리 일대에는 충적지가 발달해 있으며, 하천변을 따라 발달한 저지대는 주로 논으로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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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마치(三馬峙/460m) → (1.1km) → 602봉 → (1.4km) → 임도삼거리 → (0.5km) → 상창고개(上蒼峙/494지방도/350m) → (3.1km) → 철탑,임도(林道) → (1.1km) → 782.9봉 → (2.4km) → 금물산(今勿山/776m) → (0.2km) → 성지봉(聖地峰)갈림길,태양광전지판 → (2.2km) → 시루봉(504m) → (1.9km) → 임도(林道) → (0.8km) → 발귀현(發歸峴/285m) → (2.6km) → 578봉 → (1.6km) → 갈기산(葛基山/685m) → (1.5km) → 용화사(龍華寺)갈림길 → (2.1km) → 신당고개(神堂峙/홍천휴게소/225m)
신당고개(神堂峙/홍천휴게소/225m) → (4.6km) → 398.3봉 → (2.1km) → 통골고개(通谷峴/401m) → (0.6km) → 451.4봉 → (1.4km) → 밭배고개(田拜峴/340m) → (2.0km) → 562봉 → (1.5km) → 송이재봉(670m) → (1.9km) → 소리산(657.6m) → (1.4km) → 비솔고개(非率峴/380m)
비솔고개(非率峴/380m) → (1.3km) → 싸리봉(812m) → (0.5km) → 싸리재 → (0.8km) → 중원폭포갈림길 → (0.6km) → 중원산갈림길 → (1.3km) → 738.2봉(삼각점) → (1.6km) → 폭산(문례봉/천사봉/1,004m) → (1.5km)→ 문례재(問禮峙) → (0.2km) → 용문봉갈림길 → (1.2km) → 용문산(龍門山/1,157m) → (1.5km) → 군부대정문 → (2.7km) → 배너미고개(600m) → (4.1km) → 유명산(有明山/862m) → (1.3km) → 소구니산(800m) → (1.8km) → 농다치고개(420m)
농다치고개(420m) → (1.1km) → 노루목(獐項/450m) → (0.7km) → 옥산(玉山/578m) → (1.0km) → 말머리봉(498m) → (0.4km) → 말고개(430m) → (1.2km) → 546봉 → (1.7km) → 된고개(412m) → (1.8km) → 청계산(淸鷄山/656m) → (1.2km) → 송골고개(380m) → (0.9km) → 461봉 → (0.8km) → 벚고개(260m) → (0.9km) → 389봉 → (2.9km) → 갑산공원묘지 → (3.6km) → 106.7봉 → (1.2km) → 양수역 → (0.9km) → 양서문화체육공원앞 → (1.5km) → 두물머리(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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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구간은 온도가 크게 높지 않았는데도 진행하기 힘겨운 산행이었습니다. 코로나19확진자 접촉으로 두명이 자가격리라 팀인원이 부족해 휴가를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마냥 뒤로 미루기도 어렵고 해서 3구간으로 끝낼렸는데 계획을 변경해 4구간으로 끝내기로 했습니다. 동서울에서 22:30분 막차로 홍천터미널, 택시로 삼마치로 갔습니다.
새벽 세시 양지봉에서 성지지맥 산줄기와 멀리 용문산의 불빛이 확인 되었으며, 고압선 빨간 멀티 점멸등을 따라 진행해야할 방향을 감잡고 잠시 거풍을 쐬다 출발했는데 아뿔싸 금물산에 도착하니 어플이 동작을 멈췄네요.
살이 좀 빠지려나 하는 생각도 잠시 벌컥벌컥 들이키는 물배는 연신 빵빵한 상태를 유지하고, 그나마 머리를 굴린다고 야간산행으로 출발했는데 한낮의 햇빛을 온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고 습도가 높아 땀이 물흐르듯 흘러 나왔습니다. ㅋ
신당고개-비솔고개 구간은 지루한 면이 있고 막바지 송이재봉과 소리산은 차라리 송이를 안먹고 말지 악 소리나게 진을 다 빼더군요. ㅎㅎ
4구간은 태풍이 온다길래 서둘러 다녀오느라 요즘 운동도 못해 체력이 바닥인 상태에서 약간 무리된다 싶었지만 마냥 지체하기 보다는 부딪쳐 보자며 출발하였습니다. 역시 졸업하니 개운합니다.^^
용문산 정자에서 세시간 잤고, 진행하며 얼굴 전신에 거미줄 팩을 여러번 했습니다.
출발점 비솔고개를 가자면 용문터미널에서 산음, 석산을 가는 17:55분 막차를 타야는데 시간이 지체되어 버스로 용문에서 단월로 가서 택시를 이용했습니다.
용문역앞 버섯전골은 버섯만 건져 먹어도 배가 불러 밥을 봉지에 싸서 주먹밥으로 가져갔는데 쏘시지와 빵 중간에 밥을 먹어주니 조합이 한결 나았습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분수령인 한강기맥은 실거리 200.7km(제외: 상원사 접속 8.5km + 두물머리 양수역 회차 2.2km)로 마무리하며 제게 두 가지 특징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는 갑산공원묘지에 이르기까지 기맥상에 무덤이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보기 힘들었으며,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3~5차 공세가 이곳에 집중되어 형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951년 2월 11일 삼마치 횡성전투, 1951년 2월 13일 금물산~신당고개 지평리전투, 1951년 5월 17일 동부전선 현리전투의 운두령 후퇴,
1951년 4월 21일 철원 광덕산과 상해봉지구는 맥아더 후임 리지웨이장군이 진행한 임진강변-철원-김화-화천을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을 확보하기 위한 공격에 6사단이 선봉에 섰다가 사창리전투 패전으로 석룡산-화악산의 캔자스방어선까지 무너지고 용문산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1951년 5월 17일 용문산전투가 설욕의 기회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1951년 1월 30일 한남정맥 용인 향린동산 썬더볼트작전 전적지,
강원도 양구 도솔지맥의 해병대 도솔산 펀치볼지구는 1951년 6월 4일에서 20일까지 17일 간의 전투이고, 한북정맥 적근산은 1951년 8월 에티오피아군과 중공군이 교전한 장소입니다.
물론 한강기맥은 그 이전에도 태기왕국, 불발령 동학도, 상창봉리역과 양원역 등 역사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지만 한국전쟁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파란많은 한강기맥을 백두대간 오대산 두로봉에서 두 강의 합수점인 양수리 두물머리까지 4구간에 걸쳐 끝마쳤습니다. 과연 정맥이라 칭해도 뒤지지 않을만큼 힘들었다는 말로는 대체 불가한 굵고 멋진 기맥길임에도 어째서 산경표에서 한강기맥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의문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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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 사진에 삼마치에 물이 콸콸 나오는 호스가 있던데 확인하진 못했으나 요근래 비가 많이 와 저번구간 날머리에서 선명한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건기에 삼마치에서 물을 구할려면 홍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개울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삼마치(三馬峙) 유래/ 홍천군 홍천읍-횡성군 공근면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과 횡성군 공근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5번 국도가 터널을 통과한다. 옛날 사람들은 오음산에서 다섯 명의 장수가 태어나리라는 풍수설을 믿었다. 장수가 태어나면 그 마을이 편안할 수 없다는 말을 믿어온 이 마을 사람들은 장수가 나타나리라는 오음산 골짜기 바위굴에다 구리를 녹여 퍼붓고 창을 꽂았다. 그랬더니 과연 장수의 혈맥이 끊겼던지 검붉은 피가 용솟음 치며 다섯 개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 뒤 사흘째 저녁 무렵 주인을 잃은 세 필의 백마(白馬)가 나와 갈 길을 잃고 헤매다 힘없이 이 고개를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다. 그래서 삼마치란 이름이 이 고개에 붙여졌다고 한다. 『해동지도』, 『1872년지방지도』에도 '삼마치'와 '소삼마치'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예전에 고개가 하도 험하여 말 세 마리를 갈아 타야만 넘을 수 있는 고개라 삼마치라 불렀는데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4차선의 터널의 뚫려 있어서 이 고개는 잊혀진 고개가 되어 버렸다.
♤ 삼마치전투
6.25. 한국전쟁 때 이 오음산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951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중공군 제4차공세로 홍천의 삼마치리(三馬峙里), 유치리(楡峙里), 횡성의 창봉리(蒼峰里)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사에는 삼마치전투(三馬峙 戰鬪) 또는 오음산 기슭에서 벌어졌다하여 오음산전투(五音山 戰鬪), 횡성을 공격하기 위한 전투로 횡성전투(橫城戰鬪)라고도 한다. 2월 11일 밤부터 2월 13일 아침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국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미군에서도 2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장비와 물자의 손실도 컸다. 특히 국군 제8사단은 3천여 명만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귀환해 7천여 명이 실종되거나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 2구간 삼마치 참조
상창고개 직전 만나는 임도입니다. 여기서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서면 물을 구할 수 있다는데 역시 확인까지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홍천읍을 벗어나 이제 홍천군 남면으로 접어듭니다. 홍천군 남면은 금물산 전엔 횡성군 공근면과 금물산 이후에는 양평군 청운면과 접경을 이룹니다.
♤ 상창고개(上蒼峙/494지방도/350m)
상창고개(上蒼峙)는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상창봉리와 홍천군 남면 유치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5번국도에서 494번 지방도가 연결되는 능선 고개이다. 공원처럼 생긴 넓은 공터에 유치마을에서 세워놓은 커다란 장수마을 표시석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 주위에는 장승과 여러개의 솟대들이 설치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상창봉리고개'이며 창봉리는 창봉곡 아래쪽이 되므로 하창봉리(下蒼峰里)라 하였다가 그 후에 창봉리라 불렀는데 조선시대에 횡성군 공근면에 창봉역(蒼峰驛)이 있었다고 한다. '상창봉리고개'에서 앞 두글자만 따 상창고개가 되었다.
상창고개를 지나 두번째 만나는 임도에서 올라선 곳의 이정표입니다. 두번째 임도를 지나는데 아래쪽에서 개짖는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리네요.
임도를 조성하느라 파헤쳐 놓아 가로질러 절개지를 기어올르다시피 올라 내려다 보며 찍었습니다. 능선을 타지않고 그냥 임도를 따라도 되겠던걸요.
782.9m 전망바위 양지봉이랍니다.
양지봉에서 바라보는 오른쪽 빨간 철탑이 고압선이고 진행방향입니다. 그 멀리 용문산 불빛이 보이고, 좌측으로 금물산과 성지지맥 산줄기도 보이던데 사진으로는 시커멓네요.
♤ 782.9m봉 전망바위/ 양지봉
782.9봉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우측으로 상창고개에서 이어지는 유치리, 시동리, 신대리가 내려다 보이고, 전방으로 오늘 지나게 될 갈기산이 조망되며, 맑은 날은 좌측 멀리 용문산까지 조망된다. '발귀너미고개(발귀현)'를 넘어 양평군 신대리로 넘나들던 고개가 있다. 그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망덕산'이 보이는데, 고려말 왕(王)씨들이 피난와 살면서 신대리에는 '숨어지내기 좋다'는 의미로 동은(東隱), 서은(西隱), 하은(下隱) 등 작은 부락이 있고, 그 후손들의 묘가 아직도 망덕산 곳곳에 남아있다고 하며 고려의 옛 도읍 송도가 그리워 '발기고개'까지 왔다가 저녁이면 돌아갔다고 한다.
낮이라면 우측으로 홍천군 남면 유치리와 시동리가 보이겠지만... 불빛만...
홍천으로 향하는 산줄기는 낮게 펼치지고, 횡성쪽은 산만 첩첩... 불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 금물산(今勿山, 776m)/ 삼군봉(홍천군, 횡성군, 양평군)
강원도 홍천군 남면, 횡성군 서원면,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경계에 위치한 전망이 좋은 산이다. 금은산·그물산이라고도 하는 금물산은 마을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한때 이 산에서 금과 은을 캐어 금은산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산의 모양이 그물을 친 것 같다고 하여 그물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물산은 금물산면이라는 조선시대 행정지명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한편, 금물산과 시루봉, 신당고개에 이르는 시동리, 갈운리 일대는 1951년 2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중공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UN군의 Round-Up작전 일환으로 2월 11일 미10군단에 배속되어 홍천으로 공격 중이던 국군 8사단과 횡성으로 진출을 노리던 중공군 13병단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다.
♤ 성지지맥이란
금물산에서는 성지지맥이 분기된다. 성지지맥은 한강기맥상에 있는 금물산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하여 성지봉(791m), 삼각산(538m), 보금산(364m), 성주봉(343m), 뚜갈봉(216m), 자산(246m)을 거쳐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여주 강천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55.2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동쪽으로는 섬강, 서쪽으로는 흑천이 흐른다.
♤ 성지지맥 개념도
♤ 성지봉(聖地峰, 791m)
성지봉은 산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천주교와 관계가 깊은 곳이다. 조선 순조 원년(1801년) 신유박해와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 등으로 극심하게 탄압 받았던 천주교 신도들이 이곳 성지봉으로 숨어 들었다. 금물산의 최고봉인 성지봉은 금물산 정상에서 서남으로 뻗은 성지지맥에 있다.
지평리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중공군 5만의 병력이 홍천에서 인해전술로 넘어간 곳이 금물산, 시루봉, 송이재봉 등등 바로 이 한강기맥의 능선입니다.
♤ 지평리전투(1951. 2. 13.~16.)
69년 전인 1951년 2월13일 일어난 지평리 전투는 한국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전투로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 이후 연합군이 중공군에 거둔 첫 승리였다. 미10군단 예하 미2사는 51. 2월초 한강선 진출 중인 좌측의 미 9군단과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교통의 중심지역인 양평군 지평리를 점령방어하기 위해 23연대 전투단과 프랑스대대를 배치했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3개 사단 5만 병력으로 야간에 사방에서 공격하자 프랑스군은 동서남북에 병력을 배치하고 실탄이 떨어지자 총검술 백병전으로 적을 물리치고 고립방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중공군은 1주일만에 유엔군의 근접항공지원과 포병화력을 버티지 못하고 수천의 희생자를 남기고 철수하게 된다. 지평리전투는 미군이 한국전에서 거둔 전술적으로 승리한 최초의 전투이다. 지평리전투의 승리 뒤에는 세계 1.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의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1892~1964), 마그랭-베르느네 중장이 있었다. 그는 유엔군에 참가하기 위해 중령 계급을 달고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감물산 이후 큰 고비 없이 진행이 됩니다. 시루봉에 이르니 날이 완전히 밝았네요.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새벽녁에 산안개가 절정에 이르고 한강기맥 저 멀리 갈기산이 우뚝하군요.
♤ 시루봉(504m)/ 홍천군 남면-양평군 청운면
강원도 홍천군 남면 신대리와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도원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이다. 멀리서 보아 뭉뚱한 모양의 봉우리는 떡시루를 엎어 놓은것 처럼 생겼다고 해서 시루봉이라 부른다. 시루봉 정상에는 삼각점과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스텐레스 표지판이 있다. 한강기맥 줄기 양 옆으로 조망되는 구릉성 산줄기, 이곳이 한때나마 오랑캐가 개미떼 처럼 새카맣게 달라붙었다는 사실이 쉬이 믿기지 않는다.
♤ 망덕산(望德山, 429.9m)전설과 삼은(三隱)마을
약 600여년 전 고려가 망하자 이씨 왕조가 고려의 왕족인 왕씨 일가를 멸족시키려고 할 때 왕씨일가는 송도(개성)에서 이곳으로 도망와 피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고개 너머인 시동 4리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너무 광활하여 방어할 수 있는 은신처와 망을 볼수 있는 산이 없어서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는, 협소하고 방어도 쉽고 뒤에 뾰족한 산이 있어 사주경계도 가능한 이 삼은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삼은마을이란 동은(동쪽으로 잠깐 거쳐간다. 은신했다 간다), 서은, 하은을 말하는데 동네에선 동거른다리, 서거른다리, 아랫거른다리 라고 보통 부르고 있다.
망덕산은 동은 마을 뒷산에 아주 뾰족하게 생긴 산인데 왕씨 일가들이 이곳에 올라가 노심초사하며 항상 망을 보며 살았고 매월 1일, 15일에는 개성을 향해 망향제를 지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산을 고려가 망했으니 패망산이라고 했다가, 개성이 그리워서 개성에 있는 산 이름인 덕물산이라고 하였다가, 어느날 스님이 와서 자고 가면서 "망덕산"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하여 그후부터 지금까지 망덕산이라고 부른다.(문화원지-참조)
발귀현 도착 직전 좌측에 인가가 보여 잠시 내려가 수도에서 물을 보충하고 올라옵니다. 새벽녁이라 인기척이 없어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리고....
매봉산 아래로 비승전차사격장이 있고 신새벽부터 쿠릉쿠릉 전차 기동하는 소리가 들리네요.
♤ 발귀현(發歸峴/285m)/ 홍천군 남면-양평군 청운면
발귀너미고개, 발귀고개, 새터고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洪川郡志에 의하면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신대리를 잇는 도계(道界) 역할을 하는 고개로 고려말 王氏들이 신대리 동가른다리로 피난와 살면서 날마다 이 고개까지 와서 망을 보다가 저녁이면 되돌아갔다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개에는 군사용 도로가 지난다.
절벽바위와 부부바위를 지나 전망바위에 서보니 오늘은 전망이 그다지 보잘게 없습니다. 갈기산 정상은 까탈스런 암봉으로 삐죽 솟아있고...
발귀현에서 갈기산까지 약 4.2km, 갈기산에서 신당고개까지 약 3.6km 입니다.
♤ 갈기산(葛基山/685.4m)/ 홍천군 남면-양평군 청운면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에서 강원도 홍천군 남면 방향으로 이어지는 44번국도 동쪽에 솟아있는 산이다. 『해동지도』에서 갈기산으로 짐작되는 갈기리산(乫其里山)이 동북쪽에서 산세를 뚜렷이 하며 표현되어 있으며,『광여도』에는 홍천과의 경계에 있는 신당현(新堂峴) 아래 갈기리산이 묘사되어 있고 『조선지지자료』 상북면 산명에는 갈기산(葛箕山)으로 신당리에 수록되어 있다.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상 갈기산의 한자 표기는 칡 "갈"자에 터 "기"자를 쓴 "葛基山"이지만 과거에는 일어 날 기(起)자를 썼다고 한다. 정상 주변 곳곳에 바위가 울뚝불뚝한 암봉이고 사면이 가파르다. 옛 기록에는 감물악(甘勿岳)이라 불렀다. 악(岳)이 들어가는 산은 거칠고 신령스러워 누구에게나 정상을 쉽게 내 보이는 산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후 갈기산은 부동산(不動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갈기산 정사각대리석 정상석에는 갈기산 표기 옆에 부동산이라고 표기를 해 놓았다.
옆으로 임도가 따라다닙니다. 여기서 산타는영혼님 띠지가 이끄는 대로 임도를 따르니 플라스틱 하수관이 간간이 묻혀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 500cc 보충합니다. 항상 물이 있는건 아니고 가뭄에는 구경할 수 없겠지요.
♤ 용화사(龍華寺)
용화사(龍華寺)는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에 있는 사찰로 원래의 사찰명은 ‘청운사(靑雲寺)’였으나 ‘용화사(龍華寺)’로 개칭하였다. 최근에 대웅전,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 보현당, 수월당 등을 새로 지었으며 지장보살상 및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는 등 큰 규모로 중창하였다. (031-772-4447)
폐휴게소 내부를 들여다보니 아쉬운 대로 비바람을 피할 장소가 될성 싶네요. 시원한 물도 마시고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먹을 수 있음 좋겠구만은....
♤ 신당고개(神堂峙/225m)/ 홍천군 남면-양평군 청운면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삼성리에서 강원도 홍천군 남면으로 이어지는 도계로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에서 설악산 한계령 넘어 양양군 양양읍으로 이어지는 44번국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남쪽은 양평군 청운면 삼성리, 북쪽은 홍천군 남면 양덕원으로 옛날 양덕원(陽德院)이라는 원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리(三聖里)는 원래 지평군 상북의 지역인데, 1908년에 양평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폐합 조치에 따라 유곡리, 신당리, 고론리 일부를 합쳐 성인을 모신 신당(神堂)이 있으므로 삼성리라 불리게 되면서 청운면에 편입된 곳이다. 삼성리의 유래가 서.박.남 세 성씨만 살았던 곳이란 일설(一說)도 있으나 신빙성은 희박하다. 신당(新堂)은 유곡 동북쪽의 마을로 당집이 있었다. 44번 국도 옆으로 폐점한 GS칼텍스 주유소와 홍천휴게소가 흉물스럽다.
신당고개를 넘어 곧바로 철계단으로 올랐는데 칡넝쿨이 가로막아 진행이 힘들더라는... 여기 능선상 마루금으로 500m를 오르는데 땀 삐질했습니다.^^;; 조금 아래에 들입목을 찾아 오르심이 고생이 덜한 줄로 아뢰오~
반바지님의 수고로 그냥 지나칠 장소를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정성이 깃든 표찰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 수고와 배려심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지납니다.^^
鳥木峴(새나무고개)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삼성리 정자골에서 강원도 홍천군 남면 화전리로 넘는 고개로 넓은 임도가 지나며 새남터고개 또는 조목현(鳥木峴) 이라고 부른다. 1918년 발행 옛지도에도 鳥木峴(새나무고개)로 표기되어 있다.
특별한 표식은 없지만 통골고개부터 강원도를 벗어나 경기도로 접어듭니다. 트랭글 통골고개 뱃지는 이 장소를 약간(80m?) 지나서 들어오네요.
♤ 통골고개(通谷峴, 401m)/ 도계(강원도, 경기도)
강원도 홍천군 남면 굴업리와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여물리에 걸쳐있는 고개이며, 넓은 공터가 있다. 이정목과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Y자 임도가 있다. Y자 임도중 좌측은 능선으로, 우측은 임도로 가는 길이다. 강원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지나온 한강기맥 마루금이 통골고개에서부터 강원도 홍천에서 완전히 벗어나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내로 접어드는 경계지점이다. 이정표(←밭배고개 2.0 신당고개 6.7→)가 있다. 오대산 두로봉에서 출발하여 132.7km에 걸쳐있는 홍천군은 대한민국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지역이다. 이곳 통골고개에서 명성천이 발원하여 하천을 경계로 강원도와 경기도로 나누어진다.(행정구역은 2道 2郡 2面 5里) 동서쪽으로 흘러내리며 좌우측 지류를 합류한 후, 산음천과 합류하여 중방대천으로 유입된다. 중방대천의 제1지류인 명성천 유역의 형상은 수지상이며 유로의 형성이 중심부를 관류하고 있다. 서측 소리산의 가선이 통골고개, 매봉산, 두룡산, 종자산들과 이어져 타 유역과의 분수계를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이 임야로 경사가 급한 편이고 하천 연안을 따라 농경지가 분포되어 있다.
임도를 따르기보다 마루금을 고집하니 몇 미터 봉이었더라? 531m였던가?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네요. 산악오토바이가 산길을 움푹 패여놓아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이제 끝이 보입니다. 잠시 시멘트 도로에 누워 노란 하늘 한번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고....
물은 700cc남았네요. 500cc만 더 있었더라면, 조금 아껴 마셨더라면 하는 소심한 후회가 ㅎㅎ~
♤ 밭배고개(田拜峴/340m)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부안리에서 명성리나 대명스키장으로 넘어다니는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상배치(上胚峙)로 표기돼 있고 1918년 발행지도에 전배현(田胚峴)으로 표기돼 있어 전배현(田拜峴)이라고도 불리우며, 사통팔달로 뚫린 MTB 자전거 도로와 임도가 거미줄처럼 보이는데 70번 지방도였으나 이 고개 아래로 뚫린 터널로 인해 옛고개가 되어 버렸다.
막바지라 꽤 힘이 듭니다. 전위봉까지 2km, 전위봉에서 정상까지 1.5km... 정상 직전에 전위봉을 올라서면 임도와 마주칩니다. 마지막 0.4km 아주 길게 느껴지는 송이재봉 오름...
♤ 송이재봉(670m)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행소리와 명성리 사이에 솟은 산이다. 6.25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능선이어서 곳곳에 참호 흔적과 녹슨 탄피가 보일 정도이다. 백두대간상의 두로봉(1,422m)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쳐 오대산, 계방산, 운무산, 대학산, 오음산, 금물산, 갈기산, 용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수역을 가르는 능선이다. 안내표지목(밭배고개 3.5km ← 송이재봉 → 소리산1.9km)이 설치되어 있는 송이재봉에서 좌측의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간 후 나무계단이 설치된 절개지에서 계단을 통해 임도로 내려선다. 능이, 송이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송이를 채취하기 위해 넘어다닌 산이라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야호호!!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요.^^ 다 왔다는 생각에 웃음소리가 절로 나네요.
송이재봉에서 소리산까지 1.9km, 소리산에서 비솔고개까지 1.4km.... 저 소리산 푯말이 원래는 폐산불초소 기둥에 붙어 있었다는데 누가 이정표에 잘 갖다 붙여 놓았습니다.^^
♤ 소리산(658.1m)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에 소리산이 두개가 있다. 하나는 소금강이라 불리우는 석산리 소리산(479m)이고 다른 하나는 한강기맥 경로인 비슬고개 북동쪽의 소리산(657.6m)이다.
양평군 단월면 항소리와 산음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석산리에 있는 소리산에 비해 풍광은 덜하지만 높이는 이쪽이 훨씬 높다. 무명봉으로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소리산으로 불리워지게 됐으며(큰소리산) 정상에는 철재로 만든 산불감시초소가 녹슬어 훼손되어 있고 이정표 삼각점이 있으며 표지목이 서있다. 예로부터 산 속 바위벼랑에 수리가 서식했다고 하여 수리산으로 부르다가 소리산으로 바뀌었다. 석산리와 산음리 사이에 용소계곡이 있고, 매년 3월 석산리 문레울에서 '소리산 고로쇠축제'가 열린다.
많이 와본 곳이죠. 예전엔 정자가 있었다는데... 그런데 지금은 비를 피할만한 장소가 없네요.
벤치는 군데군데 보이고, 요 페르골라가 유일한 구조물이군요. 버스 정류소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향소리쪽으로 한참 내려가야 지붕있는 버스정류소가 있습니다.
♤ 비슬(솔)고개(非率峴/380m)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향소리 비솔마을에서 산음리 무푸레골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345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항소1리 노적봉 아래에 비솔마을이 있다. 비솔마을에서 산음리 무푸레골로 넘어가는 비솔(非率)고개는 풍수지리상 용의 목에 해당한다고 한다. 산음리는 용문산 북동쪽의 응달이 된다하여 산음리(山陰里)라 하였다고 한다.
3,4구간을 한꺼번에 연결한다면 단월면쪽으로 2.5km 내려서면 용목쌍가마 불한증막이 있습니다. 지금은 숙소로만(하루 15,000원) 이용 가능하답니다. 목욕가능, 길건너편 음식점 있고.... 편의점은 확인 못했습니다.
비솔고개에서 도일봉갈림길 능선까지 올라서는데 바람이라곤 1도 없고 땀을 제일 많이 흘렸습니다.
♤ 도일봉(道一峰, 864m)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향소리와 용문면 중원리, 망원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다. 용문산(1,157m)의 지봉(支峰)으로 주봉과는 조금 떨어져 있으며, 중원산(中元山) ·백운봉(白雲峰) 등과 같은 맥을 이룬다. 서북쪽 방향으로 싸리재가 있고, 중원계곡과 중원폭포가 가깝다. 골짜기의 물은 용문면과 단월면의 남쪽을 감아돌아 흑천(黑川)과 산대천(山垈川)으로 흐르며 유역에 경작지를 만들고 북한강 지류인 수입천(水入川)과 문호천(汶湖川)을 만나 남한강에 합류한다. 도일봉은 풍수지리적으로 용의 어깨쪽에 자리잡은 봉우리며 풍부한 수량(水量)의 담(潭)과 소(沼)를 이루며 사시사철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고 있는데, 동으로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송이재봉이 있고, 서쪽으로는 경기 제일의 명산이면 한강기맥이 마지막 기를 세워 솟구쳐 올린 용의 몸통에 해당하는 용문산이 위치하고 있다.
♤ 괘일분맥(卦日分脈)/ 용문도일분맥
도일봉갈림길 이정표에 싸리봉(811.8m)이라 적혀있지만 싸리봉은 2분여 더 올라가야 한다. 싸리봉 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도일봉으로 가는 괘일분맥이다. 괘일분맥은 한강기맥 비솔고개를 지나 싸리봉 직전 삼거리 갈림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도일봉(864m), 괘일산(469.3m), 두리봉과 인자봉을 지나 흑천에서 맥을 다하는 길이 18.6km의 양평지역 마루금이다.
첫번째 만나는 싸리봉 이정표
싸리봉 이정표가 가까운 거리를 두고 두군데나 있습니다. 나중에 이정표(아래쪽)가 진짜라는...
♤ 싸리재
싸리재는 중원폭포 북쪽에 있는 고개로, 양평 용문면 중원리와 신점리에서 단월면 향소리와 산음리로 넘는 고개이다. 비솔고개에서 2.1km 지점이며 한강기맥은 직진의 중원산 방향이다.
야간이라 전망은 없고, 산음리 야경만 구경하고 갑니다. 처서가 지나서인지 차가운 기분이 들고 바람까지 약간 불어주면 천국같은 기분도 듭니다.
♤ 단월산((丹月山,775.1m)
단월산은 '밝은 달이 비친 정자의 마을'이라는 뜻의 단구월사(丹丘月謝)에서 지명이 유래한 단월면과 용문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싸리재를 지난 지점에 있다. 단월산 정상 아래 소나무 조망처에서 우측으로 단월면 산음리 봉미산이 건너다 보인다.
♤ 중원산갈림길(770m)
아무 생각없이 직진하다 대형 알바를 불러오는 곳입니다. 직진은 중원산으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용문산은 우측으로 크게 틀어서 진행해야 합니다. 날선 바위가 많이 나오면 중원산가는 리지 능선입니다. 중원산까지 4km이니 다녀올려도 부담스런 거립니다.^^
된비알을 올라서서 천사봉 직전 헬기장 부근인데, 헬기장이 용문면, 옥천면, 단월면의 경계가 만나는 삼면봉입니다. 100m 될려나? 배낭 놓고 헬기장 지나 천사봉에 다녀와야겠죠.
비솔고개에서 용문산 코스에는 여기 천사봉 오름이 제일 빡십니다. ㅋ
♤ 폭산(暴山, 992m)/ 문례봉(問禮峰)
폭산갈림길 헬기장이 삼면봉으로 양평군 단월면과 용문면, 옥천면의 경계지점이다. 정상으로 150m 이동하면 폭산이다. 폭산은 문례봉으로도 불리는데 양평군 단월면과 옥천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문례(問禮, 물례)는 새마을 동북쪽 마을로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한다. 그러나 정상석에는 해발 1,004m로 표기하고 천사봉이라 명명하고 있는데, 산림청과 산음자연휴양림에서 원래의 이름과 다르게 좋은 이름을 찾다가 임의로 산 이름을 작명한 듯하다. 온라인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산 이름 없이 그냥 1002.5m로 표기하고 있고, 개념도 상에도 992m로 기록하고 있다.
♤ 장락단맥(長樂短脈)
폭산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이 단맥은 폭산(문례봉) 아래 헬기장에서 분기하여 봉미산(鳳尾山:856m), 보리산(나산, 627.3m), 놀미고개, 장락산(長樂山:629.5m), 왕터산(411m)을 거쳐 홍천강(洪川江)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21km의 단맥이다.
용문봉 갈림길을 지나 올르다가 군부대 울타리로 직진하지 않고 옆으로 우회하여 용문사에서 올라오는 주등산로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빠지기 직전 우측에서 물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립니다. 이게 웬일이지 실컷 마시고 보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에서 물을 구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정상 인증샷을 찍고...
정자에서 쉬어가기로 합니다. 정상에서 한숨 자기 위해 해발고도와 바람을 감안해 온도를 짐작하니 15도 정도.... 배낭카바와 긴팔, 쟈켓, 겨울양말을 준비했는데 무겁더라구요.^^ 잠을 재촉하기 위해 동행한 삘참을 오름길에 한모금 마셔보니 술맛이 아니라 달달한 물맛이더군요. ㅋ
늦게까지 잠이오지 않아 예정보다 조금 늦게 기상했습니다.
석산리 좌측으로 홍천강 모곡유원지 쪽입니다.
산음리 지나 석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모곡, 우측으로 가면 명성리 홍천비발디 방향입니다.
동쪽방향이네요. 산음리 봉미산이 우뚝합니다.
맨 앞쪽이 용문봉입니다. 중간 우측으로 중원산으로 빠지는 줄기.... 도일봉 위로 해가 솟았습니다.
해가 뜨는 우측으로 아련한 갈기산과 그 뒤쪽 성지지맥이 보이는지요? 그렇담 1.0 천리안에 해당합니다.^^
아래 마을이 용문사가 있는 용문면 신점리입니다. 바로 앞쪽이 가섭봉 개방하기 이전에 정상 역할을 하던 전망대이구요.
♤ 용문산(龍門山, 1157m)/ 용문면과 옥천면의 경계
양평(楊平) 북동쪽 8km, 서울 북동쪽 42km 지점에 위치하는 산으로, 많은 봉우리들과 산세가 웅장하고 골이 깊은데다 철마다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예로부터 '경기의 금강산'으로 불렸으며, 산림청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 중의 한 곳으로 경기도 화악산(1,468m), 명지산(1,253m), 국망봉(1,167.2m) 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용문산 산체(山體)는 동서 8km, 남북 5km에 걸쳐져 있고, 용문산을 주봉으로 하여 동북동쪽의 도일봉(道一峰, 864m), 동쪽의 중원산(中元山, 800m), 남서쪽의 백운봉(白雲峰, 940m), 서쪽의 유명산(有明山, 864m), 등 지봉(支峰)이 용립(聳立)하여 연봉을 이루고 있다. 정상은 평정(平頂)을 이루고 능선은 대지(臺地)가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원산과의 중간에는 용계(龍溪),조계(鳥溪)의 협곡이 있고 그 사이에 낀 대지는 수 100m의 기암절멱 위에 있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북쪽은 완경사, 남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첩첩이 쌓인 암괴들이 나타나며 깊은 계곡과 폭포도 볼 수 있고 용문산 북서 일대는 고도 700~1,100m의 약 4㎢의 고위평탄면이 나타난다. 남쪽 산록 계곡에는 용문사(龍門寺), 상원사(上院寺), 윤필사(潤筆寺), 사나사(舍那寺) 등 고찰이 있고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이 260㎡나 된다. 또 이곳에는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正智國師浮屠) 및 비(碑) 2기가 있다. '용이 드나드는 산', '용이 머무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용문산의 원래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라고 전해온다. '미지'는 '미리(彌里)'의 옛 형태로, '미리'는 경상, 제주지방의 '용'의 방언으로, '용'이 옛말인 '미르'와도 음운이 비슷하다. '미지산'에서 '용문산'으로 지명이 바뀐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용이 날개를 달고 드나드는 산이라 하여 ‘용문산’이라 칭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정상에서 장군봉(1045m), 함왕봉(889m), 백운봉(940m)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줄기는 마치 한 마리 용이 꿈틀대며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용문산은 사방 100㎞가 막힘 없이 조망되는 천혜의 요새여서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고, 6·25 당시 용문산 전투로도 유명한 곳이다.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17일부터 21일까지 6사단 용문산연대 전 장병이 중공군 제2차 춘계공세에 결사항전으로 맞서 제63군 예하 3개 사단(2만여 명)을 격멸한 전투로, 미 육군사관학교 전술교범에 사주방어의 성공사례로 기록돼 있을 정도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승전사’로 꼽히고 있다. 경기 가평군 설악면에 용문산전투 가평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어 매년 전승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용문산 ‘가섭봉’은 예로부터 용문산내 ‘석가봉’, ‘아난봉’ 등과 함께 ‘용문산 불교 3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가섭봉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연꽃을 대중들에게 보였을 때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미소를 보였다는 염화시중 미소(拈華示衆 微笑)의 고사에 나오는 ‘가섭존자’를 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일대의 등산로가 폐쇄됨에 따라 지도상에서도 ‘가섭봉(迦葉峰)’이란 이름이 잠시 사라졌다가, 지난 2007년 11월 정상이 일반에게 개방되면서 서울 근교의 등산코스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가섭봉’과 ‘가섭치’란 명칭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가섭치는 온라인 국지원 지도에는 가협치(加狹峙)로 표기되어 있는데, 가섭치와 혼용되고 있다.
용문산을 울타리 밑으로 우회해서 돌아가는데 군부대에서 기상나팔소리가 들리네요.
장군봉 왕복은 생략하고 여기에서 곧바로 배너미로 내려섭니다.
바로 아래쪽은 사나사계곡입니다. 저 멀리로는 양평읍내...
용문산 뒤쪽 군사도로로 내려서는 곳에도 물이 흔하게 흐릅니다.
군부대로 들어가는 군사도로입니다. 여기서 바라보이는 전방의 배경이 용문산전투현장입니다.
장낙산, 울럽산, 보납산, 나산.... 물론 호명산도 들어갑니다. 상천역으로 내리는 호명호수 정상부에 6.25전사자 유해발굴지가 있다는거 아시죠?
중간 활공장 약간 우측으로 둥그스름한 마유산(유명산)입니다.
♤ 용문산전투(1951. 5. 17.~21.)
양평이 용문산은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웅장한 봉우리를 자랑한다. 산세가 화려해지는 여름과 가을이 되면 수많은 등산객들이 용문산을 찾는다. 주봉의 남동쪽 중턱에 위치한 용문사와, 경내에 위치한 60미터 높이의 국내 최고(最古)의 은행나무는 산경에 품격을 더한다. 과연 '경기의 금강산'이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는 이곳은 한때 전쟁의 화마가 몰아닥친 곳이기도 하다.
1951년 5월 17일, 중공군제19병단의 3개 사단은 북한강을 건너 용문산 일대를 방어하던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하였다. '5월 공세'라 불리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의 일환으로, 강원도 전방을 방어하던 국군 6개 사단을 일시에 격멸하여 경기도에 집중된 미군을 고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용문산을 향한 중공군의 공세는 경기와 강원도의 경계를 끊어 미군이 국군을 증원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더구나 제6보병사단은 불과 한 달 전인 4월 24일,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맞아 패주한 바 있었다. 장병들은 수치심을 느끼며 설욕의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훗날 '용문산전투'로 기억될 싸움의 시작이었다.
용문산에는 제6사단의 주력인 제7연대와 제19연대가 나란히 산의 북사면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배치로 미루어 '당시 사단의 주방어선은 용문산에 설정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어진 며칠 동안의 전투는 그보다 북방인 청평호에서 이루어졌다. 사단의 나머지 1개 연대인 제2연대는 다른 부대보다 북방에 배치되어 중공군의 북한강 도하를 막고자 하였다. 연대의 주력은 강물을 청평댐(1944년 완공)으로 막아 형성된 청평호를 내려다보는 울업산(지금의 설악면 사룡리)과 미사리 등지에 배치되었다. 17일, 중공군은 곳곳에서 도하를 시도하였다. 제2연대는 치열한 교전으로 중공군의 시도를 번번히 좌절시켰지만, 그 와중에 연대의 좌우를 지키던 인접부대들이 후퇴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제2연대는 청평호변을 지키는 유일한 부대가 되어버렸다. 전황을 지켜보던 지휘부와 미군 고문관들은 제2연대가 괴멸되거나 포위당할 것을 걱정하였지만, 정작 연대원들은 사창리의 굴욕을 모두 씻으려 결심한 듯 결사의 각오로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단의 주방어선에서 돌출된 제2연대에 중공군의 공세가 집중되었지만 방어는 흔들리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지 당황한 것은 도리어 중공군 측이었다. 그들은 이토록 강력한 방어를 펼치는 부대가 있다는 것은 곧 여기가 국군의 주방어선임을 의미한다고 오판하였다. 19일이 되자 중공군은 2개 사단의 주력을 제2연대에 집중하였고, 이에 아군은 연대를 살리기 위해 5개 포병대대와 근접항공지원을 총동원하여 이들을 지원하였다. 20일에는 진지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연대는 끝끝내 진지를 사수했다.
20일 05시, 중동부전선에 감행된 중공군의 주공이 둔화되자 제6사단의 공세로 전환하였다. 그동안 국군 주력과 싸우고 있다고 착각한 중공군은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사단의 나머지 제7,19연대와 맞닥뜨리며 도리어 포위를 당할 위기에 빠져 서둘러 퇴각하였다. 이에 사단의 좌우에 있던 미 제7,24사단은 기동부대를 꾸려 도주하는 중공군을 춘천 지암리 일대에서 포위하였다. 곧이어 제6사단은 포위망 내부를 강타하여 수천 명을 생포하였다. 중공군의 군단급 공격을 홀로 막아낸 제2연대, 승리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제6사단 장병 전체의 노력으로 빚어낸 대승이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지금의 '용문산 전적지'는 대부분 실제 전투와 큰 관련이 없는 곳에 놓여있다. 설악면 천안리에 위치한 '용문산전투가평지구전적비'는 당시 격전이 벌어진 청평호변에서 약 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용문면 광탄리에 위치한 또 다른 '용문산지구전투전적비'는 전투 당시 사단지휘소가 위치한 곳과 근접하지만 이 역시 '전투 장소'라고 부르기엔 어패가 있다. 제2연대의 피땀이 가장 많이 배인 울업산은 옛 신선들의 설화가 전해지는 훌륭한 등산코스로만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장병들이 보았을 전장의 지형을 다시 보고 싶다면 이곳을 방문해야 할 것이다.
6.25전쟁이 한창인 1951년 5월, 국군 제6보병사단이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과 가평군 화야산 일대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3개 사단(63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의 공세를 격퇴하고 패잔병 무리를 춘천 지암리를 거쳐 화천 저수지(현 파로호)까지 쫓아가 섬멸한 대승을 뜻한다. 6.25전쟁 초반 1년간의 치열했던 전면전을 마무리지은 전투로, 후술하겠지만 6.25 전쟁은 이 전투 이후로 전면전에서 전선교착전으로 전투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 중략
제2연대의 시의적절한 축차진지 변경과 용맹한 고수방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2연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 군단급 부대에 맞서 북한강변의 최초진지부터 근접전투를 벌이면서도 제때 몸을 빼내 축차진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는 대대별로 사주방어를 실시하여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수 차례나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해냄으로써 중공 제63군의 주저항선 오인과 예비대 조기투입이라는 치명적인 패착을 유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거의 같은 시기 벌어진 현리전투에서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그대로 무너져 궤주한 한국군 제3군단과 비교해보면 2연대는 6사단은 물론 한국군 전체의 명예를 지켜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미 제9군단과 공군의 엄청난 화력지원 역시 승리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6사단 제27포병대대 외에도 인접사단 포병과 군단포병이 제2연대 방어구역 전면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쉼없는 포격지원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2연대라도 9:1 이상의 수적 열세를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중공군 예비대 제189사단은 19일 야간에서 20일 새벽 사이 초월공격을 실시하던 도중 군단포병의 맹렬한 포병사격에 휘말려 주저항선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주방어지대 전방에서 돈좌되었다. 미 공군의 근접지원은 야간에는 운용에 제한이 있었으나 주간에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중공군이 감히 공격이나 기동을 제대로 감행하지조차 못하도록 만들었다. 전투 직전 6사단 책임구역 내 최대 자연장애물은 북한강이었으나, 강을 따라 주저항선을 설정할 경우 북한강 북쪽의 적 고지에 지원부대의 움직임이 노출되는만큼 사단은 군단 방침에 따라 용문산 일대의 고지에 주저항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사단장 장도영장군은 북한강을 활용하여 중공군 공세를 둔화시키기 위해 제2보병연대에게 사단의 주 방어선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북한강변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럽산, 3대대는 (후방에 위치한) 353고지를 맡았다. 사실 밑의 요도에서도 보이듯 당시 군단 명령에 의거해 인접 사단도 1개 연대를 경계부대로 전진시켜놓았기에 이 자체는 특이한 일이라 하기 어려웠다. 경계부대 철수를 불허하고 최후에 고수방어를 실시토록 한 점만 빼면. 장도영 장군은 적 공세가 시작되고 최초 진지에서 버티기 어려울 경우 427고지와 나산의 축차진지로 철수한 뒤, 마지막으로는 제2연대 전 부대가 427고지의 최후진지에서 전면방어를 수행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연대 하나를 위험천만하게 돌출시켰다는 점 때문에 미 육군 고문관도 주저항선 이남으로의 완전 철수를 권고했으나 하여간 장도영 장군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18일 저녁. 중공군의 공세가 개시되자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럽산에서 밤새 도강하는 중공군을 강타하고 19일 주간 포병과 미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353고지의 3대대 뒤로 후퇴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그런데 여기서 중공군으로서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전방에서 밀려나던 2연대 1, 2대대가 주저항선 뒤로 빠지지 않고 3대대 뒤의 427고지와 나산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미합중국 공군과 인근의 7개 포병대대(한국군 2개, 미 육군 5개)가 19일 하루에만 포탄 3만발에 달하는 화력을 무지막지하게 퍼부어대자, "이렇게까지 방어가 탄탄한 걸 보면 한국군의 주저항선이 틀림없다!"고 오판한 중공 63군 지휘부는 군단 예비인 189사단까지 가세시킨 3개 사단의 총 공세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어진 중공군의 포위공격에 제2보병연대는 연대 지휘소가 피습, 연대 지휘통제가 두절되고 1대대장이 수류탄 폭발로 의식불명에 빠진 사이 1대대가 나산에서 밀려나 남쪽의 마치고개에서 간신히 병력을 수습하는 등 위기상황에 직면했지만, 사전에 선정된 축차 진지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싸는 전면방어(全面防禦)를 실시하고, 이를 포병과 공군이 맹렬하게 지원함으로써 중공군의 공격기세도 점차 둔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사단 본부와 다른 연대들은 2연대의 외로운 혈전을 애타는 심정으로 주시하며 한시라도 빨리 공격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6사단 사령부는 물론 미 9군단도 섣불리 반격을 지시할 수 없었다. 이는 사단 책임구역 내 중공군 공세는 군단 전체를 선형으로 잇는 주저항선에 도달하지조차 못한 상황이었고, 6사단 본대가 주저항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차상급부대인 미 8군 차원에서 야전군 전체가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지침이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사단 사령부의 어떤 장교는 안타까운 나머지 지휘소 천막 밖으로 나가 동쪽 하늘을 향해 어서 날이 밝으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 때 주공을 동부전선으로 지향해 5월 공세를 실시한 중공군은 현리전투에서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대관령에서 한국군 1군단이, 벙커고지를 비롯한 한계 전투에서 미 2사단이 사투 끝에 견부진지를 굳건히 고수하자 돌파구를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고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10시간만에 100km을 달려와 평창 속사리에 전개한 미 8군 예비대 미 3사단이 돌파구 첨단 봉쇄에 들어간 19일부터는 중공군 5월 공세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음이 분명해졌다. 이에 미 8군은 20일을 기해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에서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실지 회복을 위한 제한적 역습이 아니라 동부전선의 적 주력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야심찬 공격계획이었다. 적의 군단급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전력에 큰 손실을 입지 않은 6사단 역시 이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애타게 공격 명령을 기다리던 6사단은 즉각 공격계획 수립에 착수, 20일 02시 각 예하대에 약식 명령을 하달했다. 19일 야간부터 20일 새벽까지 네 차례나 이어진 중공군의 파상공세가 결국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 20일 오전 5시, 용문산 북방 고지군의 주저항선에서 대기중이던 6사단의 나머지 연대들인 제7, 제19 보병연대가 반격을 개시했다. 한편 2개 연대급의 뒤치기를 당한 중공군들은 이를 적의 대대적인 포위 내지는 반격이라고 오판했고, 직후 중공군 3개 사단은 이들에게 쫓겨 패주하기 시작했다. 오후 7시에는 사흘간의 분전 끝에 427 고지의 최후진지에 집결한 2연대와 공격중이던 19연대가 연결에 성공하면서 용문산 방어전은 6사단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이제 패주하는 중공군 63군을 추격해 섬멸할 차례였다.
배너미를 향하는 길에 설매재휴양림 사나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을 지납니다.
가게는 열지 않았지만 그 앞에 물이 가득 담긴 통만으로도 만족합니다.^^
♤ 배너미고개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서 가평군 설악면 가일리로 넘나드는 고개로, 배넘이고개는 이곳 사람들은 설매재(雪梅峙 610m), 주유현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설매재는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매화가 폈다는 뜻, 많은 눈이 내려 눈꽃이 피면 매화가 핀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라 한다. 현지 주민들은 670고지라고 부른다. 아마도 근처에 668m봉이 있어서 6.25전쟁 중에 그리 불려진 듯하다.
일반적으로 "배너미골(舟月里, 舟越里)"이나 배너미고개(재)는 전국에 널리 분포된 지명으로, 전설 대부분은 산이나 언덕으로 배가 넘어 다녔다는 내용이다. 해안가나 하천 변의 내륙 쪽에 위치한 마을에서 지대가 낮은 곳은 만조시나 홍수가 날 때 물에 잠겨 배너미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볼 때 물이 찬다고 하여 배가 드나들었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곳도 있는데, 이는 배너미라는 지명이 반드시 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즉 지형이 배의 모양을 하고 있거나, 풍수적으로 배형을 하고 있다(行舟形)는 속설에서 기인하기도 하며, 배가 가지는 상징성, 즉 불교적 열반이 심성이 깃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이를 통해 마을이 안정되고 마치 피안의 경지처럼 평안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배너미골은 배나무골과 음차가 크지 않아 배(梨)가 많이 나는 지역을 지칭하다가 음운변이로 명칭이 변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배골, 배나뭇골, 배남골, 배낭골, 배내, 배내미로 표기되는 배나뭇골의 명칭은 변이의 가능성이 있다. 특히 예에서 보는 배내미와 배내는 각각 배가 다니던 곳과 배가 나던 곳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로 정착되어 사용되고 있다.
기맥길 옆으로 영화 "관상" 등 촬영장소인 셋트장이 있다고 사진을 많이 올려주시던데... 나무가 우거져 직접 보진 못했어요.
♤ 대부산(743m)
유명산 200m직전 소구니산으로 빠지는 갈림길입니다.
유명산에 이른 시간인데 젊은 등산객 두명이 있네요.
이곳 유명산에서 선어치고개갈림길까지의 한강기맥이 양평군과 가평군의 군계입니다.
유명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백운봉으로 향하는 용문산 줄기입니다.
농다치고개에 포장마차가 보입니다.
주인에게 통화하니 요즘 문을 열지 않는다고... 물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지하수가 나오는 수도가 있다는 대답을 듣고 갔습니다.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집니다.
머리도 감고 마음같아선 팬티만 입고 주저않고 싶더군요. 한풀 꺽어진 여름인데도 목에 감은 면수건을 짜면 물인지 땀인지...
농다치고개에서 잠깐 올라서니 이정표가 반깁니다.
♤ 농다치고개(籠多峙, 420m)
농다치 고개는 경기도 양평군과 가평군 경계인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산189번지 새말에서 양평시내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양근(양평)으로 시집가는 신부가 험한 고갯길에 인부가 지고가던 농이 나무에 부딪쳐 부서질까봐 '농다칠라'라고 한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전한다. '농다치'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중기 때 양평군 신복리에 최씨 성을 가진 마을 향리가 고개 넘어 가평군 방일리에 사는 박씨에게 무남독녀 외동딸을 시집보내게 되었다. 혼수로 딸이 태어날 때 심었던 오동나무를 베어 솜씨 좋은 목수에게 부탁하여 농을 제작하여 농 속에 이불과 살림살이를 챙겨서 머슴인 돌쇠와 돌쇠 아버지의 지게에 지어 보내었다. 아씨를 짝사랑하며 숱한 밤을 가슴앓이 해오던 어린 머슴, 돌쇠는 고개마루에 도착해서는 짝사랑 해온 여인에 대한 사랑의 표시인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연인의 해코지인지, 지고 가던 오동나무 농을 도로가 비좁다는 핑계 삼아 도로 옆 바위에 쿵쿵 부치며 눈물과 콧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운반하였다. 뒤따라오던 돌쇠 아버지가 보다 못해 “애야 농 다친다! 농 다친다!”하고 주의를 준 것이 '농다치고개'라는 향토명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농다치"란 시집가는 신부의 농을 지고 고개를 넘어가면, 아무리 조심하여도 산모퉁이에 부딪치어 농이 다쳤다고 하여 "농다치"고개라고도 하였다니, "서너치" 고개나 "농다치" 고개가 모두 좁은 것은 물론,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많은 선남선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 신접살림 가구를 지고 오고 간 것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시집가는 신부의 부푼 꿈과 희망이 묻어나는 지명이다. "동국여지지" 양근군에 "노다령(勞多嶺)이 군 북부 이십리에 있고 노다치(勞多峙)라고도 칭한다."는 내용이 있다. 다른 자료에는 농다치현(農多峙峴)으로 표기되어 있거나 농현(籠峴)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 노루목(獐項/450m)
이 곳을 노루목(또는 노루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 산자락을 넘어가는 고개가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옛 문헌에는 ‘노루 장(獐)’자와 목 항(項)‘자를 써서 한자어로 장항(獐項)이라고 했다. 이는 옛 지리지에 “용산 아래 노루목 위에는 큰 명지(좋은 땅)가 있어 3정승·8판서가 나올 자리”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노루목을 ‘노루미’라고도 부르는 것은 노루가 많이 사는 산이란 뜻이지 목이 잘린 노루 대가리가 꼬리처럼 볼품없이 되어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 옥산(玉山, 580m)
옥산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와 서종면 서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의향(義鄕)의 고장인 옥천의 진산으로 경기도 양평군 최고봉인 용문산을 모산(母山)으로 하는 산이다. 산세가 부드러운 유명산과 소구니산 줄기와 청계산 사이에 끼여 있고 능선이 완만하여 위험지대가 없는 산으로 가족 등산에 매우 호평 받는 산이기도 하다. 산아래 한화콘도가 자리하고 있어 콘도에 머무는 사람들이 가볍게 오르기에 적합하다.
♤ 말고개(馬頭峙, 430m)/ 서차남고개
말고개는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새말에서 서종면 서후리 서차남을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정상은 말머리봉(馬頭峰, 498m)으로 노거수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으며, 옛날 民草들이 다녔을법 하지만 지금은 한강기맥을 하는 맥꾼이나 지나다니는 잊혀진 고개로 남아 있다. 말머리봉 역시 한화리조트에서 옥산과 연계해서 산행하는 코스로 제법 많은 등산객이 지난다.
몸에서 시큼한 식초 냄새가 얼마나 심한지... 초파리도 귓가에 욍욍 거리지만 잠시 앉아 쉴라치면 어디서 조그마한 산모기가 떼거지로 나타나 쉬지도 못하게 합니다. 어이.. 저리가 저리가 조옴~~ ㅋㅋ
546m 무명봉/ 삼면봉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의 삼면봉)
철탑이 있는 546m봉에서 약간 내려서 급우틀하는 지점으로 말머리고개와 청계산의 중간 정도이며 청계산 정상 3.1km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옹기종기 사람 살아가는 마을이 넓게 내려다 보입니다. 국수역에서 올라오는 중동마을입니다.
여기서 청계산까지 250m가 만만하지 않으니 잘 쉬어야 합니다. 쉬어가기 좋은 명당터입니다.
♤ 된고개(高峴 412m)/ 옥천면과 서종면의 경계
된고개는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 서차남에서 양서면 중동리 고현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고현, 된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넓은 공터가 있으며 고사목이 많이 보이는데 속칭 제치레미(제칠암)라고도 부른다. 된고개는 양평군 양서면 중동리 된재 마을에서 제치레미로 넘는 고개로 고개가 높아 오르기 힘들다는 뜻으로 된고개라고 불리웠다. 고갯마루에는 이정목 산불, 산악사고 119 안내목이 서 있으며 이곳부터는 좌측은 옥천면계를 벗어나 서종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양평 청계산 세번째 오릅니다. 포천 청계산도 서너번 쯤 갔나봐요. 과천 청계산은 셀 수 없이 갔습니다. 한강기맥길이 면계를 따라 요로코롬 가는구나 싶습니다.^^ 농다치~청계산 구간은 처음 걸어보았습니다.
중요한 킬포 포장마차는 월욜이라선지 문을 열지 않았네요. 감안하고 물을 충분이 가져왔으니 망정이지... 하지만 오던 길에 계속 청계산에 가면 막걸리를 한잔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갈증을 달랜 것으로도 만족합니다.
♤ 청계산(淸溪山, 658m)/ 양서면과 서종면 경계
양평의 청계산은 양평군 서쪽에 위치한 양서면과 서종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동쪽으로 용문산과 북쪽으로는 중미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한강이 흘러 전망이 좋다. 산이 크지 않고 교통이 불편해서 수도권 일대의 세 개의 청계산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산이지만 산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과 두 개의 정상석이 있고, 정상에 서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발아래로 펼쳐지고 두물머리인 양수리 일대가 잡힐듯이 내려다 보인다.
송골고개 아래로는 임도가 보이고요. 이름없는 봉우리(469m)이지만 그리 높아보이지는 않으며 오름 중간에 독도 이경일 산줄기종주영웅선배님의 힘내라는 격려메시지도 볼 수 있습니다.
♤ 송골고개(380m)
송골고개는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 서차남 서쪽 골짜기에 있는 서후리(송골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 고개에서 일부 선답자들은 좌측 임도를 따르기도 했지만 산길로 오른다. 좌측 형제봉 능선 아래에는 팔당공원묘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벚고개에서 250여 미터 오름만 오르면 이후로는 큰 고비없이 졸업이라고 봐도 됩니다. 기왕 올라야 하는 길 힘들다 그만 둘 수도 없고 마음을 달래며 살살 올라갑니다.
♤ 벚고개(260m)/ 양서면과 서종면 경계
벚고개는 양평군 양서군 목왕리(木旺里)에서 서종면 수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왕복 2차선의 1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며 하늘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은하수 관측 장소로 널리 알려져있다. 고개 위로 생태이동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벗고개 유래는 고개 아래에 있는 목왕리에 벚나무가 많아 벚고개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벗고개라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벚고개로부터 200여 미터 고도를 높이면 완만한 내림이다.
오성과 한음이란 만화를 많이 보며 자랐어요. 오성이 경주의 별호이니 오성부원군 이항복대감은 경주이씨인가 봅니다. 부원군이란 벼슬은 왕의 장인에게도 내리고, 중요한 공적(정일품 공신)을 이룬 분에게 하사한 작호입니다. (사진은 요맥회 강형태산줄기종주영웅선배님 작품입니다.)
♤ 한음 이덕형묘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호는 한음(漢陰)이며,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1580년(선조 13)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때 예조참판으로서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후 우의정에 올랐다가 1602년(선조 35)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때에 영창대군(永昌大君)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반대하다가 사직하고 양근(楊根)으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묘역은 청계산(淸溪山) 서쪽으로 뻗은 형제봉(兄弟峯) 줄기의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묘비문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지었다.
♤ 갑산공원묘지
북한강변 노적봉 옆에 양평군 양서면 갑산에 자리잡은 공원묘지로 텔렌트 최진실,최진영남매의 납골묘가 있어 더욱 유명해졌다.
♤ 진고개, 소리개고개
옛적 고개 넘어 마을과 마을을 제일 가깝게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담담했던 고갯길이다.
지도상 도당재로 표기된 골짜기의 우측 또는 좌측 능선을 따라 양수고등학교 후문으로 내려섭니다.
♤ 양수역/ 두물머리역
두 물줄기가 합친다는 뜻의 두물머리가 일제강점기 고유 지명을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말이 양수리입니다. 양수역은 1939년에 생겨났네요. 2008년 구역사가 허물어지고 복선전철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구 양수철교는 자전거길로 보존이 되었고요.
양수역에서 한강기맥의 상징적 합수점인 두물머리 나루터까지 2.2km, 중간에 다리를 건넙니다.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않으므로 한강기맥의 끝점은 양서면 용담1리 팔암마을 세한정으로 봐야하겠죠. 하지만 팔당댐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두물머리가 뭍이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면서 한강기맥의 상징적 끝지점을 두물머리 나루터와 두물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미원 배다리 입구 연지... 배다리는 정조가 화성을 행차할때 노량진 앞 한강에 놓은 다리입니다.
그걸 여기다 재현해 놓은 거라는군요.
액자 속으로 들어가 사진이 되고픈 장소입니다. 엉뚱하게도 성산일출봉 옆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니 사진값을 받던 나쁜 기억이 소환되네요.^^ ㅎㅎ
두물머리 강변에 사연을 가진 나무가 한둘이 아니군요. 느티나무, 소원나무....
겸제 정선이 이곳에서 족자도를 그린 사연도 소개되어 있네요. 족자도는 다산 정약용선생 생가가 있는 능내리 앞에 있는 섬을 말합니다.
두물머리에는 한강기맥외에도 검단지맥, 천마지맥, 앵자지맥의 끝이 합수합니다. 저는 여기까지 갔습니다만 조금 더 가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물줄기를 볼 수 있는 두물경도 있다합니다.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ㅎㅎ
♤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
양수리(兩水里)는 두 물줄기인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물머리는 양수리의 우리말이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강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유일무이한 테마와 컨텐츠를 가지고 있는 관광지이다.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와 일출, 황포돛배 그리고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어우러진 양수리 두물머리는 사계절 아름답게 변모하는 풍광이 기다리는 곳으로 한강 제1경(두물경)인 동시에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장소로 널리 알려지며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생태관광자원이다. 또한 팔당댐 건설로 인하여 물길이 끊기기 전까지 강원도와 서울을 잇던 번창하던 나루터로 다양한 이야기가 함께 있는 역사와 문화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두물머리는 최근의 대표 여행트렌드인 힐링에 부합하는 관광지로 서울에서 30분 거리라는 지리적 이점 외에도 주변에는 수도권 최대 연꽃 정원인 세미원, 두물머리 일대를 도보와 자전거로 둘러볼 수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두물머리물래길, 양평 대표 걷기여행길인 물소리길, 남한강자전거길 등 힐링에 부합하는 다양한 관광인프라가 확충, 연계되어 있다.
한강은 한반도를 흐르는 강중에 가장 넓은 유역면적을 가지고 있다. 남한강을 본류로 하여 남한강과 북한강, 둘로 나누며 나누는 산줄기가 한강기맥이다. 고어로는 아리수(또는 아리물,아리가람)라고 불리며 발원지는 태백시 창죽동 대덕산 금대봉 아래 검룡소다. 남한강은 검룡소에서 시작하여 강원도에서는 평창·정선·영월·횡성·원주를, 충청북도 북동부에서는 제천·단양·괴산·음성·충주를, 경기도 남동부에서는 여주·이천·양평·광주를 지난다. 여주군을 관류하여 양평군으로 들어와 옥천과 만나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북한강 합류점인 양서면(楊西面)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에 이른다. 북한강은 강원도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류, 금강천, 금성천 등을 합친 후 서천, 수입천 등과 만나고, 경기도에서 가평천과 홍천강을 합쳐 남이섬을 지나 양평군과 남양주시 경계를 가르며 양수리에서 합수한다.
용문산에서 청계산을 지나 비솔에서 두물머리까지....
한강기맥의 화려한 끝마무리...
대단한 한강기맥, 기맥 중 단연 으뜸입니다.
첫댓글 한강기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더위 속에 멋진 추억을 추가하시면서 수고많으셨습니다.
말씀처럼 정맥 같은 기맥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네요.
전 마무리구간의 청계산에서 국수역 쪽으로 내려서는 큰 알바로 지체하던 기억이 납니다.
덕분에 지난 추억도 되살려 보구요.^^
네~ 방장님!^^
양수역-부용산-형제봉-청계산-벚고개-갑산-양수역 이렇게 원점회귀로도 한바퀴 돌아봤습니다.
서울 촌놈이 게을러서 두물머리 첨 가봤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m.cafe.daum.net/SeongAm/AjCo/137?searchView=Y
한강기맥 완주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먼거리를 한방에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네 세르파선배님!
코피 나게 걸었습니다. ㅋㅋ
청량리 개찰구를 나가는데 코가 근질근질해서 핑~ 풀어보니 피가 다 나오더라고요.^^
면수건을 하나 목에 걸치고 걸었는데 그게 몸으로 흘러내렸으면 바지 다 젖을뻔 했습니다.
이제 다음 진양기맥 출발 때까지 여유가 조금 확보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 좌우지간 대단한 열정입니다 코로나 정국에 항상
안산 즐한하세요 진양기맥도 화이팅입니다 ~~~~
열정은 세르파선배님이 최곱니다.^^
그저 산만 쳐다보고 묵묵히 걸을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게 아니거든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뜨거운 여름날
한강기맥을 마무리 하셨네요.
한강기맥 졸업 축하드립니다. ^^
예전에 소소한 걸음 했던곳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한강기맥 을 해야 하니 다시 걸어야할 길이기도
하구요..
이어 가실 진양기맥도 안전하게 진행하시기
바라겠습니다. 퐁라라님
파이팅 ^^
감사합니다. 다류대장님!
저도 농다치~청계산 구간을 빼고 양수역에서 신당고개까지는 했고,
후기를 찾아보니 "평산"에서 2014년 겨울에 구목령에 트럭을 타고 올라
원넘이재에서 청량리 마을로 내려가 마을의 지인 집에서 하룻밤 숙박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 기억은 날라가고 구목령 모습과 청량리 마을에서 민들레 뿌리를 캤던 기억만 있네요.^^
http://cafe.daum.net/_c21_/bbs_read?grpid=1C7yE&fldid=AjCo&page=1&prev_page=null&firstbbsdepth=null&lastbbsdepth=null&contentval=0004Ozzzzzzzzzzzzzzzzzzzzzzzzz&selectyn=Y
방대한 산행정보에 읽기도 버겁네요 하지만 저도 가야할길이기에 산행시 많은 도움이 될듯합니다
트랭글 gpx를 사용하시니 저에게는 금상첨화입니다 졸다가 알바하셨으면 미리 자수하십시요 마당쇠 고생시키지마시고요
4구간으로 210km가 넘는 한강길을 걸으셨는데 3,4구간 80여 km를 거의 이어서 완주하셨네요 고생많으셨습니다 퐁라라님 ^^
감사합니다. 마당쇠형님~^^
신당고개~통골고개는 임도를 따르기도 했습니다. 임도는 햇빛이 비추는데도 지루해서 요쪽저쪽 걸어봤습니다.^^
크게 알바한 곳은 없습니다.^^
모든 기맥을 3구간으로 해볼까도 했습니다만...
그런데 인원이 모자라 휴가를 내지 못해 나눠서 하게된 계기로 3구간에 집착하지 않고 자주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한강기맥 졸업을 축하드림니다.
우리는 9구간으로 진행해는데요. 어느 한구간 수월한 곳이 없었네요.
신당고개 이후로 교통도좋고 길이 좋았던걸로 기역되는 한강기맥 입니니다.
무더운 여름날 날씨도 오락가락하고 그놈의 코로난지 뭔지땜시 어디한곳 맘놓고 다닐 수 없는 요즘입니다.
한강기맥졸업 대단히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뜰이운영자님!^^
비솔고개~신당고개는 언제 했는데 했더니 벌써 6년 되었네요.
그땐 그게 몹시 길게 느껴졌던 기억입니다.
https://m.cafe.daum.net/SeongAm/AjCo/244?searchView=Y
더운 여름날 애쓰셨습니다
광대한 자료를 자세하게 기술해줘서 중공군 사태때 어떻게 막아냈는지 참고했네요.
그리고 제가 여러번에 걸쳐 올랐던 많은 산을 단번에 다 끝냈네요
용문산, 유명산, 소구니산, 농다치고개 그리고 운길산 두물머리까지 대단하셔요....
어쨌든 한강기맥 졸업 축하드립니다.
항상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네 부케님~^^'
한국전쟁에 중공군의 5차공세가 있었답니다.
고지전까지 포함하면 7차로도 분류하고요.
신정공세는 51년 1월에 걸친 3차 공세이고요. 2월 공세가 4차공세입니다.
두물머리로 걸어가며 그렇찮아도 검단산, 예봉산, 운길산을 쭈욱 살펴볼 수가 있었고요,
마지막 구간 진행하며 서종면과 양서면의 경계를 확실히 감잡을 수 있었습니다.^^
삼면봉에서 계속 서종과 양서의 면계를 따르다 갑산공원묘지로 내려가며 양서면으로 들어가네요.
한강 졸업 축하 합니다. 마치신후 한강물에 몸좀 담그셨는지요? 아님 졸업 무효...
고문님~ 손만 씻어도 인정이 되는건가요?
저는 물가만 가면 아나콘다 같은 큰 뱀이 나올까봐 공포스럽습니다.ㅋㅋ
감사합니다.
한강은 힘은 들었어도 묘하게 기회되면 다시 가고픈 매력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