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나 강의 큰 물줄기의 대부분은 가파른 산 사이의 협곡(峽谷) 혹은 절벽의 둑을 안은 깊은 산협(山峽) 사이로 흐른다. 강줄기의 불과 몇몇 군데에서만 탁 트인 골짜기가 만들어지고 그 강의 양면으로 제법 평평하고 집도 짓고 농사도 지을 만한 비교적 비옥한 곳이 생겨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곳 비셰그라드에도 있는데 바로 이곳이 드리나 강이 부트코바 암벽과 우좌브니크 산맥 사이에서 생겨난 깊은 협곡 사이에서 갑자기 물길을 바꾸는 곳이기도 하다. ~~~~ 거무칙칙하고 가파른 산들의 폐쇄된 곳으로부터 거품을 튀기며 전속력으로 녹색의 물살을 만들어내며 흐르는 드리나 강의 바로 이 자리에는 널찍한 아치가 11개나 되는, 조화롭게 깎아 자른 듯한 돌다리가 놓여있다. 그 다리에서부터 11개의 굽이치는 계곡이 비셰그라드의 카사바와 카사바의 주변 마을들, 언덕과 목장, 슐리바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들, 들녘 그리고 보기 드문 침엽수림들과 더불어 부채꼴처럼 펼쳐져 있다. 먼발치에서 바라다보면 하얀 다리의 넓은 아치들 사이로 푸른 드리나 강만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리 위에 있는 모든 것들과 위로는 남녘의 하늘을 품은 비옥하고 기름진 공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듯하다.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 앞부분
비셰그라드에 가게 될지는 몰랐다. 베오그라드에서 다음 여행지에 대해 탐색하던 중 비셰그라드 가는 버스가 있는 걸 발견하고는 바로 예매해버렸다.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 가는 길은 볼 것이라고는 없다고, nothing이라고 하던 마링코의 말대로 심심한 풍경만 이어졌는데 비셰그라드 가는 길은 조금씩 오르막으로 이어지더니 산은 점점 깊어지고 그만큼 강도 따라 깊어졌다. 구불거리는 산길을 돌고 돌아 도무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그렇게 네 시간쯤 달리자 국경이었고, 국경을 지나자 휴게소에 차가 섰다.
복도 건너에 앉은 유일한 청년이 말을 건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알고 보니 베오그라드에서 입사면접시험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12월이면 6개월간 유람선을 타게 될 거라고 했다. 선원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아무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하우스키퍼로 취직되었다면서 조금 부끄럽게 웃는다. 하우스키퍼는 말 그대로 주부처럼 선장의 방을 청소해주고 빨래도 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한 달에 천불의 월급을 받게 될 거라는데, 면접에서 영어가 딸리니 연습을 더해서 오라고 했단다. 그래서 나에게 영어를 하냐고 물었던 것. 내 영어도 썩 훌륭한 건 아니지만 청년보다는 좀 나았다.
그런데 그의 집이 비셰그라드였다. 이보 안드리치 때문에 비셰그라드를 간다면서, 한국말로 번역된 책을 보여주니 무척 반갑고 기뻐한다. 자기가 집에서 할 일이 좀 있는데 그걸 마치면 나를 가이드해주겠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아르메니아에서 온 소설가를 안내한 일이 있었다고 하길래, 사실은 나도 소설가라고 밝혔더니 더욱 반가워한다.
마침내 비셰그라드에 내렸다. 내리면 곧바로 다음 행선지 버스 티켓을 예매하려던 생각은 버려야 했다. 정류장 따위는 없이 그냥 길바닥에 내려주었는데, 비셰그라드는 그렇게 궁벽진 산골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데까지 찾아간 내가 이상한 것이었다. 청년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마을을 둘러보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안드리치 광장이라는 것이 꽤나 근사했지만 정작 안드리치에 대한 것은 동상 하나와 서점의 책뿐이고 광장 한 가운데에는 정교회가 자리하고 있고 주위로는 온통 까페였다. 이 광장을 에밀 쿠스트리차(“집시의 시간” 등을 감독한 그는 세르비아인이다) 만들었다는 청년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광장을 돌아다오다가 마트 앞에서 청년을 마주쳤다. 그는 어딘가와 통화 중이었는데, 뭔가 몹시 바빠 보여서 그냥 반갑게 손만 흔들고 돌아섰다.
비셰그라드는 ‘드리나 강의 다리’로 충분한 곳이었다. 더 이상 둘러볼 것이 없는 것도, 청년이 바쁜 것도 너무나 다행한 일이었다. 다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물론 그 다리는 예사 다리가 아니었다. 그건 다리를 둘러싼 역사와 문학적 아우라 때문이다.
“드리나 강의 다리”는 1516년부터 1914년까지, 장장 4백년에 걸친 시대를 배경으로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정교도인 세르비아인들과 가톨릭 신자와 유태인들이 서로 충돌하고 공존하며 이어지는 갈등을 다루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다리이다. 다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인간의 역사를 다룬 것이며, 그것은 곧 다양한 종교와 문화와 민족이 공존하는 발칸의 역사를 다룬 것이기도 하다. 이보 안드리치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고모가 살고 있던 비셰그라드로 보내졌는데, 학교로 가기 위해 매일 이 다리를 건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사라예보에서 대학을 다니며 문학에 심취한다. 그 당시 유고슬라비즘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던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 하에 있던 슬라브 민족 해방을 주장하던 진보적 민족단체인 ‘청년 보스니아’운동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한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실의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의 라틴다리에서 피살되는 사건으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으로 그 주범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도 ‘청년 보스니아’의 일원이었다) 단원들이 모두 체포될 때 이보 안드리치도 3년 형을 선고 받고 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여러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제일 앞이 가블리로 프린치프이다. 안드리치 그라드에 이런 벽화가 있는 것은 이보 안드리치가 '보스니아청년' 일원이었기 때문인 듯 싶다. 세르비아에서부터 자주 발견하게 되는 프린치프에 대한 책이다. 우리에게는 그냥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이곳에서는 그가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안드리치가 이 작품을 쓴 것은 2차 대전 중이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베를린에 머물고 있던 안드리치는 나치가 유고를 공습하기 몇 시간 전에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지만, 독일군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그때 그는 “드리나 강의 다리”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196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작품에 몰입하는 게 쉽지 않았다. 너무나 낯선 이슬람문화와 직업에 대한 용어와 입에 도무지 붙지 않는 낯선 지명들.....
그러나 비셰그라드에서 읽는 “드리나 강의 다리”는 이보 안드리치가 귀에 대고 나지막이 낭송을 해주는 듯 술술 읽혔다. 보슬비가 내리는 다리를 몇 번이나 걸어 다녔다.
“마을의 읍내에서 오다가 오른쪽에 있는 테라스는 소파(현관)라고 불렀다. 두 계단을 더 올린 오른쪽 테라스에는 벤치들마다 등받이 역할을 하는 난간이 있었고, 계단과 벤치들, 난간들은 모두 똑같이 밝은 색깔의 돌로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소파의 건너편 왼쪽 테라스도 오른쪽 테라스와 같았지만 앉는 자리가 없어서 텅 비어 있었다. 그 난간의 중앙에는 사람의 키보다도 훨씬 높게 세워진 벽이 있었는데, 그 난간의 중앙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판이 박혀 있었고 그 석판에는 다리를 세운 사람의 이름과 연도를 13행의 연대기 형식으로 작은 타리흐(역사)라고 하는 화려한 터키식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벽의 바닥에서는 샘이 흘렀다. 돌로 만든 뱀의 입에서 가는 물줄기가 흘렀다. 그 테라스에는 졔즈바(터키식 커피를 끓이는 손잡이가 긴 주전자)와 터키식 커피잔들, 항상 불이 지펴져 있는 화로가 있었고, 건너편으로 소파에 있는 손님들에게 커피를 나르는 소년을 부리고 있는 카페의 주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카피야이다.”
소파는 터키어로 현관이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진짜로 소파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커피가 아닌 술을 마신 게 분명해 보이는 아저씨가 전혀 일어날 생각도 없이 앉아있었다. 내가 왔다 갔다 해도 거들 떠 보지도 않고 흐린 눈으로 앞만 바라보는데, 그 아저씨로 해서 그 소파가 더욱 소파다워보이기도 했다. 다리는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그것조차도 소설 속에서 다리 공사를 하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다리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학교가 파한 금발의 예쁜 초등학생들이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고, 할머니가 장을 보러가고 있었다. 강가에는 낚시를 하는 노인들도 보였다. 우산을 쓴 채 능숙하게 찌를 던지는데, 던지는 족족 물고기를 낚아 올린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마치 백 년 동안 그러고 있었던 것 같은 자세다. 바스켓이 금방 가득 찬다.
아마 이런 커피 잔에 마셨으리라. 긴 호스는 아마 물담배인 듯 한데..... 우리 아저씨는 무엇에 취하셨을까
내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아저씨는 정말 고수 중에 고수였다.
비셰그라드를 떠나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프라하의 블타바 강, 부다페스트의 다뉴브 강, 베오그라드의 사바 강을 지나왔지만, 드리나 강은 그와는 다른 감동을 주었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과 협곡을 흐르다가 다시 협곡으로 갈라지는 드리나 강의 짙은 초록색 물빛은 도시를 지나는 강과 다른 장엄함이 서려 있었다.
“다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이보 안드리치가 말했단다. 그러게나. 의도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보니 다리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 같이 되어가고 있다. 드리나 강의 다리는 단연 그 중 최고였다.
첫댓글 비셰그라드의 청년은 지금쯤 배를 탔을까? 궁벽진 산골마을에서 어느 대양을 향해 나아가가 있으려나..... 그러고보니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지만, 톰 크르주를 닮은 아주 잘 생긴 청년이었다. ㅎㅎㅎ
역사문화연구회원 답군!
그런데 이번주 금요일(20일) 모임은 참석하겠지?
지켜보겠어!!!
답사 갑시다, 다 같이~~~~
이번 주 금요일에 가기에는 너무 일정이 빠듯할 듯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