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고추장
5월이 오면 나는 더욱 어머니 생각에 잠을 설친다.
“엄마, 외할머니께서 오실 때가 됐나 봐요.”
“네가 어떻게 아니?”
“고추장이 조금밖에 없잖아요?”
어린 딸아이가 베란다에 열어놓은 고추장 단지를 들여다보며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소리 질렀다.
이제는 모두가 지나가 버린 추억으로 남을 뿐, 고추장독의 밑바닥이 보일망정 어머니는 오시지 않는다.
이민 오기 전에는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서울 나들이를 꼭 오셨다. 말이 나들이지 고속터미널에 마중을 나간 나는 어머니를 발견한 순간 반가움보다는 택시 잡을 걱정부터 앞섰다. 올망졸망한 보따리와 새끼줄로 묶은 자루들, 그리고 플라스틱 통과 바스켓이 몇 개씩, 버스 표 한 장에 이 많은 짐들을 실어준 회사도 있으니 인심이 좋구나 싶었다. 짐을 풀어보면 고추장, 된장, 간장, 떡, 유과 등 맛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서울에는 아들 한 명과 세 딸이 살고 있으므로 이것들을 똑같이 넷으로 나누어주신다.
8남매를 두신 어머니로서는 보통 정성과 극성이 아니고는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유별나셨다. 그 흔해빠진 꽃놀이니 친목계니 하는 관광여행 한 번 아니 가시고, 평생을 남편과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오셨다. 일본 유학을 한 신식 사위를 보셨다고 외할머니께서는 자랑스럽고 흐뭇하셨는지 모르지만 외동딸로 귀하게 자라서 대종손의 며느리가 되었던 어머니는 어느 여인보다도 힘든 삶을 살아오셨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그 생이 힘겹거나 고달프다고 푸념하시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사셨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주고 또 주어도 한이 없는 것인지, 당신 몸을 여덟 번씩이나 쪼개어 주시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남은 기력마저 없애려고 저토록 싸들고 오시는지, 아무리 사위가 말려도 듣지 않으신다.
“이 낙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하시며 빙그레 웃으실 뿐이다.
봄이 되면 친정 집 마당은 고추장을 담가 삭히는 장독들로 가득 차있다. 손수 담근 고추장을 자식들에게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고집스런 사랑 때문에 난 사십이 넘도록 고추장을 담그는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했다.
어머니는 고추장 담그는 솜씨가 뛰어나셨다. 그것을 만들기 위하여 수개월 전부터 메주가루며 고춧가루 등 재료를 세심하게 준비하신다. 어머니의 손을 거친 고추장은 윤기가 자르르 나면서 색깔이 고와 보기만 하여도 입맛이 당긴다. 식탁에 놓인 고추장을 볼 때마다 ‘음식은 정성이 들어가야 맛이 난다’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라서 가슴이 찡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작년 5월,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어머니를 이제는 내가 찾아뵙기로 하고 한국에 갔다.
“고생을 한다기에 얼굴이 많이 상했을 줄 알았는데 좋구나.” 공항에 나오신 어머니는 새파랗게 힘줄이 튀어나온 거친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기뻐하셨다. 나는 아직도 나를 마중 나와 주실 어머니가 계시다는데 감사함과 행복을 새삼 느꼈다.
어머니는 우리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요,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안식처다.
“된장과 고추장은 있냐?” 잊지도 않고 물으신다.
“그럼요, 이민 갈 때 그렇게 많이 해주셨는데 벌써 다 먹나요? 캐나다에서는 저녁만 한식을 먹으니까 얼마 안 들어요.” 난 거짓말을 해버렸다. 사실은 다 떨어졌지만 너무나 노쇠해지신 어머니의 모습 앞에 그만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노인들의 쇠약함은 예측할 수 없다더니 삼년이 그다지도 긴 세월이었던가. 그토록 오시고 싶어 하는 캐나다 여행을 극구 말리는 가족들의 마음을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어머니 몰래 서울에서 고추장을 사 가지고 왔지만 남편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고 투정이다. 25년 가까이 입에 밴 장모님의 손길이 깃들인 고추장맛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나 보다. 우리는 이처럼 알게 모르게 어머니의 그늘 아래서 살아온 것이다. 이제 아이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어가니 나도 좀 철이 드는지 어머니의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싶고, 그토록 아파하시던 팔과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싶다. 그러나 너무도 먼 공간이 어머니와 내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
“어머니” 하고서 전화통을 붙들고 아무리 소리쳐도 잘 듣지 못하신다.
“정서방이랑 아이들, 너 모두 잘 있으면 됐다. 전화 끊자.”하시며 전화 요금이 걱정되는지 수화기를 놓으신다. 조금이라도 자식 것이 축이 날까 봐 염려하시는 그 마음. ‘사랑이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신은 어머니의 가슴을 만들었다’고 安秉煜선생은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서 어찌 사랑을 알 수 있으며, 희생과 인내, 그리고 용서 또한 배울 수 있겠는가.
이 봄에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푼다면 어머니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될까.
그리고 내년에 다시 고국에 가면 어머니의 고추장 솜씨를 꼭 배워서 와야겠다. 딸이 시집을 가면 나도 어머니처럼 맛있는 고추장을 담가 주고 싶다. 또 먼 훗날 며느리와 딸에게도 다시 외할머니의 고추장 솜씨를 전하여 주리라. 그래서 언제까지나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속에 함께 계시도록 하겠다.
(1993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