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네이션, 쾌락 과잉시대에서 균형 찾기
제목이 흥미롭다. 사람마다 책을 구입 할 때 기준이 다를 것이다. 나는 책을 구입 할 때 제목을 가장 먼저 본다. 그 후 저자, 출판사를 본다. 길터 책방 모임에서 추천받은 책이기도 하지만, ‘도파민네이션’은 제목에서 일단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면 책장 넘기는 것이 일단 수월하다. 첫 발걸음이 가볍다는 것은 두 번째 발걸음도 가벼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쯤은 ‘중독’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중독이 되는지, 중독의 증상은 무엇인지, 중독의 자기 균형과 절제가 가능하지 않을 때 어떻게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중독’을 좀 더 과학적으로 진단해보면서 중독을 사회학&인간·심리학 접근을 통해 분석해주어 좋았다.
도파민은 특정 행동이나 약물의 중독 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라고 하는데, 정신의학 전문의인 저자는 본인의 치료 사례를 통해 독자에게 우리는 왜 중독이 되는지, 우리의 뇌는 어떻게 쾌락과 고통을 조절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저자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등 중독에 빠질 경우가 많다고 했다. 10년 전쯤 나 역시 ‘매운맛’에 중독이 된 적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매우 힘겨운 시절이 있었다. 그 스트레스를 매운맛으로 풀었다. 퇴근할 때마다 내 손에는 매운 족발과 소주 한 병이 있었고, 나는 매워서 우는 것이라고 변명을 하면서 매운맛에 한없이 빠졌다.
매운맛 중독에 이어 내가 경험한 중독은 탄수화물 중독이었다. ‘쌀밥’이 너무 달고 맛이 있었다. 다른 반찬도 필요 없이 그냥 쌀밥을 먹는 것이 너무 맛있어서 나의 체중이 하염없이 늘어나는 것도 모른 채 쌀밥에 중독이 됐다. 체중증가는 단순히 살이 찌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혈압수치를 올려주고,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게 되는 등 부수적인 부작용이 왔을 때 나는 나의 탄수화물 중독을 인정하고, 끊기 위한 노력을 했었다.
내가 경험한 매운맛 중독과 탄수화물 중독의 원인을 이 책에서는 ‘범불안장애’라고 정의를 하고 있다. 내가 처한 암울한 현실 혹은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생각을 다른 것으로 돌릴 만할 것을 찾게 된다. 순간은 내가 처한 현실을 잊을 수 있지만 이것은 회피였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저자는 자신을 스트레스와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이 모든 시도가 회피였으며, 이 회피는 근원적인 문제해결에 대한 시도 자체를 거부하게 할 뿐 하니라 고통을 더 악화시킨다고 했다.
인간은 중독에 빠졌을 때 의식적 사고나 별도의 의지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반사 작용으로 균형을 잡으려 한다. 저자는 이것을 “자기 조정 메커니즘”이라고 했다. 쾌락 쪽으로 기울었던 저울이 반작용으로 수평이 되고 나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쾌락으로 얻은 만큼의 무게가 반대쪽으로 실려 저울이 고통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이 책 219페이지가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중독에 빠진 환자와의 치료과정에서 질문을 할 때 먼저 자신이 바꾸고 싶은 습관을 논의하고 그 변화를 위해 자신이 취할법한 조치에 대해 이야기 하라고 한다.
왜 바꾸고 싶으시죠?
그 행동을 멈춘다면 무엇을 포기하게 되나요?
그 행동을 바꾸기 위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각자마다 가진 수많은 충동과 중독에서 솔직한 나 자신을 직면하기가 어렵다. 나 역시 나를 포장하거나 회피하는 것으로 나의 바람직하지 못한 충동과 중독을 변명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그런 나를 인정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수치심에 대한 설명이 꽤 길다. 많은 공감을 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가 느꼈던 수많은 수치심을 합리화했던 경험들을 되돌아봤다. 내가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 속에 담긴 자학이 파괴적 수치심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실수에 대해 거부, 비난, 회피의 감정으로 들어가면 파괴적 수치심의 사이클로 들어간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반면에 상대가 우리를 더 가까이 두고 구원/회복을 위한 손길을 내민다면 우리는 친사회적 수치심의 사이클로 들어간다고 한다.
책에서는 수치심이 그릇된 쪽으로 가는 경우 파괴적 수치심, 수치심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경우 친사회적 수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의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나 역시 실수를 하면 일단 자학을 하면서 소용돌이치는 후회 속에 수치심을 느낀 경험이 많다. 실수를 인정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긍정적인 접근보다는 순간적으로 느끼는 수치심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던 경험들이 더 많았다. 내가 느꼈던 파괴적 수치심의 해결책이 친사회적 수치심이라는 저자의 말이 놀랍기만 하다. 파괴적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나가 먼저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야한다는 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타인이 파괴적 수치심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나 역시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지사지의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책장을 덮고 한참을 생각을 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나 혼자 고립되어 살 수는 없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수치심을 타인에게 오픈하면서 손을 내밀려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솔직해져야 하는 것이 어디 쉬운가?
고립을 버리고, 솔직함을 선택해야 한다면 고민이 필요하다. 외면과 회피를 통해 순간을 모면함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이 될 것이냐, 솔직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친사회적 수치심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다시 한 번 더 나에게 질문을 해 본다.
내가 바꾸고 싶은 습관은 무엇인가?
왜 바꾸고 싶은가?
바꾸고 싶은 습관을 멈춘다면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습관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