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바르티매오, 바르라는 것은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르티매오하면 티매오의 아들, 바르요나라 하면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시각장애인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복음에서 보았습니다. 예리코라는 도시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가기 위해 거쳐야 되는 중간에 있는 도시로, 말 그대로 거지들이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구걸 행위를 하던 장소가 바로 바르티매오가 있던 예리코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조건이 참 좋지 않습니다. 우선 시각장애인인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으로 보아 후천성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애인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말씀드려야 할 내용인데, 선천성 장애인이 낫겠습니까? 후천성 장애인이 낫겠습니까? 참....이런 질문을 하면서도 장애인들의 마음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말씀드립니다. 제 생각엔 후천성, 즉 잘 보시다 못 본 분이 더 힘드실 것 같습니다. 오늘 바르티매오는 후천성 장애인에 거지, 즉 경제적 장애인, 또한 가족이 없는 가족공동체 장애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중 삼중 사중의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는 사람 바르티매오가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복음의 촛점을 바르티매오의 이중 삼중 사중의 극심한 악조건들을 어떤 조건으로 보면 되는가? 즉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아님 부정적으로 보는가에 따라 바르티매오의 삶살이가 많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중심으로 바르티매오가 이런 악조건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이것을 주제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르티매오는 후천성 시각장애인, 경제적 장애인(거지), 가족장애인(가족이 없는 사람), 이런 삼중 장애가 인간의 삶의 조건에 있어서는 치명적입니다. 그런데 이 조건을 갖고 자기 자신에 대해 포기 않는,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가 바르티매오의 안에는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죠? 48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찾았을 때 그 주위의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억눌렀습니다. ”너같이 거지에 장애인에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운 상태의 조건을 갖고 있는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거지노릇하며 우리가 던져주는 동전이나 빵부스러기나 먹고 그렇게 살아라.“하는 것이 바르티매오를 꾸짖고 그의 목소리를 막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르티매오 같은 삶의 조건이 된다면 자기 자신을 포기할 스타일의 사람들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이 도와주시면 눈을 뜰 수 있고 가족들도 다시 만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하면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내리누르는 힘을 바르티매오는 혼자서 뚫습니다. 바르티매오가 누르는 사람들을 뚫고 말하는 이 힘을 갖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록키산맥 3000M가 넘으면 강풍으로 나무가 옆으로 구부러져 자라며 그 동네 사람들은 ”무릎 꿇는 나무“라 부른다 합니다. 워낙 강풍에 찬바람이 부니까 3000M 넘어서는 무릎 꿇는 형식으로 한 방향으로 나무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조건이 안 좋지만 그 나무들로 바이올린, 첼로를 만들었을 때에는 다른 나무와 달리 깊은 공명, 깊은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그 무릎 꿇은 나무는 그런 악조건을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변명이나 부정적인 이유로 쓰지 않고 잘 견디어내어 마침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명품 악기로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가치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골프선수 신지애 선수도 조건이 안 좋았죠. 어머니를 일찍 교통사고로 예민할 때 잃었고....신 선수 보면서 어린 여자아이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도 흔들리지 않는 느낌 못 받으셨나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 잃고 그것을 극복해 내고....어머니 잃은 것도 극복해 내었는데 골프 하나 잘못 실수했다고 흔들리겠습니까? 그까짓 것이 어머니 잃은 만한 충격만 하겠어요? 물론 몸도 흔들리지 않게는 생겼지만..... 정신적인 마인드도 몸같이 탄탄한 사람이죠. 인순이란 여가수 아시죠? 무언가 가볍지 않게 노래하죠? 그 사람의 삶의 조건, 물론 지금은 국제결혼, 혼혈 이런 것들이 개방되고 인식이 달라졌지만, 그 사람이 어린 사람에서 자라났을 그 사춘기 때에는 인식이 아주 험할 때 아니었습니까? 그 과정을 다 겪고 나서 자신의 피부색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내리누르는, 마치 바르티매오를 꾸짖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너 같은 흑인 혼혈....“하면서 내리누르는 사회의 그 어떤 힘을 뚫고 인순이(본명:헬레나)는 국민가수라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에게 결코 가볍지 않는 노래를 들려주며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설악산이나 월악산에서 바위덩어리 위 흙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소나무 자라는 것 보셨죠? 신기하죠? 그곳에 뭐가 있다고 푸르게 잘 삽니까? 나무가 자라기에는 이중 삼중의 악조건이죠. 어떻게 어떻게 바위틈에 뿌리를 디밀고 간신히 수분, 양분 흡수하면서 살아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소나무보다 그 소나무의 솔잎은 훨씬 향이 강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조건 가운데 조금 더 어려운 조건을 만나는 사람이 있고, 조금 덜 어려운 조건을 만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건이 좋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에 네 조건을 내가 바꿔주겠다는 이런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삼중의 악조건을 갖고 있는 바르티매오도 그 조건을 핑계로 삼아 자기 자신을 포기하거나 나쁜 길로 가거나 하느님, 부모, 사회를 원망하는 방향으로 쓰지 않고 그 조건 안에서, 록키산맥의 무릎 꿇은 나무처럼, 신 지애 선수처럼, 인순이라는 여자가수처럼,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소나무처럼 자기 자신의 삶을 변명, 부정적인 조건으로 포기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며 그 많은 사람의 내리누름을 뚫고 외치며 자신의 삼중적인 장애를 극복해내는 결론을 오늘 복음을 통해 보여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누군가가 바르티매오에게 다가와 너의 삼중적인 악조건을 없애주겠다 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사이비 종교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내!!!!”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조건들을 그대로,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느냐? 아님 부정적이고 좌절하는 시선으로 보느냐 입니다. 부정적, 좌절하는 시각을 바르티매오 같은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는 시각으로 바꿔주는 것이 참 종교요, 가톨릭 신앙인 것입니다.
잠시 묵상하시면서 우리 형제자매님들 바르티매오에 비하면, 바위틈의 소나무에 비하면, 신 지애 선수에 비하면, 가수 인순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조건을 갖고도 포기하고 그것을 부정적인 에너지로 술술 쓰시고...서로 원망하고 상처주고 받고...그 시각을 바르티매오의 시각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는 자기 사랑, 자기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 미사를 통해 우리 교우 여러분들 마음 안에 받으시길 빕니다.
잠시 기도합시다.
첫댓글 제게 주신 말씀 같아 마음깊이 새깁니다.
주님께서 주신... 고통과 억압에서의 승리!...힘과 용기가 절로 생깁니다...참으로 감동적인 강론을 해 주셨습니다.큰 힘이 됩니다...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