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대통령 김영삼 장로님이 2015년 11월 22일 88세를 일기로 서울대학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시고, 국가장(國家葬)인 5일장을 치룬지 벌써 2주기가 되었다. 금년 추모식은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12시부터 2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추모식에는 영부인 손명순권사님과 차남 김현철교수, 추모추진위원장 이수성전국무총리,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내빈으로는 문재인대통령 내외분과 반기문전유엔사무총장 내외분을 비롯하여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님, 박관용, 김수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 김무성, 유승민 의원 등 많은 정치인들과 김영삼 장로님을 사랑하며 존경하는 필자를 비롯한 추모객들이 현충관 아래 위층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이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하였다.
개식사, 추모사를 한신 문재인대통령과 반기문전유엔사무총장, 설교를 하신 김장환 목사님 등 모든 분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김영삼 장로님이 문민정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단행한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금융 실명제를 단행하여 음성금융거래 단절과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다음으로 군사정권 창출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하나회를 해산시켜, 군인들의 재집권을 차단하였고, 다음으로 일제식민시대의 상징물인 조선총독부를 허물고 조선왕조시대의 건물을 복원하는 등 이사야 60장 1절의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는 성경말씀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졌다고 말씀들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선진국의 반열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시켜,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경제도약을 이룩하였다. 그때의 국민들의 지지율은 90%를 상회 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재임 중반까지 경제성장률이 9.2%(1994년), 9.6%(1995), 7.6%(1996년)등으로 대단하였다.
이처럼 황흘한 지표들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는 인기누수(人氣漏水)와 그간 누적되어온 경제 불황과 외화고갈 등으로 IMF 위기를 가져와 이것이 그간 김영삼 대통령이 이룩한 모든 업적을 전부 가리 우고, 경제난국을 초래한 대통령으로 평생을 몸 바쳐 조국의 자유와 민주, 정치발전을 위해서 헌신하며 이룩한 모든 봉사와 업적들이, 다 사라지고, IMF난국을 초래한 대통령으로 온갖 비난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머지않은 장래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는 후세들에 의해 점차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리라 믿는다는 말씀들을 피력했으며, 유언으로 장로님이 남기신 “통합과 화합을 통하여 나라를 굳건히 지켜 달라”는 말씀과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리고 문민정부를 수립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큰 틀을 마련하시고, 국민과 국가만을 생각하시던 故 김영삼 대통령은 14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밝히신 대로 “국민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국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장례식 주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문민정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호의가 간다는 지지율이 51%를 상회한 것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해가 거듭할수록 추모하는 분위기와 지지율은 점차 높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부모에 대한 효심도 잘 알려진 고인은 거제도 멸치어장을 경영하시면서 자식의 정치자금을 조달하여 주신 선친 김홍조 장로님께 소천하시기 직전까지 거의 매일 아침 전화로, 동영상으로 문안인사를 드린 효자인 동시에, 평생을 동반자로 남편 뒷바라지를 뒤에서 묵묵히 하시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칼국수 등으로 손수 대접해 오신 영부인 손명순 권사님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신 애처가 였다.
필자가 김영삼 장로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1년 3월 장로님이 신민당 총재 시절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다,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의원직을 제명당하고 가택연금으로 고통 받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 남산에 소재한 숭의여전 교수(교목실장 겸임)였다.
1981년 2월4일 박동선 숭의학원 이사장님과 함께 레이건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미국의회국가조찬기도회에 초청을 받아 참여 하였는데, 1973년 9월 한국여의도광장에서 부흥집회 주강사로 부흥회를 이끌었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레이건대통령당선축하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 머무는 동안 교포지도자들, 대학 동문 등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5.18 광주민주화 항쟁당시 광주시민들과 많은 학생들이 군부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것을 알게 되고, 평소에 좋아하던 김영삼 장로님의 가택연금과 김대중 선생님의 근황도 알게 되었다.
귀국 후 3월초부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김영삼 장로님과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 후 여러 번의 통화를 통해 장로님을 위로 격려해 드렸는데,
드린 말씀을 요약하면 “장로님! 저는 면목교회 김상태 장로입니다. ...어떤 핍박과 고난이 오더라도 좌절하거나 굴하지 마시고, 신념대로 사십시오. 정의를 위해 불의와 맞서 최선을 다하노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하나님의 가호와 크신 은혜와 축복을 받으실 날이 반드시 오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려우실 때는 욥과 다윗을 생각하시고, 이방인의 포로로 잡혀가서도 신앙과 신념대로 산 다니엘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내십시오. 다윗이 사울왕의 핍박을 피해 숨어 다닐 때 사울 왕을 복수할 수 있는 몇 번 의 기회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긴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사울 왕이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태복음 16장 24-27절의 말씀에 저는 위로와 소망을 갖고 항상 기도합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제 신상은 염려 마십시오. 전화를 드릴 때 그만한 각오 없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등의 말씀을 드렸다.
김영삼 장로님의 답변을 요약하면 “장로님! 전화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에는 별 이상이 없습니다. 미국 교포사회의 소식 고맙습니다. 장로님! 이 전화는 전부 도청이 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친 몸이니까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이 나중에 나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실 것이 염려가 되어서입니다. 집에서도 매일 예배를 드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민주화와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장로님이 주신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전화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의 말씀이었다.
그 후 3월 중순경 면목교회 주소로 온 누른 봉투 속에 <金相泰 長老淸正 松柏長靑 辛丑春 巨山 金泳三>라고 쓰신 김영삼 장로님의 휘호가 들어있었다. 보낸 이는 김현철이라고 되어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4계절 변함없이 그 푸르름을 간직하듯 김영삼 장로님의 자유와 민주주의 쟁취를 향한 강한 믿음과 신념, 민주 복지국가 건설에 대한 한결 같은 염원을 담은 명문이었다.
김영삼 장로님의 휘호와 관련해서 잊혀 지지 않는 기억 중 한 가지는 장로님의 휘호를 받은 후 내가 섬기는 면목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인 표구점에 들려 휘호를 맡긴 후 약속 날 자에 찾으러 갔더니, 장로님의 휘호를 표구하여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하여 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고 약속 금액을 지불하고 포장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40대로 보이는 표구점 주인은 “선생님! 일주일만 더 진열해 놓으면 안 되겠습니까?! 김영삼 총재님이 너무나 좋고, 휘호가 마음에 들어, 오가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게 하였으면 좋겠어서 그럽니다. 일주일만 더 진열하게 해 주세요 선생님!”하는데, 이 사람이 누구를 감옥에 가게하려고 이러나? 는 생각에 두려움도 스쳐갔으나, 젊은 표구점 주인의 당차고 용감한 행동과 애국심에 감동이 되어, 한주일 후에 찾아왔던 기억도 새롭다.
2016년 7월에 나의 15번째 저서인 평론집 <연지탑>을 발간할 때, 출판사에서 표지 뒷면 안쪽에다 장로님의 휘호를 축소해서 다시 잘 표구한 휘호 아래
장로님이 2001년 4월 4일 내가 제4회 한국장로문학상(수필부문)을 받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축하전보를 보내주셨는데, 축하전보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4회 한국장로문학상 수상 축하전보>
신록이 우거지는 이 축복 받은 계절에, 한국장로문학상을
수상함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과거 어두웠던 때부터 오랜 세월동안 큰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시고,
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 주신데 대해 이 기회를 빌어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합니다.
김 장로님의 전도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언제나
충만하시길 빌 며,
건강과 행복이 늘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2001년 4월 4일 김 영 삼
장로님은 그 전 후에도 자식 결혼식, 문학상 수상, 섬기는 기관 행사 때면, 잊지 않고 화환을 보내주셨다. 문민정부 대통령 고 김영삼 장로님의 국가장(國家葬) 전 날 나는 서울대학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을 찾아뵙고 기도를 드린 후 상주인 차남 김현철 교수님 등과 악수와 위로의 말을 나누고 나오면서 방명록에
<믿음, 소망, 사랑의 정신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사시다
소천하신 장로님!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하소서.>
주후 2015년 11월 24일 청석 김상태 장로드림.
기록한 후 집으로 오면서, 고 김영삼 대통령을 개인적으로는 역대대통령 중 사심과 사욕 없이 일평생 청렴결백하게 정치의 정도(正道)를 가장 잘 지켜 오신 분 중의 한분으로 생각하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신 <통합과 화합>의 말씀과 교훈을 후학들이 잘 본받아야 될 줄로 믿는다.
그리고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 민주센터>를 정부와 온 국민들의 후원성금으로 민주주의 ‘역사교육’과 연구의 터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념관이 되어, 많은 애국지사들과 각계지도자들을 양성 교육하는 참다운 기관으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상태(한국장로문인회 상임고문: 모스크바장신대 객원교수, 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