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머리에 쥐나네요. 어제부터 서둘러 썼는데 이제 그냥 올려야겠네요. 미흡한 부분있더라도 양해해주시고 공주답사 정리에 조금이라도 도움되시면 좋겠네요.
다시 한 번 백제 부흥을 실현한 두 번째 도읍지 공주를 다녀와서…….
강바람드리(서자영)
9월 5일 토요일 8시 출발 예정으로 종합운동장역 1번 출구역에서 모이기로 했다. 7시 43분. 도착해 보니 마야님이 먼저 와 계셨고 이어 속속 우리 1기 수강생 여러분들과 오덕만 회장님, 오늘의 답사 인솔 담당자이신 최병우 교수님, 그리고 송파문화원 사무국장님 이하 직원분들도 오셔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출발시간이 되었는데도 선생님 한 분이 오지 않아 10분 가까이 기다리다가 도착 시간이 확실치 않아 그대로 출발하게 되었다. 안타까움과 시간 엄수의 교훈을 되새기며 28명(수강생은 22명)을 태우고 버스는 출발했다.
아침의 선선한 바람과 맑은 햇살이 일상의 피로를 뒤로하고 학구(學究)의 설렘을 품은 우리들의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답사를 앞두고 최병우 교수님의 해설 말씀과 일정 안내가 있었다. 일정은, 10시경 공산성에 도착해 성을 종주하고 12시 점심 식사를 한 후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공주국립박물관, 곰사당을 답사하는데, 각각 현지 해설사 분들을 예약해 놓으셨다 했다.
웅진(熊津) 또는 곰나루는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수도이다. 지금의 공주시이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서 밀려나 22대 문주왕이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26대 성왕이 538년 수도를 다시 사비로 옮길 때까지 64년간 수도였다.
웅진으로 온 문주왕은 병관좌평(현 국방장관)에 해구(解仇)를, 내신좌평(현 총리급)에 곤지(昆支)를 임명하고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는데, 병권을 장악한 해구에게 2년 후인 477년에 피살당한다. 이어 삼근왕이 즉위하지만 13세의 어린 나이였고 실권은 여전히 해구에게 있었다. 478년, 해구는 왕위마저 찬탈하려고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함께 반역을 꾀했으나 덕솔(德率) 진로(眞老)에 의해 평정되었다. 이후 진씨 세력이 백제의 유력한 귀족으로 부상했다. 해구의 반란이 평정된 이듬해(479년) 삼근왕은 15세의 나이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고 진씨 세력의 옹립으로 곤지의 아들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했다. 동성왕은 금강 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백씨(苩氏)·사씨(沙氏)·연씨(燕氏) 등의 신진세력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해, 한성에서 이동해온 남래귀족(南來貴族)과의 세력균형을 꾀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으나 신진세력이 커져 이를 견제하자 그들의 불만을 샀으며, 그 중 광주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를 가림성주로 내보낸 것이 화가 되어 501년 백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동성왕대에 추구된 일련의 정책은 백제왕실의 기반 확대 및 후의 무령왕·성왕대의 정치적 안정과 백제 중흥의 토대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502년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한다.
내․외의 혼란을 진압하고 백제를 강국으로 만들어 웅진 시대를 꽃피운 무령왕의 탄생에 대해서는,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무령왕의 출생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백제 개로왕이 동생 곤지에게 일본으로 가라고 하자 곤지는 왕비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개로왕은 부인이 출산하면 모자를 함께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요구를 수락했는데, 왜국을 가던 중 산기를 느낀 부인이 461년 6월 초하룻 날, 일본 각라도(各羅島)의 해안동굴에서 무령왕을 낳았다는 것. 이 각라도는 현재 일본 큐슈(九州)사가(佐賀)현 가라쓰(唐津)시 가카라시마(加唐島)라고 한다. 그래서 무령왕의 원래 이름이 시마(島:しま)라는 일본어에서 유래한다고도 한다.
백제 왕조와 일본 황실과의 관련성은 2001년 12월 23일, 68세 생일을 맞은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기자 회견에서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인 다카노노 니기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천황가의 혈통이 백제계라는 사실을 이례적으로 언급다고 한다. 아키히토 천황이 언급한 간무 천황은 781년부터 806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50대 천황인데, 재위 중인 현재 오늘의 천황이 일본 황실과 백제와의 혈연적 관계에 대해 직접 언급하기는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관련 역사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일본에서는 아사히(朝日)신문에만 게재되었을 뿐 모든 언론은 침묵을 일관해 아키히토 천황의 언급은 조용한 고백이 되었다.
이 이상의 백제와 일본과의 긴밀한 관련성에 대해서는 차후의 흥미로운 공부거리로 남겨두기로 한다.
남공주 IC로 들어가 공주 공산성에 도착한 우리들은 바로 현지 문화관광해설사이신 조옥순 선생님과 인사하고, 매표소를 지나 산 능선에 세워져 있는 금서루로 향했다. 매표소에서 금서루 사이의 고갯길 오른편으로는 비석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관찰사 및 순찰사 비석, 또는 공덕을 나타낸 비석으로 공주 전역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둔 것이라 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 목사 김효성비였다. 조선시대 비석이 많았다. 한자에 조예가 깊고 금석문에 관심 있으신 몇몇 선생님들은 주의 깊게 살펴보셨다.
금서루는 공산성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인데 1993년에 복원한 현재의 문루는 아쉽게도 원형인 홍예문이 아님을 조선생님이 부끄러워하시며 말씀해 주셨다. 금서루 입구에서 건너편에 보이는 정지산을 가리키며 산 위에서 유적이 나와 길을 내려다 그 아래로 터널을 뚫게 되었다고 했다. 무령왕비의 묘지석에 ‘……서쪽 땅에서 초상을 치르고……’라는 말이 새겨져 있는데, 송산리 고분군에서 직선 거리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정지산이 왕궁인 공산성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그곳에 무령왕과 왕비의 빈전(1차 장례식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남서쪽에 있는 송산과 정지산, 왕성이 삼각을 이루고 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금서루에서 출발해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추정 왕궁지-임류각-명국삼장비-광복루-동문루-진남루-영은사-만하루로 이어지는 2시간 코스로 안내해 주셨다. 공산성 축조 당시는 토성이었으나 이후 증․개축을 통하여 현재의 석성의 모습을 하게 되었고 부분적으로 토성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동문루 옆이었다. 치성도 한 곳으로 진남루 바로 남동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건물인 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일시 파천한 곳이다. 쌍수(두 그루 나무)에 기대어 왕도를 걱정하던 인조가 평정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쌍수에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영(令)을 내리셨다는 유래가 있다.
쌍수정 사적비는 인조에게 정3품 대부작을 하사받은 나무가 죽고 구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 유지를 기념하기 위해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10년에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이 사적비의 비문은 여러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서체들인 것에서 의미 깊은 것인 듯 했다. 통일신라는 왕희지체, 고려는 구양순체……, 서로 끌어안는 형상인 안진경체는 충절을 나타내는데 정조 임금이 안진경체를 즐겨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옆 백제 왕궁 추정지는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최초로 추정했다고 한다. 조옥순 선생님은 공주박물관이나 송산리 고분군에 가서도 듣게 될 것이라며 이 일본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만날 해설사분께 바통을 넘기셨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공주대학교에서 처음 조사했다고 한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추정 왕궁터는 발굴 조사 시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토기 철기, 봉황형 향로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조선생님은 공주박물관 2층에 가면 볼 수 있다 하셨는데 우리는 시간 관계상 확인하지 못하고 왔다. 둥근 연못터는 그날 우리가 공산성 내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확실한 백제 유구였다. 4.18m 깊이의 이 연못을 채웠던 물은 길어다 부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건물터 자리만 펜스로 둘러져 있어 실감하기에는 상상의 여지가 희박한 왕궁터를 뒤로 하고 임류각 쪽으로 향했다. 임류각 원래 자리 조금 위쪽에 복원된 임류각이 있었다. 이것은 동성왕 22년(500년)에 왕궁 동쪽에 건축한 건물인데, 복원된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 발굴에서 나온 유물의 문양을 참고했다고 했다. 임류각 아래 그늘에서 조선생님의 동성왕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동성왕의 지나친 연회에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 충신들이 탄원하자 못 들어오게 하며 연회를 계속했다고 한다. 이에 501년 사비로 사냥을 간 동성왕을 마한 중 웅진지역의 토호 백가가 지금 부여의 성흥산성(가림성)에 원치 않게 가게 되자 백가가 반감을 품고 자객을 시켜 동성왕을 죽인다. 바로 무령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듬해 백가는 난을 일으켰고 무령왕이 이를 진압하여 백가의 목을 쳐 강물에 던졌다. 이 무령왕 즉위에 관해 무령왕의 쿠테타설도 있다 하셨다.
그 옆의 명국삼장비는 정유재란시 공주에 주둔하면서 공주민을 잘 다스렸다는 명나라의 세 장수의 업적을 기린 선조 때 금강변에 세운 사은 송덕비인데 홍수로 비석이 매몰되어서 숙종 때 다시 세웠는데 일본 사람들이 와 보니 왜구라는 말이 있어 글자를 지워 공주 읍사무소 뜰에 파묻었던 것을 발굴하여 이곳에 가져온 것이라 했다.
광복루는 원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고 군인들이 드나드는 문루의 역할을 했던 것인데 일본 사람들이 현재 위치에 세워놓았다 했다. 원래는 운신각 또는 해상각이라 부르던 건물인데 광복루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은 김구 선생과 관련이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분개한 김구선생이 1896년 황해도에서 일본 장교 한 명을 살해한 죄로 인천교도소에 사형선고를 언도 받고 수감된다. 고종의 감형 조치가 있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스님이 되어 숨어 있다가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간다. 광복 후 이시형 박사와 이곳에 와서 광복이 되어 기쁘다는 의미로 ‘광복루’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광복루라 부르게 되었다 했다. 그리고 마곡사에 가서 김구 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가 아직도 있다고 했다.
동문루에서는 남아있는 토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곽 전문가에 의하면 위쪽 부분은 조선시대에, 아래쪽은 백제시대에 쌓은 것이고 867m라 했다. 공산성 안내 표지판을 보니「공산성은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석시대에는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미터의 능선에 쌓은 이 성은 동서 약 800미터, 남북 약 400미터 정도의 크기이고 총 둘레는 2,660미터 가량 된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약 2.5미터, 너비는 약 3미터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의 전체 길이가 3.5km인 것을 감안하면 풍납토성보다는 규모가 작고, 전체 길이가 2,285m인 몽촌토성과는 약간의 차이가 난다. 모습도 평지성인 풍납토성보다는 자연 구릉 위에 축조한 몽촌토성과 닮은 듯하다. 견주어보니 첫 500년 도읍지 한성 백제의 위용을 더욱 실감한다. 그러나 이 공산성 또한 북쪽으로 차령산맥을 1차 저지선으로 하고, 자연 해자 역할을 하는 금강을 북으로 두고 있으며 해발 110미터의 능선에 위치하는 포곡형(包谷形:여러 개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성의 형태) 산성으로 쌓아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문루에서 또 한 가지 짚어주신 것이 있었다. 동문루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공주교대 건물 뒤편 터널 부분이 동학농민운동의 남접 접주 전봉준의 마지막 싸움터 우금티(우금치:우리는 이렇게 배웠는데, ‘치’는 일본인들이 고개의 의미인 우리말 ‘티’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티가 없으니 치로 바꾼 것이라 한다. 도둑이 많아 소를 몰고 넘지 말라고 하여 牛禁티.)라 했다. 북접의 접주 손병희 군대와 함께 가장 치열했던 관군과 동학농민 2만명 대 2천명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참패를 당했다. 그 때의 동학농민 시체를 무령왕릉 옆 골프선수 박세리가 졸업한 금성여자상업고등학교 앞 논 자리에 쌓았다 하여 송장뱀이라 불리는 논이 있다고 한다. ‘뱀’은 논배미의 의미라 했다. 전봉준은 남은 500여명의 동학농민들과 쫓겨다니다가 김경천이라는 부하의 밀고로 12월에 잡혀 그 이듬해 3월에 사형을 당하는데, 왜 공주를 공격했는지 물으니 공주는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이라 했다고 한다.
진남루를 거쳐 북쪽으로 한참 내려가니 큰 암은행나무가 은행을 주렁주렁 달고 반겼다. 영은사와는 얼마간의 시간을 같이 했을까? 영은사는 조선 세조(1458년)에 지은 사찰로 임진왜란 때에는 영규대사가 승병들의 합숙소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은행나무 앞에는 알아보기는 어려운데,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등의 유물이 나와 백제 연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 가까이에 영은사에서 만하루로 향하는 암문이 있었다. 공산성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것이라 한다. 어린 시절 개구멍을 지나던 기분이 살짝 들었다. 암문을 빠져 나오니 만하루와의 사이에 연못 터가 있었다. 아까 조선생님이 가리켰던 백제 연지 추정자리와는 달리 큰 석축 연못이 있고 ‘백제 연지’라는 푯말도 세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사다리꼴을 하고 있었는데 돌을 단을 이루며 쌓아올렸다. 깊이는 10m 정도로 군인들의 용수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여지도서에 옆에 있던 못이 말라 이 연못을 팠다는 연도와 연못 조성자 김시찬의 이름이 나와 백제 연지라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했다. 그 옆에 있던 말라버린 못이란 것이 은행나무 앞쪽의 것이었을까? 확언하지 못하는 역사 해설의 어려움을 다시 느낀다.
만하루에서 금강을 바라보며 건너편이 신도심, 이쪽 편이 구도심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과거의 공산성에서 현재로 돌아왔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40척의 배가 오르내렸다던 곰나루의 모습은 변해버린 지형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다.
만하루 서쪽에는 발굴 작업 중인 곳이 있었다. 팜플릿에 ‘백제민속마을 발굴지’라 표기된 곳 같았다. 조선생님이 농담으로 그곳을 ‘교수님들 농사 짓는 곳’이라고 한다고 했다. 사실 교수님들이 아니라 연구기관 연구원들이 발굴한다지만……. 재미있는 표현이다. 공산성에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 발굴자들이 여러 발굴지에서 부디 많은 양질의 고고학적 열매들을 수확하길 기원해 본다.
공산성 답사를 마치고 공산성 매표소 건너편에 있는 쌈밥집에서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송산리고분군으로 향했다. 송산리고분군 전시실 안에서 만난 해설사는 최병옥 선생님. 영어 해설도 하시는 분이라 가끔 영어 단어도 섞어 주셨다. 예정한 1시간 안에 해주실 내용이 많아 말씀이 빠르셨는데, 모두 놓치기 아까운 해설의 연륜이 묻어나는 것들이었다. 열심히 듣고 적었다.
입구 벽면에 걸려 있는 한성백제 시기의 온조왕부터 사비시대의 의자왕까지의 연표 앞에서부터 해설을 듣기 시작했다. 백제가 가장 강한 때는 근초고왕,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시대는 성왕, 그 배경을 잘 닦아준 분이 무령왕이라 한다. 부여로 옮긴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백제 왕의 성은 부여씨(扶餘氏), 그런데 660년 7월 18일 백제 멸망, 의자왕이 당나라로 넉달 동안 끌려갔었는데 백제의 활발한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웅진도독부를 설치. 이 때 당 고조가 ‘부여씨’ 대신 ‘서씨’를 쓰게 해 오늘날 남아있는 백제의 왕족은 ‘부여 서씨 (扶餘徐氏)’ 성을 쓰고 있다고 한다.
‘웅진(熊津 : 곰곰, 나루 진’의 이름 유래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이셨다.
아득한 옛날 지금의 곰나루 근처 연미산(燕尾山)에 큰 굴이 있었다. 이 굴에는 커다란 암 곰이 한 마리 살았다. 어느 날 잘 생긴 사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물어다 굴속에 가두었다. 곰은 사내를 굴에 가둬 놓고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짐승을 잡으면 굴속으로 가져와 사내와 함께 먹었다. 곰과 함께 굴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내는 기회를 보아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곰이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바위로 굴 입구를 막아놓아 하릴없이 굴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하루 이틀을 지나서 어느덧 이 년 동안 곰과 함께 살게 되자 사내는 곰과 정을 나누게 되고, 그 결과 곰이 새끼를 낳았다. 그로부터 또 일 년이 되어 둘째를 낳자 곰은 사내를 믿기 시작하였다. 사내가 새끼들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것을 보면서 더더욱 사내에 대한 믿음이 쌓여갔다.
그 날도 곰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곰은 전과 달리 굴 입구를 막지 않았다. 자식이 둘이나 되는데 설마 도망가랴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사냥터에서 한참 사냥을 하고 있는데 멀리 사내가 강변 쪽으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곰은 서둘러 굴로 돌아와 두 새끼를 데리고 강변으로 달려갔다. 사내는 이미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곰은 강가에 다다라 사내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사내는 곰의 애원을 외면하고 강을 건넜고, 그것을 보고 있던 곰은 새끼들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사내가 건너온 나루를 고마나루 또는 곰나루(熊津)라고 불렀다 한다.
공주박물관 2층에 전시되어 있는 양나라의 ‘양직공도’라는 그림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했다. 양직공도에 공주를 고마(固麻)라 했고 그 의미는 대도시의 의미인데, 백제 사람에게 듣고서 적어 놓은 것이니 이 곰나루 전설이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했다.
무덤은 ‘무덤’, ‘기’로 세는데 이곳에 외관상으로는 7기만 보이는데 실제는 16기정도 있고 주차장 부지에서부터는 30기 가까이 되는데 보존 가치가 있는 것들만 남아 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벽돌무덤과 할석 ·괴석으로 만든 돌방무덤 2가지 유형이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왕릉의 분포를 보면 계곡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 동쪽에는 1~4호분이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하고는 이미 다 도굴된 상태라 한다.
경주, 나주의 무덤들은 평지에 있는데 공주, 부여의 백제 무덤들은 야산 능선에 있고 풍수지리에 입각해 조성했다는 사실이 남아있다. 벽돌 무덤의 형식은 중국 양나라의 것을 따르고 있으며, 공주에서는 벽돌무덤 4기가 발견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2기로 송산리의 무령왕릉과 6호분인데 교동에 있는 것을 보니 무덤 조성 중 천정 부분이 무너진 것으로 보여 벽돌 무덤 조성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여로 옮겨서는 벽돌무덤을 조성하지 않았던 것인지 벽돌무덤은 웅진에서 단절되고 부여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다.
전시실에서 우리가 주로 관람한 것은 송산리 고분 5호분, 6호분, 무령왕릉 모형관과 벽돌 제작 방법 모형관, 무령왕릉 출토유물 등이었다. 5호분은 할석으로 쌓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천장이 활모양(궁휼식)이다. 모형 내부로 들어가 보니 돌을 쌓아올린 벽면 내부에 그림으로 오해한 흰색 칠들이 있었는데 이는 돌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백회를 덧칠한 것이라고 한다. 6호분은 굴식 벽돌무덤(전축분)으로 내부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횟가루로 사신도를 그려 넣은 무덤이다. 널길의 아치에 단 차이가 있었다. 최선생님이 무령왕릉분은 ‘one-arch'인데 6호분은 'two-arch'라고 강조하셨다. 벽돌에는 오수전이 새겨 있었고 창문 위 등잔을 놓은 등감이 있었다. 사신도와 양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오수전 장식의 벽돌로 보아 백제가 해상 활동을 통해 중국과 교류하여 도교를 수용했음을 짐작케 한다. 무령왕릉보다는 규모는 작지만 왕의 무덤이었을 것 같은데 앞서 공산성에서 언급되었던 그 일본인, 가루베 지온에 의해 무령왕릉을 빼고는 모두 도굴 당해 무덤의 주인들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지 않다니 한탄스럽다.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일본 와세다대학 한문학과 출신으로 1927년 1월 공주보통학교에 부임해 1930년대까지 공주 일대 백제고분 1천여기를 무단으로 발굴하고 유물을 수습했으며 일제 패망 뒤 본국으로 귀환해 니혼대학(日本大学) 교수를 역임한 인물이라고 한다. 15년 정도의 도굴로 1500년 전 역사를 지워버린 이 일본인이 국토를 침탈당한 한스러운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송산리 고분군의 하이라이트 무령왕릉! 묘를 쓸 때 ‘주산’과 ‘안산’을 조성하는 우리의 정서로 볼 때 지금보다 완만했다던 무령왕릉을 주산으로 보고 5호분과 6호분은 안산으로 본 가루베 지온의 착각으로 도굴되지 않았다 한다. 백제를 다시 부흥시킨 무령왕은 죽어서도 일본의 한 도굴꾼의 손은 허락하지 않는 위용을 보이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있다 세상에 나오시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1971년은 우리나라 발굴 여건이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17시간 만에 유물을 수습한 벼락치기 발굴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8척 장신(환산하면 180cm 정도)이고 수려한 외모이셨다는 무령왕릉의 흉상 앞 설명을 끝으로 코팅한 강서대묘 사신도, 아키히토(明仁)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朝香宮·61)의 공주 방문 자료 등을 보여 주시며 열정적으로 해설해주신 최병옥 선생님과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 관람 장소는 무령왕릉관. 정재근 해설사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전시관 안 유물들을 안내해 주시며 진품인 것들을 짚어 주셨다. 과연 1500여 년간 널길 입구 중앙에서 진묘수가 지키고 있던 무덤 속 유물들은 백제 문화의 위대함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국보로 지정된 13점의 유물을 포함해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실 명품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미처 못가서 애석했는데 갔다 온것처럼 머리속에 그려집니다. 또한 선생님의 글은 가뭄에 단비내리듯 저의 지식에 대한 열망도 채워줍니다. 감사해요.
와우~ 대단하세요. 선생님의 글이 저에게는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거기에 많은 서적을 참고해주시며 올려주신 글 감사히, 고맙게 잘 봤습니다. ^^
모든 샘들의 귀감이 되십니다. 잘 하셨습니다.
한 번 게을러지니까 정리하기가 힘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본 받아야 되는데 역시 ~ 다시 한 번 간 느낌입니다^^
답사기라기보다 한편의 논문처럼 논리가 넘쳐납니다. 이 답사기에 동성왕이 나오는 데....마침 이번 KBS1TV에서 방영할 '역사스페설' 12일(토)편에 동성왕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 하던데요 .자기 측근한테 암살당하였다나....
잊지 말고 봐야할텐데.. 영일만님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이쁜 강바람드리님 애쓰셨어요논리 정연한 글플이에 한번 휘감은 느낌 돌아 돌아 여기다라는 점이 찍고 싶네요 힘든 산고에 아낙처럼 영롱한 담방울에 찬사를 짝 짝 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