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순교자 신태보 - 13년 모진옥고 견뎌낸 "신앙의 금자탑"
신태보(申太甫)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집안은 양반가문이었다. 그는 1768년 용인에서 40여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베드로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12월 국내에 들어오자, 신태보는 1795년경 외사촌 동생 이여진(李如眞)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고, 정약종 황사영 황심 강완숙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신앙활동을 했다. 이때 신태보는 주 신부에게 성체를 배령하려고 서너 차례나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신태보는 1801년 신유박해의 거센 회오리가 지나자 경기도 용인현에서 교인 다섯가족을 찾아냈다. 그들은 친인척간인 늙은 여인들과 어린이들 뿐이었으며,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태보는 그때부터 8∼10일에 한 번씩 찾아와서 그들이 숨겨놓았던 한권의 복음해설서와 두서너 권의 기도서를 읽고 주일과 축일을 지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모임을 갖던 이들은 마침내 용인을 떠나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신태보는 자신의 가족 등 40여명의 교우를 이끌고 겨울에 강원도에 도착하여 산을 개간하여 마을을 형성했다. 이것이 기록상 나타나는 한국 최초의 교우촌(敎友村)이다.
이러한 교우촌이 박해의 태풍을 피해 꺼져가던 조선천주교회를 살린 ‘신앙의 불씨’였고, 성직자가 없이도 ‘복음의 씨앗’을 온전히 유지하고 퍼뜨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살아남은 교인들은 다시 용기를 잃지않고 모이기 시작했으며, 재난을 당한 교인 가족을 돌보고 그런 가족들끼리 모여 공동생활을 꾸려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앙공동체가 다시 조직되었으며, 곳곳에 교우촌이라는 집단적 교인촌락이 형성되었다.
모여든 교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자신들이 목격한 박해의 무서운 광경과 교훈이 되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박해로 인해 남편이나 아버지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던 과부나 고아들을 돌보며 거두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모이기 시작한 교인들을 주축으로 1811년 무렵부터 천주교회재건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주역들은 초기천주교 도입에 관련됐던 인물들의 2세들이었다.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 홍낙민의 아들 홍우송, 정약용의 아들 정하상, 주문모 신부 때부터 믿기 시작했던 이여진(李如眞, 요한)과 그의 사촌 신태보, 권철신의 사위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재건을 위해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냈는데, 이 청원서에 서명한 8명 가운데 한 사람이 신태보다.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는 1811년 10월 24일자,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는 11월 3일자였다. 밀사로는 신태보의 사촌인 이여진이 파견되었고, 경비는 신태보가 마련했다. 이여진이 동지사 일행에 끼어 1812년 초 북경교회에 청원서를 접수시켰으나, 북경교회 역시 1805년 박해가 일어나 성당이 파괴되고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가 학살되거나 귀양갔으며, 신학교도 파괴된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교황 비오 7세는 교황령 문제로 나폴레옹에 의해 퐁텐블로성에 감금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후 이여진은 1812년 말 다시 북경으로 밀행했지만 1814년 47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이러한 성직자 영입운동은 1829년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밀사를 파견할 때마다 신태보는 자금마련을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성직자 영입운동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자, 신태보는 개인신앙에 전념하는 한편 여러 지역의 교우촌을 두루 돌면서 전교에 열중했다.
그는 박해를 피해 강원도 산중에 있을 때나 서울로 올라와서 교회부흥사업에 전력할 때 늘 많은 교리서를 등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이후 그는 경상도 상주 잣골에 정착하여 자신의 수양에만 전념했다.
한편 1827년 2월 전남 곡성군에서 천주교인들 사이에 다툼이 발단이 되어 신입교우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곡성현감을 찾아가 고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뜻밖의 사태가 일어나 전라도 전역이 박해의 도가니로 변했다. 4월까지 전라도에서만 천주교인 240여명이 관아에 체포되었다.
신태보는 1827년 음력 4월 22일 경북 상주(尙州) 잣골에서 피신준비를 하고 있다가 새벽에 들이닥친 전주의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 신태보가 체포된 결정적 이유는 전주 감영에서 심문받던 교인들이 천주교 서적을 감영에 바쳤는데, 그 책 가운데 여러 권이 그가 필사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신태보는 3도를 돌아다니며 사교(邪敎)인 천주교를 퍼뜨린 주모자로 지목돼 4월 그믐부터 심문을 받았다. 심문과정은 그가 샤스탕(Chastan) 신부의 요청으로 남긴 〈옥중수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자 신태보는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만 진리를 따르고 난세를 당해 진리를 버린다면 그보다 더 비겁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관장(官長)은 법대로 처리하고, 나는 신념대로 행동하겠다”고 자신의 결의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에 화가 난 관장의 명에 따라 신태보는 가위주리, 학춤, 주리질, 줄톱질 등 모진 형벌을 받아 결국 가슴이 찢어지고 다리뼈가 으스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감옥으로 옮겨진 그는 앉을 수도 손발을 쓸 수도 없을 뿐더러 먹을 수조차 없게 되었고, 연일 계속되는 심문과 형벌로 온몸이 걸레가 되어 상처에서는 썩는 악취가 진동하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참혹한 문초를 받았지만 매에 못이겨 실신을 하면서도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5월 5일 전주판관, 무주부사, 고산현감, 익산군수 등이 배석한 합동 신문에서도 신태보는 “겉으로는 몸을 삼가고 예의를 지키는 듯하나 속마음은 썩고있는 작금의 공자 맹자의 가르침 보다는 참된 종교인 우리 천주교를 통해 덕행을 쌓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역설하여 입회한 관장들의 미움을 샀다.
또 신태보는 신분을 묻는 관장에게 “천주교인이 되면 양반과 상민의 차이가 없다”고 대답했으며,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외국종교를 믿는 것은 죽어 마땅한 죄가 아니냐고 묻는 관장에게 “종교도 우리에게 유익하면 배척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천주교의 윤리는 난세의 구급약”이라고 말했다.
당시 전주부윤은 천주교인들을 무한정 옥에 방치해 두어 굶주림과 고통으로 죽게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많은 배교자가 속출했다. 차라리 죽음보다 지독하고 오랜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태보는 굳건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전주옥에서 무려 13년이라는 긴 옥고를 치른 신태보는 결국 1839년 4월 12일(양력 5월 29일) 71세의 나이로 김대권, 김사건, 박사의, 이재행 등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당했다.
신태보는 신유박해 이후 자칫하면 꺼질 뻔했던 천주교신앙을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교우촌을 형성하여 ‘복음의 씨’를 뿌린 인물이다. 이후 그는 30여년 동안 오지의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교리서를 필사해 나누어주고 전도하는 등 복음의 밭을 갈기위해 전력했다. 이러한 그의 간절한 노력에 힘입어 천주교의 맥은 이어지고 꽃을 피워 귀한 열매를 맺을수 있었다.
또 그는 육신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참혹한 고문과 13년의 옥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 결코 무너지지 않을 ‘위대한 신앙의 금자탑’을 세웠고, 옥중수기를 남겨 초기 천주교인들의 ‘불멸의 귀감’으로 되살아났다.
/김 탁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