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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 베르나르딘 지음 / 강우식 옮김 / 바오로딸
1. 작가소개
J.L 베르나르딘 추기경
1928년 4월 2일 남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서 태어나 1952년 찰스턴 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애틀랜타 부주교(1966-1968), 위싱턴 D.C.에 있는 미국 주교회의 사무총장(1968-1972), 시카고 교구장(19722-1982), 주교회의 의장(1982-1996)을 지냈으며 1983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인 1996년 9월에 백악관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주는 훈장 중에 가장 명예로운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으며, 10월 중순경에 췌장암이 급속하게 몸속에 전이되어 사목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책을 마무리한 후, 1996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2. 내 마음에 다가온 글귀
머리말
자기를 버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일생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하지만 마음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무엇보다 올바른 기도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면 자기를 버리기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P16)
☞ 자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기도생활이 필요하다.
기도는 오히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귀 기울이는 관계를 의미한다.(P17)
☞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매우 직설적이고 퉁명스럽기까지 한 말투로 사제요 주교인 내가 스스로 실천하지도 않는 영성생활을 다른 이들에게 역설하며 요구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기도를 위해,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질적인 시간(quality time)을 마련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p19)
☞ 아래 사람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인 추기경님의 겸손한 마음. 자신은 실천하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라고 하는 것보다 모순적인 일은 없다.
따로 질적인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면 누구보다 그분께 질적으로 가장 좋은 시간을 내드려야 마땅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의 첫 시간만큼은 하느님께 내드리기로 결심했다.(p19)
☞ 주님께 가장 좋은, 첫 시간을 내어 드려야 한다. 내 삶의 십일조. 나도 실천하자.
자캐오가 자기 집 문을 활짝 연 것처럼 나도 내 영혼의 문을 활짝 열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주님께서 내 삶을 온전히 주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주님께 일부만 열어 보이기 일쑤였다. 그분께 마음을 열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드리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p22)
☞ 완전한 의탁, 내 일생의 목표.
1 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자신을 버리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를 버리는 첫 단계는 나를 비우는 일과 관계가 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획에서부터 가장 하찮게 여기는 집착 대상까지,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워야 주님께서 진정으로 주관하실 수 있게 된다.(p28)
☞ 많은 성인들이 말하듯, 나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의 나와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면 자신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나를 주관하시도록 해야 한다.(p29)
우리는 영성생활에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주변적인 것인지 쉽게 구별해 낼 수 있다. 본질적인 요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되기를, 그리고 다른 이들을 더욱 사랑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주변적인 것들은 자신에게 집착하게 한다.
☞ 영성생활의 본질은 누구를 사랑하는가에 달려있다. 나를 사랑하는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가?
자신을 비우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게 느껴지거나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므로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자신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p30)
☞ 버림으로서 채울 수가 있다. 역설이면서도 진리.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삶 안으로 들어올 때는 늘 예상하던 대로 정면으로 들어오지 않으며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측면에서 들어와 나를 놀라게 할 뿐 아니라 이내 자신을 비우도록 한다.(p30)
☞ 사람의 방법과는 다른 하느님의 방법. 그러기에 고통은 은총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믿었고, 주님을 신뢰했다. 나는 그분이 내 인생에 사건을 개입하도록 허락하셨다고 생각하는 한편 정형화된 허상과 왜곡된 진실이 참된 진실인 양 행세하는 오늘의 문화 풍토에서 과연 나의 진실이 받아들여질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믿음 안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나는 진실 외에는 가진 것이 없으며,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p36)
☞ 어떤 경우에도 진실만이 힘이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을 비우고 있었다. 이제는 나를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싶었다. (p40)
공개적으로 고소당하고 질문 조사를 받는 그 순간이 내게는 은총의 순간이었다. 물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은총의 순간이라고 느낀 것은 많은 사람이 보여준 사랑과 지지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 순간은 영적 성장의 순간이었다.(p41)
☞ 시련은 영적 성장의 훈련장이다.
나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스티븐 쿡에게 접근하여 고소인의 역할을 하도록 부추긴 것이 틀림없었다. 고소사건이 법원에 접수되었다는 뉴스가 발표되자 다른 주의 한 사제를 포함해 몇 사람이 재빠르게 라디오 지방 방송 토크쇼에 출연해 베르나르딘 추기경이 유죄라는 의견을 표명하고 나섰다.(p45)
☞ 세상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 교회 내에서도.
허위 고소사건의 배후 조종자가 성 그레고리 신학교에 몸담고 있는 문제 많은 사제라는 것도 밝혀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스티븐 쿡이 힘들게 버티며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신시내티 신학교를 중퇴한 후에 교회와 멀어졌고, 그 후 난잡한 생활에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후천성 면역결핍증을 않고 있던 그는 필라델피아의 한 아파트에서 친구의 간호를 받고 있었는데 주소는 비밀로 했다. 그가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었으며, 나는 목자로서 그를 꼭 찾아보아야 했다.(p47)
☞ 그는 추기경이 돌보아야 할 잃어버린 양이었다.
목자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서는 결코 사건이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무고사건은 내가 스티븐을 만나 화해하지 않고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p48)
그는 신학생 시절 자신이 믿고 있던 한 사제에게 성 폭행을 당해 교구청에 알렸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마음에 원한을 품고 교회를 떠났다.(p50)
☞ 그때 교회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더라면 그가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추기경을 무고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는 피해자였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교회가 이 일의 단초를 제공했다.
스티븐은 신학생 시절 자신을 추행한 신부만 고소하려 했으나 영적 조언을 해준다던 사제는 베르나르딘 추기경, 곧 나를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고소사건에 나를 끌어들이게 되면 교회에서 자신이 바라던 것을 틀림없이 받아낼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적 지도자’라는 신부가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고소 대상자 명단(다른 사제들과 함께)에까지 집어넣으라고 부추긴 것이다.
☞ 사건의 전말을 대하면서 참 씁쓸하고 답답한 느낌이 든다. 악의 부추김은 어디까지인가? 악의 세력에 넘어지지 않도록 정말 교회 구성원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
스티븐은 떨리는 두 손으로 성경을 받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어느새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가방에서 백 년 된 성작을 꺼내며 말했다. “스티븐, 자네를 위해 미사를 꼭 드려 달라는 부탁과 함께 알 수 없는 사람이 이것을 주었다네.” 그러자 스티븐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미사 참례 … 하겠습니다.”(p53)
☞ 그를 이해하고 그의 말을 들어주었을 때, 비로소 그와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사제생활을 해오면서 이보다 감동적이고 의미심장한 화해를 한 적도 본 적도 없다. 그날 오후에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능력과 은총을 표현하기에 인간의 말은 한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치유의 현시(顯示)였다.(p53)
☞ 어쩌면 하느님은 스티븐을 구원하기 위하여 추기경님을 도구로 쓰신 것이 아닐까?
“어떤 가정이든 마음의 상처와 분노, 소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정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정은 하나뿐이므로 사이가 틀어졌을 때일수록 있는 힘을 다해 화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영적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정의 구성원이 되면 상처받기도 하고 소외당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가정은 하나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화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 우리가 했듯이 말입니다.”(p54)
☞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다.
스티븐은 임종 때 자신이 성사생활로 되돌아온 것을 두고 “이것이 제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라며 웃음 지었다고 한다.(p56)
☞ 길 잃은 양을 찾으신 놀라우신 주님의 은총!
2. 암
예수님은 사람이셨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듯 그분도 고통을 느끼셨다. 그분은 분명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과 고통을 겪으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고통 이상의 것으로 변화시키셨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당신 자신을 비우심으로써 하느님께서 그분의 고통을 통해 더욱 충만하게 당신 능력을 드러내 보이도록 하셨다.(p58)
☞ 예수님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와 같은 눈높이가 되셨으며,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의 고통의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 들이셨다. 사람이 되심으로서 우리와 똑같이 되셨다.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극심한 고독감은 예수님의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하는 절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주님께서 고난과 고통을 겪으셨는데 과연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p59)
그렇다! 예수께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겪는 고통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겪는 고통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신다는 사실이다.(p59)
☞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예수님.
나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집착할수록, 우리의 운명을 조종할수록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게 되며 점점 무의미함으로 채워지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주님과 하나 되어 그분이 나를 온전히 차지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버림으로써 구원을 체험하게 되며 육체적·감정적·영적 고통 한가운데서 생명과 평화와 기쁨을 찾아야 한다.(p61)
☞ 결국은 나를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려면 다른 이들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그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누군가 병들었을 때,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억압적 사회구조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그들과 함께 어둠의 골짜기를 걸어가야만 비로소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62)
☞ 사랑은 그 사람이 힘들 때 함께 하는 것이다.
그가 “추기경님의 소변에서 빌리루벤이 검출되었습니다.”라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농담 삼아 “워렌, 빌리 루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내 소변 속에 들어가 있는 건가?”하고 물었다.(p70)
☞ 고통 속에서도 숨어있는 추기경님의 유머 감각.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육체적 고통 때문에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문병 온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기억이 난다. “건강할 때 기도 많이 하게. 병들 때까지 미루다가는 정작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p82)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마음을 모을 수가 없네. 신앙심을 잃어서가 아냐. 믿음은 그대로지만 고통을 견뎌내는 것만 해도 힘들어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네. 건강할 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게.“(p83)
☞ 기도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도 은총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도가 핵심임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건강할 때는 일상의 것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데 방해가 된다. 그러다 병에 걸리게 되면 모든 상황은 달라지고 만다. 나는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한창 건강하고 활동적일 때 기도생활이 몸에 배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p83)
3. 환자이기 전에 사제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목활동은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심오하다. 사목활동이 단순하다는 것은 매일매일의 구체적인 사건과 사람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목활동이 심오하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만남은 양쪽 모두를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로 이끌기 때문이다.(p92)
☞ 사목, 양들을 하느님께 이끄는 것.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과 함께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목자 됨’의 의미인 것이다. 사목자의 진실된 사목을 통해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게 된다.(p93)
☞ 사제는 양들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사람이다. 신부님들이 귀담아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일부 사목위원들만 함께 하지 마시고.
나는 예수께서 어린이를 안아주기 위해 팔을 벌리신 것과 온 세상을 포옹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신 일은 같은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분은 아버지의 치유하시는 사랑, 구원하시는 사랑을 인류 가족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으로 가득한 분이셨다.(p94)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예수께서는 바로 다음 날 그 사랑으로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다. 사제로서 그리고 주교로서 나의 사목활동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것이다.
☞ 목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종이다. 선택된 종.
암환자인 내 일상 안에서 시작한 사목은 많은 암환자와 나의 유대감을 깊게 할 뿐 아니라 주님과도 더욱 가까워지게 해주었다.(p98)
사람들은 사제들에게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과 그분 사랑의 진정한 증거자가 되기를 바라지 사제들이 정치가나 경영인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p103)
☞ 본당에서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의 모습은 유능한 경영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목자, 기도하는 목자이다.
사람들은 본당 활동이나 교구 활동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시시한 갈등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사제들이 그저 자신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p103)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목자의 선한 뜻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되고 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관심과 깊은 마음에서 나온 작은 배려다. 세월이 지난 뒤에 사람들이 사제나 사목자들을 회상할 때도 바로 작은 배려와 사려 깊음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p104)
☞ 관심과 배려만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암환자들을 위한 ‘비공식 원목 신부’가 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사람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올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투병생활을 하는 암환자들의 용기와 깊은 신앙심을 통해 나 또한 격려를 받았다.(p106)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고난과 고통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앙인으로써 나는 그분 안에서만 고통과 고난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수 있다.(p110)
고통을 끌어안음으로써, 고통이라는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는 동시에 그너머를 바라봄으로써 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p110)
☞ 고통의 그너머에 하느님이 계시기에 고통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은총은 어려운 상황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었다. 특히 허위 고소사건때 그랬고, 지금은 암으로 그렇다. 이런 것이 바로 그분이 내게 허락하신 평화의 은총이다.
☞ 추기경께 허락하신 하느님의 은총은 어려운 상황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었고, 그 은총의 목적은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최악의 순간에도 우리가 삶을 충만하게 살도록 도와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기도를 통해 얼마나 하느님과 관계를 깊이느냐에 달려 있다.(p111)
☞ 기도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다. 결코 놓치면 안 된다.
‘주님, 소중한 아침 기도시간에 몽상에 빠지거나 혹 문제 해결을 위해 궁리하는 데 쓰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버릇을 과연 고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나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시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 시간에 당신과 일치하지 못한 다해도 그 시간만큼은 절대로 다른 일을 하는 데 쓰지 않겠습니다.'(p113)
☞ 비록 기도가 되지 않더라도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드리자.
그렇다면 나는 그 시간에 무슨 기도를 바치는가? 먼저 성무일도를 바친다. 이것도 내게는 매우 중요한 기도다. 성무일도는 교회의 기도이며, 나는 이를 통해 모든 교우, 특히 세계 곳곳에서 성무일도를 바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연대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가 교회의 일부라는 느낌뿐 아니라 확신을 준다.
☞ 성무일도를 바치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기도 안에서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다음 묵주기도를 바친다. … 묵주기도는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묵주기도가 반복되는 기도 방식이라며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묵주기도는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를 통해 주님의 신비에 계속 머물도록 이끈다.(p115)
나는 또한 기도시간의 일부를 묵상에 할애한다. 이때는 성경 말씀과 영성 서적 등을 활용함으로써 최대한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한다.(p115)
☞ 책을 읽음에 그치면 소용이 없다. 마음에 닿으면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추기경님의 기도는 ①성무일도 ②묵주기도 ③렉시오 디비나로 요약된다.… 나도 따라 해야겠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며 그 안에 머무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할 수도 또 주님과의 일치 안에 머물 수도 없다. 우리에게 기도는 절대 필요한 것이다.(p115)
☞ 기도하지 않는 것. 하느님과 연결된 끈이 끊어지는 것. 미아가 되는 것이다.
환자들이나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나는 환자들의 명단을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사때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를 만큼 명단이 짧았다. 그러나 명단이 점점 길어져 더 이상 이름을 일일이 부를 수 없게 되었으며 지금은 7백 명을 넘어섰다! 그래서 암환자들과 다른 병을 앓고 있는 중환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명단을 손에 꼭 쥐고 한다.(p127)
저는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으나 도중에 교회를 떠났으며, 다시 되돌아갈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날 추기경께서 제 손바닥에 성유를 바르시고 제 손을 꼭 쥐어주시며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떤 내적인 평온함이 제 마음을 뒤덮었습니다.(p134)
☞ 목자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잃어버린 양을 찾을 수 있다.
이 검사를 하기로 한 것도 추기경님께서 제게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암이라는 병을 위엄있게 대면하시는 모습 때문이라기보다 추기경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겸손과 자비 때문입니다.(p135)
저희 부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희 부부의 가장 절친한 친구 조’가 되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날마다 기도 중에 추기경님을 기억하고 있으며, 특히 성 페레스린과 성 미카엘에게 추기경님을 보살펴 주실 것을 청합니다.(p138)
☞ 하느님께서는 추기경님께 암이라는 고통을 통해 암환자를 위한 사목을 펼치셨다. 목자는 언제, 어디서나 사목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4. 죽음과 친숙해지다
그분은 자신이 가르치신 바를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셨다. 당신이 섬기던 사람들을 온화하게 대해 주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겸손하게 순명하셨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은 하루하루의 생활(어떤 상황일지라도) 속에서 그분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 소명, 자신의 목숨조차 기꺼이 내놓으신 그분의 선택을 우리 자신이 생활하고 본받는 데서부터 비롯된다.(p142)
“나와 함께 걸어가자. 내가 짐을 어떻게 끄는지 잘 보고 배워라. 나와 같이 멍에를 진다면 무거운 짐도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아마도 짐은 궁극적으로 죽음 자체일 것이다. 죽기 전에는 흔히 고통과 고난을 겪게 된다. …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는 결코 우리의 짐을 없애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짐을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들인다면 죽음을 원수나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친구처럼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p143-144)
☞ 예수님께 의탁할 수 있을 때 죽음은 친구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죽음은 천국으로 나아가는 문이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내가 지금 기억하는 것은 뉴엔 신부가 죽음을 원수가 아니라 친구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점이다.… 뉴엔 신부가 말했다.
“실은 매우 단순한 원리라네. 우리가 두려움과 걱정에 시달리고 있을 때, 친구에게 그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두려움과 걱정은 최소화되고 또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지. 그러나 그런 것들을 원수나 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들을 부정하게 되고, 그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치게 되는 것이지. 죽음을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으로의 이행(移行)으로 이해하는 신앙인들은 죽음과 두려움을 친구로 바라보아야 하네.”(p145-146)
☞ 죽음은 천국의 영원한 삶으로 이사하는 과정이다.
나는 암환자로서 병자성사를 받았다. 한 성당 안에서 본당 환자들과 함께 병자성사를 받은 일은 모두에게 감동적인 체험이었다.(p150)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을 사로 잡았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내 힘이 다하는 그날까지 목자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p152)
☞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약속. 우리는 이를 굳게 믿는다.
오늘은 11월 1일, 가을이 겨울에게 길을 내주고 있다. 나뭇잎은 아름다운 빛을 잃고 세상은 눈으로 뒤덮일 것이다. 땅은 휴식을 취하며,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걸치고 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p169)
그러나 새 생명과 경이로움을 안고 봄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새봄에 나는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는 곧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되리라. 내세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일생 동안 최선을 다해 봉사하도록 세상으로 나를 부르신 하느님께서 지금은 본향으로 부르고 계심을 확신한다.(p169)
☞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한다는 것. 기쁨이다.
첫댓글 아름다운 묵상을 할 수 있도록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한 아침입니다!!
건강할 때 기도해야 한다는 추기경님의 말씀을 새깁니다.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화의 선물" 을 소개해 주심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제 마음에도 평화가 자리하고 있었네요...
"내가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언제 어느 때나 우리의 위로자이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이심을 추기경님의 글을 통해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요~~^^
" 우리는 버림으로써 구원을 체험하게 되며 육체적·감정적·영적 고통 한가운데서
생명과 평화와 기쁨을 찾아야 한다."(p61)...온전히 주님께 의탁해야 하는데 고통이 오지 않게 해주십사 기도하게 됩니다.
시간을 내어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며 읽으러 오겠습니다."고맙습니다!^^"
선물 감사합니다. 감동이예요. 건강할 때 기도하고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과 함께 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