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년 10월 12일, 딸이 죽었다. 권문해의 하나 밖에 없는 귀한 딸, 달아(達兒)가 죽었다. 권문해는 애끓는 마음을 부여잡고 통곡 할 뿐이다. 나이 50이 넘도록 자식 하나 두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아픔 끝에 딸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귀한 딸이 아비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권문해는 받아들이기가 힘겨웠다.
권문해는 딸이 죽은 다음에도 “역병으로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혹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며 딸이 다시 살아나 주기를 바랐다. 가망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권문해는 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배경이야기
◆ 권문해의 아들과 딸
권문해는 20세가 되던 해인 1553년, 현풍 곽씨, 곽명(郭明)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곽씨 부인과의 사이에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1582년 6월 곽씨 부인은 먼저 하늘로 떠난다. 29년을 함께 한 아내를 떠나보내는 슬픔과 함께 자식을 두지 못한 아픔이 컸다. 권문해는 1582년 첫 번째 아내가 떠나고 홀로 2년을 지낸다. 아내도 떠나고 자식도 없는 권문해는 1584년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게 된다. 두 번째 아내는 함양 박씨의 박명(朴明)의 딸이다.
그렇게 애타게 소생을 바라던 초간 권문해는 두 번째 아내 함양 박씨와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와 아들 둘을 얻게 된다. 딸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1585년에서 1587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박씨부인과의 결혼이 1584년이며, 딸이 1587년에 죽기 때문이다.) 또 1588년 그의 나이 55세에 득남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1589년 56세에도 아들을 하나 더 얻는다.
◆ 조선시대 출산의례
조선시대에는 문종의식과 장자제도가 강화되면서 집안의 대를 잇는 일은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결혼한 여자는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야 여자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전통사회의 인식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들 낳기를 바라는 다양한 의례행위가 존재했다. 첫째로는 가신(家神)에게 기원하는 행위로 초하룻날 아침에 목욕하고 비는 <지앙> 또는 물 한 사발과 초를 꽂은 쌀 한 그릇을 차려놓고 비는 <삼신>과 관련된 행위이다. 둘째로는 자연물에 기원하는 행위가 있다. 신통력이 있다고 알려진 바위, 당산 혹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경우이다. 셋째는 특정한 행위를 하거나 음식을 먹음으로써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산한 부인의 옷을 빌려 입거나 아기 낳은 집에서 쌀과 미역국을 훔쳐다 먹고, 흰 장 닭에 백도라지와 백일홍 나무를 넣어 삶아 먹는 등의 행위가 있었다.
출산 날이 다가오면 그 날을 미리 예측하고 조산할 사람을 결정해 놓는다. 출산을 위해서는 반드시 조산할 사람이 필요한데 좋은 사람을 가려 조산원으로 모신다. 일반적으로 시어머니가 조산하고, 경우에 따라 친정어머니나 마을에서 많은 아이를 순산한 할머니나 아주머니를 모셔다가 아이를 받게 한다. 일단 조산원으로 결정되면 매사를 깨끗이 가려서 행동해야 한다. 출산을 앞둔 산모를 위해 <피옷>을 준비하는데 검은 치마나 쪽물을 들인 치마로 이 옷을 입고 출산을 하게 된다. 이 피옷은 출산 후 3일째 되는 날 목욕한 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아이가 나오면 목욕을 시킨다. 목욕을 시키는 순서는 양손과 발을 물을 묻혀 닫고 코를 씻기고 얼굴을 씻긴 다음 몸을 씻긴다.
해산을 하고 나면 이를 알리는 금줄을 치는데, 지역에 따라 금줄에 다는 내용물에 차이가 있다. 남자일 경우 숯, 고추, 백지를 오려서 새끼에 끼워 걸고, 여자일 경우에는 고추를 빼고 거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줄을 치는 이유는 출산을 알림과 동시에 상가 등 궂은 곳에 간 사람이나 궂은 음식을 먹은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급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원문정보
◆ 원문 번역
1587년 8월 28일 맑음.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때 부(府, 대구부)에 도착하였다. 달아(達兒)가 머리 위에 종기[瘢瘡]가 나서 약을 발랐다. 딱지가 앉은[合瘡] 뒤에는 아래로 내려와 목에 부기가 생겨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았다. 거의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침으로 터트려 피를 낸 뒤에야 부기가 조금 가라앉아 다시 살길이 있었다. 정원(靜元)의 종기 자리에 고름[濃, 膿]이 나온다는 기별이 와서 바로 사람을 보내 탐문하였다. 밤에 비가 내렸다. 1587년 10월 7일 맑음. 달아(達兒)를 대구 관아[大衙]에서 부사(府司)로 옮겨가 피접(避接)시켰다. 저녁때부터 기운이 고르지 않더니 밤에는 통증마저도 그치질 않았다. 1587년 10월 8일 구름이 끼어 흐렸다. 선산 부백(善山府伯) 윤인함(尹仁涵) 영공(令公)이 수로로[由水路] 하빈(河濱)의 얼사촌(孼四寸) 윤인협(尹仁浹)의 집에 왔다가 저녁에 부강정(浮江亭)으로 올라와 묵었다. 어린아이[小兒, 달아(達兒)]의 병은 곧 비각(鼻角, 고뿔) 정도의 우연한 증상이라고 여겼다. 오후에 강정(江亭)에 나가 보고 날이 저물어서 머물러 잤다. 밤에 아이의 증세가 아직까지 고르질 않다고 들었다. 1587년 10월 9일 맑음. 아침에 아이[兒, 달아(達兒)]의 병이 수그러들지를 않았기 때문에 먼저 들어왔다. 1587년 10월 10일 비가 내렸다. 출근하지 않았다. 아이[兒, 달아(達兒)]의 병세는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관아의 북쪽 담장 안에 토우(土宇)를 지어 묻은 곳이 있는데, 그것이 동티가 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우나 또한 확실하지는 않다. 저녁에 잠시 역기(疫氣)의 증상을 드러내었으나 또한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1587년 10월 11일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비를 뿌렸다. 병든 아이의 역신(疫神, 천연두)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여 얼굴 위에는 마치 좁쌀을 흩뿌려 놓은 듯하였고, 온몸에는 마치 물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1587년 10월 13일 맑음[晴]. 아침밥을 먹은 뒤에 (달아를) 옛 병장기를 놓아둔 곳으로 옮겨 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도록 하였다. 관내에서 남청방(南廳房)으로 나갔다. 1587년 10월 14일 맑음. 역병으로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혹 깨어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종을 시켜 연일 열어보도록 하였으나 가망 없는 일이다.
개요
개요
출전 : 초간일기(草澗 |
저자 : 권문해(權文海) |
주제 : 대구, 가족관계, 딸 |
시기 : 1587-08-28 ~ 1587-10-14 |
장소 : 대구광역시 |
일기분류 : 생활일기 |
인물 : 권문해, 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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