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의 시조이신 강이식 장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진주강씨의 후손들이 시조에 대한 사적을 알 정도이고 譜學을 하는 분 들이 상식적으로 아는 정도의 내력 이었는데,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여 우리나라의 방송사 들이 제작하는 드라마 중에서 장군의 활약상이 부각되고있다. 우리의 역사교과서는 그 자료가 수나라측의 역사서에 의존하다시피한 것으로서 많은 보완이 필요 할 것이다.
강이식 장군에 대한 자료는 근세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저술한 조선상고사와 서곽잡록. 대동운해등에서 고증하여 이번에 드라마로 내 보내고 있는것이다.
강이식 장군은 서기 598년(고구려 영양왕 9) 수나라와의 제1회 전쟁인 [임유관전쟁]에서 정병 5만을 이끌고 수나라 군사 30만명을 섬멸시킨 고구려 병마도원수(지금의 야전사령관)이다.
묘는 만주 심양현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元帥林驛) 앞에 있으며 [兵馬元帥姜公之塚(병마원수강공지총)]이란 큰비가 있었으나 중국 문화혁명 때 현대 중국 혁명가 장작림의 묘를 성역화하면서 이웃의 고총들을 모두 매몰하는 바람에 지금은 거북 좌대만 남아 있다.
사적명
봉산사 전경(시조님 사당)
춘향제일-음력 3월 10일
소재지
진주시 상봉서동 871-1
연혁
봉산사는 진주강씨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곳이다.
고려 광종(950년 경) 때부터 사당이 있었다는 구전이 있다. 1570년(선조 3) 진주 봉곡촌에
사당을 건립하고 봉산사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1592년 임란 때 왜적의 분탕질로 소실되고
120년 후인 1714년(숙종 40) 대봉산(지금의 비봉산) 아래 봉산사를 중건하였다. 1802년
(순조 2) 다시 화재로 소실, 1911년(융희 11) 봉서동에 다시 봉산사를 지었지만 왜정의 탄압
으로 사당이 폐쇄되고 사당터가 국유화되었다. 그러나 1921년 사당터를 다시 매입하고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웠다. 1940년 왜정의 토지수용령으로사당을 봉지(지금의 가매못) 옆 옛날
봉바위가 있던 자리로 이전되어 지금의 봉산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남아 있었다.(아래 1950년
대 봉산사 참조) 1975년 호암 강계중(姜桂重) 전 회장이 거액의 사비를 희사하고 후손들이 힘을
모아 1983년 12월 20일 준공하였다. 봉산사 좌측에 있는 대봉사는 해군대장 강기천(姜起千)
진주강씨의 시조이신 강이식 장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진주강씨의 후손들이 시조에 대한 사적을 알 정도이고 譜學을 하는 분 들이 상식적으로 아는 정도의 내력 이었는데,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여 우리나라의 방송사 들이 제작하는 드라마 중에서 장군의 활약상이 부각되고있다. 우리의 역사교과서는 그 자료가 수나라측의 역사서에 의존하다시피한 것으로서 많은 보완이 필요 할 것이다.
강이식 장군에 대한 자료는 근세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저술한 조선상고사와 서곽잡록. 대동운해등에서 고증하여 이번에 드라마로 내 보내고 있는것이다.
강이식 장군은 서기 598년(고구려 영양왕 9) 수나라와의 제1회 전쟁인 [임유관전쟁]에서 정병 5만을 이끌고 수나라 군사 30만명을 섬멸시킨 고구려 병마도원수(지금의 야전사령관)이다.
묘는 만주 심양현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元帥林驛) 앞에 있으며 [兵馬元帥姜公之塚(병마원수강공지총)]이란 큰비가 있었으나 중국 문화혁명 때 현대 중국 혁명가 장작림의 묘를 성역화하면서 이웃의 고총들을 모두 매몰하는 바람에 지금은 거북 좌대만 남아 있다.
사적명
봉산사 전경(시조님 사당)
춘향제일-음력 3월 10일
소재지
진주시 상봉서동 871-1
연혁
봉산사는 진주강씨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곳이다.
고려 광종(950년 경) 때부터 사당이 있었다는 구전이 있다. 1570년(선조 3) 진주 봉곡촌에
사당을 건립하고 봉산사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1592년 임란 때 왜적의 분탕질로 소실되고
120년 후인 1714년(숙종 40) 대봉산(지금의 비봉산) 아래 봉산사를 중건하였다. 1802년
(순조 2) 다시 화재로 소실, 1911년(융희 11) 봉서동에 다시 봉산사를 지었지만 왜정의 탄압
으로 사당이 폐쇄되고 사당터가 국유화되었다. 그러나 1921년 사당터를 다시 매입하고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웠다. 1940년 왜정의 토지수용령으로사당을 봉지(지금의 가매못) 옆 옛날
봉바위가 있던 자리로 이전되어 지금의 봉산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남아 있었다.(아래 1950년
대 봉산사 참조) 1975년 호암 강계중(姜桂重) 전 회장이 거액의 사비를 희사하고 후손들이 힘을
모아 1983년 12월 20일 준공하였다. 봉산사 좌측에 있는 대봉사는 해군대장 강기천(姜起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