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목사의 현장은 다양했다. 철거민과 함께하는 일은 기본이고 집회나 시위의 현장에서 앞장서는 일부터 시작해서 일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직장을 알아보는 문제,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치료를 잘 해줄 수 있는 병원을 소개하는 문제, 몸이 아파서 보약을 먹기는 해야 하는데 돈이 없을 때, 동거생활을 하다가 애를 갖게 되어서 제왕절개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을 때,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허둥댈 때, 가전제품을 샀는데 도둑을 맞고 돈을 못 갚아서 고소를 당했을 때,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갔다 훈방이 되어야 하는데 신원보증을 해줄 사람이 없을 때, 주민등록이 말소가 되었을 때, 등등 돈 없고, 힘없는 이들이 당하는 억울하고 분한 일들, 답답한 일들을 함께 해야 했다. 나는 사돈의 8촌까지 뒤져보아도 자기 주변에 9급 공무원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땅의 진정한 민중들 사이에 있었다.
내가 이런 일들에 관여 할 수 있었던 것은 돕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부천 삼화한의원 박종훈 원장, 지평교회 정인조 장로처럼 오직 내가 가진 ‘뜻’을 보고 평생을 도와준 수 많은 분들 때문에 이어질 수가 있었다. 그것을 나는 내가 가졌던 ‘도덕적 권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모든 권위처럼 ‘도덕적 권위’도 나름대로 힘이 있는 법이다. 도덕적 권위가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예를 한 가지 들어 보자.
어느 날 전혀 만난 일이 없었던 고등학교 동창생에게서 전화가 와서 부천에 사는 자기 교회 교인 동생이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알려준 병원으로 찾아갔더니 36살의 김 씨는 온몸에 화상을 입어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차마 얼굴을 쳐다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간호를 하고 있던 김 씨의 누나가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복도의 벤치에서 상황설명을 들었다.
전라도 산골에서 올라온 김 씨는 부천에 와서 자취를 하면서 혼자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오직 몸뚱이 하나로 살아 가다가 33살이 되어서야 주변의 소개로 비로소 결혼을 하게 되었다. 비록 월세 단칸방이었지만 신혼살림을 차리고 사는 재미를 붙이려고 하는데 가끔씩 아내의 행동거지에 이상한 모습이 나타났다. 혼자 말로 중얼거린다던가 멍하니 앉아 있다든지 하는 일들을 이상하다는 생각은 되었지만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서 차일피일 하다가 그만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입덧이 심해지자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게 되어 몸이 허약해지자 정신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이런 상태로 아이를 낳았다가는 큰 일 나겠다는 생각에서 건강해진 다음에 아이를 낳자고 했지만 아내는 한사코 고집을 피웠다. 드디어 달이 차서 아이를 나았지만 아내의 상태는 아이를 돌 볼만 한 처지가 되지 못했다. 20일 쯤 되어서 몸을 움직일 때쯤 되자 아내는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가 버렸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까 간난아이만 혼자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서 광주에 있는 처갓집으로 전화를 하니까 아내가 그곳에 가 있었다. 아내를 설득해서 돌아와서 한 동안 아기를 돌보다가 90일 째 되는 날 아기가 계속 울어대자 순간적으로 실성한 엄마가 아이를 죽였다. 김 씨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처가에서 애걸복걸을 해서 다시 살게 되었다.
아내는 여전히 살림을 전혀 하지 못하고 병원에 들락날락 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피임약을 먹으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먹지 않다가 아내가 또 다시 임신을 해서 아이를 떼자고 했지만 이번에도 한사코 아이를 낳겠다고 해서 이혼을 하자고 했더니 처가에서 위자료를 요구했다. 합의된 위자료의 내역은 그 동안 아내 병원 치료비로 처가 집에서 빌린 돈 4 백만 원에 기왕에 이혼 소송을 하려면 들어가야 된다는 돈 2 백만 원에다가 방을 얻으라고 3 백만 원을 합해서 계 9 백만 원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일 년 안으로 주기로 하고 드디어 이혼을 했다. 다시 혼자가 된 김 씨는 9백만 원의 빗을 진 상태에서 실의에 찬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고가 난 그날도 설렁탕 한 그릇을 사먹고 집에 들어가 잠을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방 안의 공기가 어쩐지 메케했지만 평소의 습관대로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켜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온 몸이 화염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사고가 나자 조사를 나온 경찰관은 당연히 모든 주변 정황으로 볼 때 자살사건으로 조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김 씨는 확률 50%로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지만 문제는 치료비였다. 김 씨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법률적으로는 환자가 자해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 엄청난 치료비를 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여기서 나의 역할은 자살이 아닌 사고가 되도록 해야 해서 2 가지를 하기로 했다..
첫 번째 할 일은 내 단골 거래처인 경찰서로 가는 것이다. 거북한 사이도 자주 만나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다. 즉 애증관계가 성립된다. 언제나 나와 신경전을 벌리고 사는 정보과장을 찾아 가서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착한 일’도 가끔 해보라고 간곡하게 호소를 했다.
두 번째 할 일은 돈 생기지 않을 일에 경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을 대비해서 지역 신문기자에게 취재를 부탁을 하는 것이다. 다행히 작전의 효과가 나타나서 김 씨는 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또 하루는 아침에 막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울산에서 온 사람인데요. 목사님 좀 만나 뵙고 싶습니다.”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로 나갔더니 허름한 차림새의 두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27세의 변창기라는 청년은 리바트가구를 만드는 현대목재 노동조합의 교육홍보부장이고, 함께 온 김 군은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한 쪽 팔이 잘린 22살의 김 군이었다. 김 군은 2년 전인 20살에 입사하여 22만원씩 받고 일을 한지 두 달 만에 사고가 나서, 사람은 먼저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잘려진 팔은 나중에 승용차에 실려 와서 접합수술을 받았으나 팔을 쓰지는 못하고 건성으로 달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치료가 다 끝났다고 하여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한 팔을 가지고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4,000만 원을 줄 터이니 회사를 나오지 말아 달라는 제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노조 대표들과 항의를 하다가 위원장은 구속되고 김 군과 변 군은 서울의 큰 병원에 마지막으로 더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기 위하여 올라온 것이다.
서울에 온 김에 내 책 ‘옛날 하나님과 요즘 하나님’을 읽고서 무엇인가 도움이 될 것 같아 나를 찾아 부천까지 왔다는 것이다. 변 군이 김 군을 고아라고 소개하기에 몇 살부터 고아원에 있었느냐고 하니까 “눈 뜬께 있데요”(눈을 뜨니까 고아원에 있데요, 즉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있었다) 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김 군이 얼마나 어수룩해 보이는지 꼭 산에서 방금 동네로 내려와 아이들에게 잡힌 토끼 같아 보였다.
두 사람을 데리고 언제나 성실하게 답변을 해주는 이 양원 변호사를 찾아갔다. 이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현행법으로는 쓰지 못하는 팔이라도 일단 붙어 있으면 50% 밖에 노동력 상실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회사가 제안한 그 이상의 보상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허망한 심정으로 떠나는 김 군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비디오 가게나 할 생각이라고 해서 간곡하게 당부를 했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팔 잘린 돈이라고 다른 돈과 다르지 않다. 너는 아직 나이나 경험으로 볼 때 혼자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돈으로 무엇을 할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고 그 돈은 안전하게 수익성 있게 보관하고 기술을 배워라. 22살의 네 인생을 4.000만원에 걸었다가는 너는 분명히 돈도 잃고 절망에 빠져 다시 한 번 죽을 지경이 될지도 모른다.”
김 군은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답게 ”전화할게요.“ 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떠났다.
얼마 후에 변 군으로부터 서울에 있는 본사에서 사무직 노조를 결성하는데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런 경우 경찰이 정보를 입수하면 ‘제 3자 개입 금지’ 조항에 의해서 엮여 들어갈 수가 있어서 비공개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본사 직원들은 노조를 만드는 일을 두려워 했지만 드디어 성공적으로 노조가 결성되고 1990년 12월 7일에 노조결성보고대회에서 격려사를 해달라고 해서 압구정동에 있는 본사로 갔다. 대회장인 현대목재 지하 강당에는 울산공장과 용인공장에서 올라온 생산직 노동자들과 서울지사의 사무직 노동자들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사무원들이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어색해 보이고 꼭 자기가 앉아있을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것같이 보였다. 불안해하는 표정의 사무직 조합원들에게 아무쪼록 앞으로 그들 앞에 닥칠 시련들을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격려사를 했다. 사실 두렵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 차기였다. 오직 용기로서 극복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 그것은 십자가가 주는 의미였다.
노조가 파업을 할 때는 지루해지기 쉽기 때문에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와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해온다. 그럴 때 나는 단결과 투쟁의 의지를 북돋는 내용보다 노동자들에게 현상을 다른 면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하려 했다. 그럴 때에 많이 써먹은 예화이다.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이 희생적으로 회사를 경영 한다고 자부를 하는 어떤 나이 많은 장로 사장님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불만이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 회사에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어떤 성질 급한 노동자가 회사의 담벼락에 붉은 스프레이로 ‘인간답게 살자는 데 어떤 놈이 개소리냐?’고 휘갈겨 썼다.
구호를 본 사장은 구호 밑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건드리면 문다’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단식농성을 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노조위원장이 “사장님, 들어가셔서 단체협상을 하셔야지 여기서 이러시고 계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하고 간청을 했다.
사장은 “개하고 무슨 협상을 해?”하고 눈도 뜨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할 수 없이 위원장이 노조원들을 모아놓고 “어떤 놈이 그 따위로 썼어?” 하고 화를 내며 범인을 색출했더니 20 살도 안된 애송이가 머리를 긁으면서 나왔다. 위원장은 그 애송이를 데리고 가서 사죄를 하고 구호를 다시 쓰도록 했다.
새로 쓴 구호는 “인간답게 살자는 데 어떤 분이 말씀 하냐?” 였다. 사장은 그제야 뒤를 돌아다보고서 “그만하면 됐네” 하고 협상에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