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6.16
갱정유도(更定儒道)의 1965년 '평화통일' 재연 행사를 보면서
news letter No.371 2015/6/16
지난 6월 4일 갱정유도는 ‘평화통일’ 선포 50주년을 맞이하여 광화문 광장에서 50년 전 벌였던 시위를 재연하였다. 이 시위는 1965년 미국이나 소련의 종용(慫慂)을 멀리하고 민족 고유의 도덕을 살려서 남북이 힘을 합쳐야만 평화통일이 가능하다며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당시 언론들은 이 사건을 ‘장안에 난데없는 청포데모’, ‘갓데모’ 등으로 대서특필하였는데, 평화통일 성명서의 내용보다는 외형에 치우쳐 평가절하 하였다. 흰 고무신을 신고 갓망건에 청포(靑袍)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중앙청을 향해 달려간 500여 명의 시위대는 당시 위정자들을 놀라게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민족 주체성과 평화통일을 각성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종교인들에게는 민족의 분단 현실에 눈을 뜨게 하였다. 반공법이 작동하던 군사정부 시절, 지리산 청학동의 한 작은 종단에 어떻게 이 같은 선언이 가능했는지 오늘날의 종교, 특히 남북 분리신화를 강조하면서 민족을 위한 기도회나 하는 종교단체들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날 열린 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노길명 교수는 당시 신문들이 이 사건을 해프닝 정도로 다루었지만, 한국 현대 사회사나 종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이 사건은 민족 분단과 6.25 전쟁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강렬한 민족자주의식과 주체의식을 표출하였으며, 둘째, 분단의 논리인 반공을 국시로 삼은 군사정권시대에 항의하며 반공 일변도의 정책을 숙고하게 하였으며, 셋째, 민족도의(民族道義)를 통한 평화 통일을 주장하고 있으며, 넷째, 1960년 4.19 혁명세력의 민족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5.16 이후 잠복한 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민간 주도의 통일논의를 활성화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주장하였다. 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노길명 교수의 글을 논평한 필자는 노 교수의 논지에 동의하면서 몇 가지 사항을 덧붙였는데, 그중 최근 민족담론의 동향과 갱정유도의 평화선언의 종교사적 의미에 대한 내용만 여기에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개항 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족은 항시 민중의 중심에 있었지만 현실의 정치학에서 민족은 언제나 부차적으로 취급되어 왔다. 탈냉전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많은 위정자들은 민중을 달래고자 기회만 있으면 민족통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 삶의 현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개항기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서구문명 도입에, 식민지 시대에는 식민지 근대화에, 해방 이후 냉전체제하에서는 반공분단과 경제발전에, 90년대 이후 탈냉전시대에는 시장논리와 종북논란에 밀려 민족은 항상 후순위 채권이었다. 지금도 대외 개방을 강조하는 세계화의 논리와 민족을 최우선시하는 민족의 논리 간에 보이지 않는 대립이 진행되고 있다. 현실의 시장논리와 공동체의 민족논리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 세계화의 유령(幽靈)은 민족을 한갓 근대의 산물로 규정하며 폐기처분하려 한다. 그리고 민족에 대한 부정적인 담론들을 마구 분출시키고 있다. 세계화를 주장하는 이면에는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시장근본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기능을 국가의 공적 영역에 까지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장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현대판 공룡이 된다. 이 같은 담론들 하에서 세계화를 추진하는 주체(主體)의 동기화(動機化)는 완전히 배제된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국가로서 아직도 수많은 희생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건너뛰고 미룬다고 해서 민족의 고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개벽종교들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금후 한국과 한민족은 인류사회를 영도할 정신적 지도국으로 또 후천개벽의 지상낙원의 주역국(主役國)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민족을 최우선시 한다. 1965년 선포된 갱정유도의 자주적 평화선언은 한말 개벽종교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시대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통찰력과 민족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 선언이 발표된 7년 후인 1972년 남북이 협의한 7.4 남북공동선언이 나왔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여기에 담긴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들은 갱정유도의 평화선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개항기 이후 지속되어온 동학,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 개벽종교들의 민족공동체의 이상들이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반공종교와 민족종교’의 대립구도 속에서 민족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개벽종교들은 미군정에 의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는 미군정하의 종교법제 마련과 적산불하 정책에서도 잘 나타난다.¹ 생존에 급급했던 개벽종교들은 공동체의 이상을 상실하고 분열과 변신을 거듭하였다. 일부에서는 기독교의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하였으니 통일교, 전도관, 용문산 기도원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기독교계 개벽종교들은 민족의 영광과 미래를 기약하기는 하나 모두 반공을 주장하고 있어서 민족만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적인 개벽종교들이 아니다. 개벽의 종교임에도 남북분리 신화를 담고 있는 종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갱정유도는 개벽종교의 막내둥이로서 당시 자주적 평화통일 시위는 정통적인 개벽종교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것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노리는 한말의 동아시아 정세가 재연되고 있는 듯하다. 중국은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의 진출도 가능하다는 뉴스도 있고, 사드가 배치되면 미군에 더 많은 작전권의 이양이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는 것 같다. 크게 보면 과거 서구열강이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던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은, 한말 이후 부국강병과 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한 저항적 민족주의의 산실인 개벽종교의 목소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1. 일제에 고초를 겪은 민족종교에 돌아가야 할 많은 일본계 신사와 교파신도의 적산자산들이 거의 전부 기독교(영락교회, 충현교회 경동교회 등)에 배정되어, 반공교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해방직후 남한 개신교 신자의 수는 대략 10만 명 수준이었다. 당시 남한 인구를 2,000만 명으로 보았을 때, 약 0.5%정도, 그리고 서울의 교회수도 30개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해방이후 10년 만에 약 2,000여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거의 90% 교회는 미군정의 적산재산을 불하받아 세운 교회들이다. 윤승용_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seyoyun@daum.net 논문으로 〈한국사회변동에 대한 종교의 반응형태 연구〉,〈근대 종교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방안〉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공저),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공저), 《현대 한국종교문화의 이해》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