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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명인물 스크랩 원균
박유승(박노동) 추천 0 조회 224 10.03.25 10: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원균(元均)의 묘 ...

 

 

 

 원균은 이곳 평택에서 1540년 1월5일 출생하였는데, 이순신보다는 5년 연배이었다. 그리고 1597년 칠천량(漆川梁)전투에서 三道水軍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으나 대패하였고, 원균은 여기서 그의 외아들인 원사웅(元士雄)과 함께 戰死하였다. 이 곳 원균의 묘는 가묘(假墓)이다. 戰死한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그가 태어난 이 곳에 가묘를 만들었다.

 

 

 

 

 

 

 

원균과 그의 아들 원사웅의 죽음에 관하여 지금까지 이것이 定說이었다. 그러나 인조실록(1624년)의 기록에는 "반정공신 2등에 원사웅이 올랐다. 그는 宣祖때 선무공신이었던 원균의 아들이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1597년  칠천량전투에서 죽었어야 할 원사웅이 27년후에 다시 실록에 등장하는 것이다. 당시 원사웅의 나이 50세이었다.

 

 

 

1597년 죽었다는 元均의 죽음도 의문투성이이다. 1598년 실록에는 원균이 조정에 올린 狀啓도 실려 있다. 사실은 ? 원균도, 원사웅도 임진왜란때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1921년까지의 원주원씨 족보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원균과 원사웅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921년이후의 족보에서는 칠천량전투이후의 원균,원사웅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삭제되어있다고 한다.  후손들이 일부러 조작하였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원균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이순신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이순신은 영웅을 넘어 성웅(聖雄)이었다. 특히 박정희대통령의 제3공화국부터... 이순신에 대한 폄하는 금기시되는 사회분위기이었고, 이순신에 대한 神話는 일제시대, 6.25동란, 4,19혁명,5,16혁명 등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되었지만, 임진왜란을 이순신 위주로만 설명하다보니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한 美化도 있었던 것...또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이순신을 평가하는 정설(定說)은.....

 

 

 

▶  임진왜란 기간(1592~1598)에 전쟁의 최고 지휘부인 조선 조정은 철저히 무능했고, 당쟁으로  일관하였다.     ▶ 이순신은 이 같은 黨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구하려고 몸을 바쳤다. ▶ 이순신은 뛰어난 전략과 거북선 등 빈틈없는 준비로 엄청난 군사적 열세를 뒤집고 海戰을 승리로 이끌어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 이순신은 동료 장수인 원균 등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백의종군한다.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패잔병을 수습하여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나라에 대한 "忠"으로 일관했으며,가정에서는 "孝"를 실천하는 등 문과 무를 겸한 성인중의 성인이었다.

 

 

 

이에 대한 定說을 뒤집어 생각해 보는 것...그리고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은 숨은 얘기들을 들추어 보는 것... 원균의 묘에서 깨우쳐야 할 역사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 경상도와 전라도 水軍은 左,右로 나뉘어져..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李舜臣,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그 지휘권이 있었다. 그러나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경상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리자 경상우수사 元均은 홀로 적과 싸웠으나 수영이 함락되었다.

 

 

이때 원균으로부터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에게 왜란의 급보가 전해진 것은 왜군이 침공한지 2일후였지만, 이순신이 경상도로 출동한 것은 20일 후인 5월4일이었다.

 

 

 

원균은 영남해역에서 단독으로 왜군의 함정 10여척을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이순신에 원군을 계속 요청하였지만, 이순신은 계속 출동을 미루기만 하였고..이는 후일 두사람의 不和를 빚게 되는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순신의  출동 지연은 이순신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다. 출동은 그의 작전권 범위를 벗어나 있었으므로 조정의 許可가 필요하였고, 작전상으로도 절대 서두를 일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합류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원균과 불화의 시작이 되었으며, 宣祖도 이순신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는 이유가 되어, 적을 앞에 두고 조정의 내분과 갈등으로 연결되고 혼란이 벌어진다.  

 

 

 

출동을 미루는 이순신에게.. 군관 송희립은 " 큰 도적이 치고 들어와 그 행세가 커졌는데,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성만 지킨다고 혼자 보전될 리 없으니 나아가 싸우는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운이 꺾일 것이고, 또 불행히 전쟁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臣下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녹도만호 정운도 이에 가세한다. "영남도 우리 땅이므로 적을 치는데 있어서는 전라도,경상도에 차이가 없습니다. 신하로서 국은을 입고 국록을 먹다가 이런 때에 죽지않고 어떻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이에 이순신은 출정을 결심하고 군사와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원균과 합류하여 모두 40척을 대파하였다. 이어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합세하여 이른바 3道 水軍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이로부터 약 5개월간 왜선 약 330척을 격파하거나 불태워 없애는 등 엄청난 전과를 올리게 되고, 조선은 守勢에서 攻勢로 전환할 수 있었으며, 명나라 이여송의 출전과 강화회담으로 이어진다.

 

 

 

  

 

 

 

  

 

 

 

 

海戰에서의 패배와 명나라의 화해 주선으로 일단 철수한 일본은 再侵을 노린다. 그리고 사전에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하여 재침의 시기(時期)와 경로에 관한 역정보를 흘린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출동을 지시하지만, 이순신은 거짓 정보임을 알고, 출동을 미루자 격노한 宣祖는 이순신을 하옥시키고, 원균을 새로운 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 당시 이순신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지만, 宣祖는 이순신이 전투에 주저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원균의 판단도 이순신과 같았으나, 조정의 강력한 요구로 출동준비를 마무리하고  결전에 임하였다.  이 때 상상할 수도 없는 돌발사건이 벌어진다. 都元首 권율장군이 출동 지연이라며,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원균에게 곤장을 때린다. 요즘 말로 참모총장이 해군사령관에게 직접 태형을 가한 것이다.

 

이에 분함을 참지못한 원균은 명령에 의하여 水軍을 출동시키지만, 분명히 왜군의 계략에 빠져 패배할 것이라는 비장한 말을 남기고 수군 3만명과 함선 200척으로 전선을 향하였다.  짐작대로 원균의 수군은 왜군 1천척에 大敗하고, 원균도,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모두 전사하게 되고,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할 수 있었다. 정유재란(丁猶再亂)이었다.

 

조선 수군이 완전히 와해된 이 海戰을 칠천량(漆川梁)해전이라고 부른다. 원균의 戰術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이 패전은 조정의 무능력과 無知 그리고 일본군의 奸計에 허망하게 당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한 개인의 역사는 시간이 갈수록 後代의 사람들에 의하여 때로는 각색되고, 윤색되기 마련이다. 어떤 인물은 사실보다도 훨씬 더 부풀려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형편없이 왜곡,축소되기도 한다. 보통 이순신은 英雄을 넘여 聖雄이고, 그 상대역인 원균은 무능한 겁쟁이에다 모함꾼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두 사람의 골이 깊어지게 된 원인은 먼저 이순신이 제공한다.

 

그 빌미는 옥포해전의 승리이었다. 이 승리는 이순신과 원균이 합동으로  참여하여 승리한 것으로...서로 공을 탐하지 않고 승리의 보고(狀啓)를 할 때 서로 협의하여 하기로 했슴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이를 어기고 단독으로 장계를 올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비롯하여 부하들은 모두 상을 받았지만, 원균과 그 부하들은 어떤 포상도 받지 못하였다.

 

또 이러한 사건도 있었다. 이순신이 출정한 날이 1492년 5월4일인데, 이순신은 출정하기 직전에 원균 관할 지역인 남해의 군사창고를 불태웠다. 그것이 왜적의 손에 넘어 갈 경우, 가까이 있는 이순신 관할인 전라좌수영의 방어에 큰 위협이 된다는 이유이었다.  이 행동은 불필요한 이순신의 큰 오판이었으며, 자신의 관할지역도 아닌 곳에서 원균과 사전 협의도 없이 자신의 지역만을 위한 利己的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公的 이유에 의한 갈등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私的인 일로 인한 갈등일 것이다. 이순신이.. 원균의 측실(側室)소생인 원사웅(元士雄)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功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일러 바친 것이다. 이에 宣祖는 " 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앞으로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하여 밝혀진다. 元士雄은 측실소생이 아니라 정실(正室)소생이었으며, 12살이 아니라 18살이었고, 실제로  아버지 원균을 따라 전장터에서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확인도 안 하고 원균을 모함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으며, 이순신이 하옥될 때 그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이순신이 파직되어 하옥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원균에 대한 모함 사실과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출정하지 않았다는 罪인데...두번째 이유는 사실 이순신에게 억울한 것이고, 오히려 조정이 일본의 계략에 넘어 간 것이었다. 

 

 

원균의 가장 큰 불명예는 이순신을 모함하여 하옥시키고, 자기가 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칠천량전투(漆川梁海戰)에서 조선 수군을 붕괴시킨 주인공이라는 것인데....사실은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하였고, 칠천량전투는 원균의 뜻과 작전이 전연 아니었고, 조정의 무능과 도원수 권율이 곤장을 때리며 강요한 탓이었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원균은 이순신과 비교될 때 항상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무능한 장군"라는 부정적 선입견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원균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인 이순신의 친구인 서애 유성룡 (西涯, 柳成龍)조차도  선조에게 " 옛날부터 육장(陸將)은 수전(水戰)에 능하지 못하고, 수장(水將)은 육전에 능하지 못하나, 원균은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용감히 싸우며 그 모두에 능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전쟁이 끝난후 그의 저서 "징비록"에서는 원균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 성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또 중앙과 지방의 많은 인사들과 연결하여 이순신을 모함하는데에 힘을 다했다." 라고 적고 있다. 원균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당쟁에 따라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원균은 비겁한 卒將이아니라 너무 용감해서 문제가 있는 그러한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을 결과적으로 평가하였을 경우 원균은 분명히 패장(敗將)이었고, 이순신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원균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너무 왜곡되어 있고, 억울한 점이 많다. 그의 칠천량패전도 그는 반대하였지만

조정의 무능과 강요로 인한 예정된 패배이었다. 원균은 이전투에서 그의 외아들과 함꼐 죽어 후사도 완전히 끊기고, 그 시신도 못 찾아 가묘(假墓)로 그 억울함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후 이순신과 권율은 1등공신, 원균은 2등공신으로 추천되었으나, 선조의 事理있는 판단으로 1등공신이 된다.

 

 

 

그러나 역사는 또 한번의 반전(反轉)을 기록한다. 선조와 광해군을 지나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仁祖시절... 역사는 다시 왜곡된다. "선조실록"은 광해군시절에 편찬된 것이고,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때에 다시 수정된 실록인데...당시 이율곡의 제자들인 西人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북인(北人)으로 분류된 원균은 다시 무능하고 모함만 일삼는 비겁한 패장으로 기록되는것이다.

 

 

 

더욱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주관자는 이순신의 후손인 택당 이식(李植)이었다. 

 

 

 

 

 

 

이순신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美化)와 원균에 대한 지나친 왜곡과 평가절하...당쟁과 선조의 무능에 기인한 바 크지만.. 이순신은 난중일기등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원균의 기록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실록에는 이순신보다 더 많은 장계와 보고를 하였음이 나타나 있는데...

이렇게 한쪽은 자료가 철저히 보관되고, 나머지 한편은 철저하게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

누가 의도적으로 없앴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이다.

 

 

 

조카에게 보낸 짧은 편지도 亂中日記에 남아 있는데, 이순신에 불리한 사건의 일기등은 전부 빠져 있다. 이 것도 누군가 후손에 의하여, 당쟁의 결과로 제거되었다는 주장도 이해할 만하다.

 

 

 

 

 

 

 

역사는 정말 勝者의 기록인 것 같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極과 極의 평가와 반전.. 이순신은 물론 구국의 충신이었지만, 한 사람만을 영웅화시키기 위하여 다른 무고한 장수를 왜곡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오히려 이순신의  영웅적인 모습을 오히려 훼손할지도 모른다.

 

 

 

 

 

애마총(愛馬塚)...선조가 원균장군에게 하사한 말의 무덤이다. 원균과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원균이 전사하자, 그의 유물을 싣고 고향에 돌아 온 후. 식음을 전폐하다가 주인을 따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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