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에
늦은 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잠결에 받았더니 “나야. 오랜만이야.” 속삭이듯 말한다.
K다. 잠이 깨며 공연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사이드 테이블에 부딪치며 내려놓았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주말 밤의 목소리에 취기가 묻어있다. 안쓰럽다. 내게 전화를 하다니.
학창 시절 엄격하기로 소문난 여학교만 골라 다닌 나는 또래의 남학생과 사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교환일기도 쓰고,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낭만적인 약속도 하고, 날라리처럼 한번 놀아볼 것을. 전형적인 학교모범생으로 집과 학교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책 속 세상에서 살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옆 집 아주머니가 수녀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야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오빠 부부에게 친구 집에 간다고 하면서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장학생으로,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었다. 방학마다 아르바이트로 보내고 월급은 고스란히 오빠에게 바쳤다.
정신병원 사무실, 신발공장을 거쳐 동네 방직공장에서 일할 때는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교대 없이 아침부터 꼬박 고된 노동을 하고 자정이 넘은 시각에 공장에서 나왔다. 문 밖엔 짙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가려면 공장 앞 넓은 건천을 건너야 했다. 둑을 내려가자 물기 없는 모래벌판이 괴물의 비늘처럼 달빛에 번쩍이는데, 나는 멀리 계룡산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어깨와 같이 우람하고도 따뜻한 능선. 그 능선을 얼마나 자주 바라보았던가. 능선 위 하늘엔 유난히 빛나는 별들의 무리가 있었다. 별들은 어둠 속에 파묻힌 나를 위무하듯 명랑하게 반짝였다.
20대가 되면 파티가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20대는 내게 혹독한 사막의 시기였다. 뜨겁게 들끓는 마그마가 폭발할 곳을 찾지 못하고 내면에서 싸늘하게 굳어갔다. 왜 삶은 내게 이토록 불친절한가. 화가 치밀었다. 건천을 건너 반대편 둑길에 올랐다. 얼어붙은 둑길 저 앞 가로등 불빛 아래 누군가 와인 병을 품에 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기다려 주었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 사랑에 빠진 사람의 대뇌피질의 내측섬, 전대상, 대뇌기저핵 두 곳, 모두 네 부위에서 활발한 혈액 흐름이 관찰되어서, 이른바 '사랑병'을 뇌 촬영으로 확인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연구에 참여한 앤드리어 바텔스 박사는 “뇌 검사를 통해 누가 누구를 정말로 사랑하는지 확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야말로 아는 사람들의 사진을 죽 늘어놓고 내가 저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사랑한다고 말하는 저 사람은 나를 참으로 사랑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그리는 정결한 사랑은 현실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고,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할수록 흩어져 손가락 사이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K는 모임에서 만났다. 뿔테 안경을 쓰고 온화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좋아하는 배우 한석규와 닮았다. 어느 늦가을 저녁 무렵, 버스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다 마주쳤다. 그날 나는 몹시 의기소침하고 울적했다. 그가 인사를 하더니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경자네 과수원쯤 갔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우산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면서 다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가져온 우산을 함께 썼던가.
친구들과 몰려간 주점에서 메모를 하다 버린 냅킨을 그는 호주머니에 넣어 가져갔다. 이따금 어두운 나를 부신 눈으로 바라보았다. 딸을 그리는 늙은 아버지의 노래 ‘내 사랑 클레멘타인’을 그에게 부탁하여 들었다. 친구들이 갑자기 불러내어 맨얼굴로 나간 내가 쑥스러워하자, “지안 씨 자체로 아름다워요.” 그는 한석규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문장은 작은 불씨처럼 기억에 남았다. 그 뿐. 그가 직장 때문에 인천으로 가고, 나도 신변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시간이 한참 흘러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얼굴에 살도 많이 붙고, 한석규와는 더 이상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결혼하셔야지요.” 내가 말을 높이자 “일을 하다 보니 그럴 틈이 없네요.”그도 이내 존댓말을 했다. 악수를 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이 어색했다.
감정은 이제 지나간 그 순간, 추억 속에 고여 있을 뿐. 강물도 흘러가고, 세월도 흘러간다. 사람의 마음도 흘러가버린다. 그는 21세기로 건너오지 못한다. 20세기 비밀의 숲에 남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세월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땐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누군가“당신 자체로 아름다워요”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삶은 모두에게 그의 성장을 위해 불친절한 얼굴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사랑이란 목숨 바치는 거창하고 화려한 것뿐만 아니라 따뜻한 미소, 작은 배려에도 깃들어 있다는 것을.
비 내리는 먼 숲에서 소쩍새가 울던 밤, 보라색 라일락 향기에 숨이 멎을 것만 같던 밤, 공기가 달콤하던 20대의 봄밤으로 돌아가 본다. 이제 누굴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 뇌를 촬영하지 않아도 좋다. 기억의 갈피갈피 꽃잎처럼 꽂혀 있는 얼굴들, 그 빛깔이 사뭇 곱다.
첫댓글 지안씨 반가워요. 슬프고도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얼굴 뒤에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나이를 먹어서 좋은 건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덜해진 거 같아요. 무심히 지난 시절을 굽어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어요~^^
수고 많으세요 회장님~ 안동에서 학하동으로 이사 왔는데, 지금은 정말 많이 변했지요. 건천만 빼고 완전히 바뀌었어요.^^ 감사합니다.
아~ 덧칠하지 않은 수채화 같은 한 편의 서사를 봅니다.
젊음과 열정과 설렘이 비밀의 숲에 있군요.
그는 21세기로 건너오지 못한다.
추억이 다 이런거겠지요.
흐린 봄날에 마음이 맑아집니다.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데 그때의 그 감성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되었대요? 감사합니다 사무국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