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의 쇠말뚝 뽑기
이오덕
연구위원·우리말 연구소
요즘 행정당국에서, 지난날 일본제국이 우리 땅 곳곳에 박아 놓은 쇠말뚝을 뽑아 내는 일과, 일본제국이 좋지 못하게 고쳐 놓은 땅 이름을 우리 것으로 도로 찾아 내는 일을 한다고 떠들썩하다. 이런 일들은 민간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실제로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하여 오던 일이다. 행정하는 사람들은 행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산같이 쌓여 있는데 이런 일까지 한다고 하는 것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행정은 민간에서 하는 일을 도와 주면 얼마나 좋겠나.
2월 17일 ㅎ신문에 난 <"일제 쇠말뚝"뽑기·옛 지명 살리기> 제목의 기사에서 몇 대문을 들어 잘못된 말을 바로잡아 보겠다.
- "일제 쇠말뚝" 뽑기·옛 지명 살리기 (큰 제목)
이 제목에 나온 "일제"와 "지명"은 한문글자 로 나와 있다. 우리 글자로 "일제"라 써서 잘못 알 것 같으면 "일본제국"이라 쓰면 된다. "지명"은 "땅 이름"이라 써야 하고.
- 광복 50년, 통일로 미래로 (제목)
연재하는 기획 기사의 제목인 듯하다.
먼저 "광복"이란 말인데, 올해가 광복 50년이냐 해방 50년이냐로 의견이 맞서고 있는 모양이다. 행정부에서는 광복 50년이라 하고, 학계에서는 해방 50년이라고 하는 것 같다. 내 생각은 해방 50년이 옳다. 광복이란 말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선 때에 정부에서 쓰기 시작해서 퍼뜨린 말이기에, 올해가 광복 50년은 아니다. 그런데 해방이란 말은 1945년 일본제국이 패망하자 우리 백성들의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이다.
그 다음 "미래"라는 말인데, 우리 말로 "앞날"이라면 될 것을 왜 모두 "미래"라는 말을 쓰고 싶어하는지 한심하다.
"통일로 앞날로"
이렇게 써도 좋지만
"하나되는 앞날로"
라고 쓰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 50년, 하나되는 앞날로!" 이렇게 말이다. 무슨 말이든지 백성들이 쓰는 말을 써야지, 관청에서 쓰는 말을 따라 써서야 어떻게 "참 언론" 노릇을 하겠는가.
- 일제가 민족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우리 국토의 "혈맥" 곳곳에 박아 놓은 쇠말뚝을 뽑아내고 일제에 의해 개악된 지명은 고유지명으로 바꾼다. (기사 첫머리)
"차단하기"는 "막기" 또 "끊기"로 쓰면 된다.
"일제에 의해…"는 "일제가 나쁘게 고친 땅 이름은 우리 땅 이름으로" 이렇게 써야 할 말이다.
-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면 경북 의성군의 자미산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데 일제가 "봉황이 날아가 버렸다"는 의미의 비봉산으로 억지로 지도에 표기해 현재 비봉산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같은 기사)
"대표적인"은 "대표가 되는"이라고 써야 우리 말이 된다. "형상"은 "모습"이라 하든지 "생김새"라고 하는 것이 좋다.
"의미"는 "뜻"이라 하면 된다.
"표기해"는 "적어"라고 쓰면 된다.
"현재"는 "지금"이 좋다.
"비봉산으로 불리고"는 "비봉산이라 (말)하고"로 써야 우리 말이 된다. 이 "불리고"가 일본말법이다.
- 3월 1일 "광복 50주년 3·1절 기념 문화 축제"가 4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립 중앙박물관 앞 마당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3·1절 기념 행사가 옥외에서 문화 축제로 치러지기는 처음이다. (같은 기사)
"축제" 이것은 일본말을 따라서 쓰는 말이다. 우리 말은 "잔치"다.
"대대적으로" 이것도 일본말이다. "크게" 하면 시원스런 우리 말이 된다.
"옥외" 이것도 일본말 따라서 쓰는 말이다. "바깥"이나 "집밖"이라면 된다.
- 고유제에 이어 철거 경과 보고가 있고 원로시인 박두진 선생이 광복과 철거의 의미를 서사시 형식으로 쓴 "대국민 메시지"를 낭독한다. (같은 기사)
"고유제"란 말은 큰 일을 신명에 알리는 제사를 가리키는 말이니 그대로 써야 하겠다.
"의미"는 "뜻"이란 우리 말을 쓰는 것이 좋다.
"대국민 메시지"는 "대국민"이란 한자말도 안 써야 하고, "메시지"란 서양말도 버려야 한다. 더구나 이것이 시의 제목이라니! "국민에게 알립니다"든지 "온 국민 앞에 밝힙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낭독한다"도 "읽는다"면 그만이다.
지금까지 지적한 말들은 거의 모두 일본말과 일본말법으로 된 말이다. 바위에 박혀 있는 쇠말뚝을 뽑는 일도, 총독부 건물 뜯어 없애는 일도 다 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머리속에 박혀 있는 일본말의 쇠말뚝은 어째서 뽑으려고 하지 않는가? 일제 총독부가 우리 온 겨레의 피속에 주사해 넣어 놓은 독약과 같은 일본말은 어째서 그토록 신이 나서 쓰고 싶어하는가? 우리 말이 이 지경으로 되어 가지고서야 쇠말뚝이고 돌집이고 아무리 알뜰히 뽑고 뜯어 없앤다고 해도 민족정기는 찾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점점 기가 살아 날뛰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창간호
우리 것을 잡아먹는 외국종 동식물과 외국 말글
이오덕
우리 땅에 살던 개구리들이 농약 때문에 논밭에서는 다 죽었지만 그래도 산골짝 개울 가에는 살아 있더니, 요즘은 그것들마저 외국종 개구리에 다 잡아먹히고 있다고 한다. 물고기도 외국종이 들어와 우리 것이 외국 물고기의 밥이 되고, 미국에서 들어온 무슨 고약한 풀이 또 우리 땅 곳곳에 퍼져가는 모양이다.
동물과 식물뿐 아니고 우리가 입으로 지껄이는 말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들도 요즘은 '열쇠'라 하지 않고 '키이'라 한다. '생일잔치'라고 말하는 아이는 드물고 거의 모두 '생일파티'라 한다. 쇼핑·세일·오리지날… 물건을 사러 가는 주부들의 입에서 예사로 나오는 말들이다.
이와같이 서양말 즐겨 쓰는 버릇은 일본말 즐겨 쓰는 버릇이었고, 중국글자말 자랑스럽게 쓰는 버릇이었다. 중국글자말에서 일본말로, 다시 서양말로… 이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그만둔 정신상태에서 보여주는 슬픈 버릇이다. 우리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하게 여겨서 덮어 가리고 지워 없애고 싶어하고, 그래서 남의 것을 쳐다보고 흉내내고 따라가고 싶어하는 병든 몸가짐, 바로 얼이 빠진 종살이 버릇이요, 망국망족의 정신병이다. 외국의 동식물을 들여온 것도 정신병자들이 한 짓이었다.
이래 가지고 민주주의를 해? 이래 가지고 통일을 해? 할 재주 있으면 해 보라! 이래 가지고 교육을 한다고? 이래 가지고 문학을 한다고? 정말 웃기는 노릇이다.
세계화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래서 어린애들에게 영어 가르치고 한문 가르친다고 난리가 났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제것 다 버리는 것을 세계화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런 세계화의 끝장이 어찌 되는 것인가 내 눈에는 너무나 환하다.
여기서 우리가 나날이 보고 듣고 쓰는 중국글자말 한두 가지만 가지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다음은 ㅎ신문 3월 19일 치에 나왔던 기사 제목이다.
중년 여성 '발 모양 변형증' 환자 많다.
볼 좁고 굽 높은 신발 착용으로 30·40대 후반에 주로 발생.
이 글에 나온 '착용'이란 말을 어떻게 쓰는가 생각해 보자. 우리 말에서는 '옷'이면 '입는다'고 한다. '모자'라면 '쓴다'고 한다. '신발'이라면 '신는다'고 해야 한다. '이름표'라면 가슴에 '단다'고 해야 되겠지. 이렇게 우리 말은 우선 사람마다 그 몸을 가려 주거나 꾸며 주는 물건만 해도 그 물건마다 하는 말이 다 다르다. 얼마나 넉넉하고 재미있고 자랑스러운 말인가 ?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제 나라 말을 버리고 중국글자말을 써서 '모자'도 '옷'도 '신'도 '이름표'도 '넥타이'도 모조리 '착용한다'고 하면서 유식한 척하니 이것이 정신병자들 하는 짓 아니고 무엇인가?
이번에는 3월 20일 치 ㄷ신문에 난 광고문의 한 대문을 보자.
전학원에 도덕성 회복운동 현수막·표어를 부착하고 대국민 캠페인을 전개합시다. (한국학원총 연합회 '도덕성회복'운동 전진대회 개최 광고문)
이 글월에서 '현수막'은 '드림막'으로, '대국민 캠페인'은 '국민운동'으로, '전개합시다'는 '펼칩시다'로 쓰는 것이 옳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착하고'란 말이 문제다.
'현수막·표어를 부착하고'
이렇게 되어 있으니 '현수막'도 '부착하고' '표어'도 '부착하고'가 된다. 우리 말이라면 '드림막'(현수막)에서는 마땅히 '걸고'(내걸고)라고 해야 될 것이고, '표어'는 '붙여서'로 써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중국글자말은 우리 말을 다 잡아먹는다. 마치 커다란 외국종 개구리가 우리 개구리를 모조리 잡아먹듯이.
한 가지만 더 보기를 들어 보자. '길이'는 자로 '잰다'고 하고, '무게'는 저울로 '단다'고 한다. '곡식'('곡물'이 아니다. 오늘 신문에 '미국, 북한에 곡물 수출'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나와 있는데, '곡물'은 일본사람들이 쓰는 말이다.)-'곡식'은 되나 말로 '된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말이다. 그런데 중국글자말로는 모조리 '측정한다'고 쓴다. 일본말에서도 '하카투'(計) 한 가지만 쓴다.
이렇게 되어서 우리 말이란 것이 하도 책에서만 쓰고 있는 글에 끌려가고 글을 따라가다 보니 (그 책의 글이란 것이 모조리 중국글자말과 일본말법으로 되어 있으니) 요즘은 정작 우리 말을 한다(쓴다)고 하는 것이 그만 외국말 외국글의 질서를 따라가는 꼴이 되어 '콩을 잰다'고 한다. 또 '저울에다가 몸무게를 잰다'고 한다. 이런 말은 어쩌다가 철없는 사람들이 쓰는 것이 아니라 이름난 문인들이 이렇게 쓰고, 학교 선생님들이 이렇게 쓰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이들이 어떻게 우리 말을 바로 쓰겠는가?
죽어가는 배달말, 그것은 소리 한 번 질러 보지 못하고 생매장 당한 숱한 우리 백성들의 목숨이다. 도시의 쓰레기장에서 비닐 부대에 무더기로 처넣어 꽉 봉한 채 버려져 숨이 막혀 죽어가고 썩어가 흙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된 그 수많은 여린 병아리들의 처참한 모습이기도 하다. 아아, 이래 가지고 우리가 죽어선들 어느 땅이고 하늘이고 헤맬 자리조차 있겠는가?
그러니 누구든지 유식한 말을 지껄인다든지 글로 쓴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부모형제들의 목숨을 짓밟는 죄를 짓는 것이다. '만난다'고 할 것을 '조우한다'고 하고, '백성'이라고 할 것을 '민초'라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을 한다'고 할 것을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는 것조차 그렇다. '그 소식을 듣고'할 것을 '그 뉴스를 접하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몰랐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모르고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법의 상식이다. 더구나 아이들 앞에서 어려운 말, 유식한 말, 어른스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하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다.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잡아먹는 사나운 외국종 동물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날마다 끊임없이 반성해야 비로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 말을 찾아 쓰는 공부를 해 봅시다. 죽어가는 말을 살리는 일입니다.
문제 1. 다음과 같은 말이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 또는 상품을 설명한 말에 나왔을 때, 우리 말로 어떻게 바꾸어 써야 할 것인지 그때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착 (한다· 하고·하여…)
접한다. (접하고· 접해서· 접하면…)
사용한다. (사용하는· 사용하면· 사용해…)
비해. (이 집은 저 집에 비해 더 낡았다.)
문제 2.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 (써야) 할 때 흔히 어떤 한자말(중국글자말)을 쓰고 있는지 적어 보시오.
나선다.
일한다.
쉰다.
땅
(잠)잔다.
날마다
<글쓰기>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