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대 영창과 법정- 5·18자유공원/ 20150328
주차장에 차를 대고 주변을 둘러보니 조경수 백목련이 먼저 띈다. 뜨겁게 타들어간 꽃봉오리 끝이 짙은 다갈색이다. 봄이라고 밀어올린 소망이 꽃샘추위에 얼어붙은 흔적들이 짠하기만 하다. 1980년의 봄을 말하는 것이냐, 순백의 목련꽃이여…….
5·18자유공원 입구에 서면 왼쪽으로 공원을 알리는 푸른색 팻말이 서 있고 오른쪽으로 검은 빗돌이 서 있다. 두 개의 돌덩이 위에 올린 구름덩어리 같은 돌에 패인 ‘5·18자유공원’ 글자가 선명하다. 옆으로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들불열사기념비’가 있다.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 등 7열사를 북두칠성으로 형상화하였다. 다음은 비문 전문이다.
“칠흑 어둠속에서 별은 빛나고 혹한을 지나 들꽃은 피어 납니다. 다만 지극히 낮고 뜨거운 열정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타올라 영원한 들불 한 점, 밝은 별은 노동자와 민중의 가슴에 깃들어 모든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벗이 되었습니다. 삼가 세상의 순결한 것들의 이름을 빌어 아름답고 고귀한 님들의 자취를 여기에 세웁니다.”
5·18자유공원은 상무신도시 개발과 함께 조성되었으며 33,058㎡(1만 평) 규모이다. 당시 민중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연행 구금하고 재판 수감한 군사법정과 영창을 원형으로 복원 재현해 놓았다. 원래 영창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어울림아파트 406동이 들어섰다. 법정은 대략, 김대중컨벤션콘코스홀쪽으로 이어지는 길가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영창의 위치는 당시 육군전투병과 교육사령부가 있던 자리로 보병, 포병, 기갑부대이든 장교가 되려면 반드시 거치는 곳이다.
입구에 서서 공원을 보면 붉은 색 바닥 안에 둥근 흰 선이 그려져 있고 그 안은 잔디밭이다. 그런데 붉은 테두리가 ‘오’자 형상이다. 이 ‘오’자는 공원 상공에서 찍은 여러 발간물의 사진을 보면 확연히 도드라진다. 그 둥근 ‘오’자를 지나 ‘한 일(一)’자의 물길-분수-이 있고 영상 전시실인 ‘자유관’의 지붕은 ‘여덟 팔(八)자이다. 전체적으로 5·18의 형상화이다.
해설사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패해 보상, 기념사업 등 다섯 가지를 관철하려는 의미”라고 말하였다. 세계 학자들이 “국가 폭력과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과거 청산이 단편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광주에서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피해 보상’ ‘기념사업’의 5대 원칙이 모두 관철되었으며 과거 청산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사례”로 보았다. 이 내용은 ‘광주광역시 5·18기념문화센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의에도 기록되어 있다.
헌병대 본부사무실, 헌병대 식당, 영창, 헌병대 중대내무반, 법정 순서로 설명을 들었다. 철망 펜스의 문이 열리고 직진으로 7~80m 거리에 구령대가 보였다. 그곳까지 당시 붙잡아온 시민군을 끌고 가는 데 두 시간 정도가 걸렸고, 150~200m 정도 거리로 보이는 구령대에서 영창까지는 네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냥 걸어가도록 한 것이 아니라 기어가기, 거꾸로 가기, 오리걸음 온갖 군대기합을 동원하였으며 “나는 폭도”를 외치게 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너희는 폭도이고 국가전복 위협분자이며 죽어야 할 사람이며 필요 없는 사람들이다.”고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무력감에 빠뜨렸다고 한다.
‘헌병대 본부사무실’ 건물이 있는 쪽에 트럭이 한 대 있었다. 헌병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시민군의 모습, 그리고 오라에 묶여 끌려가는 시민군의 모습을 설치하였다. 헌병대본부사무실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였으며 계엄군에 끌려온 시민들을 조사했다. 곤봉, 곡괭이자루, 송곳 등으로 고문을 자행하며 억지자백을 받아내는 곳이라니 성선설과 성악설의 끝없는 논쟁이 떠오른다. 창고 건물을 지나니 시민들이 얼차려 기합을 받는 조형물을 설치하여 보는 이마저 피가 거꾸로 솟게 한다. 머리를 땅에 박고 두 팔을 허리에 대고 있다. 이곳 연병장은 지금은 잔디가 깔려 있지만 원래는 모래와 자갈이 깔린 곳이었다 하니 인권 유린이 어느 지경이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헌병대 식당’ 또한 고문과 조사가 자행되는 취조실로 쓰였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구타 등으로 피범벅이 되며 매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술서와 진술서를 써야만 했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나눔의 정신 주먹밥 체험’이라고 쓰인 5·18기념문화센터에서 걸어놓은 현수막이 보인다. 지금은 체험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초소를 지나 ‘영창’으로 진입하였다. 영창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끌려와 10월 27일 광주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감금되어 있었던 곳이다. 들어서니 왼쪽으로 빨랫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목욕실’ ‘면회실’이라고 쓰인 건물이 보인다. 40명을 세워놓고 군인이 호스로 물을 두어 번 뿌리는 게 목욕이었다고 하니 목욕실이라는 명칭이 부끄럽다. 사람이 가장 싫을 때가 감옥에서는 여름철이라고 하던 신영복 선생의 옥중서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 구절이 떠오른다. 면회실 또한 당시엔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감방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네 개의 널빤지를 반원 모양으로 맞추어 상단부를 만들고 아래는 시멘트로 역시 반원 모양으로 벽을 바른 감시헌병의 자리가 있다. 이 널빤지들은 1980년 당시의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뭇결 사이사이마다 시민들의 비명이 박혀 있을 것만 같다. 저 널빤지로 거문고를 만든다면, 한의 울림이 아니 들리겠는가. ‘철거 전의 영창’ 사진이 뒷벽에 걸려 있다. 이 사진이 있어서 철거해버린 당시의 영창을 1999년 재현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6개의 감방은 부채꼴로 되어 있어 감시헌병이 수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구조이다. 구금된 시민들은 아침6시부터 저녁10시까지 하루 16시간을 정좌자세를 취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때에는 감시헌병의 구타와 고문을 받아야 했다. 감방 두 곳에는 시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놓아 실감을 높이고 있고 나머지는 빈 상태였다. 빈 감방 중 맨 끝 감방에는 ‘5·18영창 내부 재현 모형’이 설치되어 있었다.
‘헌병대 중대내무반’은 텅 비어 있다. 다른 장소에는 조사, 고문 등의 장면이 실물 크기로 설치되어 있던 데 비하여 휑한 느낌이다. 이곳 역시 조사, 고문 등이 일어난 장소였을 것이다.
‘법정’ 건물 옆에서 안내문을 먼저 읽는다.
"이곳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1980년 8월에 급히 만들어진 군사법정이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신군부가 상무대 안에 법정을 만들어 재판을 한 것이다. 법정에는 무장한 헌병들이 도열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1980년 10월 하순부터 421명에 대한 약식재판을 진행하였다. 구속자들은 재판이 시작되자 액국가를 소리 높여 부름으로써 부당한 군사재판에 저항했다. 1980년 12월 말에 있었던 항소심인 고등군법회의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재판부는 이미 짜여진 각본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하였다. 구속자들은 재판 과정에서 신군부의 정권 찬탈과 광주 학살 만행을 폭로하며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법정 입구 오른편에는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 편액이 걸려 있고 검은 벽돌 벽면 하단에 붙인 ‘머릿돌’의 빛깔이 도드라지게 희다. 법정 안으로 들어가니 무장헌병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불의한 국가권력 앞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과 그들을 심판하는 재판관들의 조형물이 있다. 이곳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옷깃을 여미고 조용히 한참을 서 있었다.
법정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김대중컨벤션센터 콘코스홀을 마주본다. 그곳에서는 ‘2015광주봄꽃박람회’가 3월 27일부터 4월 5일까지 열리고 있다. 확 뚫린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유리문 너머에서 박람회에 불려나온 화훼들이 환호작약하고 있을 것이다. 꽃이여, 너는 아무런 진통 없이 피어나는가!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으로 회자되던 이름자가 버젓이 붙은 대형건물을 바라보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가 민주의 대명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그의 덕성과 천성, 즉 올곧고 굳센 신념과 의지와 용기가 있어서였지만, 그의 그러한 신념과 의지와 용기를 지킬 수 있게 밀어준 이는 다름아닌 국민이다. 국민이 하늘이라는 실례가 바로 그의 성취가 아니었을까.
자칫 5·18자유공원과 5·18기념공원을 헛갈리는데 영창과 법정이 재현 복원된 곳이 5·18자유공원으로 상무평화로 13번길(치평동)에 위치하며 김대중컨벤션센터 콘코스홀과 마주보고 있다. 5·18기념공원은 내방로 152번길(쌍촌동)로 광주시청 건너편에 있다. 5·18기념문화관, 5·18현황조각 및 추모승화공간, 오월루 등 다목적 시민 휴식공간 등이 조성되어 문화공연, 국제학술대회 등이 열리는 곳이다.
2011년 5월 유네스코는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다. 1980년 5월의 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물론 아시아 다른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민주주의는 먼 곳에 있는 것, 거대한 것인가? 그렇다면 실생활에 적용하기엔 너무 어려운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가까운 곳에서 밀접한 인간관계에서 출발하며 작은 돌이 모여 탑이 되는 것이다. 절차를 무시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지 않는 작은 실천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첫걸음이다. 그것이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만이 으뜸이고 옳다는 식의 오만과 편견에 빠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오래된 습벽이란, 스스로 깨려는 노력이 없이는 저절로 절대로 그것은 깨뜨려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