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날짜를 기다리며 아침저녁 일기예보를 확인하던 중 급히 연통을 돌린다. 그동안 쾌청하던 날씨가 하필 우리가 예정한 날 심술을 부리겠다니 도리가 없다. 부랴부랴 일정을 앞당겨 옥천으로 향한다. 지난 8월, 부상으로 발목인대가 늘어나 쉬고 있던 이종려씨는 무려 넉 달 만의 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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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계폭포 날머리 직전의 갈림길. 그대로 진행하면 영동청소년수련관과 천화원 방향이고, ‘비젼행군로’라고 쓰인 쪽은 정상으로 가는 등로이다.
- 옥천나들목을 빠져나가 4번 국도를 달린다. 산행들머리로 잡은 원동 2리를 지나 영동 방면으로 4km 정도 진행하면 오른쪽으로 옥계폭포 이정표가 나온다. 날머리로 예정한 옥계폭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택시를 부른다. 주차장 뒤로는 화려하게 단장한 천국사가 있고 마당엔 커다란 금불상이 있다. 주차장은 옥계폭포에 딸린 주차장인지 천국사 주차장인지 표시가 없다. 택시를 타고 다시 원동 2리 숯가마골 담안이마을로 향한다. 숯을 구워 숯가마골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월이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서리고개를 끊자, 승천을 준비 중이던 용마와 장군이 죽어 검은 피로 물들어 생겨난 이름이란다.
원동보건지소 옆길로 접어들면 옥천과수영농조합 작업장이 있다. 택시에서 내려 마을 앞을 지나 이원낚시터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언덕 위로 오른다. 이 야트막한 고개가 서리고개다. 월이산 안내판은 보이지 않고 좌측으로 시그널이 몇 개 달려 있다. 들머리에 계단공사라도 하려는지 중장비를 동원한 흔적이 역력하다. 도로에서 산으로 접어들면 바로 세상은 조용해진다.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 갈참, 굴참나무 등 참나무종이 주종을 이룬 좁은 숲길을 걷는다. 산객 하나 보이지 않는 늦가을 숲은 느닷없이 닥친 추위에 성급히 떨어진 낙엽들로 발자국 소리만 소란하다.
도내 작은 산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주중 주말에 상관없이 산을 독차지하며 호젓하게 걸을 때가 많다. 큰 산, 유명한 산만 찾아다니는 사람들 덕분에 누리는 소박한 호사라고나 할까. 들머리에서 30여 분 오르면 월이산 봉수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영동의 박달산과 환산(옥천 고리산), 대전의 계족산 봉수대와 연락을 취하던 조선시대의 봉수지다. 사방 전망이 트였을 봉수지임에도 조망이 좋지 않다. 낮게 드리운 연무와 세월과 함께 번성한 잡목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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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이산 서리고개 들머리.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이 표지기가 몇 장 달려 있다.
- 봉수지를 지나 정상 직전의 암봉에 오르기까지 길은 내내 조붓하고 파스텔 톤으로 단장한 만추의 숲은 마냥 조용하고 어여쁘다. 봉수지를 지나 현리에서 월곡사를 거쳐 오르는 갈림길과 만난다.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좀처럼 연무가 걷히질 않는다. 지난달 두악산 산행 때도 짙은 연무로 인해 산 아래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 조망이 어려웠다. 날씨가 흐려 이도 저도 아니게 칙칙한 사진을 데스크로 보낼 때에는 번번이 속이 상한다. ‘연무야 물러가라, 물러가세요!’ 주문을 외우며 암봉 조망터에 이른다. 첩첩 능선 위로 휘장을 친 베일은 여전히 걷히지 않는다. 개인적인 산행이라면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안개 끼면 끼는 대로 상황을 즐기겠지만 취재산행의 임무를 띠고 있으니 애가 탄다.
가을 가뭄에 바위손이 다닥다닥 말라붙은 동쪽 암봉 아래로 수십길 까마득한 벼랑이다. 건너편에 투구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가 투구봉이다. 투구봉 아래 겹겹 능선의 색채는 꿈결마냥 아련하다. 소나무 숲 평탄한 길을 따라 보드라운 솔잎을 밟으며 20여 분 걸으면 정상이다. 정상은 무성한 잡초 속에 헬리포트와 삼각점이 있고 정상 표지석은 동쪽 수풀 속에 버려진 듯 무심히 서있다. 정상표지석의 위치보다 약간 높은 둔덕 위에 무덤 한 기가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무덤의 봉분이 정상이겠다.
- 숯가마골 들머리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직선 방향의 등로에 무덤이 많으니 이 산이 명당인가 하는 짐작을 하게 된다. 잡목 숲 사이 서쪽으로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은 서대산과 장용산, 대성산, 갈기산, 국사봉과 천태산, 백화산의 능선들이다. 전날만 해도 끈으로 단단히 묶어놓고 싶게 쨍하던 코발트빛 하늘은 어디로 갔는지. 달이산 긴 등성이를 따라 흐르는 금강, 그 옆에 4번국도가 나란히 함께 달리는 멋진 조망을 희미한 실루엣만으로 확인하고 옥계폭포로 향한다.
“달이산이 왜 월이산이냐고요.” 종려씨의 한마디가 뇌리에 박힌다. 월이산(月伊山), ‘월이산에 달떴다’하는 말보다 ‘달이산에 달떴다’하는 말이 얼마나 더 예쁜가. 청명한 가을, 달 밝은 보름밤에 “얘들아, 달이산에 달떴다” 하면서 동무들을 불러 모으고 싶게 어여쁜 산이다. 정상에서 투구봉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옥계폭포로 진행하는 길은 깊숙이 감춰뒀던 알사탕을 아껴가며 먹는 그런 맛이다. 아기자기한 암릉구간이 나타나는가 하면 왼편의 금강을 내려다보는 맛도 장쾌하고 오른편 희부연 연무 속에 펼쳐지는 능선의 조망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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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헬리포트와 삼각점, 정상석이 있는 월이산 정상. 잡목과 낮게 드리운 연무 탓에 조망이 나빠 아쉽다. 아래) 아름답고 웅장한 옥계계곡. 과하게 조성된 시설들로 인해 자연미를 잃어 아쉽다.
- 기다려볼까? 30여 분, 나무에 기대앉아 커피를 마시며 연무가 걷히기를 기다려보지만 허사다. 큰 산에 든 것 마냥 저 멀리 보여야 할 속리산 능선과 손에 잡힐 듯한 옥천의 고리산이며 황간의 주행봉에서 포성봉까지, 겹겹으로 내달리고 있을 연능들을 확연하게 조망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이제 그만 접어야겠다.
산에 오니 발목 아픈 것도 다 잊었다는 이종려씨는 수북한 낙엽을 밟으며 한들한들 걷고 있다. “금강이 보여요.” 앞서 가던 태동씨가 걸음을 멈추고 일행을 불러 모은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금강과 물줄기를 가로지른 금강 제2철교와 금강교, 그 아래 이원대교가 보인다. 아스라하다.
참나무 숲 좁은 등로 양편으로 누군가 일부러 모아 놓은 듯 자그마한 돌무더기들이 무더기무더기 쌓여 있다. 돌탑이라도 쌓으려는가. 조붓한 오솔길이 끝나고 449m봉을 지나자 시야가 확 터지며 갈림길이 나온다. 영동청소년수련관 가는 길과 옥계폭포로 가는 갈림길이다. 우리가 내려온 방향을 가리켜 무슨 말인가 싶은 ‘비젼행군로’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오른편 길은 영동청소년수련관, 일지명상센터 천화원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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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계저수지가 보이는 옥계계곡 아래 전경. 만추의 절정에 이르렀다.
- 옥계폭포 위쪽 계류는 가뭄으로 물이 말라 수량은 적으나 계류와 어우러진 숲은 숨이 막히게 아름답다. 거기에 절정이 지난 파스텔 톤의 추색까지. 일행은 한동안 자리에서 떠나지 못한다. 이끼가 끼어 제법 운치 있는 시멘트 다리를 건너면 폭포 아래 까마득한 전경이 펼쳐진다. 폭포로 내려오는 길옆으로 설치된 파이프라인은 폭포 아래 저수지의 물을 끌어올려 갈수기 폭포의 수량을 충당하는 시설이다. 폭포 아래서 20여 m 직폭의 옥계폭포를 올려다본다. 주변의 요란한 시설물들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폭포만 보면 절경도 그런 절경이 없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는 일,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옥계폭포의 옥(玉)은 여성을 의미한다. 음폭인 옥계폭포 물줄기가 떨어지는 지점에 남성을 상징하는 양(陽)바위가 있었다. 양바위가 폭포의 경관을 해친다고 생각한 마을사람들이 양바위를 치워버리고부터 마을에 흉한 일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마을사람들이 다시 양바위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나서야 폭포가 다시 음양의 조화를 이루게 되고 마을은 다시 평온해졌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최근 들어 영동군이 지나치게 단장한 옥계폭포 주변을 보면 폭포와 주변 인공시설물의 조화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미를 해치는 인공시설물은 없느니만 못하다. 폭포 아래 저수지를 지나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오른다. 난계국악거리로 차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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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길잡이
○ 숯가마골~정상~449m봉~ 옥계폭포~ 주차장 <3~4시간 소요>
○ 옥계폭포~정상~투구봉~서봉~445m봉~서재마을~천화원~옥계폭포<3~4시간 소요>
○ 현리~월곡사~서재마을~정상~448m봉~449m봉~옥계폭포<4~5시간 소요>
○ 중산~대동리~월정사~정상~448m봉~449m봉~옥계폭포<3~4시간 소요>
옥천군 이원면과 영동군 심천면의 경계에 위치한 월이산은 옥계폭포 주변 외에는 이정표가 거의 없으나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4번국도상의 원동2리 원동보건지소 옆길로 진입하는 숯가마골 들머리에는 산행안내판이 없고 마을사람들에게 물으면 친절하게 알려준다. 옥계폭포 위에 가파른 협곡을 따라 내려가면 제2폭과 용소가 있으나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 아니라 길 찾기가 어렵다.
옥계폭포에서 천화원(일지명상센터) 쪽으로 천손고개에 장승군이 있고, 천화원을 지나 월이산자락에 분지로 이루어진 서재마을을 돌아오는 등로는 경관이 아름답고 길이 좋아 가벼운 트레킹 코스로 권장할 만하다.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한 천화원 주변은 특정 종교의 분위기가 물씬하며 투구봉을 지도에 없는 천문산이라 불러 산객들이 혼선을 빚기도 한다. 숯가마골에서 옥계폭포까지 남북으로 곧게 뻗은 등로는 숲도 아름답고 조망이 뛰어나다. 좀 더 긴 산행을 원하는 이들은 투구봉과 서봉을 거쳐 마니산까지, 또는 국사봉 종주코스를 찾기도 한다. 옥계폭포는 일명 박연폭포, 국악의 거성 난계 박연이 즐겨 찾았다는 명소로 충청지역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폭포로 알려져 있다.
교통
○ 대중교통
서울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옥천까지 하루 4회 운행. 소요시간은 2시간. 옥천에서 이원까지는 군내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군내버스로 원동보건지소 앞에서 내린다.
○ 자가용
경부고속도로→옥천IC→4번국도(김천, 영동 방향)→원동리 보건지소. 혹은 심천면 옥계리 옥계폭포 주차장
숙식(지역번호 043)
월이산 부근엔 숙소가 마땅치 않다. 옥천이나 영동의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게 좋다.
옥계폭포 아래 폭포가든(742-1777)은 우렁이 쌈밥집으로 유명하고 택시기사가 추천한 월이산가든(732-8999)의 칼국수는 맛과 양이 특별하다. 이원면에 있는 한일식당(731-8118)은 내장전골과 소 양무침으로 인근의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청산면의 선광집(732-8404)은 47년째 생선국수와 도리뱅뱅이를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볼거리
4번국도상 김천 방면으로 진행하면 영동군에서 조성한 국악의 거리가 있다. 난계국악박물관과 국악체험전수관, 난계사와 국악기 제작촌이 있다. 한천팔경의 하나인 황간의 월류봉과 천태산의 영국사도 여기서 놓칠 수 없는 절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