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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계획표의 진도에 맞추어 국문학사의 학습자료가 정리가 될 것입니다. 반드시 교과서와 학습자료집을 가지고 학습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문학사 이해의 새로운 관점
(1) 문학의 범위와 갈래
①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며, 예술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이다.
②국문학의 범위를 결정하는 데 문제되어 온 것이 구비문학과 한문학이다.
③국문학의 범위에는 구비문학, 한문학, 국문문학의 세 가지 문학이 있다.
④국문학의 갈래를 나누는 방법으로 서정, 교술, 서사, 희곡 등의 사분법이 있다.
⑤서정(抒情)은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자아화
⑥교술(敎述)은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
⑦서사(敍事)는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
⑧희곡(戱曲)은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
(2) 시가의 형식과 율격
①교환창으로 부르는 짧은 형식에는 향가나 시조가 있다.
②선후창으로 부르는 여음이 삽입되는 형식에는 속악가사나 경기체가가 있다.
③독창으로 부르는 긴 형식에는 가사가 있다.
(3) 시대구분의 방법
①먼저 개별적인 작품만을 다루는 법
②작품군(문학의 갈래)을 다룬다
③갈래체계를 고찰한다.
④작가(문학담당층)를 다룬다.
(4) 국문학사 시대구분의 실제
①첫째 시대는 국문학이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이다. - 원시문학
②둘째 시대는 건국신화의 출현(한자 전래와 한문학의 성립, 향가의 형성) - 고대문학
③셋째 시대는 한문학 특히 한시와 더불어 시작 - 중세전기문학
④넷째 시대는 경기체가이다. - 중세후기문학
⑤다섯째 시대는 소설의 등장이다. -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⑥여섯째 시대는 현대문학사
2. 첫째 시대 : 원시문학
(1) 구석기시대의 문화와 언어예술
①이 시기 사람들이 누린 문학은 구비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②조형예술에 담긴 사연을 노래나 말로 풀이하는 것이 언어예술이다.
③토테미즘, 애니미즘 같은 원시종교적 사고
(2) 신석기시대로의 전환
①수호신의 유래의 풀이는 무당의 굿을 통해 행해졌을 것이고, 이런 내용의 신화는 건국신화의 모체가 되었을 것이다.
(3) 민족문화의 계통과 관련해서 우리 문학의 저층에 고아시아족과 공유하는 유산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3. 둘째 시대 : 고대문학
(1) 건국신화, 국중대회, 건국서사시
①국중대회는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굿을 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춘 행사이면서 국가단합을 위한 정치적인 기능도 수행.
②건국신화시대가 바로 건국서사시 시대이고 또한 영웅의 시대이다.
(2) 고조선의 경우
①<삼국유사>에 있는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서사시이다.
②환웅(桓雄)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풍백(風伯;바람), 우사(雨師;비), 운사(雲師;구름)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고 한다.
③고조선의 경우는 국중대회에 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④단군신화의 내용을 벽화로 그려 놓은 것이 산동반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⑤<후한서> 동이전 서두에 서나라 서언왕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3) 부여, 고구려계의 전승
①부여의 건국서사시는 해모수, 해부루, 동명이나 주몽 등
②부여에서는 영고(迎鼓)라는 국중대회가 있다.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③해모수 이야기가 고조선 건국신화의 기본 전개에 일치한다면 동명 또는 주몽이 등장하는 대목은 서나라 서언왕의 출생담과 상통한다.
④주몽의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 출생, 탁월한 능력, 위기구출과 극복 그리고 승리자 이렇게 전개되는 유형은 이른바 영웅의 일대기이다 - 후대 서사문학에서 재창조.
⑤우리 문학사에 나타난 "여성수난사"는 웅녀에게서 처음 보이다가 유화를 통해 처음으로 구체화되었으며, 그 전통이 바리공주 등의 서사무가나 소설을 통해서 이어졌다.
(4) 삼한, 신라, 가락, 탐라 쪽의 사정
①마한 - 천군과 소도라는 이름의 별읍을 정해 거기에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겼다.
②삼한 - 육촌 촌장
③신라 - 혁거세는 특별히 시련과 투쟁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지 않은 것이 부여, 고구려계 건국신화와의 뚜렷한 차이점이다., 천마총, 알영
④탐라 -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 이들은 땅에서 솟았다는 점이 특이
⑤건국신화에 일본과 관련된 것 - 연오랑과 세오녀
(5) 짧은 노래 몇 편
①가락국 건국신화에서 거북더러 머리를 내어 놓으라고 부른 노래 구지가 - 해가와 흡사
②곽리자고, 백수광부의처, 여옥 등이 작자로 알려진 공무도하가 - 공후인으로 불려짐
③화희와 치희를 두고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
(6) 전설, 민담시대로의 전환
①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②신화는 자아와 세계가 동질적이거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대
③전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세계의 우위와 자아의 패배, 합리성을 추구하다 더 큰 불합리에 부딪히고 마는 이야기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등
④전설에서의 세계의 횡포와 민담에서의 자아의 가능성은 서로 표리관계에 있다.
4. 셋째 시대 : 중세전기문학 - 제1기(삼국 남북국시대) -
(1) 한문학의 등장과 그 구실
①<양서>신라전에 보면 "글자는 없고 나무를 깎아서 신표로 삼았다"는 말이 있다.
②고구려는 "건국 초에 문자를 처음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기사 100권을 지어서 이름을 <유기>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③고대가 우리말 문학의 시대였다면 중세는 한문학을 상층의 공식적인 문학으로 삼고 우리말 문학은 기층문학으로 존속하도록 내버려둔 시대였다.
④한문이 활용되면서 중세문학이 성장했다. 한문이면서도 우리말 어순에 따라서 쓴 서기체라는 글과 뒤이어 한자의 음과 뜻을 따서 우리말을 온전히 표기한 향찰을 만들었다.
⑤고구려 국사 - 유기100권과 이문진의 신집5권
⑥백제 국사 - 고흥의 서기(書記),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⑦신라 국사 - 거칠부
⑧광개토왕비 비문의 내용 : 건국초 비 설립 당시까지의 고구려 역사, 광개토왕의 업적, 왕릉의 철저한 수호)
⑨진흥왕의 순수비 네 곳 : 창녕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북한산비
(2) 노래의 새로운 모습
①고구려 음악자료는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지에 보이는 정도 - 내원성, 연양, 명주
②<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지에 소개되어 있는 백제노래는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 등의 다섯 편이다.
③정읍은 <정읍사>라는 노래말이 남아 있는데 1493년 <악학궤범>에 실려있다. - 궁중악
④신라 유리왕이 <도솔가>를 처음 지었는데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작 - 차사사뇌격
⑤도솔가의 뜻은 "두릿노래"이고 그 뜻은 "편안하게 하는 노래"이다. 후에 월명사가 지은 <도솔가>도 있음에 유의.
⑥악 - 회악, 신열악, 우식악(우식곡), 곡 - 우식곡(우식악), 가 - 물계자가
⑦향가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기록문학이고 또한 개인창작시라고 할 수 있다. 향가는 불교의식 가요 및 한시와 구별되는 특정기능이 없는 우리말 노래이면서 향찰로 표기되고, 사설이 아주 중요시되며, 개인작으로 인정되는 서정시이다.
⑧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이 역대의 향가를 모아 편찬한 삼대목 -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⑨향가는 4구체, 8구체, 10구체로 구성.- 고려초 균여전에서 향가는 삼구육명으로 구성
⑩다섯 줄 형식으로 된 향가의 첫 例 - 혜성가, 다섯 줄 향가 - 사뇌가, 사뇌가의 잔존형태 - 도이장가, 정과정곡
(3) 향가의 작품세계
①<서동요>는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동이 지어 불른 노래
②<풍요>는 양지라는 신통한 승려가 아주 커다란 불상을 만들 때 온 성안 남녀가 다투어 흙을 운반하면서 불렀다고 한다.
③<헌화가>는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철쭉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노래 - <해가>와 비슷
④<혜성가>는 화랑 셋이 풍악에 가서 놀고자 했는데 혜성이 나타나 심대성을 범했다는 융천사가 지은 노래
⑤<모죽지랑가>는 죽지랑이 화랑을 찬양하고 사모한 노래
⑥<원가>는 신충이 효성왕과의 헤어짐의 고민을 노래 - 잣나무와 관련
⑦<도솔가>는 해가 둘이 나타나 열흘동안 없어지지 않았다는 변괴에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변괴를 퇴치했다고 함. 월명사가 지은<제망매가>는 죽은 누이의 재를 올릴 때 부른노래⑧충담사는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었다.
⑨광덕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부른 노래<원왕생가>, 희명이라는 여인의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노래<천수대비가>또는<도천수관음가>, 영재라는 스님이 도적을 만나 지었다는 <우적가>
(4) 불교문학에서 문제된 이치와 표현
①신라에서 불교에 대한 저술의 종류 : 기(記), 소(疏), 종요(宗要), 논(論)
②원효의 열반경종요,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원효대사의 불교 연구는 너무나 심오하고 위대하여 그 연구 결과가 불경의 일부로 편입되기에 이른 것)
③원측의 유식학
④의상의 화엄학, 일승법계도
⑤혜초의 왕오천축국전
(5) 설화에 나타난 상하, 남녀 관계
①신격이 등장하지 않아 전설처럼 보이고 신화의 흔적을 간직한 것으로서 일본에 대한 우리의 우월한 입장을 드러내는 이야기 - 연오랑과 세오녀
②신화적 질서에 불신이 생긴 후에도 어느 특수한 집단에서 신화를 전승 - 미추왕 죽엽군③영웅이 괴물을 퇴치했다는 이야기 - 거타지 이야기
④불교설화에서는 영웅 대신에 고승을 내세웠다. 불교가 재래신앙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편 이야기 - 보양스님
⑤모든 세속적인 욕구나 인연의 초탈과 불도의 경지마저 떨쳐버린다는 이야기 - 의상
⑥숭고 대신에 골계를, 격식보다는 비속을 택한 - 원효나 혜공 또는 신라 말기의 선승들
⑦미천한 처지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는 이상스러운 승려 이야기 - 혜공과 혜숙
⑧지귀라는 천한 역졸이 선덕여왕을 짝사랑했다는 이야기 - 수이전(제목은 심화요탑)
⑨사랑은 아름답다고만 하지 않았고 번뇌와 고통의 원인이다 - 조신이야기(조신전)
⑩김춘추가 고구려에서 들은 이야기라는 구토지설(龜兎之說)은 불경을 매개로 해서 들어온 외래설화의 변용이지만, 약자의 지혜를 암시하는 교훈과 후대에 토끼전(토별가)의 선행설화로 주목된다.
(6) 연극의 자취를 찾아서
①굿은 사람 아닌 것과 사람의 갈등을 주술을 써서 해결하자는 행사이고, 놀이는 화해와 다납을 꾀하고, 미리 정해진 공동의 절차에 몰입하도록 하고, 연극은 사람들끼리의 갈등을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몰입이 아닌 각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
②굿에서 연극으로까지 이어진 공동의 절차는 맞이와 싸움과 혼인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③굿과 연결되는 연극은 농악대가 하는 굿과 무당이 하는 굿 등의 두 가지로 나눈다.
④고구려의 가무에는 [지서]라는 놀이가 있는데 오늘날의 [짓]에 해당되는 연극
⑤백제사람 미마지가 남중국 오나라에서 <기악>을 배워 일본에 전했다는 내용이 <일본서기>에 전한다.
⑥신라에서는 가무백회, 황창무(가면무), 경흥우성(탈춤) 등이 있었다.
⑦<삼국사기> 악지에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오수"라는 것은 다섯 가지 놀이인 오기(五伎)를 시로 읊은 것 : 금환(金丸)은 금빛 방울을 돌리는 놀이니 곡예, 월전(月顚)은 놀이꾼의 모습, 공연내용, 청중의 반응, 무대분위기, 공연시간 등을 적어 놓았으니 연극, 대면(大面)은 가면을 뜻하고, 속독(束毒)은 탈을 쓴 모습이고, 산예( 猊)는 사자춤이다.
(7) 남북국시대의 상황과 문학
①한자를 빌어 민족어를 표기하는 방법 : 신라의 향찰, 일본의 가명, 월남의 자남
②발해의 한문학이 난숙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을 입증한 묘비들 : 1949년 발견된 정혜공주묘비와 1980년 발견된 정효공주묘비가 있다.
③발해의 시인으로 양태사, 왕효렴, 인정, 정소, 배정 등을 든다.
(8) 신라 한문학의 성숙
①설총이 남긴 글로 <풍왕서> 또는 <화왕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
②성덕왕 때의 문인 김대문의 저술로는 <소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계림잡전> 등이 있다.
③고운 최치원은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변의 막하에서 <격항소서>를 지어 문명을 떨쳤다. 이밖에 <계원필경집>, <사산비명>, <난랑비서>, <촉규화>, <강남녀>, <우흥> 등이 있다. 특히 <촉규화>라는 시는 "천한 땅에서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도 참고 견디는" 접시꽃에다 자기 처지를 비하했고, <강남녀>도 자신을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으로 의식하여 주위의 민중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질 여유로움으로 지은 시다.
④최광유의 <장안춘일유감>
⑤박인범의 <기향암산예상인>, <범일국사영찬>, <무애지국사영찬>
⑥신라말에 문장에 뛰어난 인물로 삼최(三崔) :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5. 셋째 시대 : 중세전기문학 - 제2기(고려 전기) -
(1) 창업과 쟁패의 신화적 표현
①신라말 반란세력의 지도자 : 원종, 애노, 기훤, 양길, 견훤, 궁예
②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신라황실의 혈통을 이어 그 계보가 장황하다. 古記에 이야기가 전한다. 미천한 처지이나 비범하다.
③궁예의 이야기 :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다. 비정상적인 출생과 한쪽 눈을 잃는다.
④왕건의 6대조 호경, 5대조 간충, 4대조 보육, 3대조 진의, 할아버지 작제건, 아버지 용건 등의 신화적 이야기는 신과 사람을 동일시한다.
⑤현종은 현화사라는 거대한 절을 지어 왕실불교, 귀족불교의 아성이 되었다.
⑥"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온 천하가 오줌으로 가득 찼다"라는 꿈과 관련한 인물들(김유신의 누이 문희, 왕건의 4대조 보육, 보육의 둘째 딸 진의)
(2) 향가의 전통과 그 행방
①<보현시원가>는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그 한 대목을 노래로 풀이한 것이다.
②균여가 스스로 이름을 정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보현시원가>라고도 하고, <보현십종원왕가>라고더 하는 노래 열한 수 가운데 열 수는 제목도 화엄경에서 그대로 따왔다.
③한시는 중국말로 지으면서 5언 7자로 다듬고, 향가는 우리말을 3구 6명으로 배열한다고 했다. - 최행귀가 <균여전>에서 한 말이며, 향가의 형식과 관련된다.
④<도이장가>는 예종이 서경에 가서 팔관회를 보는데,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을 타고 뛰놀면서 뜰을 돌아다니더라고 했다.
⑤시용향악보에 <유구곡>이라고도 하고 <비두로기>라고도 하는 노래가 전해서 그것이 바로 예종이 지었다는 <벌곡조>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낳게 한다.
⑥악학궤범에 전하는 <삼진작>은 <정과정곡>, <정과정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⑦<정과정곡>이 사뇌가의 잔존형태라는 견해의 근거는 향찰로 표기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나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향찰표기가 있었다고 인전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다섯 줄로 볼 수 있으면서도 사뇌가 본래의 격식과는 아주 달라진 데가 있으니 바로 감탄구가 놓인 위치다. [니미 나를]하는 말 앞에 와야 할 감탄구가 [아소 님하]에 들어가 있다.
(3) 불교문학의 방향 모색
①불교통합운동 : 광종의 승과제도 창설과 승려직위공인, 현종의 현화사창건
②균여의 주장 : 성상융회(성은 없음의 영역이고, 상은 있음의 영역)로 집약
③제관의 주장 : 회삼귀일(사람의 등급을 셋으로 나누지만 어느 쪽이라도 함께 성불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보살과 같은 경지에 이른다)
④의천의 주장 : 교관병수(교라고 하 이론과 관이라는 실천, 교종에서 힘써 하는 공부와 선종에서 내세우는 수행을 함께 해야 비로소 그 어느 쪽에서도 막히지 않는다)
(4) 과거제 실시와 한문학
①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는 중세적 보편주의와 민족문화의 관계에 대해서고 깊이 유의했다.(불교를 잘 위하라, 왕위 계승은 적자가 원칙이나 장자가 불초할 때는 형제 중에서 나은 자로 하라, 서경을 중시하라)
②고려의 과거는 진사, 명경, 복업, 의업 등의 네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③진사와 명경 중 더욱 중시된 것은 진사였으며, 진사의 시험과목은 시, 부, 송, 시무책이다.④과거의 시험관을 지공거라고 했다.
⑤성종은 국자감을 창설했고, 광종은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여덟 번의 과거를 실시.
⑥대표적 문인들 : 최승로, 최충, 최유선, 김근, 김황원 등
(5) 설화와 역사 사이
①민간신앙의 제당을 들고 그 유래를 설명한 것 : 숭산묘, 동신사, 합굴룡사, 오룡묘
②최치원-박인량-김척명(수이전), 김인존(해동비록)
③김부식(삼국사기)
④삼국사기의 문학적인 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열전이다.
⑤명장의 자리는 김유신- 을지문덕- 박제상과 온달 등이다.
⑥미천한 인물이라도 행실이 아름다우면 열전에 등장시켰다(설씨녀, 도미, 지은 등)
⑦<삼국사기>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 : 유교적 합리주의와 사대주의적 입장이 나타나 있다, 대단한 문장력이지만 신라중심주의로 기울었다, 외세(당나라)에 의한 반통일을 합리화했다.
(6) 고려 전기 귀족문학의 결산
①이규보는 예종이 신하들과 주고받던 작품을 받아 <예종창화잡>을 편찬
②예종이 곽여를 찾아가 만나지 못하자 적어둔 시가 <하처난망주>이다
③이자현의 <낙도음>은 은거와 도피의 문학이다.
④박호의 <하팔관회표>, 권적의 <조송로상기제우>
⑤예종더러 놀이만 일삼지 말고 위기를 인식하라고 한 도학적인 문학관을 지닌 최약
⑥정극영은 <청연방조신표>를 지어 예종에게 위기의식을 심어 주었다.
⑦정지상의 <송인>은 천년을 두고서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다는 평을 듣는 이별의 시다.
⑧개경파 문인의 대표적 인물이 김부식이라면, 서경파의 대표적 인물은 정지상이다.
⑨정습명의 <석죽화>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데 부귀를 탐내는 귀공자들의 세계에서 멀리 벗어나 거친 들판에 남모르게 피어 있는 석죽화를 농사짓는 늙은이와 함께 바라본다고 했다.
6. 넷째 시대 : 중세후기문학 - 제1기(고려 후기) -
(1) 무신란, 몽고란과 문학
①무신이 집권한 시기의 문학은 두 방향으로 진행 : 무신의 전횡을 꾀한 문인들이 문학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는 점과 최충헌이나 그 후계자들이 문학을 장려하였다는 점
②무신란은 문벌귀족의 몰락과 신흥사대부의 출현을 불러왔다.
③무신의 우두머리끼리 정권다툼을 벌이던 시기에 세태를 비판하고 산수를 즐기며 고결한 문학을 표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벼슬의 기회를 엿보던 일곱 사람이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따 죽림고회를 결성 - 오세재, 임춘(공방전, 국순전), 이인로(파한집:문학의 절대적 가치와 그것의 표출방법으로 공교로운 표현을 강조) 등
④<한림별곡> 제1장에서 다루고 있는 최씨정권의 문인들 중에서 금의, 유승단, 김인경, 진화, 이규보 등은 당대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⑤이규보의 문학은 <동명왕편>으로 대표되는 주체적 역사의식의 표현과 민족정신의 고취라는 방향과 농민시를 통하여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려 하는 방향으로 전개
⑥몽고의 침략을 규탄하는 대몽항쟁의 문학 : 이규보(맹고문, 불평삼수), 최자(삼도부), 김구(과철주), 충지, 이곡, 이승휴(제왕운기), 일연(삼국유사)
(2) 비평의식의 성장
①이인로의 <파한집>은 시를 짓는 데 따르는 일화에다 시평을 곁들이고, 이따금 작가론이나 문학일반론까지 보태서 만들었다.
②이규보는 <백운소설>에서 문학이 무엇이며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가를 설득력있게 비평.③최자는 이인로의 파한집을 보완하면서 이규보의 문학관을 따른 시화집 <보한집>을 지음.④최해의 <동인문>은 김태현의 <동국문감>에서 영향을 받고 <동문선>에 영향을 주었다.⑤이제현은 정통적인 시문을 새롭게 한 <익재난고>와는 별도로 <역옹패설>을 지어 비평.
⑥이제현은 고려전기문학의 수준을 새로운 문학으로 이어야 한다는 절충론을 택했고, 이인로의 용사론과 최자의 신의론이 조화의 묘리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3) 불교문학의 새로운 경지
①지눌은 <수심결>에서 문자가 아닌 뜻이 긴요하며 스승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깨칠 수 있다는 것을 강조
②지눌의 사상을 문학을 통해서 구체화한 사람이 혜심(죽존자전, 빙도자전, 어부사)이다.
③충지(원감록), 경한(백운화상어록), 혜근(나옹집)
(4) 민족사 재인식의 시대
①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대의 영웅서사시를 재현한 작품
②각훈의 <해동고승전>은 승려들의 전기집
③일연의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역사문학에서 가장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④<삼국유사>를 낳게 한 동기 : 침략자 원에 의해 소실되는 문화유산의 수집 필요성 인식, 외침의 위기를 맞아 민족사의 주체성 확립 필요성 인식, 민족적 위기를 맞아 민족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절감 등
⑤역사를 읊은 영사시 : 오세문(역대가), 이승휴(제왕운기)
⑥영사시는 서사시와 구별되는데 서사시처럼 특정 주인공에 대한 일정한 줄거리를 갖지 않고 역대의 사실을 인상 깊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교술시라 할 수 있다.
(5) 사람의 일생 서술방법
①유가열전은 있었던 사실을 충실하게 서술하면서 다른 인물의 행적을 칭송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는 것을 기본성격으로 하는 행장과 묘지가 그 예이다
②이색의 <정씨가전>이나 정이오의 <성주고씨가전>은그집안이대단하다는것을 알리자는 것③이숭인의 <초옥자전>은 김진양의 전이다.
④도잠의 <오류선생전>은 작자 자신의 전을 어떤 가상적인 인물에 의탁해서 쓴 것이 탁전인데 <동문선>에 수록된 이규보의 <백운거사전>과 최해의 <예산은자전>이 그런 유의 작품이다.
⑤임춘의 <국순전>은 술을, <공방전>은 돈을 의인화한 작품
⑥이규보의 <국선생전>은 술을, <청강사자현부전>은 거북을 등장시켜 동물을 의인화한 첫 작품
⑦혜심의 <죽존자전>은 대나무를, <빙도자전>은 얼음을 의인화한 작품
⑧식영암이란 승려는 지팡이를 의인화한 <정시자전>, 이첨은 종이를 의인화한 <저생전>
⑨이곡의 <죽부인전>은 대나무에 관한 지식을 열거
(6) 속악가사와 소악부의 세계
①<고려사>악지에서는 악을 아악, 당악, 속악으로 나누었다.
②고려의 속악가사는 궁중의 악곡이고 잔치를 벌일 때에 불렀는데 그 예가 <쌍화점>이다/
③<고려사>악지에 두 번째로 든 속악이 <동동>이다. 동동은 <동동지희>,<동동사>라고함.④<고려사>악지에서 정재의 절차를 설명한 것은 <무고>에서 <무애>까지 이다.
⑤<비두로기>또는<유구곡>, <상저가>, <엇노래>또는<사모곡>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⑥<이상곡>은 "서리 밟는 노래"란 제목에서부터 주위의 풍경과 마음의 상태가 적절하게 호응한 노래, <만전준별사>는 <악장가사>에 장을 나누는 표시를 하였지만 장과 장사이에 여음을 삽입하지 않고 실어놓은 노래.
⑦이제현의 소악부는 <익제난고>에 11편이, 민사평의 <급암선생시고>에 6편이 전한다.
(7) 설화, 무가, 연극의 양상
①고려 후기에 나타난 시화는 설화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②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중 상층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보은담이다.
③신유학의 등장은 무속을 완강하게 배격하자는 온동으로 전개(심알, 안향, 우탁 등)
④고려시대의 연극의 행방을 추적하자면 우선 팔관회, 연등회, 나례 같은 행사를 주목한다.⑤이규보의 시 <관농환유작>은 분명히 꼭두각시놀음을 보고 지은 것이다.
(8) 경기체가, 시조, 가사의 형성
①<한림별곡>에서 시작된 경기체가는 유식한 문인이 창작한 것이며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하면서 감흥을 찾는다는 점에서 서정시가 아닌 교술시라 할 새로운 갈래이다.
②<한림별곡>은 악장가사에 전문이 실려있고, 제유(諸儒)가 지었으며, 1장(문인들의 이름), 2장(서적), 3장(글씨), 4장(술), 5장(꽃), 6장(음악), 7장(경치), 8장(그네)으로 되어있다. 제유들이 한 대목씩 지어 돌림노래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③안축은 정치할 때의 생각을 <관동별곡>으로 나타내고, 자기 고장을 자랑하는 말을 <죽계별곡>에 담았다.
④서정시의 갈래인 시조는 우탁의 늙음을 한탄하는 [청산에 눈 노기난]과 [한 손에 가시를 들고]로 시작하는 시조가 첫 작품이다.
⑤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는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자지 홀로 느끼는 번민을 노래
⑥이존오[구름이 무심탄 말이], 최영[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이색[백설이 자자진 골에]
⑦이방원의 [하여가]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응답
⑧고려말 시조와 함께 생겨나 후대까지 이어진 새로운 노래갈래가 어부가이다.
⑨가사가 고려말에 성립되었다는 견해는 나옹화상 혜근의 [승원가]가 발견되어서 부터이고 [심우가], [낙도가] 등의 작품의 계통을 이어받아 많은 불교가사가 나타났다.
(9) 사대부문학의 방향과 문제의식
①성리학을 표방하면서 고려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는 안향, 백이정, 우탁 등이다.
②다음 세대로 최해(동인문), 안축(근재집, 관동와주, 관동별곡), 이제현(관도로서의 문학)
③이제현의 "재도(載道)로서의 문학이 아니고 관도(貫道)로서의 문학"이란 문학과 도는 그 비중을 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④이곡은 이제현의 방향을 더욱 구체화하여 유학의 도리를 근거로 삼고, 교화를 목표로하는 문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⑤이색의 [관어대부]는 웅대한 기상과 함께 대단한 포부를 나타내고 사물과 심성의 이치를 온통 다루고자 한 착상은 한문학이 우리 풍토나 생활과 깊은 관련을 가져야 더욱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나타내었다.(송씨전, 오동전)
⑥정몽주(단심가), 이존오(석탄행), 이숭인(행로난, 애추석사)
7. 넷째 시대 : 중세후기문학 - 제2기(조선전기) -
(1) 왕조 교체기의 한문학
①조선시대 사대부문학의 두 가지 방향(처사문학과 관인문학)
②정도전은 문학은 도리를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특히 칠언절구에 능해서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었다.(소재동기, 답전부, 금남야인, 무덕곡, 문덕곡, 심문천답, 심기리편, 불씨잡변)③권근은 시에서는 창의력보다 품격을 존붕했으며 고려후기에 이룬 성과를 가다듬어 조선 전기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 문에서는 천인합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입증.
④원천석("운곡행로"라고도 하는 "운곡지사" 5권을 남겼다.)
⑤길재의 글 중 시골생활을 다룬 "산가서"와 "후산가서"가 흥미롭다.
⑥변계량에게서 문학이란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다. [태행태상왕시책문]에서 태조를, [봉정정삼봉]에서 정도전을 칭송했다. 한양 도읍을 칭송한 경기체가 [화산별곡]도 같은 맥락이다..
(2) 훈민정음의 창제와 서사시, 언해
①훈민정음 창제가 주는 민족사의 의의 : 한문을 대신하여 쓸 수 있다. 한자에 의한 차자표기를 대신하여 쓸 수 있다, 국문문학의 새 시대를 여는 구실을 했다.
②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국문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창제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풩되杉? 바라고 할 수 있다.
③[용비어천가]는 교술적인 서사시로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우리말 노래가 있고, 이어서 같은 사연이 한시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역사적인 사실 또는 설화를 자료로 한 자세한 주해가 있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제1장은 한 줄이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두 줄씩이며, 마지막의 제125장은 세 줄이다.
④[용비어천가] 제22장에서는 태조의 할아버지 도조가 백룡의 부탁으로 흑룡을 한 살에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 태조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용왕의 부탁을 받고 천 년 묵은 여우를 쏴 죽이는 이야기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토속신앙은 용신신앙이다.
⑤[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 합본된 것이 [월인석보]이다.
⑥왕조서사시인 [용비어천가]가 국가적인 이념을 굳히는 데 사용되었다면, 불교서사시인 [월인천강지곡]은 세종 자신이나 왕실의 가족이 내심의 위안을 얻는 데 쓰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진다.
⑦[두시언해]의 원래의 이름은 [분류두공부시언해]이다. [두시언해]는 세종 때 어떤 중국 문헌을 번역 간행하고 그 후 150여 년이 지난 후 또다시 이를 번역 간행하여 낸 책으로 이는 당시의 국어 변천의 실례를 알 수 있게 해주어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⑧언해라는 이름의 번역사업은 국문이 한문을 보조하는 구실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3) 악장, 경기체가, 가사
①악장은 나라에서 거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이고, 경기체가는 형식이 까다롭기 때문에 내용이 한정될 수밖에 없어 가사와 대조된다. 이 모두 시이어서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악장은 경기체가로, 경기체가에서 가사로 올수록 음악으로서의 구실은 줄어들고 문학으로서의 구실은 확대된다.
②악장 : 정도전(무덕곡, 납씨곡(납씨가), 궁수분, 정동방곡, 문덕곡, 몽금척, 수보록)
③경기체가는 고려때 3편(한림별곡,관동별곡,죽계별곡), 조선전기때 22편 총25편이 전해진다.④경기체가는 악장의 구실을 하는 것, 승려의 노래, 개인적인 노래 등 세 부류로 나눈다.
⑤권근(상대별곡)은 악장 구실을 하는 나라 노래 경기체가의 첫 작품이다. 변계량(화산별곡)은 서울이 빼어난 고장이라고 칭송하면서 어진 임금이 훌륭한 정치를 베풀어 태평성대가 도래했다고 서술한 작품.
⑥승려의 경기체가로는 기화(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 의상(서방가), 지언(기우목동가), 개인적인 노래로서의 경기체가의 첫 작품은 유영(구월산별곡)이고, 정극인(불우헌가), 박성건(금성별곡), 김구(화전별곡), 주세붕(도동곡, 육현가, 엄연곡, 태평곡), 권호문(독락팔곡)
⑦조선시대 가사의 첫 작품은 정극인의 [상춘곡]이다.
⑧유배가사의 첫 작품으로는 조위(만분가)이고 유배가사이면서 은일가사인 것은 이서(낙지가), 은일가사인 것은 정극인(상춘곡), 이인형(매창월가), 송순(면앙정가)을 들 수 있다. 견문가사 또는 기행가사로는 백광홍(관서별곡)과 양사준(남정가), 도학가사로는 이황(퇴계가, 금보가, 상저가, 도덕가, 효우가), 조식(권선지로가), 이이(낙빈가, 자경별곡, 낙지가), 불교가사로는 혜근(승원가), 휴정(회심곡) 등
⑨정철(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4) 시조의 정착과 성장
①조선 초 과업을 맡은 김종서가 넘치는 기개를 나타낸 [순풍은 나무 긋티 불고]를 남겼다.②자연에다 도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강호가도의 시조 등장 - 월산대군(추강에 밤이 드니)
③이황의 [도산육곡]은 한시는 읊을 수 있을 따름이고 노래 부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말 노래를 찾다가 한림별곡류라는 경기체가는 방탕스럽게 들떠 있는 것이라서 배격하고, 이별의 <육가>가 완세불공의 뜻이 있고 온유돈후한 맛이 부복해 불만이지만 그 형식을 본따서 지어낸 작품이다.
④영남지방의 시조 - 이현보(농암가, 어부가), 주세붕(오륜가), 이황(도산십이곡)
⑤이이(고산구곡가)는 강호가도를 다시 구현했다.
⑥호남가단 - 송순(면앙정단가)
⑦성산가단 -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5) 관인문학과 왕조사업의 표리
①조선 전기 관인문학의 전성기는 성종 때이고, 그 주역은 서거정(동문선, 태평한화골계전)이다.
②이승소(송도삼수, 한도십영), 강희맹(금양잡록, 촌담해이), 성간(용부전, 신설부)
③성현(악학궤범, 용재총화)
④관각삼걸(정사룡, 노수신, 황정욱)
(6) 사림문학과 심성에서 우러나는 소리
①김종직(청구풍아, 동문수, 낙동용)은 도학과 문학 또는 경술과 문장은 하나여야 한다.
②김종직의 제자들(유호인, 남효온, 조위, 정여창, 김굉필)
③서경덕은 산수를 유람하는 일 외에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일에 몰두했고, 이(理)와 기(氣)는 하나임을 입증했다. 서경덕은 글을 지어 행세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물의 이치를 명쾌하게 밝히는 글을 쓰고, 벼슬은 미관말직도 사양하고, 한 때는 황진이의 유혹에도 끝까지 넘어가지 않았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④이황은 시조에서 이현보을 따르고 한시에서 이언적을 계승하면서 물러나 도학에 힘쓰는 사림파의 문학이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할 것인가 더욱 설득력 있게 논의하고 작품을 구체화 하였다.(=기질지성, 본연지성)
⑤영남에서 이언적이나 이황, 조식 등이 나와 도학에 힘쓰면서 사림문학의 새로운 기풍을 d일으킬 때 호남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도학보다 풍류를 앞세우는 고장이라 한시를 지어 심성의 도리를 찾고자 하지 않았으며 가사나 시조에서 한층 더 창의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김인후는 호남의 도학을 창도하는 위치에 섰다.
⑥이이는 작품창작보다 이론전개에 치중하면서 이황의 도학을 수정하는 한편, 문학의 원리에 대해서도 총괄적인 정리를 다시 하고자 하였다.
(7) 방외인문학과 반감의 양상
①방외인의 성격 : 훈구파에 적대적 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사림파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지체에 결함이 있는 말단 사대부거나 그 이하의 위치에서 진출을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자기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반발을 촉진하여 방랑과 비판으로 일생을 보내기 일쓰였다, 불리한 여건을 무릅쓰고 한문을 열심히 익힌다면 진출의 기회가 올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②방외인의 선구자는 김시습(금오신화)이었다. 그는 반발을 유학 자체의 논리로 체계화하기도 하고 불교로 대응책을 삼기도 하며 도가 사상에도 적지 않게 경도되었다. [신귀설], [생사설], [태극설] 등을 써서 지배질서의 기본전제를 근저에서부터 비판하려 했다.
③방외인(홍유순, 정희량, 정렴, 정작, 양사언, 어무적, 서기, 송익필)
④천인으로 태어나 사림에서 인정하고 존경하기조차 하는 위치에 오른 인물이 서기와 송익필이다. 특히 송익필은 천인이었으나 김시습, 남효온과 함께 평가되고, 이이가 칭송했으며, 예법의 대가 김장생이 스승으로 삼았다.
⑤송시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했다고 해서 부르는 삼당시인(백광훈(용강사, 달량행), 최경창(동작기사, 이소부사), 이달(화학, 만랑가, 습수요))
⑥임제(원생몽유록, 수성지)는 사대부문학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한걸음 더 나아갔다.
(8) 척불의 시련에 놓인 불교문학
①보우는 문정왕후에게 발탁되어 승과를 부활하여 인재를 찾고 불교중흥의 계기를 만든 승려이다. 보우는 한시를 힘써 지으면서 선과 시를 일치시키는 것을 기본방침으로 삼았다.
②보우의 뒤를 이어 불교께의 새로운 바람을 더욱 세차게 일으킨 사람은 휴정이다. 휴정은 불교, 유학, 도가사상을 한데 어우르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넓게 공부하고 깊이 다진 결과를 정리해서 [선가귀감, 유가귀감, 도가귀감] 삼부작을 저술하고, 그 가운데 [선가귀감]을 으뜸으로 한 데서 사상체계가 잘 드러난다.
(9) 산문의 영역확대와 소설의 출현
①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서는 [고려사]이다. [고려사]열전에는 왕실 인물 외에 왕실 밖 인물들도 상세히 기록했는데, 그 까닭은 신하들도 왕 못지 않은 공헌을 한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하는 이유에서이다.
②서거정은 [동인시화]와 [필원잡기]를 따로 저술해 시호와 잡기가 분리되는 첫 예를보였다.③조선 전기의 잡기류 : 이륙(청파극담), 어숙권(패관잡기), 이자(음애일기), 남효온(추강냉화]와 [사우명행록], 김정국(기묘록), 이중열(을사록), 이이(경연일기), 허봉(해동야언)
④사물을 의인화한(저생전, 포절군전, 주장군전), 심성을 의인화한(천군전, 신명사도, 수성지)⑤몽유록계(수향기, 몽기, 안빙몽유록, 서재야회록, 원생몽유록, 금생이문록)
⑥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설화와 관련된 소재를 가져왔어도 자아와 세계의 대결방식을 전에 볼 수 없게 구현했기에 소설의 개념을 다시 규정해서 최초의 소설이라 한다. [금오신화]는 작품 전개방식에서나 주제에서 진전된 성과를 보이고, 일원론적 주기론과 영합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의 모방작이라는 학자들의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
⑦명혼소설(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몽유소설(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취유부벽정기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10) 연희의 양상과 연극의 저류
①조선 전기에는 나례희와 산대희를 국가행사로 계속했다.
②나례희 즉 산대희는 규식지희(줄타기, 방울받기, 땅재주 등의 곡예), 소학지희(재담으로 웃기는 연극), 음악으로 이루어졌다.
③작자미상의 [지양만록],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귀석이란 광대가 했다는 서로 대조적인 성격을 갖는 소학지희의 내용을 싣고 있다.
④유몽인은 [어우야담]에 귀석이란 광대가 소학지희를 공연하면서 지방수령을 풍자하려고, "진상은 꼬챙이에 꿰고 인정은 바리로 싣는구나"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의 참 뜻은 국가에 공식적으로 바치는 물품은 하찮은 것으로, 고관들에게 바치는 개인 뇌물은 중요한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⑤성현의 [관극시]에 괴뢰라고 한 꼭두각시놀음의 이름이 언굽되어 있어 조선 전기에도 꼭두각시놀음과 탈춤이 민속극으로 전승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8. 다섯째 시대 :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 제1기(조선 후기) -
(1) 민족수난에 대응한 문학
①임진왜란 실기의 대표적인 예(유성룡의 [징비록], 이노[용사일기], 이순신[난중일기], 곽재우[망우당선생집], 김덕령[김충장공유사], 유정[분충서난록])
②왜군에 잡혀가 탈출하여 슨 체험수기(노인[금계일기], 강항[간양록], 정희득[월봉해상록])
③7년이나 지속된 임진왜란 시에는 우리나라 사람 약 10만 명이 일본으로 잡혀갔다고 한다. 이중 일부는 도망하다 잡혀 죽고 일부는 배 안에서 굶어 죽고, 일부는 도착하여서 종으로 팔리거나 노동과 향수병으로 죽고, 후에 7천명쯤이 겨우 귀환했다고 한다. 이때 이런 기록을 일부 남긴 것이 있는데, 이중 퇴계의 제자로서 자기 자신보다 고향의 부모 친척을 더 걱정하고, 다 죽어 흩어진 시신이 짐승의 밥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다고 하면서 귀국 후 복수전을 준비하자고 절실히 역설했던 사람과 그의 저술은 "강항"과 [간양록]이다.
④병자호란과 관련된 글(최명길[병자봉사], 김상헌[남한기략], 어한명[강도일기], [산성일기])
⑤병자호란 시에는 임진왜란과 달리 두 달만에 끝났으면서도 다르 각도에서 깊은 상처를 남겼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왕자들이 인질로 잡혀가고 삼학사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척화파는 잡혀가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그곳에서 처형되고 수도 없이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때 소현세자를 따른 관원 누군가가 세자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기록을 남긴 것이 있는데 [심양일기]가 그것이다.
⑥양란의 체험을 한시로 읊은 작(권필[적퇴후입경], 허균[노객부원], 이안눌[동래사월십오일]⑦전란을 소재로 한 가사(최현[명월음],[용사음], 박인로[태평사],[선상탄], 백수회[도대마도가]
(2) 정통 한문학의 동요와 지속
①정통 한문학은 그동안 중세 가치관을 상징하는 고답적이고도 복고적인 표현 방식을 유지하면서 사회변화를 지연시키는 구실을 해왔다.
②유몽인, 이수광, 권필, 허균 심광세 등이 비판과 반역의 노선, 특히 심광세는 상고시대부터의 역사를 길게 노래한 [해동악부]를 지어 자기자신의 불행까지 겹친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역사의 흐름을 통괄하면서 의미와 교훈을 찾는 작업을 처음 시도했다.
③조선후기에는 과거시험이 몹시 부정하게 시행되어 시험도 보기 전에 합격자 명단이 고관자제들 중심으로 나돌았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풍자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과거시험 답안을 파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 사람이 끝내 시험에 합격치 못하는 사정을 그린 소설을 지었다. 소설을 지은 사람은 "이옥"이고, 그 소설의 이름은 [유광억전]이다.
④한문사대가(이정구, 신흠, 이식, 장유, 허목, 송시열, 박세당, 정제두, 김창협)
⑤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거셀수록 고문의 규범을 다지는 것이 한층 긴요하게 되었는데, 그런 임무를 맡은 사람이 홍석주와 김매순이다.
(3) 소설시대로 들어서는 전환
①허균의 [손곡산인전], [엄처사전], [장산인전], [남궁선생전], [장생전]은 소설이기에 앞서 전(傳)임에 틀림없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인물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사소설(逸士小說)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②[전우치전]은 [홍길동전]과 가까운 관계의 작품이다. [전우치전]은 주인공이 하늘의 선관이 되어 왕으로 하여금 황금 대들보를 바치게 하여 그것을 외국에 팔아 백성들을 구제하면서 제물은 원래 백성들의 것이니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소설이다. [전우치전]의 작자는 미상이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택한 [임경업전]과 [박씨전]은 [임진록]과 같은 연대기소설을 이루지 않고 일대기소설로 되돌아갔다.
③우화소설의 작품으로서는 [토끼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토끼전]은 사회소설 또는 풍자소설로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했다.
④소설이 형성되고 정착되는 데 중국소설이 미친 영향을 평가할 때 먼저 살펴야 할 것은 [태평광기]이다.
⑤[홍길동전], [구운몽], [사씨남정기]사이에 국문소설로는 어떤 작품이 나타났는지를 추적하는 데 [구운몽] 자체가 증거를 제공한다.
(4) 문학의 근본문제에 관한 재검토
①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문학담당층이 확대되고 문학의 실상이 크게 달라지는 데 따라서, 문학사상 또는 문학론에서도 중세적인 규범에 대한 찬반론이 치열했다.
②허목으로부터 정약용까지의 남인들은 성리학의 절대적인 권위를 비판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원시유학의 재흥에서 찾으려 하였다.
③허균에서 김만중을 거쳐 박지원에 이르는 혁신론자들은 당대에 새롭게 이루어지는 문학을 옹호하는 논리를 마련하려고 했다.
④문학은 유학의 경전을 모범으로 삼고 중국 전래의 규범을 존중하면서 심성의 바른 도리를 전하는 재도지기(載道之器)여야 한다는 것이 전래의 문학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관은 조선후기에 와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종래의 표현법인 논(論), 설(說), 책(策), 의(議) 같은 것은 부적절했다. 그리하여 다른 방법의 표현을 쓰게 되엇는데, 서(序), 발(跋), 시화(詩話), 만필(漫筆)이 그것이다.
⑤성리학의 문학관은 [문학이 성정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⑥이옥은 남녀관계에 관한 민요를 한시로 옮긴 작품집 [이언집]을 마련하고 그 서두에 삼난이란 제목으로 창작의도를 밝혔다.
⑦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위축된 민족의 기상을 되살려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며 주체적 도가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펴는 한편 속담을 수집해 놓기도 하고 우리말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서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⑧이우준은 [몽유야담]을 지어 <소설>이란 제목으로 "소설은 빈 데 시렁을 메고 허공을 꿰뚫어 생각을 쌓고 뜻을 포개어 기이한 말을 지어내는데 본뜻을 캐면 깊고 또한 이치에 맞다"라는 주장을 폈다.
(5) 문학담당층의 확대에 따른 변모
①위항인문학은 사대부문학과 서민문학의 성격을 아울러 지닌 중간적인 형태로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었다.
②위항문학의 연원은 최기남의 [육가잡영]이라는 시집이 첫 예이다.
③위항시인들(박윤목, 서경창, 김낙서)은 여러 가지 생업이 각기 소중하다고 하면서 현실인식을 넓힌 시를 보여 주었다.
④시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특히 중요한 구실을 한 사람은 장지완이다. 장지완은 율과 계통의 중인이데 위항시의 재흥에 힘써 비연시사를 조직하고 정지윤의 시집을 편찬했다.
⑤19세기에는 가곡에 비해서 열세에 있던 시조창이 더 발달해서 1863년에 나온 [남훈태평가]를 위시해 시조창을 위한 시조집이 여럿 필요하게 되었다.
⑥박만순이나 박기홍이 이은 재래의 판소리는 동편제라 하고, 이와는 다른 서편제를 박유전과 이날치가 앞장서서 개척했다. 신재효가 판소리사설을 여섯마당으로 정리했다.
⑦직업적인 소설낭독자(전기수)의 신분은 어느 계층인지 짐작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⑧소설을 판각해서 방각본으로 찍어내어 시장망을 통해 전국에 널리 파는 방식은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⑨사대부 여류작가는 고립되고 특수한 영역에 머물렀고, 위항시인은 한문학의 한계를 의식하지 못했으며, 전문가객은 자기네의 활동이 고급예술이기를 바라다가 인기를 잃었고, 판소리광대는 대량전달의 매체를 마련하지 못했다.
(6) 실학파문학의 새로운 방향
①남인실학의 선구자 이익은 유형원이 지은 반계수록의 전례를 따라 [성호사설]을 이룩하여 문학을 하는 근본자세를 바꾸어 놓았다.
②노론실학의 홍대용(담헌연기)과 박지원(열하일기)은 사상에서나 문학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했다.
③박지원을 따르며 배운 이덕무(사소절, 청비록), 유득공(발해고, 경도잡지, 유우춘전), 박제가(북학의), 이서구 등 네 사람은 특히 시로써 이름이 났다.
④정약용(용산리, 탐진촌요, 탐진농가, 탐진어가 등의 연작민요시)은 남인으로서의 물리한 위치를 극복하고, 서정양식에 서사적 요소를 적절히 도입하여 현실을 생생하고 폭넓게 재현했으며, 의인의 수법과 민요풍의 도입 등 다양한 형식의 시작품을 창작하였다.
⑤중세이념에 결정적인 비판을 하는 근본적인 논리를 마련한 사람은 최한기이다.
(7) 민요, 민요시, 악부시
①[농가] 또는 농업노동요는 민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모내기노래, 김매기노래, 보리타작노래가 그 대표적인 형태이다.
②민요는 기능에 다라 각기 특이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민요는 민중 노래라 하지만 누가 어떻게 해서 부르는가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민요는 직업적인 소리패가 부른 것이 아니기에 잡가와 구별된다.
③시조를 한시화하면서 여러 가지 가능한 형식 중에서 반드시 칠언절구만 택해서 연작을 마련한 것은 특별히 일컬어 소악부라 했다.
④악부라는 시를 다시 나누면 소악부 외에 역사를 다룬 영사악부와 풍속을 다룬 기속악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⑤한시를 우리말 노래와 접합시키자는 노력이 지금까지 다룬 방향과는 다르게 나타나서 육당풍월이나 언문풍월 같은 희작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8) 시조의 변이와 사설시조의 등장
①고응척의 [대학곡] 28수에서부터 연시조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②윤선도(산중신곡, 오우가, 어부사시사)는 산수 사이에 깊이 숨어 75수나 되는 시조를 지어 신흠의 전례를 넘을 만큼 작품의 격조를 높이고 표현의 묘미를 개척해 사대부시조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③전원시조의 결정적인 변모는 위백규의 [농가구장]에 이르러서 구체화했다.
④이세보는 수난기의 경험을 통해서 사회비판의식을 시조로 나타낼 수 있었는데 시조창을 전제로 창작하고 중국 역대인물을 회고한 것이나 애정시조, 기행시조 등도 있다.
⑤길이가 길어 장시조라고도 하고 평시조의 형식을 파괴했다고 하여 파형시조라고도 하는 사설시조는 사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극도로 집약된 표현에 주목된다.
⑥사설시조는 민요의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을 긍정적으로 계승하고, 평시조의 짜임새와 격조를 부정적으로 계승했다.
⑦사설시조의 발생시기는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17세기 후반쯤으로 추측되고, 첫 작품으로 정철의 [장진주사]를 들기도 하고 고응척이나 강복중의 작품을 들기도 한다.
(9) 가사의 복고와 혁신
①사대부가사는 한정된 소재를 두고 격식화된 표현을 되풀이한 탓에 신선감이 사라지고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폭이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②농촌에서 어느 정도의 생활기반을 다지고 벼슬은 하지 못하더라도 사대부로서의 지위는 유지하는 방책을 유학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은일가사와 함께 도학가사를 힘써 짓는 풍조는 19세기까지 이어졌다.
③유배가사는 낯설기만 한 곳에 강제로 추방당한 고통을 하소연하기 위해서 지어야만 했다.(송주석[북관곡], 김춘택[별사미인곡], 이진유[속사미인곡], 김이익[금강중용도가])
④기행가사로 주목할 만한 첫 작품은 권섭의 [영삼별곡]이다.
⑤공식적인 외국여행은 사신이 되거나 그 일행에 끼어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것이었다. 그만큼 사행가사는 사사로운 소감을 흥미롭게 나타낼 수 있고 독자층이 넓어 그것대로 긴요한 구실을 했다. 그 첫 작품은 유명천의 [연행별곡]이고 박권[서정별곡], 김인겸[일동장유가] 등이 있다.
⑥규방가사(내방가사)는 시집가서 해야 할 행실을 딸에게 가르치는 계녀가, 집안에 경사스런 일이 있으면 짓는 경축가, 놀이를 즐기는 감회를 나타낸 풍류가, 그리고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자탄가 등이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⑦가사는 원래 교술문학이면서 작품에 따라서는 서사적이거나 서정적인 수법을 사옹할 수 있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런 수법이 전례 없이 두드러진 구실을 하게 되었다.
⑧가사는 원래 네 토막을 한줄로 하면서 길게 이어지는 민요를 가다듬어낸 형식인데 민요와 다시 어울리면서 고답적인 짜임새가 흔들리게 되는 변화가 작자층의 확대와 함께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⑨가사는 오랫동안 노래부른다기보다는 읊기만 하는 이른바 음영가사로 머물렀다.
* 잡가라고 하는 것은 가창가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가사에 십이가사가 있듯이 잡가에도 십이잡가가 있다. 그 대부분이 판소리에서 유래했다.
(10) 불교, 도교, 천주교문학
①가사는 불교의 교화를 널리 펴자는 노래로 시작되었는데 사대부문학으로 바뀌어 본격적인 발전을 했으며, 국문사용이 일반화되는 것과 함께 작자나 수용자가 하층으로 확대되는 단계에 들어섰다.(보권염불문에 실린 서왕가, 낙도가, 회심곡 등)
②도교문학은 혁신을 모색하기에 앞서 숨은 도맥을 찾아 지난날의 자취를 정리하면서 유교 또는 불교와 맞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과제였다.(해동전도록)
③도교문학은 유학을 이념으로 한 중세 보편주의가 지배체제의 동요와 함께 불신되자 고대의 자기중심주의를 재인식하면서 비판과 각성을 다시 촉구하는 과업을 맡았다.
④천주교를 반대하는 가사는 벽위가사라 하고, 옹호하는 가사는 천주가사 또는 천주교가사라 할 수 있다.
(11) 한문기록에서 국문표현으로
①한문에서는 기록으로서의 의의를, 국문에서는 표현효과를 찾는 것이 기본과제였다.
②야사와 잡록을 모은 대표적인 예로는 [대동야승]이다. (청구패설, 간양록, 심양일기 등)
③국문기행문의 출현 : 이정암(서정일록), 조정(임란일기), 유진(임진록)
④국문기행문학의 성장을 정착시키는 구실을 유의양의 [남해문견록]과 [북관노종록]이 맡았다. [남해문견록]에서는 유교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의 기층문화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였고, [북관노정록]에서는 삶의 터전이 더 북쪽으로까지 뻗어 잃은 국토를 되찾을 것을 염원했다.
⑤한문학의 오랜 관례를 이은 전은 어떤 인물이든 택해서 자유롭게 지을 수 있지만 충신, 열녀, 효자 등의 숨은 행적을 알려준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격이 높아지게 마련이다.
⑥꽃을 의인화하고 화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대립과 분라이 일어나는 것을 다루는 작품은 일찍이 설총의 [화왕계]에서 비롯했는데, [화사]나 [화왕전] 등이 나와 가전체의 모습을 더욱 다양하게 했다.
⑦몽유록과 가전체를 한데 아울렀다고 할 수 있는 국문작품에 [유여매쟁춘]이란 것이 있다.⑧여성들은 지체와 학식을 자랑하는 집안 출신이라도 국문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글을 썼으며 한문을 택하는 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다.
(12) 설화, 야담, 한문단편소설
①민중운동이 고조될 때에는 진인출현설이 퍼졌고, 지배자와 백성의 관계를 다룬 설화는 오랜 내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경우에나 지배자가 부당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런 유형 중의 하나가 도미이야기에서부터 관탈민녀형이다.
②야담은 문헌설화라 할 수 있는데 구전을 바탕으로 했으며 다시 구전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처음 이루어진 야담집이다.
③홍만종의 [해동이적]과 [명엽지해]는 야담의 방계라고 할 수 있다.
④한문소설은 국내에서 실제로 있었을 듯한 사건을 집약해서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⑤박지원의 연암소설은 야담집 속의 단편들과 함께 다루기 어려운 점이 있다.
⑥박지원의 작품은 전과 야담을 기반으로 해서 한문소설의 발전된 성과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다시 그 어느 쪽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기발한 구상을 작품마다 특이하게 갖추었다.
⑦김려는 허균의 전례를 이어 일사소설이라 할 수 있는 전을 짓는 데 힘썼다.
⑧한문으로 창작된 유일한 희곡 [동상기]도 이옥의 작품이다.
(13) 소설의 성장과 변모
①영웅소설은 역사군담소설(임진록, 임경업전, 박씨전 등)과 창작군담소설(조웅전, 유충열전, 장풍웅전 등) 두 계열로 이어졌다.
②영웅소설의 원천은 [홍길동전]이고 귀족적 영웅소설의 전형적인 예는 [유충열전]이다.
③국내를 무대로 한 애정소설이나 세태소설 등이 계속 나타나는 추세에 호응해서 조선의 인물이 중국에 가서 활약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정통 왕조의 천자를 위기에서 구출한 공로로 변방의 왕이 되는 등의 영광을 차지했다는 작품으로 [신유복전]이 있다.
④[숙향전]이 인기를 모으면서 여성의 수난과 투지를 다룬 소설이 정착되고 여성독자가 내심의 고민을 상담할 수 있는 독서물이 마련되었다. [정수정전]이 그 좋은 예이다.
⑤[구운몽]은 귀족적 영웅소설의 하나이지만 김만중이 지었으니 천하다 할 수 없을뿐더러 문체가 우아하고 묘사가 세밀하며 사상적 깊이가 있어 유식한 독자들의 호감을 얻었다.
⑥[구운몽]에서 [옥루몽]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은 한문본을 통해서 사대부 남성독자를, 국문본을 통해서 사대부 여성독자를 끌어들이면서 문학의 사회적인 층위에서 소설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⑦[현씨양웅쌍린기], [쌍천기봉], [보은기우록]은 [청백운]에서 [천수석]까지와 같은 계열이며 속편까지 있다. 전편은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지닌 문제작이라 하겠으나, 더 길게 늘인 속편은 그렇지 않아 인습적인 가치관으로의 복귀를 표방하고 이미 있는 사건유형을 부연하고 복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 점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⑧[명주보월빙] 100책, [윤하정삼문취록] 105책으로 이부작을 이루고, [엄씨효문청행록] 30책 및 그 속편과도 연결되는 작품군은 소설이 어느 정도 복잡한 구성과 방대한 분량에 이르ㅡ 수 있었던가 아는 데 한층 긴요한 자료이다.
⑨애정소설은 이미 [금오신화]에서 시작되었고, [주생전]이나 [최척전] 등의 전례가 일찍 나타났다. 소설은 세태를 다루는 것을 기본가제로 삼는다. 무대를 국내로 하고 잘난 척해도 별 수 없는 인물을 등장시켜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는 사건을 벌이는 작품군이 19세기에 와서는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14) 서사무가에서 판소리계 소설까지
①큰 굿의 첫 순서인 초감제에서 부르는 [천지왕본풀이] 같은 것이 일반 서사무가의 예이다.②비극적 서사민요에서 흔히 다루는 문제는 시집살이의 고난이다.
③완성된 형태의 판소리는 광대와 고수 두 사람이 공연하면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조직화되어 있다. 광대가 너름새라는 연기를 하고 아니리와 창으로 장면을 묘사하고, 고수가 북을 장단을 맞추고 추임새를 통하여 청중의 반응르 대변하는 공연방식은 판소리가 연극일 수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④판?恬?는 원래 열두 마당이었는데, 그 중에서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은 오가(五歌)라고 하는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이다. [변강쇠가]는 신재효가 정리해 둔 것이 있어 사설을 알 수 있고, [배비장전], [옹고집전], [장끼전], [숙영낭자전] 등은 소설본만 남아 있다. [왈자타령], [매화타령]은 최근에 발견되었다.
(15) 민속극의 저력과 반응
①무당굿놀이는 굿을 맡은 주무가 거의 독판을 치면서 진행한다는 점에서 연극으로서의 발전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②서울지방의 뒷전은 [지신할미거리], [장님거리], [출산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거리굿]이라고 일컫는 동해안의 뒷전은 내용이 더욱 다채롭고 주제가 한층 뚜렷하다.
③꼭두각시놀음도 따지고 보면 사당패가 창조했다기보다 전승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놀이는 한 가지이지만 남사당패는 덜미, 구경꾼들은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고 한다.
④무당굿놀이, 꼭두각시놀음, 탈춤 등에서 민속극에서 특히 중요하고 가장 발전된 형태는 물론 탈춤이다. 탈춤을 공연한 주체에 따라 농촌탈춤, 떠돌이탈춤, 도시탈춤으로 나눈다.
⑤경북 안동 하회 마을의 굿놀이는 농촌탈춤의 전형적인 예이다.
⑥서울 근교의 본산대놀이패나 경남지방의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 등은 떠돌이탈춤의 예.
⑦양반과정에서 말뚝이가 관중과 합작해서 양반을 욕보이는 것은 도시탈춤이라면 어디에나 다 있지만 [봉산탈춤]에서는 특히 미묘하고도 효과적인 표현까지 갖추었다.
9. 다섯째시대 :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2기(1860-1910년)-
(1) 민중종교운동과 문학
①1860년대 최제우가 동학을 창건한 것을 시발점으로 민중종교운동은 척사위정운동, 애국계몽운동, 항일의병운동과 함께 한 시대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가졌다.
②[용담유사]라고 총칭되는 최제우의 가사는 모두 9편이다.(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도수사, 몽중노소문답가, 검결, 권학가, 도덕가, 흥비가)
(2) 구비문학의 활기와 긴장
①판소리 다섯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은 충효, 우애 등의 표면적 주제를 갖추고 있어서 판소리의 상승에 유리한 작용을 했으며 비교적 장편이기 때문에 양반취향의 격조 높은 문구를 삽입하기 쉬웠다.
②판소리 자체의 사설은 창작이 아닌 개작을 하는 데 그쳐야 했기 때문에 자기 의식을 직접 표출하기는 어려웠지만 판소리 공연에서 허두가 또는 단가로 부르라고 지은 짧은 노래에서는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나타내었다.
③유행민요의 대표적인 예는 서울의 [아리랑], 함경도의 [신고산타령], 평안도의 [수심가], 황해도의 [몽금포타령], 전라도의 [육자배기] 등을 들 수 있다.
(3) 구시대 국문문학의 지속과 변모
①고시조 창작의 마지막 대가로는 이세보, 조황, 박효관, 안민영을 꼽을 수 있다.
②소설이 아닌 산문을 국문으로 짓고 필사본으로 돌려 읽는 풍속도 이 시기까지 계속 이어졌지만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작품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을 찾기 어렵지만 그런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있으니 [병인양란록](부녀자가 쓴 수기)이다.
(4) 한문학에 부과된 사명
①김기수의 [일동기유]는 해외문명 견문기의 첫 예이다.
②문학작품으로 더욱 주목할 것은 중국어 역관 김득련이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 여정에 올라 견문한 바를 읊은 기행시집 [환구음초]이다.
③황현은 한문학의 격조를 지켜야 한다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 자기시대의 수난과 적극적으로 대결한 시인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짓고 자결했다.
(5) 의병투쟁의 체험과 문학
①의병장 민용호는 백두산 밑에서 해산하기까지를 기록한 [관동창의록]에는 최초의 의병가사인 [회심가]가 실려 있어 주목을 끈다.
(6) 신구 문학관의 대립과 교체
①국문을 공용하는 것이 마땅하고 한문학이 아닌 국문문학을 통해서 구습을 적극 타파하고 새로운 문필활동을 전개해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이기,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②한문학을 지켜 조상 전래의 규범을 살리면서 타락된 세태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김윤식, 여규형, 정만조, 윤희구)
③황현과 김택영은 이중적인 성향을 가져서 특이했다.
(7) 국문시가의 새로운 양상
①이 시기의 독립가, 애국가 등의 노래를 [창가]라고 하는 용어로 오늘날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창가가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창가는 대한제국시대에 독립, 애국, 개화의 의지를 고위하기 위해서 지은 단형의 국문시가이고, 이미 제기되어 있는 주장을 요약한 교술시라고 규정할 수 있다.
②[대한매일신보]의 가사는 기존의 작품을 게재한 것, 신문사에서 창작한 듯한 가사 600여편, 그리고 사회등가사의 세 가지 계열로 나눌 수 있다.
(8) 소설의 변화
①소설은 필사본, 목판본, 활자본의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유통되어 왔다.
②세책가에서 돈을 받고 빌려주는 필사본은 방각본과 상통하는 영리적인 상품이었는데 장편소설일수록 이문이 커질 수 있는 점이 아주 달랐다. 세책가는 사대부 및 시민층의 부유한 집 부녀자들을 일차적인 고객으로 해서 서울에서 1890년대까지 크게 번창하며 새로운 작품을 계속 보탰던 것이다.
③필사본으로 남아있고 작품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여항소설]이다. 표제를 그렇게 내걸고 [산촌미녀], [일본산천풍속기], [장벽지화라], [경성백인백색]을 수록했는데, 그 가운데 세 편이 소설이다.
(9) 민속극, 창극, 신파극
①민속극이 쇠퇴의 길로 들어선 직접적인 이유는 정치적인 상황이 불리하게 조성된 데 있다.
②정부에서 하던 협률사가 안팎의 반대 때문에 혁파되고 원각사라는 민간 공연단체가 그 극장을 맡아 공연장으로 삼았다. 원각사에서는 신작 창극 [은세계]를 상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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