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라는 언어
허이영
4900년을 산 나무가 있다. 므두셀라 소나무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할아버지였던 므두셀라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는 969살까지 살았다. 나무는 하늘과 맞닿은 거목으로 연상되지만, 시간이 키운 키는 시간과 비례하지 않았다. 축적된 연륜이 깊어져 시간이 근육으로 쌓인 모습이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위치는 비밀이라고 했다. 캘리포니아 화이트산 어디쯤에 뿌리내린 나무는 해발 3천 미터 고지대에서 성장기가 지난 이후에는 백 년에 3센티미터씩 더디게 그림자를 넓히는 중이다.
므두셀라가 반만년 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나운 바람, 적은 강수량과 같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저만의 속도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소나무처럼 키를 키웠다면 고지대의 바람에 허리가 꺾였을 것이고, 아름드리 나무로 허리둘레를 늘였다면 안에서부터 썩었으리라. 키와 덩치를 키우는 대신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낸 므두셀라처럼 삶은 각자의 속도를 찾는 일이다.
가끔 산행 중에 남편과 삐걱거린다. 걸음 나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경주마가 눈가리개를 하는 것은 소란스러운 관중이나 다른 경주마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자기만의 경로와 목표만 보고 질주를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젊을 때 남편이 그랬다. 한눈팔지 않고 정상에 오르는 게 목표였다. 늘 전력질주였다.
나는 한눈팔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눈팔기는 멈춤이기도 했다. 먼저 눈길이 멈추고, 발길이 멈추고 마지막에 마음이 멈춘다. 멈춤의 시간 또한 나의 속도이다. 걸음마다 놓인 꽃이며 나무를 느리게 혹은 멈춰서서 보는 힘으로 다음 발걸음이 더 가벼울 수 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의 잎이 어떻게 다른지, 열매의 크기는 어떤지, 수피는 어떤 모양이지 살피느라 눈길이 멈췄고, 눈길에 맞취 나의 걸음이 느려졌다가 또 멈추게 된다. 나의 멈춤과 상관없이 남편은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자동차였다. 옆은 사라지고 앞만 좇는 걸음에 맞추느라 아주 가끔 헉헉대기도 한다. 그러한 날은 놓치는 것이 많은 산행이다.
남편의 시선으로 본다면 나는 산만하고 느린 산행 동무다. 답답하고 무료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내 보폭에 맞추느라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하고, 산꼭대기까지 먼저 올라갔다가 내가 있는 곳으로 다시 내려와 함께 정상에 오르기도 한다. 서로의 속도 안으로 잠깐 들어갔다. 다시 각자의 속도로 돌아간다.
흐르는 시간은 빠르기가 바뀌기도 한다. 남편에게 갔던 시간은 느려졌고, 나에게 왔던 시간은 조금 빨라졌다. 남편이 한눈팔기 시작하더니 발걸음을 멈추는 횟수가 잦아졌다. 계절마다 피는 꽃에 걸음이 더뎌졌고 잎이 지는 걸 모른척하지 않았다.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하지 못하던 이가 세상일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긴 아이처럼 꽃 이름에 부쩍 관심을 가졌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감국과 산국에 대해 물었다. 발걸음이 느려진 남편에 비해 나는 불어난 뱃살과 늘어난 일감으로 마음이 조급해져 걸음이 빨라졌다.
각자의 사정으로 남편은 나의 속도로 건너는 중이고, 나는 남편의 속도로 건너는 중이다. 남편은 가을 초입에 서 있다. 여름에서 건너온 나른한 햇볕에 시간은 속력을 늦추고 느리게 간다. 자칫 방향을 잃을 수 있는 계절이다. 잘 조련된 나침반 하나 필요할지 모르겠다. 내가 건너갈 절기는 입추와 처서쯤 경계에 있다. 다음 계절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하다. 경계라는 시간이 늘 그렇듯 준비할 것이 많다. 갈무리할 것과 새로운 계절에 대한 준비, 너무 많은 주머니를 준비하지 않아야겠다. 주머니를 채우느라 시간을 낭비할지 모른다.
평행선처럼 지나온 시간, 여전히 다른 보폭으로 걷고 있다. 각자에게 맞는 속도를 찾아가는 중이다. 가끔 서로의 속도를 침범해 스텝이 엉켜위태로울 때도 있다. 언제쯤 서로에게 맞춰 갈지 알 수 없다. 같이 사는 동안 끝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굳이 속도를 하나로 밀착시킬 필요가 있을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속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각자의 보폭을 갖는다는 건 서로를 완성해 가는 일이다.
'느리다'가 '게으르다'의 다른 말이 아닌 것처럼 '빠르다' 또한 '성급하다'의 다른 말이 아니다. 각자에게 맞는 최적의 속도를 찾는 것일 뿐이다. '느리게'라는 최선의 스피드를 찾은 므두셀라처럼 최적의 속도를 찾는 일은 삶 속에서 숨차지 않는 저만의 방법이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속도, 태양에는 태양의 자전 속도가, 지구에는 지구의 자전 속도가, 달에는 달의 자전 속도가 있다. 세 개의 천체속도가 같아질 수 없듯, 달팽이에게 치타가 달리는 속도를 요구할 수 없다. 네가 나에게 오는 속도가 다르듯, 내가 너에게 가는 속도도 다르다. 속도가 바로 자신이다.
다른 속도를 경험한다는 건 불편하기도 하지만 경이로운 일이다. 므두셀라처럼 아느 순간 느려질지 모르는 삶 안에서 오늘 내게 주어진 속도를 알아가는 날이다. 삶에는 한 개의 속도가 아니라 여러 개의 속도가 있다. 속도는 나를 나타내는 또 다른 언어이고 부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