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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 리뷰
《폴른 자이언트》 모리스 아서먼. 조금희 김동수 공역 / 하루재 클럽
인간의 도전에 무릎 끓은 거인의 이야기
최초로 히말라야를 원정한 마틴 콘웨이
실종 75년만에 에베레스트 8230m지점서 발견된 맬러리의 시체
맬러리가 오델에게 보낸 마지막 메모
이 책은 인류가 히말라야에 도전해온 통사적(通史的)인 기록이다. ‘유럽의 놀이터’에서 시작된 등산 활동이 ‘눈의 거처’로 옮겨지면서 시작된 역사적인 기록이 《퍼른 자이언트》다. 시대적으로는 1892년 제국의 시대부터 1996년 극한등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록을 이 한권의 책에 엮었다.
한 세기 동안 인간의 부단한 도전에 ‘무릎 끓은 히말라야 거인’(자이언트는 히말라야8000m급 거봉을 지칭)과 이들을 향해 투쟁해온 각 시대별 영웅들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퍼른 자이언트.Fallen Giant》는 단순히 히말라야 중심의 등산역사뿐만 아니라 등산이 이루어졌던 각 시대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인 배경과 지정학적 이해관계까지 언급하고 있다. 책 전반을 통틀어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가 등산에 미친 영향에 대해 조명하고, 팀워크와 동료애를 강조했던 등산 문화가 점차 개인적인 명성과 영광을 위한 도전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사실적인 등반기록은 물론 고봉등정을 했던 영웅들의 애환과 흥미로운 일화 모두를 파헤치고 있다. 1892년 최초로 히말라야 원정등반을 했던 마틴 콘웨이, 카라코람 산맥을 선구적으로 탐험했던 패니 벌락 워크먼, 에베레스트의 낭만적인 순교자 조지 맬러리 등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재조명하고 있다.
히말라야 등산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면 1895년부터 1950년까지를 도전의 시기. 1950년부터 1964년까지를 황금기. 1970년부터 현재까지를 등정일변도에서 등로주의로 전환하며 난이도를 높여가는 극한등반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이 책은 언제 누가 어떤 루트로 어떤 산을 올랐는지에 대한 실제 기록뿐만 아니라 그 도전을 지탱한 ‘원정 문화’에 주목했다. 즉, 원정보고서라는 주된 사료에 그치지 않고 원정관련 주변 인물들을 직접 만나서 보다 광범위한 자료를 찾고 분석한 생생하고 명쾌한 역사서이지만, 까다로운 전문용어가 없어 전문가나 비전문가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엄선한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히말라야에 대한 등산가들의 열정은 단순히 정상등정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원정등반의 동기와 원정대가 맞부딪친 도전과 경험이 등산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히말라야와 등산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꺼리를 제공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등산의 역사가 ‘일련의 고봉 등정을 기록’한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등산이란 일상생활과 조금 먼 곳에서 이루어지지만 세상과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저자들은 거대한 산과 벽에 대한 도전뿐만 아니라 한 세기에 걸친 히말라야 등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가치, 기대, 갈등의 역사도 추적했다.
좀 더 히말라야로 들어가 보자.
눈(雪)Hima의 거처(居處)laya, 히말라야는 인더스강과 브라마푸트라 강을 경계로 2,400킬로미터에 걸친 구간이다. 서쪽의 낭가파르바트에서부터 동쪽의 남차바르와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러나 아시아 지각판과 맞물리는 범위는 히말라야보다 훨씬 더 넓어서 대략 아프가니스탄에서 미얀마까지 걸쳐 있고 융기현상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인도 쪽은 티베트 쪽 지각을 1년에 5센티미터라는 무서운 속도로 밀어붙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히말라야 산맥이 1년에 1센티미터 정도씩 높아지고 있다.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높이는 현재 8,850미터로 세계 최고봉이지만, 서쪽 끝에 있는 낭가파르바트의 고도가 아주 빠르게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낭가파르바트가 세계 최고봉이 될지도 모른다. 지표면과 성층권의 중간 지점까지 솟아오른 이 산들에는 생물이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지질학적 의미에서 이 산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히말라야는 상상을 불허할 만큼 거대하다. 인접한 카라코람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까지 포함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지형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은 남미의 안데스산맥이지만 분명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은 히말라야다. 그 북쪽 지역에서부터는 해발 평균 6,000미터 고도로 이어지며, 해발 8,000미터가 넘는 고봉 14개를 거느리고 있다. 히말라야에는 해발 7,620미터가 넘는 산이 30개 이상 있다. 이에 비해 서반구 최고봉인 아르헨티나의 아콩카과Aconcagua(6,962m)는 상위 20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 극지방을 제외하면 히말라야에는 ‘눈의 거처’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에서 가장 큰 빙하지대와 그로 인해 생성된 가장 깊은 골짜기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히말라야는 세계적인 3개의 강인 인더스, 갠지스, 브라마푸트라 강의 원류이며 이 세 강의 유역에는 세계 인구의 1/6이 살고 있다.
어느 등산가의 죽음.
1999년 5월 1일 에베레스트 북벽 8230m 지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이 날 실종 75년 만에 시신으로 발견된 한 등산가의 죽음을 매장하는 추도식자리에서 낭송된 시편 103편이다. 그 죽음의 주인공은 1924년 에베레스트 3차 원정에서 전설을 남긴 채 사라진 영국의 산악 영웅 조지 맬러리이다. 이처럼 이 책의 서문은 에베레스트의 망령이 된 조지 맬러리와 어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라는 명언을 남기고 정상부위 구름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 맬러리의 시신발견 이야기가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정상으로 떠나기 전날 맬러리는 오델에게 “바람이 전혀 불지 않고 일이 되어가는 상황이 희망적입니다.”라고 쓴 메모를 남긴 채 정상으로 떠났다. 1924년 6월 8일, 그날 날씨는 별로 춥지 않았다. 12시 50분, 두 사람을 지원하기로 한 오델이 6캠프 못 미친 지점에서 정상을 살펴보고 있을 무렵 하늘이 맑아지면서 정상 부근 능선이 완전히 드러났다. 오델의 시선이 작고 검은 점에 꽂혔다. 그 점은 능선의 바위 계단 아래쪽 눈 덮인 부근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보였다. 그 점이 움직이고 나서 곧 다른 검은 점이 움직이더니 두 점이 합쳐졌다. 오델은 이렇게 전했다. “첫 번째 점이 거대한 바위 계단으로 접근했고 곧 그 위로 올라갔다. 두 번째 점도 그렇게 했다. 그러고 나자 그 환상적인 광경이 구름에 가려 사라졌다.” 그 뒤로 이 두 사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이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다.
히말라야 원정의 첫 문을 열다.
히말라야 최초의 원정등반은 1892년 마틴 콘웨이의 카라코람 원정이다. 그는 히말라야등반 의 첫 문을 연 중요한 인물이다. 이원정은 머메리의 낭가파르바트 시도보다 빠르다. 그는 프랭크 스마이드와 같은 스타일의 등반방식을 취했으며, 머메리를 무척 존경했다. 윔퍼의 안데스 원정대를 모방하여 1892년 카라코룸지역에 대한 원정대를 조직하여 스리나갈로 부터 길기트에 들어가 히스파(Hispar)와 발토로(Baltoro)빙하지역을 답사하고 지도를 제작했으며, 파이오니어 피크(6790m)를 추르브리겐과 함께 등반하여 5970m까지 도달한다. 그는 카라코룸 일대에 있는 2개의 거봉에 브로드 피크(8047m)와 히든 피크(8068m)라는 산명을 붙인다. 브로드 피크는 알프스의 브라이트 호른(Breit Horn)과 비슷해서 영어와 같은 뜻인 ‘폭이 넓은 봉(Broad Peak)’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며, 히든 피크는 가셔브룸 산군의 여러 고봉에 가려져 발토로 빙하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야 볼 수 있기 때문에 ‘숨어있는 봉우리(Hidden Peak)’로 이름을 붙인다.
시대적인 맥락으로 본다면 이 시대의 원정등반은 히말라야 개척지를 조사하고 탐험하며 미개척지를 지배하려는 식민주의적인 필요성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제국주의시대 서구열강들의 원정문화는 서구 백인들의 아시아 유색인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적 환상과 모순으로 연관 지어져 있었다. 1909년 이탈리아 아브루치 공의 K2원정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원정이다.
에베레스트를 향한 대영제국의 집착
히말라야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산은 1856년 대인도 삼각 측량 조사에서 원래 높이보다 약간 낮은 8,840미터(29,000피트)로 측량된 이후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일지 모른다는 점에서 그 당시 지형학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산은 발견과 동시에 서양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1857년 영국에서 알파인 클럽이 창립되자 회원들은 곧바로 고도문제와 더불어 과연 지구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은 1921년에 첫 원정대를 파견했고 이로부터 초등이 이루어진 1953년 까지 32년 동안 10회에 걸친 긴 도전의 역사가 시작된다. 1992년 2차 원정에서는 산소기구를 사용하여 8326m까지 진출했고, 1924년의 3차 원정에서는 맬러리와 어빈의 실종으로 그 결과를 확인 할 수 없었다. 이후 네팔의 개방과 함께 1953년에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가 마침내 정상에 선다.
수확의 기쁨 누린 히말라야 황금시대 개막
히말라야의 어느 봉에서나 수확의 기쁨을 누리던 시대는 1950년부터 1964년 까지다. 인류가 8000m를 최초로 등정한 것은 안나푸르나다. 이로서 히말라야의 황금시대가 개막된다. 《초등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등반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원정기다. 이 책은 원정대장 모리스 에르조그가 병원에서 동상치료를 받으며 구술한 내용이다. 이 원정 기는 1951년 처음 출간된 이후 수십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천백만부 이상 팔린 등산문학의 고전이 된 책이다. 그는 이 책으로 인해 세계적인 명사가 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등산 역사상 맬러리의 “산이 거기 있으니까”이래로 가장 유명한 문장이 되었다. 에르조그의 마지막 문장은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저마다의 안나푸르나가 있다. There are other Annapurnas in the lives of men.”라고 끝맺고 있다.
안나푸르나 초등 이후 8000m 14개 고봉이 차례로 등정된다. 1953년엔 에베레스트와 낭가파르바트가 영국과 독일/오스트리아에 의해, 1954년엔 K2와 초오유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의해, 1955년엔 캉첸중가와 마칼루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1956년엔 로체. 마나슬루. 가셔브룸 2봉이 스위스. 일본. 오스트리아에 의해, 1957년엔 브로드 피크가 오스트리아에 의해, 1958년엔 가셔브룸1봉이 미국에 의해, 1960년엔 다울라기리가 스위스에 의해 , 1964년엔 동서냉전시대 죽의 장막 속에 갇혀있던 시샤팡마가 195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중국원정대에 의해 마지막으로 등정된다.
8000m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단독등반
1953년 7월 4일 오후 2시. 헤르만 불은 단독으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다. 그 후 41시간 만에 체력이 바닥나고 동상에 걸린 상태로 동료들이 기다리는 5캠프로 돌아온다. 3일후엔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이원정대는 고소포토 부족으로 캠프 설치에 많은 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에 정상 공격을 시작할 때는 몬순이 불어 닥쳤다. 기상이 악화되자 대장은 정상공격을 중지하고 캠프를 철수하라고 지시했으나 다시 기상이 호전되자 불, 에르틀, 프라운 베르거, 켐프터 등 4명은 대장의 명령에 불복한 채 정상 공격을 결정한다. 5캠프까지 이들과 함께 오른 불이 단독으로 정상 공격에 나섰다. 정상으로 향하던 그는 7820m 지점에서 흥분제 두 알을 먹고 드디어 오후 2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다. 이후 하산 과정은 너무나 극적인 드라마였다. 두 차례의 비박을 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다량의 혈액순환 촉진제를 복용한 그는 환청과 환각상태에 시달리면서 하산 길을 재촉 빈사의 상태로 5캠프에 도착하여 에르틀의 도움을 받는다. 죽음을 극복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그에게 베풀어진 대장의 태도는 냉랭했다. 퇴각명령을 어기고 등정한 행위가 대장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장 자신이 의사임에도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치료해주지 않았다. 이후 그는 동상 후유증으로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한다. 1954년 불은 <8000m의 위와 아래>라는 독자적인 등정 기를 출간한다. 그러나 이 등정 기는 대장의 사전 동의 없이 발표되었다 하여 대장인 헤를리히 코퍼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이로 인해 불은 오랫동안 심적 고통을 받는다. 원정대 출발에 앞서 대원들은 원정이 끝난 뒤 등반에 관한 글을 발표할 때는 대장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대장은 저작에 관한 계약 위반을 빌미로 불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대장과 대원사이의 이런 불미스러운 법정소송은 대장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모리스 에르조그의 원정기가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저마다의 안나푸르나가 있다”라는 멋진 끝맺음과는 달리 헤를리히코퍼의 원정 기는 “아홉 명의 대원 가운데 여섯 명이 내 편이었다”로 궁색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물 보닝턴과 메스너
경사가 세고 바위와 얼음으로 뒤 덮인 3300미터의 안나푸르나 남벽은 매우 어려운 곳이어서 어느 누구도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8000m고봉 14개 모두가 초등되고, 1963년 새롭고 어려운 에베레스트 서릉(혼바인 쿨르와르)루트가 개척됨으로서 심리적인 장벽이 무너졌다.
점차 등산가들은 눈 덮인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올라가는 쉬운 길보다 더 어려운 도전을 시도할 만한 위대한 루트를 찾기 시작했다. 이전의 등반은 가장 쉬운 루트로 오르는 것이었으나 보닝턴의 꿈은 가장 어려운 벽으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건 히말라야등반의 새로운 개념이었다. 1970년 보닝턴대가 성공시킨 남벽등반은 히말라야등반에 도래할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등반이 갖는 등반사적인 의미는 히말라야에서 이룩한 최초의 거벽등반이라는 점이다. 당시 이 등반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돈 윌런스는 오늘날 전 세계 클라이머들의 표준장비가 된 ‘시트 하니스’를 고안했고 그에게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윌런스 시트하니스’는 우리나라 산악인들에게도 70년대에 널리 사용한 익숙한 장비다. 당시 보닝턴은 6000m위에서 31일을 보내면서 원정대를 진두지휘했다.
1970년 6월 히말라야등반에서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라인홀드 메스너가 동생 귄터와 함께 4500m높이의 미등 루트인 루팔 벽을 통해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 것이다. 메스너는 그날의 쾌거를 시작으로 가장 위대한 히말라야 등산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그는 낭가파르바트를 시작으로 자이언트 14전봉 등정의 역사를 이룩한다. 나중에 메스너는 이때의 경험을 “내 인생을 결정지은 순간”이라고 했다.
극한등반의 시대. 개탄할 상황.
20세기 후반에는 동료에 대한 의무감과 대장에 대한 복종심이 점차 사라졌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함께 등반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1970-80년대에 뛰어난 히말라야 등산가였던 존 로스켈리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확보를 하지 않을 때는 로프를 풀어놓습니다. 그것이 제1의 규칙입니다. 그래야 제가 다른 대원들을 죽이지 않고, 다른 대원들도 저를 죽이지 않습니다.”
한때는 서로를 보호해주는 끈끈한 결속의 상징이던 로프가 이제는 자기가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옛 등반 문화가 점차 빛을 잃다가 결국 사라지면서 히말라야 등산가들은 상징적의미로만 남아있던 로프를 풀어버렸으며, 동료의식도 점차 사라져갔다. 등산가들은 단독 등반을 통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전문 가이드들은 분명한 사업으로써 미리 돈을 받고 아마추어 동호인 집단을 히말라야의 고봉으로 데리고 갔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 서로를 비난하고 서로의 말에 반박하는 불신풍조가 등산계에 점차 뿌리를 내려갔다. 가장 개탄할 상황은 1996년에 일어났다. 에베레스트 정상부위에서 기상이 악화되자 한꺼번에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처절한 경험을 생생히 써낸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라는 정직한 기록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나는 등산역사물 읽기의 필요성에 대해 미국의 등산사가(登山史家) 제임스 램지 울먼의 말을 빌려 그 중요성을 대신하려고 한다. “등산은 지구상의 돌출된 부분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등산은 과거의 경험과 실험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는 역사라는 실체를 지닌 스포츠다”라는 말을 곰씹어 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발전된 등반은 과거의 경험과 실험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이 발전된 등반은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산의 역사를 살펴 본 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성장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의 후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역자 두 사람이 677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번역하면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두 역자의 후기를 읽어보면 그 노고의 흔적을 알 수 있다. ‘ 땀, 눈물, 그리고 정성으로’ 또 한사람은 이 책의 완역이 ‘107일간의 고통과 기쁨’이라고 실토했다.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하면서 역자 두 사람은 히말라야에서 고산증세에 시달리는 것 이상의 고통을 감내했을 것이다.
발행인 ‘하루재 클럽’의 변기태 대표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상업적인 채산성을 넘어선 산서발간의 의지가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하는 것이 모든 산악인들의 바램이기도하다. 우리들 몇몇이 하는 우수개 소리가 있다. “산서 출판 오래하면 가산 탕진 한다” 그러나 변 대표만은 이런 상식에서 예외이길.......
1892년부터 1996년까지 1세기동안 히말라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 책을 읽어보면 안다. 책읽기에 다시없이 좋은 등화가친의 계절이다.
첫댓글 좋은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글로나마 히말라야 등반사에 대해 조금은 알게되는기회였습니다
좋은글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히말라야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