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거래
2007001009 김진욱
GM학교에서 철저한 안보 교육과 정신 교육을 받은 후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은 마치 입대 전 다녀왔던 일본여행과 비슷한 기분마저 안겨다 주었다. 새 하얀 뭉게구름을 삼키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저 아래 보이는 푸른 바다와 잔잔한 물결위에 흩날리는 눈부신 햇빛과 희미하지만 그 끝에 보이는 생크림을 두른 한라산 그리고 그에 질세라 쭉쭉빵빵 스튜어디스 누나들의 서빙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비행이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더블 백을 찾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었다. 동승한 승객들 중에 가장 먼저 짐을 찾아 도착 장에 들어섰지만, 인천공항에서의 지침과는 달리 아무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 집에 연락을 한지도 오래되어 공중전화에서 집에 연락을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네가 김진욱 이병이지?”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을 지닌 주임원사는 잔뜩 긴장한 나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건넨 후 자신이 더블 백을 메곤 자가용으로 인솔했다.
관광지답게 신경 쓴 조경에 봄 특유의 화창한 날씨는 그 자체만으로도 벅찬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있었다. 공항을 중심으로 한 도심을 지나 완만한 경사의 숲을 가로질러 한라산과 공항 중간 즈음 되는 곳에 위치한 ‘한라기업사’라는 팻말을 지닌 부대에 도착했다. 큰 빌딩은 못 되더라도 최신식의 시설을 기대하였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일었지만, 주변의 높고 낮은 오름들 속에, 맞은편엔 마치 쓰나미 같이 삼킬 듯 솟아 있는 한라산과 뒤편으로 보이는 몽환적인 바다까지 주변과 잘 어우러진 붉은 벽돌의 건물은 꽤나 조화로웠다. 부대장에게 전입신고를 마치고, 정식적으로 부대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난 뒤, 어떻게든 이곳 제주도로 오기위해 그렇게 몸부림을 쳤던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
나에게 떨어진 보직은 공항검문병이었다. 출발장 검색대를 통과하기 전에 있는 경찰부스와 국세청부스 사이에서 군인들의 휴가증을 검사하는 게 주 임무이며, 출근은 새벽 5시, 퇴근은 오후 9시이고, 한 달에 격주로 1일을 쉰다고 했다.
안 그래도 첫 날부터 지침 받은 장소를 이탈해 전화를 했다며, 새벽에 불려 나가 갈굼을 당하고, 김병장의 누우라는 말에 누웠다가 잠이 들어 조일병의 싸대기에 잠을 깨고, 야간 경계 근무 교대를 하는데 탄창을 낀 채 복귀해 비상사태 발령시키는 등등 찍힐 대로 찍혀 더 이상의 돌파구도 없던 찰나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전군 기상시간보다 좀 더 이른 새벽 5시, 말번초의 발차기에 몸을 일으켜 인터넷으로 주문한 싸구려 정장과 해군 단화로 민간인 코스프레를 하고선 선임 운전병의 프라이드에 몸을 맡겨 제주국제공항으로 첫 출근을 했다.
3층 출발장 2번 게이트를 지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카운터 사이의 통로로 깊숙이 들어가니 200호라는 팻말의 사무실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3평 남짓 사무실 2/3를 파티션으로 나뉘어져있고, 그 뒤의 컴퓨터 3대가 놓여있으며, 오른쪽 모서리에는 실장실이, 왼쪽 모서리에는 활주로와 바다가 보이는 80년대 취향의 응접실이 있었다.
약식으로 공항실장에게 신고를 한 후에 공사 사무실에 들러 한국 공항공사가 프린트된 띠에 내 얼굴과 사원이라는 직급이 박힌 출입증을 발급 받고, 공항 내 기관들의 사무실에 들러 인사를 다녔다. 마치 신입사원이 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검문병이라는 보직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군대에서는 할머니를 봐도 환호성을 친다던데, 검문대에 있으면 전국 팔도의 아리따운 여자들이 공항 패션을 선봬 눈을 즐겁게 하였고, 종종 연예인들을 구경할 수 있었으며, 비행기 스케줄을 받기 위해 항공사 사무실에 들르면, 예쁜 누나들이 반겨주었다.
평소 생활에 있어서도 식대가 따로 나오기 때문에 던킨도너츠와 롯데리아 등의 패스트푸드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고, 핸드폰 반입이 허락되어 얼마든지 쓸 수 있었으며, 컴퓨터가 배정되어 얼마든지 인터넷을 즐길 수 있었고,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는 등. 분명 공항에서 만큼은 남들과는 다른 군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처음엔 조금 낯설었던, 항공기 편명과 비행 스케줄 그리고 공항 내 기관들의 명칭과 공항이 돌아가는 전반적인 시스템은 여름이 다가오는 즈음엔 줄줄 욀 정도로 익숙해지고 있었다.
여름이 되자 사무실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의전으로, 육지 부대의 장교 혹은 그의 가족이 골프를 치러 제주도로 온다며, 시간에 맞춰 영접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도착장을 들락날락이며 캐리어를 나르고, 마치 항공사의 VIP룸 같이 출발 전 남는 시간을 보내기위해 사무실의 응접실에 들르면 커피를 타서 접대를 하고, 떠날 때 검색 없이 자동 통과 하게끔 협조를 얻는 특권을 누리게 해주었다.
쉴 틈 없는 높은 분들 혹은 높았던 분들의 방문에 본래 직무인 검문은 뒷전이 되어버렸다. 실장과 부장들은 잘 보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지 메뉴판까지 만들었고, 나는 커피머신 없이 거의 모든 차를 취향에 맞게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실장이 모과와 레몬과 유자를 가져와서는 적당히 차를 만들라는 말에 다지고 설탕에 절이고를 반복하여 일과시간 내내 매달린 적도 있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사무실에 항공기 관련 전화문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휴가철답게 항공기 좌석이 없으니 구해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의는 비롯 우리 사무실 뿐만은 아니었다. 공항 내의 모든 기관이 표를 얻기 위해 항공사를 찾아 갔지만, 없는 표가 생길 리는 만무하였고, 방법은 실시간으로 좌석을 확인하는 방법뿐이었다.
예매한 표가 취소되면 가장 먼저 인터넷에 풀리는데, 이때를 잡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F5 새로고침 키를 누르면서 0에서 1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즉시 예매를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표는 날아가는 것이고, 간부들의 짜증은 그대로 나에게 돌아왔다.
같은 화면을 계속 응시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낀다. 종종 화면이 전환되면서 0이 겹치면 1로 보일 수도 1이 0으로 보일 수도 있었기에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하루 종일 클릭을 하고 있으면, 그 다음날은 꼭 실핏줄이 터지기 마련이었다.
다행히 표를 구하더라도 구해달라던 측의 비행기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거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었다. 간부 몰래 그들의 신상을 확인하면 대부분이 몇 다리 건넌 친인척 혹은 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자원입대까지 해가면서 들어온 군대에서 이런 짓을 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들었으며, 어느 정도 계급이 오르면서 부대에서의 생활이 편해지던 시점이었기에 그 괴리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공항에는 두 명의 절대 권력이 있었다. 하나는 205실의 국정원 제주공항분실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특산품 판매점 고사장이었다. 국가정보기관의 최상위답게 위풍당당한 국정원 실장의 앞에서는 하나같이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마냥 꼬랑지를 살랑였고, 그 큰 공항에 수십 개의 매장을 소유한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고사장 앞에서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침을 질질 흘려댔다. 실질적으로도 우리 사무실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들 모두 고사장의 회식 대접을 안 받아본 사람은 없었다. 처음 공항에 왔을 때에도 한우로 회식을 해준 시켜준 것도 고사장이었지만, 점점 현실을 느끼던 나에게 있어서 그들은 그저 돼지새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난중에는 거의 인사도 안 하다시피 지냈다.
여느 날과 같이 충혈된 눈으로 좌석을 얻기 위해 새로고침을 신경질 적으로 눌러 가며 끝 모를 클릭질을 하던 중에 전화 한 통이 와서는 딸 내외의 휴가에 맞춰 비행기 예매를 해달라며 명령조로 강요했다. 안 그래도 요 며칠간 힘들어 죽겠는데, 말투까지 거슬리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침 간부들이 없었기에 그런 용기가 난 것이지만,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걸려온 부대에서의 호출에 나는 일주일간 완전군장에 하루 종일 연병장을 돌아야 했고, 간부들과 선임 병들에게 시달림을 당해야했다. 다행히 영창이라는 제도가 없어 복무 기간이 연장 될 일이 없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이 지냈던 공항에서 누린 특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개기가 되었다.
딱히 대체 자원이 없었기에 다시 공항으로 출근하게 되었고, 간부들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원칙대로 시행되었다. 하루 16시간 근무시간 동안 10시간을 검문대에 서야했고, 대기 시간은 간부들 옆에 앉아서 가만히 정 자세로 있어야 했으며, 식사는 저 멀리 있는 공항 식대를 이용해야 했고, 이발은 부대로 복귀해 이발병에게 깎아야 했다. 게다가 군기를 강요하며 괴롭히기 시작했고, 불시에 기관들의 전화번호와 제주에서 대구로 가는 듣보잡 항공사의 편명을 물으며 모른다는 대답엔 ‘공항 검문 및 대 테러 집단인 우리가 그것을 모르면, 존재의 이유가 뭐냐며’ 갈구기 시작했다.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부대에 복귀해서는 선임들이 공항에서 꿀만 빨던 게 미쳐서 장교한테 대들어 우리한테까지 피해를 준다며 욕을 했고, 공항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괴롭힘의 극치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제주방어사령부에서 총기를 소지한 채 탈영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우리 부대는 정보기관답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갖은 갈굼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검문대에 앉아 정신을 놓고 있는데, 군인은 군인이 알아본다고 군인 같이 생긴 인원이 검문대에 들리지 않는 것이 포착되었다. 불러다가 요즘 당한 것에 대한 화풀이를 할 요량으로 “너 군인이지?”라며 물으니, “군인 아니지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누가 봐도 군인 말투인 ‘~지 말입니다.’라는 말에 당장에 휴가증을 요구하니 당황하기 시작했고, 의심이 들어 잡아두곤 사무실에 연락해 조사하니 며칠 전 탈영한 인원이었다.
우리 부대의 위상을 세웠다는 공로로 표창을 받은 간부들은 예전에 차가웠던 태도들이 조금
씩 녹아들기 시작하면서 잃었던 혜택들은 다시금 나에게 찾아 왔고, 나는 예전과 달리 열정을 다해 클릭질과 캐리어를 나르고 있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싸구려 정장과 구두는 중고가 브랜드로 바뀌었고, 군인이 민간인 코스프레를 하던 것에서 민간인이 군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으로 변모하였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니 이렇게 편할 수 없었다. 짬이 찰수록 아무것도 모르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 전에 그토록 아니꼬웠던 국정원실장과 고사장을 봐도 밝은 미소로 배꼽인사를 했고, 공항간부들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던져가면서 박자에 맞춰 클릭질을 하였고, 시간에 맞춰 캐리어를 날랐다. 게다가 종종 떨어지는 격려비와 회식은 나를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기관들과의 친분은 여러모로 유용하였다. 아는 사람이 제주도에 오면, 고사장에게 부탁하여 특산품을 40%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마치 의전을 받듯이 줄을 설 필요 없이 옆으로 빠져, 출발장에서 검색 없이 통과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항공사 직원과의 친분을 이용해 가장 편한 28A석으로 좌석 어싸인까지 했다.
2009년 제주도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는 나를 더욱 그 세계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군정보기관답게 국정원, EOD, 공항기동대와 함께 각 국 VIP들을 영접하면서 마치 내가 뭐라도 된 양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불시 검문하여 모욕감을 주었고, 성황리에 마친 정상회의를 기념하여 대통령의 편지와 함께 받은 배지는 나의 어깨를 더욱 높여주었다.
전역이 다가올수록 자기반성의 시간도 나름 가져보았지만, 달콤하고 안정된 길을 이탈하고 싶은 용기는 없었다. 다만, 이번을 경험으로 전역 후 나의 삶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며 다짐하고 또 다짐할 뿐이었다.
어느덧 2010년 1월 3일이 되었고, 전역을 했다. 군대와는 다른 자유분방함 속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하겠다는 생각에 한 학기를 휴학했지만, 그간 쌓인 버릇을 버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고, 나에겐 알바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겐 직장인 그 곳들에선 오히려 그러한 버릇들이 더욱 나를 빛나게 하고 있었으며, 복학 후 몸담은 학생 자치 기구 또한 밖에서와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현재, 사회로의 첫 발 아닌 첫 발을 내미는 이 시점에 부대에 있을 때, 나와 가장 친했고 자주 고민을 상담해주던 4살 많은 후임 종욱이가 그럴 일 없다며 몸서리치는 나에게 했던 말을 이따금씩 떠올리며,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란 뻔한 다짐을 한다.
“김진욱 병장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언젠가 가장 증오하던 것들에 적응하고, 익숙하고, 닮아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