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과 만해
만공(1871~1946)과 만해(1879~1944)는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만해는 젊은 시절부터 불교청년회 회장,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만당 당수등 역사의 현장에 적극 뛰어들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만공은 일찍이 출가하여 경허선사로부터 수행지도를 받으며 비교적 순탄한 선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만해의 주옥과 같은 시는 교과서에 실리고 불교유신의 정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고고한 독립운동가로 온 국민들에게 추앙 받고 있지만 만공은 경허의 법을 이어서 선불교를 중흥시키고 후학을 길러낸 큰스님으로 알려졌을 뿐 독립운동가의 면모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만공의 독립운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만공은 1937년 3월 11일 31본산 주지들이 참가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전 총독 데라우치는 우리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으로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졌다. 조선 불교를 간섭을 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라는 사자후를 토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만해는 만공에게 “잘했네! 한 번 할을 하매 그들 간담이 떨어지게 하였구만. 그런데 방망이를 휘둘러 때려 주면 더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했다. 만공은 크게 웃으며 “차나 한잔 들게,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영리한 사자는 할을 쓴다네”라고 답한다. 만공스님은 일제의 사찰령에 의해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한국불교를 세우기 위해 선학원설립을 주도한다. “우리는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사람끼리 운영을 하는 선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회의를 부치게 된 거 올시다.” 또한 만공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간월암에서 천일기도를 마쳤다. 독립운동의 목표가 우리민족이 억압받지 않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라면 이것은 불교의 목표이자 만공의 목표이기도 했다. 침략자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논 하고 불교의 진흥책을 논하는 것은 기만이자 허구라면 반대로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수행자가 불교의 청정성이 훼손되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공은 일제의 사찰령이 구속에서 벗어나 조선불교의 자유를 원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무지와 탐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보았다. “나라는 의의意義가 절대絶對 자유自由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奴]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다” 1934년 선학원이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그 조직체를 변경하였을 때 만공은 초대 이사장이 되고 1935년 사찰령에 저항하는 수좌들이 수좌대회를 열고 자주적인 종단인 조선불교선종을 창종하였을 때도 만공은 초대종정이 된다. 한국불교가 풍전등화 같은 비상시기에 한국불교를 책임지고 이끌었고 청정하고 독립적인 교단이 되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다. 만공에게는 총독에게 불호령을 내리고 사찰령에 항거하는 선학원을 건립하는 것이 선수행의 본분사와 다르지 않았다. 비유를 하자면 만해가 불교의 밖으로 나가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아버지와 같은 역활을 했다면 만공은 불교전통과 청정을 책임지는 어머니와 같은 역활을 했다고나 할까. 만해와 만공은 다른 길을 걸어갔지만 그들의 우정이 말해주듯이 둘은 그 다름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아름다운 도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