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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의 별서정원에서 문향에 취하다
여행은 행선지가 어디든 늘 설렌다. 여행은 기다림만으로도 행복이다. 그러나 여행 이후엔 상황이 다르다. 실망한 곳도 있고, 아쉬워서 다시 가고픈 곳도 있다. 이번에 다녀온 광주와 담양 일대 무등산 자락은 후자의 유형이다. 긴 여운이 남는 곳이다.
무등산! 차등이 없는, 혹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인가. 무등산은 호남의 중심이다. 그 호남의 지리상 중심이자 사람들 마음의 중심에 있다. 그 산자락을 광주, 담양, 장성, 화순 등 여러 고을이 각각 나눠 에워싸고 있다.
그 산자락에는 수많은 인재가 나왔다. 풍부한 물산이 사람을 풍요롭게 살찌웠고, 예술과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동전에도 양면이 있듯이 그 이면엔 계급의 불평등이 있었다. 이를 타파하려는 민중의 큰 함성이 있었다. 역사는 무등을 지향하며 오늘 여기까지 왔다.
무등산
평등 가득한 세상의 산, 무등산!
10월 3일, 가을빛이 완연한 무등산 동쪽 자락에서 자전거 여행은 시작됐다. 관광버스가 우리를 내려다준 곳은 광주 제2순환도로 옆 산수동 어느 도로변이다. 마땅히 몸을 풀 곳도 없어 스트레칭도 없이 곧바로 라이딩을 했다.
향하는 길은 처음부터 오르막이다. 순환도로 하부 통로박스를 지나고, 대여섯 구비를 돌아 전망대 휴게소를 지나 계속 직진하면 제4수원지 교량 건너편 교차로에 쉼터가 있다. 여기서 왼쪽은 망월동 방향이고, 오른쪽이 우리가 가야 하는 충장사 쪽이다.
충장사로 향하는 길, 단풍나무 가로수 사이로 멀리 보이는 덩치가 큰 산이 있다. 무등산이다. 무등산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내게 던지는 것 같다.
충장사
운암서원과 충민사를 지나니 오르막길이 쭉 이어진다. 고개를 넘어가자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진다. 오른쪽은 무등산 정상 방향이고 왼쪽은 충장사 방향. 소쇄원을 가려면 충장사 쪽으로 가야 한다. 삼거리에서 조금 내려가자 충장사가 나타났다.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김덕령 의병장을 기리는 사당이다. 사당 위에 장군의 묘지가 있다. 1567년 이 마을에서 태어난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5천 의병을 모집, 이순신 장군과 곽재우 장군과 연합하며 큰 전공을 세워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무고로 투옥된 장군은 여섯 차례 혹독한 고문을 받고 1596년 서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장군은 시조 한 수를 읊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미처 못 핀 꽃들 다 타는구나
저 산의 불은 부어다 끌 물이라도 있지만
이 한 몸 태우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자신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부당했으면 이런 시를 남겼을까. 훗날 복권은 되었지만 그의 억울한 죽음은 사람들에게도 한을 남겼다. 김덕령 장군의 시호 충장공의 이름을 딴 광주광역시 충장로에서 5.18 항쟁이 시작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인 묵객이 사림 문화를 꽃피운 곳,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충장사에서 나와 숲으로 난 내리막길을 달렸다. 이 일대에는 16세기 시인 묵객들이 사림 문화를 꽃피웠다.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이 그 흔적이다.
무등산 자락 옛 선비들의 자취를 찾으러 온 여행자들이 많이 눈에 띈다. 소쇄원으로 가는 길 주변의 코스모스 꽃밭이 여행자를 유혹한다. 꽃밭을 지나 들뜬 기분으로 달려 소쇄원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매표소 뒤에 보관해두고 우리는 대숲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소쇄원
맑고 깨끗하고 향기로운 소쇄원
소쇄원 안으로 들어가니 대숲이 바람에 서걱서걱하고, 작은 계류가 바윗돌에 부딪쳐 졸졸 흐르니 청아한 분위기에 마음도 정화되는 것 같다.
소쇄원은 호남의 가장 아름다운 원림 중 하나다. 원림이란 인공적으로 조경을 한 정원과는 달리 숲과 동산 등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두고서 건물을 배치한 정원이다. 소쇄원은 작은 계곡 건너 양지바른 경사지에 단을 쌓아 지은 건축물이다. 주변엔 대나무, 매화, 백일홍 등 꽃을 심어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소쇄원은 정암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처참하게 숨을 거두자 그를 흠모하던 양산보(1503-1557)가 충격을 받고 여기로 들어와 살면서 조성한 별서 정원이다.
정치에 실망하고 낙향해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자연을 벗 삼으려 했지만 그인들 외로움이 없었을까. 주인의 마음은 원림 입구에 세운 대봉대(待鳳臺)라는 초가에서 읽혀진다. 봉황, 즉 귀한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김인후, 송순, 정철, 임억령, 김성원, 김윤제 등 조선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이룬 16세기 호남 문사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이었다.
소쇄원 광풍루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08년경 전 소쇄원 제월당 벽면의 낙서를 고발하는 취재로 여길 처음 다녀간 적이 있었다.
당시 제보자는 일본인 여성 레이코 씨였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고 우리 문화유산을 유달리 사랑한 그녀는 소쇄원 건물 벽에 어느 누군가 몰지각하게 낙서한 것을 보자 참을 수 없어서 방송국에 제보를 했던 것이다. 그녀의 진정성 있는 고발 덕분에 두 번의 취재 과정을 통해 낙서는 말끔히 지워졌다.
이번에 가보니 제월당과 광풍각 툇마루에 낙서금지 팻말이 놓여 있다. 그 덕분인지 지금 이곳에는 낙서가 없다. 광풍각 마루에서 김밥을 먹으며 이 이야기를 했더니 류 교수님이 매우 반색하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신다. “참 잘하였어요!” 이런 뜻일 게다. 다시 찾은 여행지에서 지난 시절의 또 다른 나를 다시 만나며 세월의 변화를 느낀다.
소쇄원 제월당
필자의 취재 후 소쇄원 건물에는 '문화재 낙서 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송강 정철과 깊은 인연을 간직한 환벽당
소쇄원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다가 왼쪽 길로 가서 다리를 건너면 나지막한 동산이 있다. 동산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동산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그곳에 환벽당(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이 있다. 환벽당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등 벼슬을 한 김윤제(1501-1572)의 집이다. 그가 나주목사로 있을 때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났는데 그때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낙향했다고 한다. 그때 손수 지은 별당이 환벽당이다.
건축주의 약력을 보니 1501년생이다. 그와 동갑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많은 제자를 두며 큰 학맥을 이루었듯 당시 김윤제의 환벽당에도 송순, 김인후, 양산보, 정철, 김성원 등 호남의 문사들이 찾아와 시단을 형성했다고 한다.
환벽당
그가 송강 정철(1536-1593년)과 맺은 인연은 퍽 흥미롭다. 어느 날 여름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던 김윤제가 용소에서 용이 놀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보니 거기에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소년의 총명함을 알고 자신의 문하로 삼고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소년이 당시 16살의 정철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정철은 아버지가 귀양살이에 풀려서 조부의 산소가 있는 이 근처로 이사를 왔을 때인데, 김윤제는 정철을 10년 동안 환벽당에 지내게 하며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고봉 기대승에게 공부를 배우고 임억령에게 시를 배웠다고 한다. 공부 끝에 정철은 26살에 진사시 1등을 했고 이듬해 문과 장원을 하며 벼슬길로 나갔다고 한다.
환벽당은 예전에 푸른 대숲이 고리를 두르듯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숲이 없다. 환벽당 아래에 김윤제의 살림집이 있었다는 그 자리에는 키 큰 배롱나무와 꽃무릇이 심어져 있다. 관직을 떠난 김윤제는 늘 툇마루에 앉아 무등산을 바라보며 여생을 마감했으리라.
광주호 생태공원
환벽당 뒤에는 광주호가 있다. 호수가 조성된 뒤에 생긴 저지대에는 생태공원과 탐방로가 있다. 구절초 군락지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랐더니 잔디가 드넓게 깔린 언덕이 나타났다. 광주호수가 아우라(aura)를 이루는 것만 같은 아름다운 풍경의 언덕 위로 신이 난 듯 자전거를 타며 사진 찍기 놀이를 즐겼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 눈의 호사를 누리니 기쁨은 배가된다. 하산할 때는 올라올 때와 달리 반대편으로 했다. 이곳에 오래된 버드나무 보호수가 있다고 들었는데, 찾지 못하고 바로 식영정으로 향했다.
「성산별곡」 송강 정철 가사문학의 무대 식영정
식영정
식영정(담양군 남면 지곡리)은 조금 전에 지나온 환벽당과 하천 하나 사이를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이곳도 환벽당과 더불어 송강 정철의 유적 중 하나로 그의 가사 「성산별곡」에 나오는 그 성산 위에 지어진 정자다.
이 건물은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이 스승이자 사돈인 임억령을 위하여 1560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김성원은 정철보다 11년 연상이었지만, 정철과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정철은 식영정의 건축주인 서하당을 생각하며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한다.
…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
식영정 옆 소나무
수백 년 세월이 흘러 강산도 수백 번 변하듯, 식영정 아래로 흐르던 강물은 호수로 변해 있다. 식영정 건물 뒤편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송강이 성산을 노래한 그때도 있었을까. 풍경은 과거의 세월을 비껴가더라도 역사는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한다.
송강은 문과 합격 후 10년여 기간 순탄한 벼슬살이를 한 뒤 숨이 넘어갈 때까지 당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그때문에 승진과 삭탈을 반복해야만 했다. 1585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동인의 탄핵을 받아 창평으로 돌아가서 4년간 은거 생활을 했는데 이때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남겼다.
다시 관직에 등용되고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우의정으로 발탁돼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 수백 명을 처단했다. 이때 정여립과 지역적 연고를 한 수많은 호남 인사들도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은 잠시뿐. 그 이후에 귀양살이를 하고 복직했고, 끝내는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온 뒤 5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권력은 그에게 부귀와 영화뿐 아니라 오명을 남겼고, 권력에 밀려나 초야에 있을 때 그는 문학작품을 남겼다.
무등산 자락을 뒤로하며 광주호를 벗어나 자전거는 또 다른 목적지로 향했다. 고서면 후산리 마을에 있는 명옥헌 원림이다. 명옥헌 원림은 오늘의 목적지인 담양읍의 진행 방향은 아니지만 이번 기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공간이다.
명옥헌 원림 앞 연못
명옥헌 원림을 아시나요?
후산리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오래된 은행나무를 구경한 뒤 명옥헌 원림으로 향했다. 안내표시가 그려진 벽화가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원림은 오희도(1583-1623)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지었다고 한다. 명옥헌 원림은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보다 한 세기 뒤인 1625년에 조성됐다.
정자 앞뒤로는 연못이 있다. 전면의 연못은 비교적 규모가 크다. 연못 주변엔 석 달 열흘간 꽃 핀다는 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지금 꽃잎은 대부분 떨어졌고, 일부 붙어 있는 꽃들은 모두 시들어 있다. 조금만 일찍 찾았더라면 백일홍 꽃단장을 한 원림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을 텐데….
명옥헌
문향에 취한 자전거, 담양으로 향하다
후산리에서 담양까지 거리는 20킬로미터이다. 중간에 휴식 한 번 하고서 쉬지 않고 달렸다. 자전거 여행이 좋은 점은 하루 동안 달릴 수 있는 이동 거리다. 길만 좋다면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하루 100킬로미터 정도는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전히 자신의 체력으로 바퀴를 굴리는 자전거 여행은 체력 증진도 되니 일석이조다.
오늘은 비록 죽녹원 대숲에서 죽림욕의 기회는 얻지 못했지만 2킬로미터에 달하는 관방제림의 강바람을 쐰 것으로도 모두 흡족해한다. 이미 행복은 바구니의 용량 가득 꽉 채운 상태다.
라이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백양사 입구 어느 맛집에서 단풍나무 수액으로 만들었다는 음식을 먹었다. 단풍 두부보쌈과 단풍두부 전골이 주 메뉴인데, 그걸 보자 몸은 자기 배 속의 용량을 잊은 듯 끝없이 식도락을 추구한다. 서울 가는 길이 천 리도 더 남았건만….
담양시내로 흐르는 영산강
무등산 별서정원길 (단위 km)
광주 산수동 - 4 - 제4수원지 - 4.5 - 충장사 - 5.5 - 소쇄원 - (환벽당, 광주호 호수생태공원) - 2 - 식영정 - 6 - 명옥헌 원림 - 15 – 담양읍관방제림
이 기사는 필자가 펴낸 '김영환피디의 자전거 인문학'을 근거로 하여 작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62267
[출처] 광주·담양 무등산 - 옛 선비들의 별서정원에서 문향에 취하다 (자출사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 작성자 김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