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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 강변 문화유적 찾기
◇ 성 니콜라스 대성당 : 마포구 마포대로 18길 43(서울 미래유산)
- 비잔틴 양식의 국내 유일의 정교회 성당
이 성당은 한국정교회(韓國正敎會) 한국 관구의 중심 교회로 비잔틴 양식의 국내 유일의 정교회 성당이다.
이 성당은 산타클로스의 모티브가 된 미라의 대주교 니콜라스의 이름을 따왔으며, 가수 나애심이 부른 「미사의 종」에서 ‘니콜라이 종소리’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한국의 첫 정교회는 조선말인 1903년에 고종황제가 주한러시아 공사관 직원에게 하사한 새문고개(현 경향신문 사옥 자리)의 정동 지역에 처음 터를 잡았다. 이 정교회 성당은 신축 계획을 세웠지만 러일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정교회의 교세(敎勢)는 6.25전쟁 참전국인 그리스의 도움으로 생기를 되찾아, 1968년에 정동의 토지를 처분하고, 이곳 아현동 마루(당시 아현형무소 소장 사택)에 자리 잡았다.
이 성당은 일본 토오쿄오의 러시아 정교회인 니콜라이 대성당(1891)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그리스 정교회 성당(1961)을 표본으로 삼아 건축하였다.
◇ 경성감옥 터: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현 서울서부지방검찰청 및 법원)
-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통한(痛恨)의 터
현 서울서부지방검찰청 및 법원 자리(공덕동 105번지) 일대는 일제강점기 경성감옥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1912년에 일제가 경성감옥을 설치하여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함으로써 옥고(獄苦)를 치르게 했던 독립운동 유적지이다.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은 원래 1908년 10월에 신설된 서대문감옥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으나, 1912년 9월, 조선총독부가 이곳에 추가로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이란 명칭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경성감옥은 주로 장기수(長期囚) 위주의 남자 수형자를 수용하였는데, 일제에 의해 체포된 많은 애국독립지사들이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특히 1919년 3.1독립선언 때 최남선(崔南善), 한용운(韓龍雲), 오세창(吳世昌)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감옥에서 이곳으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마포삼성아파트 자리(도화동 7번지)는 마포 연와공장(煉瓦工場)으로 경성감옥 수감자들의 노역장 시설로 사용되었다.
이 감옥은 1923년(안내판의 1926년은 오기) 5월,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로 개칭되었다가 광복 이후에는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 1946년 4월)를 거쳐 다시 마포교도소(麻浦矯導所, 1961년 12월)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마포교도소는 서울의 도시화의 여파로 1963년 9월에 경기도 안양읍으로 옮겨 안양교도소(安養矯導所)로 전환하였다.
5.16 후 군사정부는 전일 마포형무소의 농장으로 사용되던 곳에 1962년~1964년에 걸쳐 대한주택공사로 하여금 마포아파트를 세우게 했다. 이로써 서울은 본격적인 대단위 아파트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당시 마포아파트는 높이 6층에 8평~18평까지의 10동, 642 가구분이 건설되었다.
이 아파트단지는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점과 또한 우리의 기술로도 고층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비교적 좁은 면적에 고밀도 토지이용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내부설계가 잘 되어 거주의 편의성을 과시했다는 점에서 성공작으로 평가되었다.
◇ 마포 공덕리 금표(孔德里禁標): 마포구 공덕동 394-3번지(공덕역 2번 출구, 롯데캐슬 동쪽의 쌈지공원 내)
- 흥선대원군의 별장의 위치를 알리는 푯돌
마포 공덕리 금표(禁標)는 조선말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거처하는 별장인 아소당(我笑堂)의 위치를 알리는 푯돌로 조선말인 1870년 8월(음력)에 공덕동 로터리에 세웠다가 재개발사업으로 공덕동 394-3번지(현 백범로 139)에 이전하였다.
푯돌에는 「공덕리 금표 한 120보(孔德里 禁標 限一百二十步)」라고 쓰였다. 이는 공덕리 별장(아소당)이 이곳에서부터 120보(步) 거리에 있으니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 아소당(我笑堂) 터 : 마포구 백범로 25길 9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
아소당은 마포구 염리동 동도고등학교(서울 디자인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다.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 때(1882년) 일시 집권했다가 4년간 청나라에 유배된 후 귀국하여 운현궁과 이곳에 머물렀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민씨 일파에게 정치적 패배자로 내쫓겨 1895년 이곳에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 시절에 자신의 일생이 덧없음을 뒤돌아보며 스스로 조소(嘲笑)한다는 뜻으로 별장 이름을 ‘아소당(我笑堂)’이라 이름 짓고, 을미사변(1895년) 직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흥선대원군이 1898년에 아소당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안장했다. 1908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했으며, 다시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했다.
흔히 대원군 ‘공덕리 별장’이라고 부르는 99칸의 이 집은 정계에서 물러나 운현궁에 머물던 흥선대원군이 1895년에 교동도로 가려고 마포강변에서 배를 타려다가 제지 당한 이후부터 거주하게 되었다.
즉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4월에 고종을 몰아내려는 역모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이 가장 사랑하던 큰손자 이준용(李埈鎔)이 관련되어 10년 유배형을 선고 받고, 인천 북쪽의 교동도(喬洞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75세의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서 명성황후 민씨일파에 의하여 감금을 당하고 있는데다가 손자까지 유배를 떠나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손자를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서 고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은밀히 마포강변에 나룻배를 준비해 놓도록 하고, 이른 아침에 내금위(內禁衛)의 군사들의 눈을 피해 운현궁에서 나와 마포강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윽고 흥선대원군이 배에 올라 막 떠나기 전에 이를 뒤늦게 알아낸 내금위 군사들이 출동하여 제지 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흥선대원군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까운 공덕리 별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에 머물자 명성황후 민씨측은 30여명의 수비병을 배치하여 엄중하게 감시하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무상한 인생을 조소(嘲笑)하는 뜻에서 이 별장 이름을 아소정(我笑亭)이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에 조선이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와 긴밀하게 지내는 친러정책을 취하자 조선을 그들 뜻대로 장악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미우라(三浦)를 조선의 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미우라 공사는 오까모도(岡本) 일본 불량배 두목으로 하여금 아소당에 머물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은밀히 만나도록 하였다. 오까모도는 일본이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하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친일정권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알리고 그의 의중을 떠 보았다.
마침내 흥선대원군에게서 이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응낙을 얻어내자 일제는 을미년(1895) 8월 20일 새벽 3시, 무장한 일본인들로 하여금 흥선대원군을 호위하게 하고, 앞장 세웠다. 서대문이 열리자 훈련대장 홍계훈이 지키는 광화문을 깨뜨리고 경복궁에 난입하였다. 이어서 궁중을 샅샅이 뒤져 명성황후 민씨를 찾아 시해하니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한편 국태공 흥선대원군이 1902년 2월에 세상을 떠나자 이 아소당 안에 묘를 썼으므로 한 때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고 불렀다. 그 후 아소당 자리에는 광복 후에 동도중고등학교 · 서울여자중고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동도중고등학교 교정에 있던 아소당 건물은 5·16 군사정변 이듬해인 1962년에 철거되었다. 이 건물 재목은 신촌동의 봉원사에서 매입하여 1966년에 염불당(대방)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현재 서울 디자인고등학교 정문 옆에는 1995년에 마포구청에서 ‘아소당 터’라는 표석(標石)을 세워놓았다.
◇ 용강동 정구중 가옥 : 마포구 큰우물로2길 22(용강동 335 / 민속자료 제17호)
- 일제 때 부유한 이씨가 무남독녀에게 지어준 전통 한옥
192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구중씨 개인 집으로, 좁은 집터에 전통 한옥 구조의 깊은 맛을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대지 241평, 건평 71평).
이 한옥은 좁은 터에 안채, 행랑채, 별당을 따로 만든 살림집이며, 안채의 방 안에는 병풍, 도자기, 문갑 등 각종 근대 유물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다시 대문채가 있고 안쪽에 있는 대문을 들어서야 안채가 있다. 대문간 행랑채는 일반적인 ‘一자형’ 평면과 다르게 휘어지게 지었으며 대문의 남쪽으로 방 2칸과 광 2칸을 두었다. 현재 광 1칸은 방으로 개조하였다.
안채는 지붕 옆면의 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며, 창호는 대부분 현대식으로 바꾸었다. 대문채와 별당채는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도시의 제약된 좁은 집터에 오밀조밀 전통 한옥 구조의 깊은 맛을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이 한옥은 조선말에 용강동의 부농인 이 모 씨가 무남독녀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해, 당시 장안에서 이름난 4대 목수 중의 하나인 안영달에게 맡겼다. 목재는 압록강 유역의 홍송과 백송을 뗏목으로 옮겨와 한강에 2년 동안 담가 놓았다가 1년간 건조한 후에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개인 소유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고 있다.
◇ 토정 이지함의 집 터 : 마포구 토정로 32길 11(토정동 133), 한강 삼성아파트 102동 ‘토정 경로당 옆’
- 『토정비결』을 저술한 조선중기의 역학자 이지함의 집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조선중기의 저명한 역학자(易學者)인 토정 이지함 선생(1517~1578)이 일생을 마포구 토정동 부근에서 흙담 움막집을 짓고 살아 ‘토정(土亭)’ 이라는 호가 유래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고, 후에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성리학뿐 아니라 수리, 의학, 복서(卜筮), 천문지리 등 여러 분야에 달통했다.
특히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토정 이지함 선생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일년의 신수(身手)를 봐달라는 요구가 많아져서 ‘토정비결’을 지었다고 전한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결혼 후 마포의 장인 집 근처 마포나루에 흙벽돌로 움막을 짖고 살며 호를 토정이라 했다. 마포나루에 살면서 빈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물고기 잡는 법과 장사하는 법을 가르치다 한때는 무인도에 박을 심어서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수천 석의 곡식을 벌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또 몇 년 간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벌어 빈민들에게 모두 나눠 준 뒤 빈손으로 장삼자락을 펄럭이며 홀연히 떠난 적도 있다고 전한다.
그의 일화로 관리가 지나가는 길을 고의로 막고 심술을 부려서 곤장을 처 달라고 해 곤장을 맞기도 하고., 벼슬하라는 권유를 받은 날은 오늘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귀를 물로 씻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쇠 솟을 머리에 쓰고 나막신을 신고 다니다 때가 되면 그 솟에 밥을 해 먹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에 율곡 이이(李珥)는 사(士). 농(農0. 공(工). 상(商)의 신분 제도가 철저한 현실에 토정 이지함 선생이 공부해야 할 성리학을 게을리하고 천한 장사치 노릇을 하고 있어서 매우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토정 이지함 선생의 제자들이 과거 응시자격이 없는 토정 선생의 탁월한 예지능력을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 등의 성리학자들에게 알려서 1573년에 포천 현감으로 천거가 되어 그가 원치 않는 벼슬을 하게 되었다.
포천 현감이 된 토정 이지함 선생은 임진강의 대홍수를 예견해서 수많은 인명을 구하고, 이듬해에 빈민 구제책을 임금에게 상소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곧바로 사표를 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5 년 후인 1578년(중종 12년)에 충남 아산의 탐관오리 윤추수를 파직하고, 토정 이지함 선생을 부임시켰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빈민을 위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인근 거지들과 노약자들이 숙식하도록 하고, 자신은 부임 3개월 만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삼개 포구 터 : 마포구 토정동 용강아파트 앞(한강 둔치, <마포대교> 200m 서쪽)
- 조선시대에 황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던 물화(物貨) 집산(集散)의 포구
조선시대에 삼개 포구로 불렸던 마포 나루는 수심이 길고 넓은 강항(江港)인 마포와 서강이 조운의 중심
항구가 되어 근세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영하였다.
이리하여 마포강은 3남지방의 곡식 운수는 물론 어물(魚物)류의 집산지였다. 삼개 포구는 각지에 연결되어 서울의 교역항(交易港)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웃한 동막(東幕)과 함께 번성하였다. 『동국여지비고』 책에는 도성 서쪽 15 리 지점의 서강까지를 서호(西湖)라 하였으며, 황해, 전라, 충청, 경기도 하류의 조운(漕運)이 모두 모였다고 하였다.
삼개 포구는 조선 후기에 들어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해안에서 생산된 소금과 젓갈이 주로 이곳에서 거래되었다.
삼개 포구는 강폭이 넓어 강물이 완만하게 흘렀다. 이곳에는 밤섬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한 폭의 그림처럼 강상(江上)의 풍경이 정겨웠다. 조선시대에는 마포8경(麻浦八景)이라 하여 강상에서 뱃놀이 하던 당시 선비들의 한가로운 정경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많은 풍류 묵객들이 마포강변을 찾아 정자를 짓고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10월이면 서울 사람들은 김장을 시작하므로 여러 가지 젓갈이 삼개 포구에서 거래되었다. 겨울이 되면 한강의 결빙(結氷)으로 수로 통행이 막히기 때문에 집집마다 김장을 잘 담기 위하여 배추와 무, 파, 마늘, 청각, 생강 등 여러 가지 양념과 젓갈을 구입하려고 마포에 드나들었다.
조선 후기부터 개화기까지 한강변에서 가장 번성한 삼개 포구는 오랫동안 ‘삼개 삼주’라는 말이 유행했다. 삼주란 상거래를 알선하는 객주, 항해의 안녕을 빌어주는 당주, 술집인 색주를 말한다. 이것이 이어져서 오늘날 마포갈비 골목을 비롯한 음식문화거리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날 뱃사람과 상인들이 고기를 숯불에 구워 먹던 것이 마포갈비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한다.
개항 후에는 인천~마포간에 증기선(蒸汽船)이 운행하여 일본 상인에 비해 청나라 상인은 서울에서 비교적 활발한 상업활동을 할 수 있었다.
삼개 포구에 증기선의 왕래가 잦고 은성(殷盛)해지자 청나라는 1892년에 이곳에 계사국(稽査局)을 설치하여 도선장(渡船場)의 치안을 담당하게 하는 등 청상(淸商)의 이익에 앞장섰다. 청국인 거상 동순태(同順泰) 등은 청나라 원세개(袁世凱) 총리교섭통상대신의 권유에 따라 한양호(漢陽號) 증기선을 구입하고, 이 배를 인천∼마포∼용산 간을 왕복하도록 하였다.
◇ 마포 종점
: 마포구 마포동 140(마포역 4번 출구 부근)
- 청량리~마포간 전차(電車)가 운행되던 당시의 마포 종점
이곳은 1968년까지 청량리~마포간의 전차(電車)가 운행되던 당시의 마포 종점은 현재 지하철 5호선 마포역의 도원빌딩 뒤편의 <복사꽃공원>이다. 이곳에는 공중화장실로 사용하는 모형 전차 한 대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서울시내를 운행하던 전차의 마포 종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전차는 조선말에 고종황제의 홍릉 배릉(拜陵)을 위하여 한성전기회사에 의해 부설되어 1899년 5월 17일 처음 개통되었다. 마포에 전차가 운행된 것은 1907년 초이다. 서대문~마포에 이르는 전차 노선이 처음 개통 운행되자 전차는 서민의 발이요, 애환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자동차에 밀려 1968년 11월 30일 서울의 전차가 일제히 그 운행을 정지하게 되었다. 현재 도화동 39번지 동양시멘트 건물 자리는 당시 전차의 차고지로 사용되었다.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
‘마포’라고 하면, 1967년에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 종점」 노래로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사랑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전차의 마포 종점에는 오랜 역사의 현장이 많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한 시위군중은 서울 곳곳 교외로 번져나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마포 종점은 1919년 3월 1일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시위군중이 오후 8시경, 이곳에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던 독립운동 유적지이다.
지하철 마포역 4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걸으면 ‘3·1 독립운동기념터 : 마포 전차 종점’라는 기념표석이 보인다.
◇ 석불사(石佛寺) : 마포구 마포대로4 다길 23-6
- 조선시대에 호국사찰로 창건되어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중창된 사찰
석불사는 조선시대 제19대 숙종 때 환성(喚惺) 지안대사(志安大師 1664년~1729년)가 이곳에 한강을 진호(珍護)하고, 상인과 선원들의 무사 항해와 상업 번창을 기원하는 호국사찰인 백운암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폐사되고, 풍월정(風月亭)이 세워졌다. 200여년 전에 불심이 돈독한 무진거사(無盡居士)가 꿈에 청룡 한 마리가 한강변에서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곳에 와보니 석불과 백운암이라는 편액을 발견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석불암으로 칭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삼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천일(天日)스님(1912년~1977년)의 원력(願力)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중창하였다. 이후 1990년~2010년까지 20년에 걸쳐 대웅전, 극락전, 삼성각, 설법전, 요사채 등과 미륵부처를 세우는 등 새롭게 불사하여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석불사는 서울 도심 속 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비구니(比丘尼)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