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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선생
서울 강서구 발산동에 자리 잡은 ‘선미글방’ 박정미 원장은 그해 겨울을 보내면서 지하에 있는 태권도장 고석진 사범과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유유상종이랄까. 두 사람은 심정적으로 친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둘 다 미혼이었고, 80년대 후반 서울의 터질 것 같은 긴장과 압박 속에서 바삐 움직이다가 가끔씩 외로움을 타는 젊은이들이었다. 게다가 석진은 대학생활을 떳떳하게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뭇시선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고, 정미는 혼자 힘으로 글방을 꾸려나가느라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정미가 끓여준 커피를 마신 다음날 늦은 아침, 시장에 가려고 계단을 내려오던 정미는 석진과 마주쳤다.
“어머,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그녀가 먼저 쾌활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자 석진은 계면쩍은 듯 빙긋 웃으며 ‘아, 네에.’ 하며 머리를 숙여 응대하곤 부스스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시장 통에 나가 해장국이나 한 그릇 비울까 하고 나오던 차였다. 밖에는 찬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밤 정미가 위층으로 올라간 후, 그는 심사가 더 산란하여 애를 먹었다. 예상치 않았던 그녀의 단아한 미소에 접하자 그 동안 잊으려고 애쓴 설희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정미가 먼저 ‘전 지금 시장에 가려는 데요.’라고 말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석진은 잠시 머뭇거린 뒤 머쓱한 웃음을 웃고는 앞장서 허위허위 걸었다. 그러마 하고 동의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시장으로 난 길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휘익! 소리를 지르며 세차게 불어와 두 사람을 더 가깝게 해 주었다.
송하시장 안에는 떡집 분식집 국밥집 등이 푸짐한 김을 내뿜으며 늘어서 있었다. 석진은 이곳을 자주 이용하였다. 아침 식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해결하다시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시계포 옆에 붙은 돼지분식집은 단골이었다. 석진이 그 분식집 앞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머뭇거리자 문이 열리며 수더분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말했다.
“고 선생, 추운데 들어오시구랴. 내 할 얘기도 좀 있으니께.”
석진은 정미를 돌아보았다. 정미는 따스한 김이 좋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둘은 식탁에 앉아 우동을 시켰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석진이 묘령의 아가씨와 식탁에 앉는 것을 훔쳐보면서 우동을 듬뿍 말아 내놓았다.
“누구유? 저 색신…. 참 곱기도 하구먼.”
우동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석진에게 묻자 석진이 조금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아, 네에. 우리 원장님이신데요.”
그의 더듬거리는 말을 자르면서 정미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석진 씨가 여기 자주 오시나보죠? 어머, 우동 국물이 참 맛있네요. 내가 왜 이 집을 몰랐을까. 시장엘 수백 번도 더 왔는데….”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에 주인아주머니는 흡족한 얼굴로 응대해 주었다.
“그러우. 나도 색실 몇 번 본 적이 있다우. 고 선생은 우리 집 단골이라우. 점잖고, 잘 생겼고, 듬직한 젊은이라, 샘을 내는 여자들이 많다우. 첨엔 영화배우가 이 동네에 사는가 했다니께. 고 선생을 소개시켜 달라는 여자들이 워찌나 많은지…. 덕분에 내가 으시댄다우. 헌디, 색신 고 선생과 어떤 사이유?”
그녀는 보기와는 달리 입을 열자 말이 많았다. 정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한 집에 살거든요.”
“뭐시라? 한 집에 산다 구?”
그녀의 놀란 눈이 우스워서 정미는 깔깔 웃었다.
석진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거들었다.
“저기, 길 건너 아파트 앞에 글방학원 있잖아요. 박 선생님은 거기 원장님이세요. 저는 그 지하에 있는 태권도장에 있구요.”
“그랬구려. 난 또, 깜짝 놀랬지 뭐유.”
이번엔 정미가 물었다.
“참, 아주머니. 아까 고 선생님께 하실 말씀이 있다구 하시던데…. 제가 자릴 피해 드릴까요?”
그제야 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눈을 접으며
“아, 고거? 인자 일없게 됐수.”
“아니, 왜요?”
“아니우. 이제 보니 천생배필이고 원앙 짝인디, 다른 사람을 소개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말이우. 호호호.”
아주머니는 연신 두 사람을 훔쳐보며 자기 일처럼 좋아하였다.
정미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곤 얼굴을 붉혔지만 과히 싫지 않았다. 민망한 건 도리어 석진이었다. 아무튼 아침식사가 두 사람을 더 가까이 해준 셈이 되었다.
석진은 식사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정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해맑은 얼굴에 아직도 꿈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는 스물대여섯쯤 되었을까. 참 맑고 고운 여자였다.
한편, 정미는 그의 묵직하고 신중한 태도에 호감이 갔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그가 어째서 이 추운 날에 지하 도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것일까. 나이는 스물아홉? 서른? 아직 미혼인 것 같은데 가족은 없는 가? 아니면 시골에서 올라와 공부하는 유학생(?), 그도 아니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임시로 체육관에 기거하고 있는 것일까? 군대는 갔다 온 것 같고. 아무리 봐도 그는 예사 운동선수들과는 다른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시장 안을 돌면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들을 사서 챙겼다. 석진은 식빵과 잼 한 통 그리고 우유 두 병을 샀을 뿐, 나머지는 온통 정미의 짐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미는 먹을 것들을 꽤 많이 샀다.
석진은 그녀가 잠시 약국에 들르는 사이 약국 뒤쪽에 있는 책 코너에 들어가 수필집 한 권을 샀다.
석진은 정미의 짐을 건네받아 양손에 들고 시장을 벗어났다. 제법 따사로운 햇살을 등에 받으면서 둘은 행복 비슷한 감정을 맛보며 길을 걸었다. 집에 당도한 석진은 짐을 3층으로 올려다 주었다. 짐을 내려놓고 잠시 글방 안을 들여다보던 석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마디 하였다.
“참, 좋군요. 이런 곳에서 책 읽는 팔자가 부러워요.”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자기 짐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정미에게 건넸다. 아까 책방에서 산 소담선생의 <생명 있는 것은 다 사랑을 원한다.> 라는 수필집이었다.
“어머나! 이 책, 절 주시는 거예요? 언제 사셨어요?”
얼굴에 기쁨을 안고 책을 받아든 정미는 겉표지를 펴들었다. 표지 안쪽에는 ‘정미 씨의 소중한 땀이 선미글방에서 큰 열매로 자라기를 기원하며. 고석진 드림’이라 씌어 있었다. 아주 달필이었다. 오른쪽으로 약간 누운 휘갈긴 글씨였지만 힘 있고 여백과 조화를 살릴 줄 아는 운치 있는 글씨였다. 정미는 그의 성의와 안목이 너무 고마웠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까…, 약국 뒤 책방에서 샀어요.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지만요.”
그녀는 그의 호의가 너무 고마워서 그에게 차 한 잔 들고 가라고 말했다. 석진은 그녀가 가스 불에 주전자를 올려놓는 동안 벽에 가득 꽂힌 책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커피 두 잔을 받쳐 들고 다가온 그녀에게 석진이 말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부럽네요. 저는 H대 사학과를 나와서 지금은 놀고 있죠. 일종의 백수라는 동물이죠, 뭐. 하하하. 사학과 출신이 취직한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아닙니까. 물론 군대는 남들보다 더 진하게 다녀왔구요. 헌데 저는 실업자라는 말 대신에 산업예비군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그랬었구나. 사학을 전공했다면 나 같은 애와는 좀 다르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반듯한 그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전, 박정미예요. 아는 것도 없는데 그냥…, 공부할 욕심으로 글방을 차렸어요. 앞으로 고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자주 떼를 쓸지도 몰라요.”
그것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렇잖아도 자모반이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되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참이었는데, 석진이 원고지를 펼 줄 아는 것을 봐도 그만한 실력을 갖춘 위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또 그의 학력과 인품이 정미에게 신뢰감을 더 준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튼 그날 두 남녀는 이심전심으로 서로의 처지와 필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우연한 만남이 결코 우연만은 아닐 거라는 믿음을 조금씩 가지게 되었다.
차를 마시고 난 뒤 석진이 물었다.
“무슨 행사가 있으신가 보죠? 장을 많이 봐 오시던데….”
“네, 오늘 자모반1기 수료식이 있어요. 수료식만 하고 헤어지기가 너무 밋밋해서 간담회를 좀 해 보려구요.”
“그러셨군요. 잘 됐네요. 일요일이라 할 일도 없는데 도와 드리죠. 아무거나 좋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차 값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건강하였다.
그날 오후에 있을 자모반1기 수료식 준비에 석진은 큰 도움을 주었다.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는 두 시쯤, 아래층에서부터 깔깔 호호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십 여명의 수료생들이 몰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글방에 들어서다 말고 낯선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그러나 몇 명은 이미 안면이 있는 듯 그에게 아는 체를 했고, 그 역시 그녀들에게 미소로 대답하였다. 정미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석진을 소개하였다.
“들어들 오세요. 참, 소개해 드리죠. 이 분은 아래 태권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고석진 선생님입니다. 오늘 자모반 수료식과 앞으로 2기 학업을 도와주시려고 자원봉사 나오셨습니다. 인사들 나누세요.”
그녀의 짧은 설명이 있자 한 어머니가 말했다.
“혹시 박 선생님 애인 아니세요? 너무너무 잘 생기셨다.”
그러자 다른 엄마가 거들었다.
“세상에, 이런 금호박을 숨겨두고 있다니. 박 선생은 호박씬가 봐요.”
그 말에 모두들 깔깔깔 웃어댔다.
한 엄마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선생님, 나 오늘 2기에 당장 등록할래요.”
그녀는 이태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일곱 살짜리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김화자였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큰 키, 날씬한 몸매인 그녀는 수영장 보조로 일하면서 글방에 나오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셋, 한창 때였다.
그녀의 말에 부인네들은 깔깔대며 웃어댔다. 나이는 먹었어도 영락없는 소녀들이었다. 석진은 머뭇거리다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잘 부탁합니다. 고석진이라고 합니다. 아는 것은 없습니다만, 앞으로 함께 책을 읽으며 지내고 싶습니다. 또 태권도장에 아이들도 많이 보내주시고요.”
그날의 수료식은 석진의 예기치 않은 참석과 인기로 인하여 그만 제 2기 입학식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그날의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은영이 엄마 김화자였다. 그녀는 석진이 민망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 농을 던지면서 분위기를 잡았는데, 석진에게 맥주잔을 권하는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음을 정미는 포착하였다. 한동안 흥겨운 시간을 보낸 뒤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자모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정미는 오늘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게 도와준 석진에게 저녁을 대접하였다.
“고 선생님께서 아침 사 주셨잖아요. 차린 건 별로예요. 성의로 알고 드세요.”
정갈한 밥상을 앞에 놓고 그들은 마치 예비부부 같은 느낌을 맛보며 저녁을 들었다. 크리스마스는 이틀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 당시 석진은 거의 일년 가까이 번민 속에 헤매고 있었다. 대학원 입학을 거부당한 뒤에 깨닫기 시작한 자기의 불의한 행동, 즉 대학생활을 ‘짭새’로 보낸 자기모순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꿈에도 그리던 설희의 대학 수석합격을 확인하고 좀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떳떳한 얼굴로 설희 앞에 나타날 용기가 없어 더 괴로워했다. 그가 차가운 체육관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던 날은 설희에게 책을 선물하고 돌아온 뒤였다.
그런 그가 요즘은 정미를 만나 그녀로부터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만난 지 채 한 달도 못되었지만 그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동여매 가고 있었고, 석진은 그녀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씨에 감명을 받고 있었다. 정미는 나이에 비하여 조숙했고, 세상 물정을 빨리 터득한 여자였다.
그녀가 다니는 성당은 발산동에 있었다. 성당의 지번이 1009번지라, 그녀는 그곳을 그냥 천국이라 불렀다. 그 성당 뒤에는 천사양로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미는 주일미사가 끝난 뒤에는 양로원에 들러 일을 도와 드리곤 하였다. 그곳에 계신 많은 할머니들을 보노라면 모두 다 자기 할머니 어머니 같아서, 그녀는 틈만 나면 그곳에 가서 일을 도왔다.
새해 들어서자 선미글방은 인기가 높아졌다. 그 동안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정성을 다하는 정미의 지도가 글방에 대한 인식을 평가 절상시킨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국어 성적이 쑥쑥 올라갔고, 다른 과목들도 좋은 영향을 받고 있어 학부모들은 정미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해오곤 하였다. 아무튼 글방은 성공을 향하여 순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네 개의 과정을 운영하느라 정미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특히 자모반의 경우에는 여성들의 섬세한 감정과 엉뚱한 경쟁으로 인하여 자칫하면 마음을 다치게 할 확률이 높아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때 다행스럽게도 그 어려운 역할을 선뜻 맡아 준 것이 석진이었다.
자모반은 스무 명이 정원이지만 학생들이 일주일에 한 편씩 짧은 글을 써내어 발표하고, 남의 발표를 듣고, 또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일, 그리고 개인별로 첨삭 지도를 해주느라 석진은 일주일에 3일을 몽땅 글방에 바치고 있었다. 어떤 날은 일감을 들고 체육관에서 밤늦도록 씨름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 주고 지도해주어 이제 청실홍실아파트 젊은 부인네들 사이에서 그는 세칭‘인기 캡’이 되고 있었다.
그는 글재주가 있고, 그 나이또래답지 않게 성숙미를 지닌 젊은이였다.
며칠 전의 일이다. 그가 쓴 ‘글 짓는 엄마들’이라는 짧은 글이 C일보 독자란에 실린 일이 있었다. 바쁜 주부들이 시간을 내어 책을 읽고 글을 짓는 일을 통하여 자아실현을 해 나가고 있는 선미글방의 현실을 잔잔하게 풀어쓴 얘기였다. 그 신문보도가 있고 난 뒤부터 자모반의 학습 분위기는 더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석진은 그녀들에게 금년 말쯤 동인지 하나를 꾸며보자고 제안했고, 학생들은 모두가 기뻐했다.
어린이날 아침, 선미글방에서는 버스 두 대를 전세 내어 학생과 자모들을 태워 서오릉으로 백일장을 떠났다.
그날 전체 행사를 총괄하여 이끈 것은 석진이었다. 출발 때부터 행사 전 과정, 작품 심사와 시상, 뒤풀이까지 그가 이끌었다. 그는 강력한 지휘관이자 명 사회자, 또 개그맨이었다. 정미는 그의 소질과 활약상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가 이렇게 통솔력과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인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백일장 행사를 마친 날 저녁, 녹초가 되어 쉬고 있는 정미의 방 전화벨이 울린 것은 밤 아홉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행사를 끝내고 잠깐 다녀올 데가 있다며 사라진 석진에게서 온 전화였다.
“정미 씨, 몸살 나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석진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몸이 훨씬 가벼워짐을 느꼈다.
“아니에요. 좀 피곤해서 쉬고 있던 참이어요. 참, 고 선생님. 저녁은 드셨어요?”
그녀는 진심으로 물었다.
“예, 먹…었어요.”
그가 조금은 풀이 죽은 음성으로 대답해서 정미는 하마터면 까르르 웃을 뻔했다.
“석진 씨! 지금, 아래층에 계세요?”
정미는 이제 그를 석진 씨라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로 오래 전부터 결심해 온 바였는데, 오늘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것이 피차 편할지도 모른다는 그녀 나름대로의 판단에서였다.
“아니, 집밖입니다. 정미 씨랑 호프 한 잔 하고 싶어서요. 피곤하시면…그만 쉬세요.”
갑자기 그의 말에 힘이 없어 보여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
“아니에요, 곧 나갈게요. 거기 어디에 요?”
그는 내발산동 송화 쇼핑 부근의 호프집에 혼자 앉아 있었다. 홀 안에는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을 뿐, 사람은 두엇밖에 없었다.
“이거…, 불러내서 미안한데요.”
그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그의 눈은 전작(前酌)이 있음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정미는 웃음으로 대답하곤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전혀 뜻밖의 자리에 자기를 불러낸 그가 오히려 고마웠다.
“고 선생님, 오늘 고마웠어요.”
그녀는 체크무늬가 놓인 블라우스에 짧은 스커트를 받쳐 입고 나와 훨씬 앳되고 화사해 보였다. 정미는 이 남자가 이 시간에 왜 여기에 혼자 앉아 있는지, 그리고 왜 자기를 불러냈는지 딱히 집히지는 않았지만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를 더 우울하게 하는 것 같아서 비음(鼻音)을 섞어 말했다.
“고 선생님, 혹시 딱지 맞으신 거 아네요? 아무래두 그렇게 보이는데요. 맞지요. 그렇담…전 뭔가요, 꿩 대신 닭인 가요? 아님, 피자 대신 붕어빵? 호호호.”
그녀의 말에 석진은 호쾌하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닭이 아니라 봉황이십니다. 정미 씨는 내게 봉황이라구요, 아니지요, 공작새라구요.”
그녀는 큰 잔 가득히 따라준 맥주를 마다 않고 받아 마셨다.
사실 석진은 그날 백일장 행사를 치르고 나서 까닭 없이 기분이 우울하여 혼자 있고 싶었다. 오늘 자모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떠들면서 그는 불현듯 은숙과 설희 모녀를 떠올렸던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은숙은 참으로 아름답고 이지적인 여인이었다. 자작부인이라는 말이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을 정도로 품위 있는 여인이었다.
반면에 정미는 나이에 비하여 성숙한 기품과 함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자였다. 그녀의 지나온 삶의 여정이 그녀를 그렇게 빚어 놓았다. 처녀로서는 당당하고 훌륭한 인물이어서 석진은 이 세상에 없는 은숙을 보고 싶은 마음을 그녀를 불러냄으로써 보상받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정미를 처음 보던 순간 그녀의 눈자위에서 은숙의 모습을 발견하고 혼자 설레었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제법 취기가 돌 정도로 술을 마셨다. 정미는 석진이 권하는 잔을 사양하다가 ‘내가 있잖으냐.’는 석진의 말에 그만 과음을 하고 말았다. 오늘만큼은 해방감을 만끽하고픈 충동이 일어나서 자기 주량을 훨씬 넘겨버린, 아니 태어나 최대량의 술을 마신 것이다.
밤 열 두 시가 넘어서 두 사람은 우장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가슴의 열을 식혀야 할 것 같아서였다. 공원에는 오월의 훈풍이 알맞게 불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좁은 숲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병풍처럼 둘러친 큰 바위를 돌아 벤치형의 긴 바위를 발견했다.
석진은 잠바를 벗어 바위 위에 깔았다. 정미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의 옷 위에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숲 속은 갑자기 찾아온 인기척에 놀라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새소리만 들릴 뿐 적막하였다. 석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참 오랜만에 맡아보는 황홀한 내음이었다. 석진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자 정미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너무나 외로운 삶이었으므로 그녀는 그에게 매어 달렸다.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좋아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땀으로 배인 얼굴을 닦아내곤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뜨겁고 긴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정미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나서 오늘밤 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리라 작정하였다. 비단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어둠을 도와 집으로 들어와 정미 방으로 올라갔다. 그날 밤, 정미는 석진과 하나가 되었다. 그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그의 사랑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그의 뜨거운 입김을 귓전에 받으며 그녀는 차가운 겨울 새벽에 길을 건너다 비명에 가신 엄마를 생각했고, 혼자 살아온 고독과 외로움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석진의 허리를 안았다.
그러나 석진에게 있어서 정미와의 ‘하나 됨’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설희를 자기의 가슴에서 떠나보내기 위한 가슴 아픈 의식이었다. 아니 그녀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벌인 그 동안의 행실, 빈털터리 신세, 절체절망의 늪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오늘 등이 설희에게 가당치 않고, 너무나 뻔뻔하고 모자랐으므로 설희 모녀와의 인연을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녀들로부터 영원히 떠나기로 생각을 모아가고 있었다.
‘그래, 설희에 대한 감정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해야 해’
그렇게 다짐해오던 차였다. 설희가 새 출발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진정한 오빠로서 남아 있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을 굳혔고, 그렇게 하여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싹 텄다. 그로 인하여 설희라는 이름은 석진의 가슴에서 의도적이었지만 조금씩 지워져가고 있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청춘 남녀의 사랑이란 젊었을 때 일시적인 질풍노도에 그치는 것, 바람이 자고 비가 멎으면 하늘은 파랗게 개고, 태양은 밝게 빛나는 자연의 이치가 인간의 내면에도 살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사랑은 현세에서는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힘든 법, 그리고 지금 당장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 앓는 병인 경우가 더 많은 법. 그 병을 치유하려고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방황하다가 대상을 발견하면 그 속에서 잠시나마 평화를 맛모기 마련이다. 사랑의 방황. 이것이 살아있는 동안에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한계가 아닐까. 어떤 사랑이든 그 속에는 얼마간의 비애와 슬픔이 녹아있고, 그 슬픔은 인간심성에 순수의 나무를 키운다. 그것을 사람들은 참사랑이라고 부른다.
석진과 정미는 그해 가을쯤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다.
정미는 석진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꿈꾸는 학문의 길을 걷도록 내조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세상을 바르게 이끌 참지성인이 되도록 학업에 정진해 줄 것을 재차 부탁하였다.
그해 6월, 후기 대학원 학생 모집 공고가 신문에 난 것을 본 정미는 석진에게 다시 한 번 지도교수를 찾아가 진학을 상의하는 것이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석진씨, 실패와 좌절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잖아요.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행동력을 갖는 사람이 사랑도 행복도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정미의 간곡한 이 말이 그를 움직이게 하였다. 여러 번 망설이던 석진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그릇이 성하다면 새 물을 부으면 될 것이 아니냐고 생각을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