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평통보로 본격적인 금속화폐 유통이 시작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부가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상품 유통이 발전하였다. 원래 정부는 필요한 물품을 농민들의 특산물을 받아 조달하였는데, 대동법 실시를 통해 대동미(大同米)라는 미곡을 바치게 하였다. 이 미곡을 공인(貢人)이라는 사람에게 주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상품 유통이 원활하게 되어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금속화폐의 유통이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곡도 이동하기에는 무거워서 그보다 가벼운 금속화폐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동전의 유통에 대한 논의가 간간이 제기되었다. 인조 11년(1633)에 가격 안정을 맡은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가 인조 15년(1637)에 병자호란으로 인해 주조가 중지되었다. 그 뒤 효종대(孝宗代)에 김육(金堉, 1580-1658)의 주도 아래 동전 유통을 다시 시도하였다. 효종 1년(1650)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온 김육은 구입해온 15만문의 중국 화폐를 평안도 평양, 안주에 유통시켜 보았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이후의 동전 유통에 큰 밑바탕이 되었다.
동전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 4년(1678)에 허적(許積, 1610-1680)의 제안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면서부터였다. 17세기 말경에 이르면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금속화폐가 유통의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퇴장화폐(退藏貨幣)로써 부의 척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인들은 토지 대신 화폐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고리대의 방식으로 부를 불려갔던 것이다. 이렇게 퇴장화폐가 늘어나면서 화폐가 부족한 현상인 전황(錢荒)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화폐는 전국 각지에 퍼져 생산물의 상품화를 촉진시켜 나갔다. 이리하여 상품의 매매, 임금의 지불, 세금의 납부 등이 점점 화폐로 행해지게 되었다.
‘상시평준’의 줄임말인 ‘상평’, 유통 가치에 등가를 유지하려 하다
상평통보는 숙종 4년(1678)부터 고종대 근대 화폐가 발행되기까지 통용된 대표적인 금속화폐이다. 상평통보의 ‘상평’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줄인 말이다. 이 말은 유통 가치에 등가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노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화폐는 기본적으로 외형이 납작하고 둥근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다. 앞면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의 줄여 쓴 명칭, 천자문(千字文) 또는 오행(五行) 중의 한 글자, 숫자나 부호 등이 표시되어 있다. 글자의 서체 및 크기, 테두리의 너비, 명목가(名目價)의 표시 및 동전의 크기 등의 차이를 통해, 그 유형을 다양하게 세분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