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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 황금마스크> 기원전1330년경 카이로 박물관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재위기간 B.C.1332~1323)은 9세에 왕위를 물려받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는 호화로운 재료와 뛰어난 기술이 결합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인상을 도출하고 있다.
<한 남자의 초상> A.D.100년 이집트, 밀랍 바탕 위에 채색, 런던 대영박물관
이집트 하와리에서 출토된 미이라의 관에서 나옴. 인물 표정의 생생함과 사실성에 있어 현대인마저 감탄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헬레니즘과 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올개 상용이 나이가 1918살이 되나? (絶叫)
상용이하고 닮았네. ㅎㅎ
<하늘을 이고 있는 헤라클레스> B.C.470~460경 대리석,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헤라클레스가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를 따러가는 일화를 보여준다. 그 일은 헤라클레스조차도 쉽게 해낼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창공을 어깨에 메고 있는 아틀라스에게 간청해서 대신 가서 사과를 따오도록 했는데 아틀라스는 헤라클레스가 거대한 짐을 대신 지고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수락했다. 이 부조는 아틀라스가 거대한 짐을 바쳐들고 있는 헤라클레스에게 황금사과를 가지고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항상 헤라클레스를 재치있게 도와주는 아테나 여신이 그의 어깨 위에 쿠션을 얹어주고 있다. 전체 이야기는 단순하고 명료하게 표현되어있다. 우리는 이 조각가가 정면이건 측면이건 간에 인물을 똑바른 자세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테나는 우리를 정면으로 보고 있으며 그녀의 머리만이 헤라클레스 쪽을 향하고 있다. 아직까지 이집트 미술의 영향이 남아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르테미시움의 포세이돈> B.C. 460년경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2m에 달하는 이 장엄한 조각의 당당하고 균형잡힌 몸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체에 대한 매혹과 열정을 잘 보여준다. 이전의 조각들에서는 움직임의 표현이 자유롭지 못했던 데 비해, 잠시 멈춰 선 듯한 이 조각은 체중이 오른발에서 왼발로 자연스럽게 이동된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집중적인 힘을 느끼게 하는 강렬한 얼굴표정으로 위엄을 느끼게 한다. 이 동상은 현존하는 몇 안되는 청동상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비싼 청동은 조각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재료였지만 전쟁이 나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녹여지곤 해, 남아 있는 조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엘긴 마블-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조각군>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 대사로서 오스만 제국으로 발령 받은 영국인 토마스 엘긴 경이 오스만 당국의 묵인 하에 1812년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대리석 조각물들을 뜯어내 영국으로 가져가 대영박물관에 전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스의 지속적인 반환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전차 경주자> 기원전440년경 파르테논 신전의 일부
이 부조는 매우 심하게 손상되어서 처음 대하는 사람은 감상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파편에서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네 마리의 말들이 중첩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머리와 다리는 그래도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조각가가 작품 전체의 인상을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하게 하지 않고 뼈와 근육의 구조를 얼마나 탁월한 솜씨로 표현했는지를 보여준다. 인물의 묘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남아 있는 흔적들만을 가지고도 그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또 그들의 육체의 근육이 얼마나 명확하게 표현되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방패를 들고 있는 팔은 아주 자유롭게 그려져 있으며 펄럭이는 투구의 깃털 장식과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마행렬> 기원전 440년경 파르테논 신전의 일부
위 사진들은 파르테논 신전 내부의 높은 곳에 연이어 있는 띠 모양의 소벽(小壁), 즉 프리즈의 파편들인데 이는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엄숙한 축제의 연례 행진을 묘사한 것이다. 말과 사람이 생생하고 활기에 차 보이지만 신전의 벽을 따라서 펼쳐지는 엄숙한 행렬의 배치에 잘 어울린다.
<승리의 여신> 기원전 408년 아테네 빅토리아 신전 주위의 난간 부분, 대리석, 높이 106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걸어가다가 느슨해진 샌들의 끈을 조이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몸짓에는 어느 하나 불편하거나 걸리는 부분이 없다. 옷의 주름은 얼마나 풍부하고 그 안에 부풀어있는 살결들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우리는 이조각을 통해 당시 예술가들은 기교적인 부분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헤게소의 묘비> 기원전 400년경 대리석 높이147cm,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헤게소의 묘비’는 아테네 시외에 있는 디필론 묘지에서 1870년에 발견되었다. 이 묘비는 마치 실내 공간같이 연출되었는데 묘비의 주인공 헤게소는 의자에 앉아 하녀가 들고있는 보석상자에서 자신이 생전에 사용하던 목걸이를 꺼내보고 있다. 중앙에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생전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두 여인은 엄숙하고 절제되면서도 우수에 싸인 분위기를 준다. ‘헤게소의 비’는 두 여인의 시선이 목걸이데서 만나는데 이 부분이 전체 구성의 중심이다. 보석상자로 이어지는 팔들과 휘어진 의자의 조화로운 형태는 조각가의 탁월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부드럽고 얇은 옷은 마치 젖은 것처럼 몸에서 들러붙어 여성의 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늘어지고 겹쳐지면서 깊이감을 주는 옷 주름 처리의 섬세함과 투명함은 그리스 전성기 조각의 본질을 보여준다.
<앉아있는 복서> B.C. 300~200년, 청동, 로마 국립박물관
이 청동상의 디테일에는 숨이 막힐만한 리얼리티가 배어있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군데 군데 부풀어 올랐으며 심지어는 귀의 상처에서 흐르고 있는 피방울까지 나타냈다. 몸통에는 상처가 없는데 과거 복싱경기는 얼굴을 가격하는 경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먹과 팔목을 보호하기 위한 가죽제 글러브까지 끼고 있는데 그 묘사가 정교하다.
<죽어가는 갈리아인> B.C.230~220년 그리스 청동 조각상을 본뜬 로마의 대리석 복제품,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페르다모 왕이 갈리아에 이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의 승리를 오랫동안 알리고 싶어서 죽어가는 포로를 표현함으로써 승전勝戰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실레노스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기원전175~150년경 바티칸 박물관
1506년에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이라는 군상이 로마의 한 언덕에서 발견되었을 때 미술가들과 미술애호가들은 이 비극적인 군상의 효과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현장에서 발굴을 지켜보던 미켈란젤로는 그 아름다움에 놀라며 “예술의 기적”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것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트로이의 사제인 라오콘은 그의 동포들에게 그리스 군인들이 숨어 있는 목마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트로이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이 좌절되는 것을 본 신들은 바다로부터 두 마리의 거대한 뱀을 보내어 라오콘과 그의 불행한 두 아들들을 칭칭 감아 질식시켜버렸다.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자주 나오는 올림푸스의 신들이 무력한 인간들에게 행하는 무정하고 잔인한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가 이 조각가를 어떻게 자극하여 이토록 인상적인 군상을 만들도록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무고한 희생자가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정경을 느끼도록 원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인간과 짐승사이의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그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했을까? 그는 그의 기량을 과시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가망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노력과 고통을 표현하는 몸통과 두팔의 근육, 사제의 얼굴에 새겨진 고통의 표정,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워하는 두 소년의 몸부림, 그리고 이 모든 소동과 움직임을 하나의 영원한 군상으로 응결시키는 수법 등이 오랜 세월 동안 찬탄을 불러 일으켜 왔다.
<신들과 거인과의 싸움> 기원전 164~156년경(헬레니즘)
위 사진은 페르가몬(現터어키)시에서 발견된 제단이다. 여기에 표현된 군상들은 신들과 거인들과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거대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를 찾아 볼 수 없다. 이 조각가는 분명히 강력하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렸음이 분명하다. 싸움은 대단히 격렬하게 전개된다. 못생긴 거인들은 의기양양한 신들에게 압도되어 고통과 광란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모든 형상마다 격렬한 몸짓과 나부끼는 옷주름이 충만하다. 이러한 효과를 한층 더 높이기 위해서 이 부조는 평평한 벽면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환조의 형태로 되어 그들이 속해 있어야 할 위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이 격렬하게 싸움을 하면서 제단의 계단 위로 넘쳐 나올 것 같이 보인다.
<웅크리고 앉은 아프로디테> 112cm 대리석, 대영박물관
벌거벗은 아프로디테는 그리스 조각가들에게 인기있는 주제였고, 그녀를 비너스라고 부른 로마 조각가들에게도 그러했다. 이 조각품은 1세기나 2세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기 그리스 원본의 로마 복제본이다. 소실된 원본은 기원전 2세기경,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많은 그리스 조각품들처럼, 이 작품도 예술과 관객 또는, 이 경우에는, 관음증이 있는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자아내기 위해 디자인되었다. 그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면, 각 네 개의 시점이 얼마나 놀랍도록 다르게 이 벌거벗은 여신이 모습을 보여주는지 알게 될 것이다.
<토르소>
기원전 1세기경 아테네의 조각가 아폴로니오의 작품으로 카라칼라 욕장에서 발견되었다. 사자가죽에 앉아있는 것으로 보아 헤라클레스의 몸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아테네 여신의 계략으로 적군 대신 양떼를 몰살시킨 후 자책감과 수치심에 자살하기 직전 수많은 고민에 빠진 그리스의 영웅 아이아스의 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훗날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고 미켈란젤로의 많은 작품들 속에 나오는 몸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보통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조각된 조각상을 토르소라 부르는데 이런 작품을 토르소라 부르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조각상이다. 미켈란젤로는 몸통만 남은 이 조각상에 팔과 다리를 붙여서 완성시켜 달라는 의뢰를 받았으나 이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작품이라며 거절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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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대회화의 성격에 관하여 약간의 개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폼페이를 비롯한 인근의 헤르쿨라네움이나 스타비아이 같은 곳에서 화산재에 묻혀있다 발굴된 장식적인 벽화와 모자이크를 보는 길밖에 없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가들은 먼 곳에 있는 물건은 작게 그리고 가까운데 있거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렸다. 그러나 사물이 멀어짐에 따라서 대상의 크기를 일정하게 줄여가는 방법(원근법)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조망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구도의 틀을 고전 시대 사람들은 채택하지 못했다. 그것이 적용되기까지는 천여 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이소스 전투> B.C. 2세기초, 폼페이 유적지 모자이크, 582×313cm 나폴리 박물관
마케도니아의 정복왕 알렉산더와 당시 세계 최대제국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벌인 B.C. 333년의 이수스전투를 다룬 모자이크. 알렉산더는 투구를 쓰지 않은 채 다리우스 왕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4: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적을 궤멸시킨다.
<牧神의 머리> B.C. 2세기 헤르쿨라네움의 벽화 부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의 일원들
사제들과 관리들
<평화의 제단> B.C. 13~9년 로마 포풀로 광장 부근
평화의 제단은 아우구스투스 초대 황제의 히스파니아(에스파니아)와 갈리아(프랑스)속주 점령을 기념하여 로마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한 것이다.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로마에서 계속되어 왔던 내전과 속주 정복 전쟁이 끝나고 번영과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음을 상징하고 있다. 평화의 제단은 뛰어난 조각술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미술적 가치보다는 ‘팍스 로마나’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로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A.D. 14~37년경
로마인이 그들의 제국 전역에, 즉 이탈리아, 프랑스, 북아프리카와 아시아 각 지역에 세운 개선문들보다 더 영원한 인상을 남긴 건축물은 없을 것이다. 개선문은 기둥 양식을 사용해서 중앙의 큰 입구를 프레임(frame)하여 강조하고, 양 옆의 작은 두 개의 문이 중앙의 큰 문을 장식한다.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 콜롯세움> A.D. 80년경
실용적 구조물로서 내부에 광대한 원형 경기장의 관람석을 받쳐주는 층층이 쌓아올린 세단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의 건축가는 그리스 신전에 사용되었던 세 가지 건축 양식을 전부 응용하였다. 1층은 도리아식 변형으로, 2층은 이오니아 식이고, 3층과 4층은 코린트 양식의 반원주半圓柱이다. 로마식 구조와 그리스 기둥 양식들과의 결합은 그 이후의 건축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490~432년경 아테네
도리아식 기둥은 캐피탈(기둥머리 부분)은 단순한 쿠션형태의 사각형이며 베이스(기둥아래를 받치는 부분)는 없다. 대체로 기둥이 짧고 굵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기원후 131년 완공 아테네
코린트식 기둥은 이오니아식 양식에 캐피탈에 꽃과 잎의 화려한 장식이 있고 이오니아식보다 더 가늘고 길다.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기원후 15년경 204cm 바티칸 미술관
이 작품은 영웅의 포즈를 취한 총사령관으로서의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얼굴은 이상화의 경향(실제 얼굴과는 닮지 않은)을 띠었던, 소위 말하는 고전주의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오늘날의 단색의 외형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는데, 채색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분명 옛날에는 다채로운 색이 입혀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발치에 있는 비너스의 아들인 큐피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一家가 비너스의 후예라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슴 갑옷에는 부조가 잔뜩 새겨져 있다. 제일 밑에는 대지의 여신(Tellus)이 새겨져 있다. 그 왼쪽 위에는 아폴로가 독수리에 올라타고 있고, 오른쪽에는 디아나가 암사슴에 올라타고 있다. 중간에는 기원전 53년 크랏수스가 파르티아(페르시아)인들에게 빼앗긴 군단기를 기원전 22년에 티베리우스를 통해 다시 돌려받는 모습이라고 한다. 양쪽에 있는 슬픔에 젖은 여인들의 모습은 로마에 정복당한 민족들을 나타낸다. 맨 위에는 천상의 신 카일루스가 커다란 천을 펼치듯이 하늘을 펼치고 있으며, 그 밑에는 태양신 솔이 네 필의 말이 이끄는 이륜 전차를 타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사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확립된 로마의 평화와 황금시대를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하겠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기원후 70년경 135cm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그리스 미술로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따다가 그것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특징이었다. 그 중에 하나는 실물을 꼭 닮은 초상肖像이었다. 로마가 제국이 되었을 때 황제의 흉상胸像은 종교적인 경외감을 가지고 우러러보아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초상의 엄숙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그리스인이 했던 것처럼 실물을 조금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초상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흉상에는 아첨기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를 신처럼 보이게 만드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그는 마치 돈 많은 은행가나 선박 회사의 사주같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 초상들에는 자질구레한 구석이 없다. 어쨌든 미술가들은 사소한 것에 신경쓰지 않으면서도 실물같은 초상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트리아누스 황제 기념비>의 일부, 기원후 114년경 로마
트리아누스 황제는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에서의 전쟁과 승리를 모두 그림으로 보여주는 연대기를 새긴 거대한 원형 기둥을 세웠다. 여기서 우리는 침략하여 싸우고 정복하는 로마의 군단을 볼 수 있다. 수백 년에 걸쳐 그리스 미술이 이룩해낸 모든 기술과 업적이 전쟁을 보고하는 이 공적에 구사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본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무훈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세부의 정확한 묘사와 자세한 설명을 보다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미술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미술의 주된 목적이 이제는 조화나 아름다움, 또는 극적인 표현에 있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 A.D. 180년경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
이 기마상은 단순히 용모를 모방하지 않고, 인물의 성격을 예리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로마에는 황제를 기마상으로 나타내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통치자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는 무장한 차림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를 전쟁의 영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평화를 가져오는 인물로 표현한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다른 이교 기념물들과는 달리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사람들이 기마상의 인물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루도비시의 석관> A.D. 3세기경 로마군과 고트족의 전투, 로마 테르메 미술관, 뚜껑은 독일 마인츠 박물관
17세기초 추기경 루도비코 루도비시는 미술품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