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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치성 태을도인 5분 도훈:
나는 태을도에서 희망을 보고 있는가
2014.6.21 (음력 2014. 5. 24)
종장님:
사실 후천은 상제님의 눈물 속에 핀 꽃이거든요. 천하창생을 위해 핀 꽃이 후천이고, 상제님의 눈물 속에서 우리가 살아나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 잘되라고 빌잖아요. 비는 그 마음속에는 자식을 향한 눈물이 있다고요. 나를 희생시켜서, 나를 봉사해서, 자식을 잘되게 하려는 부모님의 눈물. 부모님이 흘린 눈물의 힘으로 자식을 키우는 거예요. 힘들지만 부모님이 흘리는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고 희망의 눈물이에요.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어요. 땡볕에서 농사짓고, 노점상하시고, 그 속에서 힘들고 어렵고 괄시 받고, 눈물을 흘리시잖아요. 눈물의 힘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그 속에서 자식이 커나가거든요.
우리 자식이라는 것은 부모님이 눈물로 피워낸 꽃이에요. 눈물 속에서 핀 꽃이 자식이라고요. 그걸 자식들은 몰라요. 나중에 자식들이 시집장가 가서 애를 낳아 키워봐야, ‘아~부모님이 나를 눈물 속에서 키웠구나. 나는 부모님의 눈물로 핀 꽃이구나. 예전에는 미처 몰랐구나.’ 이렇듯 내가 부모님의 눈물로 핀 꽃이라는 걸 알고 은혜를 갚으려고 하면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불효자는 웁니다’ 라는 노래도 있잖아요.
부모님의 눈물이라는 것은, 거기에 부모님의 희망이 담겨 있어요. 자식에 대한 절절한 희망. 그래서 상제님, 고수부님이 흘린 눈물, 천지부모님의 눈물 속에서 우리 태을도인은 희망을 보잖아요. 천지부모님이 우리들에게 희망을 보라 하시는 구나.
충원도인:
이번 기회에 태을도에서 희망을 찾고 싶어서 ‘나는 태을도에서 희망을 보고 있는가’ 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태을도 태을궁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저의 마음가짐이 생각납니다. 같은 상제님을 믿고 뜻과 마음에 맞는 분들과 만나서 도담도 나누고 수행하고 싶어서 태을궁을 처음 방문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태을도에서 현재 저의 일차적인 목표를 이루었고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태을도에서 강조하는, 마음을 부지런히 닦고 태을주 수행을 열심히 하는 데에는 부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성경에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참 좋은 말이라 생각합니다. 믿음은 홀로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소망이 없는 믿음은 금방 시들해지고 나태해지며, 사랑이 없는 믿음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최근에 본인이 느낀 사실은, 내가 왜 마음을 부지런히 닦지 않고 태을주 수행에 소홀히 할까? 내가 태을도에서 희망을 보고 있지 않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믿음과 신앙을 지속, 간절하게 하는 힘이라 생각합니다. 상제님께서 "후천을 기다리는 마음이 지극하면 마음닦기에 신실하다", "의로운 사람"을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때가 되면 개벽 때 태을도에서 의통성업을 집행하겠다, 의로운 사람이 되겠다, 하는 희망을 가져야만, 마음을 부지런히 닦고 태을주 수행에 전력질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태을도를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태을도와 태을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좀더 태을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져야, 마음을 부지런히 닦고 태을주 수행을 좀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장님:
제 어릴 적 시골교회에서 사탕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제 친구들이 그걸 먹으려고 교회를 많이 가더라고요. 저는 사탕을 별로 안 좋아했기 때문에 사탕 준다고 교회에 가는 친구들이 이해가 안 갔어요. 고등학교 때 학교 앞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친한 친구가 교회를 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가서 뭐하는데? 그러니까 거기에 가면 이쁜 여학생들이 많다는 거예요. 근데 제 친구들이 그 얘기를 듣고 교회에 많이 가더라고요.
초등학교 때는 교회로 인도할 때 먹는 사탕 가지고 얘기했는데, 고등학교 때 되니까 이쁜 여학생을 가지고 얘기하더라고요. 그 얘기에 교회를 많이 가더라고요. 저는 이쁜 여학생이라는 단어 자체가 별로 맘에 안 들어서 교회를 안 갔어요. 친구들 대부분이 그 얘기에 교회에 다 갔는데. 어떻게 보면 저는 특이했던 것 같아요. 그만한 나이에 사탕 먹고 싶고 여자에 끌려야 하는데, 친구들이 저보고 이상하다 그랬어요. 사탕도 먹고, 이쁜 여학생도 사귀면 좋지 않느냐는 거예요. 교회를 다니든가 안 다니든가 하는 것은 가서 결정하면 되지, 미리 그걸 예단하냐고요.
상제님 신앙도 그것과 비슷한 것 아니냐? 일반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탕이라든가 거기에 가면 뭐 좋은 게 있다든가 이런 것들, 그게 어떻게 보면 유일한 작은 희망일 지도 모르죠. 일반 사람들에게 필요할 지도 몰라요. 그게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는데...
하지만 진정한 희망은 그걸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태을도가 태을도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상제님께서 우셨던 그런 심정을 갖자고 했는데, 어떤 표면적인 희망 같은 그런 단계는 증산종단 백 년 동안 실험도 많이 했으니까, ‘개벽 준다’ ‘도통 준다’ ‘신명체험 해준다’ 그런 단계는 지나서, 이제는 상제님 고수부님께서 얘기하신 근본적인 틀을 가지고 우리가 희망을 찾을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서두에 얘기 했지만 천지부모님의 눈물 속에 피어난 그 희망, 눈물의 의미를 이제는 백 년의 신앙 역사 속에서 발견해야 하지 않겠냐 하는 겁니다.
종부님:
주변에 기독교, 불교 신앙하시는 분들 많잖아요. 근데 그런 분들 중에 자칭 나이롱 신도라 부르는 분도 제법 있어요. 교회나 절에 열심히 나가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나는 기독교, 불교를 믿고 있다 이것 만으로도 믿음을 계속 유지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상제님 신앙은 소위 나이롱 신도로는 신앙을 계속 끌고 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런다고 대순, 증산도 식으로 올인하라 그런 것은 아니고요. 태을도에서는 그런 식의 올인을 반대하고 있기도 하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생활에 너무 매몰되면 영성이 약해지는 걸 느껴요. 그러면 스스로 부끄러워지고 경계심이 생기지요. 그래서 상제님 신앙을 한다는 것은 단지 붙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스스로 화두를 붙들고서,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칼을 벼르듯이 화두를 틀지 않으면 계속 붙들고 가기가 어렵다고 생각이 들어요.
저에게 부끄러운 일인데요. 얼마 전에 어떤 학교에서 5일 하루 나와달라는 거예요. 근데 달력을 보니까 4일이 투표일이고 5일날 놀면 4,5,6,7,8일 해서 5일간을 노는 거예요. ‘누군지 참 싸가지 없다.’ 그 생각을 하면서 나갔어요. 가봤더니 3반 부장선생님 반이더라고요. 이사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사를 한다고 하지만 날짜를 참 잘 골라서 가는구나, 그랬지요. 그런데 두 주째 또 그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번에도 금요일 해달래요. 그런데 ‘6학년 3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지난 주 그 양반이구나 하면서 ‘진짜 싸가지네.’ 그렇게 또 구시렁구시렁 했지요.
그 날 당연히 그 반이겠지 하고는 교실에 들어가서 자리에서 앉아서 보니까 책상 아래에 여자 슬리퍼가 있는 거예요. ‘어, 남자선생님인데 어떻게 된 거지?’ 하다보니 아차, 제가 학년을 착각한 거예요. 지지난 주 갔던 반은 5학년 3반이고 이번에 간 곳은 6학년 3반이었는데, 제가 착각해서 그 선생님을 흉본 거예요. 어찌나 부끄러운지! 나 혼자 구시렁거린 것도 아니고 종장님한테도 얘기하고, 엊그제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을 만나서도 그 양반 흉을 본 거라. 그 모든 게 어제 아침 확인하는 순간, 너무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아, 사랑과 용서를 해야 하는데, 요즘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고 내가 꾸준히 마음을 닦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아직도 멀었구나.’ 독기와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나를 보고서, 아! 진짜 부끄러웠어요.
대순, 증산도안에 있으면 내가 현재 잘하고 있든지 못하고 있든지 못하면 묻어가는 게 있는데, 태을도는 그나마 사람이 없잖아요. 갖춰진 것이 없잖아요. 도장이 번듯하게 있어서 내가 언제든지 와서 맘놓고 용맹정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왁자지껄 모여서 기미에 맞는 사람끼리 형님, 아우하면서 어울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기가 말할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정말 주인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의미를 발견해서 자신을 붙들지 않으면 믿음을 유지하기가 진짜 어렵다. 요즘 그걸 많이 느껴요, 영적으로 게을러지면 안 된다는 것. 이만큼 생각하셨다고 하니까 많이 성장하신 거예요.
충정도인:
태을도를 만나고 심법 면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증산상제님이 중통인의를 하셔서 알려주신 게 삶의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는 상생의 방식을 개인적으로 사업을 해서 위(上)가 없는 관계로 실험해 볼 수 있는 여건은 아니지만, 수행도 여건이 돼서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됐었고 제 의지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서 나름대로 해봤기 때문에, 크게 가정이나 회사나 업무관계에서 사람 대하는 것에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일관되게 몇 년에 걸쳐서 꾸준히 수행하면서 현실 속에서 그런 모습이 되려고 했을 때 그런 가시적인 성과들이 보이더라구요. 집사람이든 직원들이든 업무관계 사람들이든. 소소한 것들이지만 이런 걸 목도하면서, 그런 부분에서 제 인생에서 이런 식으로 정리됐다는 게 자체가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고, 종교나 신앙을 떠나 삶의 방식에서 이렇게 하면 통하는구나. 세상이 바뀌는구나.
원숭이 세계에서도 한 원숭이가 흙 묻은 고구마를 씻어서 먹기 시작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원숭이들이 그걸 따라 하더라는 거예요. 해보면 그게 좋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요. 맨처음 시범을 보이신 분은 상제님이시고요. 그리고 태을도인들이 다시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게 좋다는 것을 태을도인들이 한 명 두 명 체험을 자꾸 해서.
소태산께서 얘기하셨지만, 나한테 득이 되고 즐거움을 느끼고 옳다는 것을 알아야지 계속 하게 되고, 남들도 따라 하게 되고. 개인적으로 인생이 정리되고 있으니까, 스스로 느끼니까, 제 스스로는 많이 만족하고 사는데, 남들한테 얘기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요. 왜냐면 뭐랄까 좋은 것을 발설할 경우 안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스스로 많이 억제하고 살았습니다. 외적 활동을 줄이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작은 바운더리 안에서 실천하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 일들이 생기더라구요. 회사입주 건물의 입주자 대표를 맡게 되고, 지금 회사가 입주해있는 건물을 단장하고 있는데 업체 변경 건이나 여러 가지 업무적으로 주위에 연락할 일이 생기는데 이런 부분도 약간 복잡한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라는 기회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항상 조심스러운 게 마음은 한 순간이더라구요.
마음이 예전처럼 떠 버리기도 하고 그런 나를 붙들고 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떻게 풀어가느냐. 상제님의 도라는 것은 폭 잡기 쉽지 않다. 그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흘러가는 상황들 속에서 거기에 맞추어서 정답을 만들어가는 그런 것들이 삶의 과정이고 경험의 과정이고 진화의 과정인데, 현실적인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촛점이 옮아가는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수행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현실적인 모습에서 태을도인으로서 상제님이 보여주셨던 모범을 잘 보여가지고 넓혀가야 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와 닿더라구요.
종장님:
교과서에 충실하면 응용할 수 있는 게 다양해지거든요. 참고서를 많이 보면 편법을 배우는 거거든요. 외국같은 경우, 수학문제를 애들한테 가르칠 때 왜 법칙이 그런지를 가르쳐요. 우리나라는 무조건 외우라고 하거든요. 행렬, 수열 같은 것도 무조건 외우라고, 당연한 핵심적인 거 몇 개만 외우면 풀기는 금방 풀지요. 하지만 외국은 법칙을 잊어버려도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지요.
상제님이 후천을 열어가는 데, 5만 년 기초를 세운다. 5만 년 가는 건물을 세우려면 이 기초가 얼마나 튼튼해야겠어요. 상제님 고수부님께서 천지공사 신정공사를 행하실 때 그런 마음으로 하셨을 거예요. 그렇게 당신이 천지공사 신정공사를 해놓은 것을 우리가 성사재인하려면 정말로 상제님 고수부님 마음같이 깊게, 넓게 파야지. 아산서 붕괴된 건물은 돈 아낀다고 기초공사를 잘못해가지고 넘어갔잖아요.
교과서 속에서 희망을 봐야 하는데. 참고서를 달달 외우면 어느 정도까지는 점수를 빨리 받겠지. 하지만 거기까지이지요. 태을도 같은 경우에는 항상 교과서 같은 얘기만 하니까, 그게 어떻게 보면 똑같은 얘기한다고 듣기 싫을 수가 있어요.
큰스님들에게 도가 뭐냐고 물어보면, “야반삼경에 빗장이나 잘 걸어잠그라.” 도가 뭐냐고 물어보면 "차 한 잔 마셔라." 항상 똑같은 얘기만 한다니까. 자기가 깊어지지 않으면, 어제 큰스님이 한 얘기나 오늘 큰스님이 한 말이 똑같으니까, 저 스님은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한다고 할 거예요. 근데 도가 깊어지면, 똑같은 단어를 얘기해도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달라요. 어제 스님이 어떤 사람을 봤을 때 "차 한잔 하시게" 했을 때 거기에 담긴 마음하고, 어떤 학인이 왔을 때 "차 한잔 하시게" 했을 때 거기에 담긴 마음이 다르거든.
어떤 사람은 ‘차 한잔 하시게’ 하는 말 가지고 딱 깨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큰 스님인 줄 알았는데 ‘차 한잔 하시게’ 하니 무슨 큰 스님이야. 아무것도 모르니까 차 한잔 마시라고 그러는 거지.” 한다는 거지요. 가장 큰 희망이라는 것은, 웬만해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에요.
대순전경 서문에도 나오잖아요. 진짜 소리는 소리없는 소리라는 거예요. 진짜 빛은 빛없는 빛이라는 거예요. 소리없는 소리여야 삼계를 뒤덮고, 빛없는 빛이어야만 삼계를 둘러싸요. 모든 사람이 다 태을도에 희망이 있다고 해봐요. 여기에 와서 난리를 필 것 아니에요. 모두 상제님을 하나님이라고 해봐요. 그 당시 박공우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낄 틈이 있나. 미친 놈이니 뭐니 상제님한테 욕을 하니까 박공우 같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것이지.
충양도인:
종장님이 아까 말씀하셨듯이, 상제님이 여기 계신다고 하면 뭐 난리 나겠죠. 소리없는 소리, 빛없는 빛, 태을도가 도장도 없고 별로 재미가 없다고 얘기하셨는데, 저는 여기가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요. 다른 곳에서 도장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거든요. 태을도에서는 후천에 대한 해답을 명확하게 얘기해주고 있고. 다른 데는 막연하게 ‘도통공부 해라.’ 그렇게만 얘기하잖아요. ‘주문 열심히 해라.’ 태을도는 후천 상제님세상에 대한 해답을 정확히 밝혀놓은 것 같아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담도인:
태을도의 가르침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홀로서기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씀으로 보자면 홀로 설 수 있도록 하라는 데에서 결국 스스로의 희망을 뭔가를 찾고 노력해야지, 태을도라는 조직에서 뭔가 내가 처질 것 같으면 태을도에 의존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구요.
증산상제님, 고수부님 말씀 같은 경우에는, 제가 힘든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 있을 때 자주 생각하고 격려도 받고 그렇게 보고 있어서, 항상 마음 닦고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라고 하니까 그런 말씀이 도움이 되고요. 삶을 잘살 수 있는 가르침이나 그런 의미에서는 제가 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고 해서 희망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충덕도인: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하거든요. 하나는 저는 희망이란 단어 자체가 제가 볼 때는 그 사람의 모든 에너지를 이끄는 것이라고 보고요. 종교도 선택하고 직업도 선택하고 혹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결국 상제님 신앙, 태을도를 함에 있어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희망이 있고 재미가 있으면 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그런 경우도 많이 봤는데, 자기가 갖는 희망하고 태을도의 희망, 천지의 희망이 일치하면 따라가는 것이고, 어긋나면 떠나가고 시들해지겠지요.
그러면 왜 어긋나냐? 그 문제를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고요. 내 희망이 올바른 희망이냐. 하늘과 뜻이 맞는 희망이냐. 그걸 한 번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고요.
심사숙고하면서 다른 증산종단, 타 종교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고요. 비교를 해봐야 이게 뭐가 좋고 나쁜지를, 장단이 뭔지를 알 수 있거든요. 무조건 그것만 알고 그걸 좋다고 생각해서는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확신이 안 선다고요. 그런 과정을 한 번 통해서 내가 희망하는 것과 비교해서, 물론 내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게 되면은 내가 완성이 되지만, 더 밑바닥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거지요.
내 생명을 용사시킨다거나 아니면 소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이 간다거나, 실제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요. 이득이 있기 때문에 한다고 보거든요. ‘그거 하면 죽어.’ 그러면 아무도 안할 거란 말이에요. 그거 하면 패가망신한다면 아무도 안할 거란 말이에요. 농약이라고 하면 누가 먹겠어요. 분명 이득이 있기 때문에 한다는 거에는 공감하고요. 최종적으로 내 희망, 상제님 희망, 천지의 희망, 태을도에서 이루고자 한 것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고요.
또 한 가지 측면에서 제가 태을도를 하면서, 그러면 당신은 처음 시작할 때 어떻고 지금은 어떻냐 이걸 말씀드리면, 저는 처음 ‘마음닦고 태을주를 읽는 것’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 하면서도 잘 이해를 못했어요. 왜 그렇게 해야 되냐. 상제님이 제시하신 급살병에 대해서 나도 살고 다같이 살려야 한다는 것 그런 걸 가지고 신앙했으니까. 우리 인류가 선천에서 꿈꿔왔던 조화선경 대동세계 지심대도술 이상세계 말이에요. 과연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나?
처음엔 그렇게 마음닦고 태을주 읽는 것을 몰랐는데, 일종의 화두를 갖고서 태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화두 속에서 두 단어 뿐만 아니라 거기에 얽혀있는 모든 문제들.
마음 닦아서 태양을 가리는 구름을 없애면 불교에서 말하는 천지의 품성하고 상제님이 말씀하신 태을신성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태을도에서 얘기하는 것을 나름대로 정리했어요. 마음 닦고 태을주로 출발해서 지심대도술로 가고 조화선경으로 가고 신인합일을 이루어서 급살병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면 신인합일이 되려면 뭔가 통해야 될 것 아니에요. 태을을 통해서 다 연결됐기 때문에, 우리도 마음이 있고 머리도 있고 세포가 있잖아요. 컨트롤타워인 뇌의 역할을 하는 것은 하느님이고, 그 다음에 이 뇌가 역할을 하려면 마음이 있어야 하거든요.
근원적인 생명이 태을이다. 사실 태을도를 통해서 태을이라는 것을 더 안 거죠. 그런 사고의 과정, 고민한 과정을 통해서 옛날에 비해서 확실하기 때문에 믿음이 더 가는 거예요. 지금은 단지 현생에서 안되더라도 다른 세상에 가서라도 할 수 있다. 그만큼 사실 굳어진 거죠. 저희가 알고 깨달은 만큼 그걸 선택해서 가게 되어 있거든요.
저는 지금은 이론적으로 체계가 잡혔다고 생각이 들고요. 현실 속에서 얼마나 느끼나가 문제지요. 태을이 있어 가슴속에 들어있고 마음도 들어있고, 실제로 갖고 살면서 모르는 거예요. 답답한 거죠. 이걸 실천을 통해서 세밀한 마음을 관찰하고 수행을 통해서 태을도 느끼고 마음도 느끼고, 그것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야 내가 지식적으로 알았던 것이 표현이 돼서 하나님의 꿈도 이루고 천지의 꿈도 이루고 내 꿈도 이룬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장님:
중국 청나라시대에 유화양(柳華陽) 스님이 있었어요. 자기가 도 닦은 것을 정리해놓은 것이 있는데 ‘혜명경(慧命經)’이라고 해요. 지혜 혜(慧)자 목숨 명(命)자. 그 스님이 얘기한 핵심이 뭐냐 하면, 마음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 생명을 다루는 도를 안 알려 준다는 거예요. 생명 자체가 영원히 가야 되니까. 진리는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결실하고, 그래서 목숨 명(命)을 생명이라고 해요. 혜(慧)는 마음이라고 하고. 명(命)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마음자리는 그걸 혜(慧)라고 하고 성(性)이라고 해요.
이 스님이 뭐라고 하냐면, 생명을 다룰 수 있는 마음이 잘못되면 생명을 해하니까, 마음이 덜된 사람에게 도를 전해주지 말라고 해요. 중국에서 홍인대사가 혜능대사의 마음을 확인하고 도를 전해 주거든요. 유교, 불교, 서교에서 항상 두 가지가 있다는 거예요. 생명을 다루는 테크닉, 즉 생명을 다루는 법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생명을 다루는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기독교 나름대로, 불교 나름대로, 유교 나름대로, 서교 나름대로, 다 있다는 거예요. 생명을 다루는 이 법을 전해줄 때는 마음이 되어있지 않으면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망쳐버리니까. 마음이 첫째라는 거예요.
모든 유불선 기독교의 성인들의 말씀을 보면 두 가지로 나누는데, 마음(心)과 명(命), 쉽게 말하면 혜(慧)와 명(命), 우리로 말하면 혜(慧)는 시천(侍天)이고 명(命)은 태을(太乙)이라. 천주님을 대하는 마음, 천주님과 똑같은 마음, 마음속에서 천주님이 마음을 가지고 천지를 용사하잖아요. 천주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태을을 용사하는 이것을 절대 안 가르쳐준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르쳐주면은 거꾸로 역천하니까, 도통문을 잠그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어라. 알면 알수록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요.
마음 닦는 것은 혜(慧)요, 태을주를 읽으라는 것은 명(命)이에요. 쉽게 말하면 여기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상제님께서 유불선서도의 진액을 쭉 뽑아서 무극대도를 내놨어요. 유교 불교 기독교 서도의 혜명(慧命), 이 모든 도의 혜명을 모아가지고 태을도를 내서,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어라’ 이게 결론이에요, 결론!
사탕 줄께 교회 가. 이쁜 여학생 있으니까 교회 가. 이런 시대는 지났다는 거예요. 가정을 가진 어른이 됐고 남자가 됐는데, 사탕 줄께, 이쁜 여학생 있어, 해서 따라가면 가정이 깨질 것 아니에요. 자기 남편이 있고 자기 마누라가 있는데, 남편 마누라에게 충실해야지 그렇잖아요?
혜(慧)와 명(命), 시천(侍天)과 태을(太乙)을 내 마음속에서 발현시키지 않으면 절대 후천 오만 년을 갈 수도 없고 용사도 못한다는 거예요. 주인도 안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스스로 혜명(慧命), 지혜와 명을, 받아나온 시천(侍天)과 태을(太乙)을, 내 스스로 밝히라는 거예요. 상제님 법을 이어서 후천 오만 년의 혜명(慧命)시대를 열려면, 시천주(侍天主) 봉태을(奉太乙)의 시대를 열려면, 옛날 큰스님이 "야반삼경에 빗장이나 잘 걸어잠그라" "차 한잔 마시게" 그런 얘기 했듯이, 우리 태을도인들도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으라’ 항상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잖아요
어떻게 하면 급살병에 살아납니까? 어떻게 하면 도통합니까? 어떻게 하면 개벽됩니까? "마음닦고 태을주를 읽어라." 그러면 사람들은 태을도는 맨날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어라 하는데 그걸 누가 모릅니까. 그것밖에 못합니까. 술(術)을 가르쳐주든지, 법을 가르쳐주든지 뭐가 있어야지, 맨날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습니까.
‘마음 닦고 태을주 읽는 것’ 그게 법방이지. 이제 그런 단계까지 왔고, 충정도인이 얘기했듯이 내가 마음 닦고 태을주 읽은 그것 가지고,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바운더리, 조직을 넓혀가는 거예요. 우리 가족밖에 몰랐던 지난 시대에서 벗어나, 도를 닦았으면 옆집까지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 가잖아요. 세계일가를 할 수 있는 바운더리를 넓혀가면 되는 거예요. 교과서에 충실해서 우리가 참고서가 되는 것이지.
종부님:
건물을 크게 올리려고 하면 땅 밑을 깊게 파거든요. 땅 밑을 파는 것을 토목이라고 하고, 그 위에 뼈대를 쌓아 올리는 것을 골조공사라고 하고, 건물 안팎을 마무리하는 것을 마감공사라고 하고. 그런데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뮐세’ 한 것처럼, 나무가 지상으로 가지를 뻗으려면 밑으로 뿌리도 그만큼 뻗어 내려가야 하잖아요. 토목하는데 시간이 진짜 오래 걸리더라구요. 땅을 깊이 파고 거기에다 철골 세우고, 그 공정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재미도 하나 없고 보기에 깝깝해도, 그게 제대로 안되면 그 위에 아무리 잘 쌓아올려도 헛방이라는 거예요. 아랫쪽 토목이 건물을 올리는 기초라서 그런 거지요. 아산에서 무너진 건물은 밑에 철근을 덜 집어넣은 거예요. 밑에서 공사비 아끼려고 철근을 덜 박았다가 건물이 통째로 넘어간 거지요.
어쨌든 간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자체가 최소한 상제님을 믿기 때문에 여기 앉아있는 거거든요. 지금 후천 오만 년을 만들고자 하는데 토목공사가 잘못되면 후천 오만 년이 그냥 휘청 넘어가버린다고요. 지금 여기 앉아계시는 몇 안되는 분들이 정말 별볼 일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바로 터파기하는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에요. 여기 계신 분들이 튼실하게 온전히 잘 자리잡아야지만 그 위에 뚜껑 덮고 위에 후천 오만 년을 쌓아 올릴 수 있는 거지요. 그 밑작업을 하려고 하니까 재미없이 더디게 가는 거예요.
태을도에 희망이 있냐? 저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천지성공시대에 천지의 운명이 어디에 달려있냐면, 요 몇 사람 태을도인들에게 달려있다고요. 예전에 ‘제5원소’ 라는 영화를 봤었는데, 정작 제5원소가 사람이더라고요. 상제님께서 형렬한테 삼정(蔘精)을 붙여서 보낸다고 하시잖아요. 여기 앉아계신 한 분 한 분이 희망 그 자체라는 거예요. 천지가 이분들만 바라보고 있는 데, 이분들이 자리잡지 못하면, 병겁이 터질 수도 없고 후천을 만들 수도 없어요.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고 종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로지 그 마음 하나 바라보고 간다는 거예요.
상제님 같은 마음이 돼서 온전히 자리잡아야지만, 그 바탕 위에 병겁을 터뜨리고 후천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희망을 내 외부의 태을도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바로 내가 희망이다.’ 바로 나를 상제님화 하는 작업, 시천주의 천주화 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거지요. 상제님 같은 공심이 되어야지만 태을주를 가지고 온전하게 용사를 할 것이고, 그래야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상제님 고수부님과 똑같은 심법으로 우리를 만드는 작업을 지금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내가 희망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태을도인의 길을 걸어가셨으면 합니다.
첫댓글 충원도인님! 꽤 긴 시간인데 녹취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덕분에 태을도의 희망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질문을 내주어 태을도인들에게 자기신앙을 돌아보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말씀 많이 들어 더욱 감사합니다.
5분도훈을 준비한 위에 힘든 녹취작업까지 해주신 충원도인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평온하면서도 치열한 태을도 믿음의 길입니다. 외롭지만, 또한 서로 격려하며 같이 걸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마음 닦는 것은 혜(慧)요, 태을주를 읽으라는 것은 명(命)이에요. 쉽게 말하면 여기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어라’ 이게 결론이에요,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