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6일 Asan UBF 주일메세지
성전을 건축하라
말씀 / 학개 1:1~15
요절 / 학개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2019년 새해에 합당한 말씀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학개 선지자가 전한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듣고자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올 한해 우리의 캠퍼스에 진정한 성전 예수님을 세우는 역사에 사용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 성전을 건축하라
1절을 보십시오. 때는 다리오왕 2년 6월 일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였습니다. 선지자 학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전하였습니다.
역사에는 다리오 왕(다리우스 황제)이 여러 사람 등장합니다. 학개서에 나오는 다리오 왕은 다리우스 히스타페스입니다. 고레스왕이 메대-페르시아 연합군을 이끌고 바벨로니아를 멸망시켰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와있던 유대인들을 귀환시킨 왕이 고레스(키루스) 왕입니다. 고레스의 아들 캄비나스 2세가 정치를 잘못하다가 다마스쿠스에서 죽었고 뒤를 이어 페르시아 왕이 된 사람이 다리우스 히스타패스입니다. 학개서 1:1절에 나오는 다리오 왕은 이 사람입니다.
이때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고레스(키루스)황제에 의하여 귀환한지 18년이 지난 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고 B.C. 538년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렸습니다.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42.360명이 B.C. 537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다음 해부터 성전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B.C. 536).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 근처에 살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들도 성전건축에 참여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성전 건축의 순수성 문제, 사마리아 사람들의 목적이 맞지 않아 거절하였더니 이들이 페르시아의 고위관리들에게 유대인들과 성전건축에 대한 악담을 하였습니다. 성전건축은 곧 중단되었습니다. 중단된 지 16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총독과 대제사장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성전은 짓다가 말았습니다. 성전은 지붕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상태로 16년이 흘렀습니다. 성전이 이렇게 되어 있는 동안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첫째,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만한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환경과 조건이 아직은 성전 건축에 불리하다는 뜻 같습니다. 사실은 유다 백성들이 성전 건축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 건축에 높은 가치, 최고의 가중치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백성들이 자기 집은 다 갖추고 살았습니다. ‘판벽한 집’이란 잘 갖추어진 집을 의미합니다. 좀 더 나가면 사치스러운 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옳으냐” 물으십니다. 성전은 지붕도 없어서 비가 오면 물이 차고 바닥은 진창이 되는데, 너희는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는 것이 옳은지 물으십니다.
성전은 왜 중요합니까? 성전을 황폐한 상태로 두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성전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성전이 있어야 그곳에서 제사 드릴 수 있습니다. 제사는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왜 죄 사함 받아야 합니까? 죄를 사함 받아야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죄를 사함 받아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고 죄 사함 받지 않고 있으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도 중단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죄 문제 해결도 없이 자기 집은 짓고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음도 없이 자기 집을 꾸미고 살았습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그렇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유대인들이 지금 예루살렘에 와서 기도하지 않은 채, 자기 집에다 갖출 것만 갖추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옳으냐?’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새번역 성경에는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다른 일을 우선순위에 놓은 삶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죄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일보다 현실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겨 온 삶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기 힘과 노력으로 살아온 삶의 방식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의 결과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죄 문제 해결 없이 기도하지 않고 자기 힘과 노력으로 먼저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하여 살아온 결과가 어떠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사람들은 열심히 씨를 뿌렸습니다. 풍성한 추수를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배부르고자 먹었고 갈증을 해소하고자 마셨습니다. 사막의 큰 일교차를 대비하여 든든하게 입었으며 열심히 일하면 그 돈을 꼬박꼬박 저축하고 모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황폐하게 된 고향 땅 고국에 돌아와 자신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우물을 팠고 힘껏 밭을 개간하였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최선 그 이상을 더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그동안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지 살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교훈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방향을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살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올바른 가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한재’는 가뭄입니다. 가뭄은 정말 무섭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무섭습니다. 비 많이 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비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아무리 샘을 파고 밭을 가꾸고 일하고 노력하였어도 하늘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라비아 사막의 열기가 지중해의 습한 공기가 부딪쳐서 밤에 이슬이 땅을 흠뻑 적실만큼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나일이나 유프라테스 같은 큰 강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오직 하늘에서 이슬을 내려 주시고 또 적절한 때에 비가 내려주어야 농사가 가능하였습니다. 이슬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비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노력이 다 허사가 되었습니다. 요즘 중국 사람들 고생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파는 상품에 관세를 높였습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에게 무거운 세금으로 차별을 시작하였습니다. 애플이 중국을 떠나겠다고 합니다. 삼성 스마트폰도 중국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무역 다음 단계는 환율입니다. 환율로 때리면 그 대가는 엄청납니다. 일본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70년대, 80년대 일본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였습니까? 세계 500대 기업에 일본 기업들이 도배를 하다시피 하였습니다. 도쿄를 팔면 미국 땅 전체를 살 수 있다고 떵떵거렸습니다. 나고야 의정서에 사인하게 하고 환율로 일본을 때렸습니다. 일본이 10년을 날렸습니다. 무역, 금융 그 다음으로 더 무서운 것은 전쟁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많은 귀중한 것들이 다 파괴되고 사라집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있고, 노력의 차원을 벗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벗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착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복의 근원이심을 잊은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먼저 성전을 건축하여야 합니다. 성전을 건축하여 먼저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산과 곡물과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서 가뭄을 겪고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은 황폐하게 놔두고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 아니라 내 힘으로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나를 행복하게 하고자 하여도 나는 결코 나를 안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동안의 자기 노력이 자기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 유다 백성들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이렇게 포도주가 안되는지, 왜 이렇게 밀농사도 안되는 것인지, 왜 자녀들은 과외공부, 족집게 과외, 학원, 교습소 다 보내는데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하나님께서 살펴보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8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곰곰이 생각하고 살폈으면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빨리 성전을 건축하여야 합니다. 멀리 레바논에 가서 비싸고 좋은 백향목을 가져오려 하기 보다도 유다 백성들이 갈 수 있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와야 합니다. 성전을 건축하여야 합니다. 지금 바로 신속하게 성전을 건축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성전이 하루 빨리 예루살렘에 세워져야 합니다. 성전이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의 중심, 유다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유다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예루살렘과 옛 유다 지역의 총독이 스룹바벨이었습니다. 돌아온 유다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 대제사장이 여호수아였습니다. 총독과 대제사장과 남은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지자 학개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으로, 그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아래로는 백성들로부터 위로는 대제사장과 총독이 모두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들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허물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최악의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변명하고 자기 잘한 것을 내세우며 자신의 허물과 죄를 자신이 덮으려 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비록 자기 집을 먼저 짓고 살았지만, 아직 최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두렵고 떨림으로 들었습니다. 궤변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14,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받은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내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은 지 22일 후,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성전이 완성된 시대입니다. 건물인 성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성전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죄는 단번에 완전히 다 사함 받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의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써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으며, 우리가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우리에게 건물로써의 성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8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세워야할 중요한 성전은 우리 자신입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전으로 세우는 일에 각별히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성전으로 세우는 구체적인 일은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탐심과 정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탐심과 정욕에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다음으로 오늘날 우리가 세워야 할 성전은 우리 공동체, 교회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려고 성막이나 성전과 같은 물리적인 건물에 임재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건물이 아닌 자기 백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교회 공동체를 잘 세우고자 하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는 일이며 ‘서로 사랑’을 내용으로 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초로 우리는 이 시대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힘썼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성전을 세우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탐심, 집착에 빠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염려와 두려움입니다. 가지지 못할까 두렵고 가진 것을 다 잃을까 염려합니다. 갑자기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길을 두려움으로 살고 평안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보호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는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과 불운이 기다리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정욕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도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정죄의식과 자책감이 괴롭힙니다. 무슨 사건이라도 나면 죄 때문인가 하여 깜짝 놀랍니다.
한편,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일이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입니다. 또 한 가지는 지독한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말이나 열정이 평소에는 크게 잘못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고비에서 무리한 선택을 합니다. 공평하지 못한 결정, 정의롭지 못한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떠납니다. 도와주지 않습니다. 도와 주어봐야 모두 자기 영광으로 삼으니 누가 동역해주고 누가 힘을 보태주겠습니까? 자기 영광을 구할 때 그 공동체는 성장하다가도 주저앉고 커지는 것 같다가도 자라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하는데, 근본적으로 이기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주시는 것을 믿지 않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나의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챙겨서 얻을 수 있다는 오만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잘되게 할 수 있다. 내가 내 행복을 내힘으로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악착같이 자기유익을 구할 때, 공동체는 그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아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이기심으로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사람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주시기 어렵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의 행복을 쟁취하겠다는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실 수 없습니다. 저는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어떤 분이 30년이 넘도록 단 한명도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여 세운 제자가 없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끊임없이 자기영광을 구하는 사람에게 누구도 곁에 남아 있지 않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살피는 것은 마음이 아프고 이런 이야기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두 번이나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실패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나 그런 오류를 비난하고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선택으로 자기 길로 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입니다. 과연 나에게는 그런 요소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통하여 교훈을 얻어 우리는 그런 삶을 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019년,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을 황폐하게 둔 채 먼저 내가 짓고 싶은 집을 지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성전을 건축할 것인가?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시대의 하나님의 전을 짓는 2019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