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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 (Saṃyutta Nikāya)’ 9강
다음은 제1장의 5번째 경을 공부하겠습니다.
까띠친다 숫따
Katichinda sutta,
얼마나 끊음 경 (S1;5)
사왓티 니다낭
Sāvatthinidānaṃ. ~~(생략)
1. 에까만탕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게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까띠 친데 까띠 자헤,
Kati chinde kati jahe,
까띠 쭛따리 바와예.
kati cuttari bhāvaye;
까띠 상가띠고 빅쿠,
Kati saṅgātigo bhikkhu,
오가띤노띠 웃짜띠띠
oghatiṇṇoti vuccatīti.
2. 얼마나 끊고, 얼마나 버리고
얼마나 다시 더 닦고
얼마나 속박을 벗어나야
폭류를 건넌 비구라고 합니까?
바가와(bhagava)
세존
3. 빤짜 친데 빤짜 자헤,
Pañca chinde pañca jahe,
빤짜 쭛따리 바와에
pañca cuttari bhāvaye;
빤짜 상가띠도 빅쿠,
Pañca saṅgātigo bhikkhu,
오가띤노띠 웃짜띠띠
oghatiṇṇoti vuccatīti.
3.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리고
다섯 가지를 다시 닦아야 한다.
다섯 가지 속박을 모두 벗어나야
폭류를 건넌 비구라고 한다.
까띠 친데 까띠 자헤(Kati chinde kati jahe)에서 까띠(Kati)는 ‘얼마나’, ‘어느 정도’라는 숫자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친데(chinde)는 ‘베다’, ‘절단하다’, ‘파괴하다’는 뜻으로 ‘끊는다’는 뜻입니다. 자헤(jahe)는 ‘버리다’, ‘포기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끊고, 얼마나 버리고’입니다. 다음에 까띠 쭛따리 바와예(kati cuttari bhāvaye)는 ‘얼마나 더 닦아야 합니까?’입니다.
까띠 상가띠고 빅쿠, 오가띤노띠 웃짜띠띠(Kati saṅgātigo bhikkhu, oghatiṇṇoti vuccatīti)는 ‘얼마나 집착을 벗어나야 폭류를 건넌 비구라고 합니까?’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상가띠고(saṅgatigo)는 ‘속박’을 뜻합니다.
빤짜 친데 빤짜 자헤(Pañca chinde pañca jahe)에서 빤짜(Pañca)는 ‘다섯’이라는 뜻이고 친데(chinde)는 ‘끊는다’는 뜻입니다. 빤짜 친데 빤짜 자헤(Pañca chinde pañca jahe)는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리고’라는 말입니다.
빤짜 상가(pañca saṅga)는 다섯 가지 속박으로 탐욕의 속박, 성냄의 속박, 어리석음의 속박, 자만의 속박, 견해의 속박입니다. 구도자는 이런 다섯 가지 속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리고’라는 말은 열 가지 족쇄를 끊은 것을 말합니다. 이 족쇄가 바로 나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다섯 가지를 끊고’는 10가지 족쇄 중에서 첫 번째 다섯 가지는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족쇄를 끊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오하분결은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다섯 가지 단계의 족쇄를 말합니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오람바기야 삼요자나(orambhagiya samyojana)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유신견(有身見)
두 번째,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
세 번째, 회의적 의심
네 번째, 감각적 욕망
다섯 번째, 악의
다음에 ‘다섯 가지를 버리고’는 10가지 족쇄 중에서 두 번째 다섯 가지는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오상분결(五上分結)은 미세한 물질의 세계인 색계(色界)와 정신세계인 무색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다섯 가지 족쇄를 말합니다. 다음과 같은 높은 단계의 다섯 가지를 집착하는 것이 오상분결입니다.
여섯 번째, 색계에 대한 욕망
일곱 번째, 무색계에 대한 욕망
여덟 번째, 자만
아홉 번째, 들뜸
열 번째, 무명
이상 열 가지 족쇄 중에서 수다원이 되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족쇄가 소멸됩니다. 사다함이 되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족쇄가 소멸하고 네 번째, 다섯 번째가 약화됩니다. 다음에 아나함이 되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족쇄가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이 되면 열 가지 족쇄가 모두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의 소멸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폭류를 건널 수 없습니다.
열 가지 족쇄를 자세하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유신견(有身見)은 삭까야 디띠(sakkāya diṭṭhi)라고 해서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유신견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중생을 중생이라고 알도록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입니다. 유신견(有身見)을 문자로 풀이하면 나의 몸이라는 견해라서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와 함께 유심견(有心見)이라는 의미도 나의 마음이라는 견해라서 잘못된 견해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오온이 나의 것이고, 오온은 나고, 오온은 나의 자아라는 견해는 잘못된 견해에 속합니다.
이처럼 유신견은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에 대한 잘못된 견해인데 누구나 항상 이러한 견해 때문에 집착을 합니다. 특히 인도사회에서는 머리에 대한 집착, 수염에 대한 집착, 눈썹에 대한 집착 등 몸에 대한 집착이 많습니다. 또 몸에 대한 집착을 하면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몸의 모습을 수행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중에 옷을 입지 않는 자이나교들도 중요한 수행의 상징으로 본 것입니다. 몸이 있다는 의미에서 유신(有身)은 잘못된 견해가 아닙니다. 하지만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하면 나의 몸이라는 견해라서 삿된 견해라고 합니다.
경전에서는 오온의 각각에 대해 네 가지로 자아가 있다는 설명하고 있는데 20가지 유신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색, 수, 상, 행, 식이 자아라는 믿음 5가지
둘째, 자아가 색, 수, 상, 행, 식을 소유한다는 믿음 5가지
셋째, 색, 수, 상, 행, 식 안에 자아가 있다는 믿음 5가지
넷째, 자아 안에 색, 수, 상, 행, 식이 있다는 믿음 5가지
두 번째,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을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고 합니다. 계금취견을 실랍바따 빠라마사(sīlabbata parāmāsa)라고 합니다. 미신적인 관습과 형식적인 계율과 의례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을 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입니다. 당시 인도시회와 자이나교의 지나친 계율지상주의 대한 입장이 표현된 바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계율이 엄격합니다. 특히 자이나교는 빗자루로 쓸지 않고서는 한 발도 앞으로 안 걸어갑니다. 벌레를 죽일까봐 빗자루로 쓸고 한발씩 앞으로 갑니다. 물도 그냥 마시지 않고 헝겊 망에 걸러서 마십니다. 물에 있는 벌레를 죽일까봐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목이 말라도 그냥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이나교 수행자를 제일 착한 수행자라고 하셨습니다. ‘나보다 더 엄격히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착한 사람을 보고 싶으면 자이나교 마을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착함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집착이고 극단적인 고행이라서 지성을 나약하게 하고 마음의 고요함을 얻지 못해서 지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불교의 계율이 자이나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중요하게 여기셨지만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삼은 차이가 있습니다. 계율이 목표가 되면 계율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인도에는 소나 개와 같이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도사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이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문화가 바로 수행문화이고 자연생활로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극단적인 것은 결국 열반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극단이든 장애로 보시고 권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째, 회의적 의심으로 위찌낏차(vicikicchā)라고 합니다. 회의적 의심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과, 계율과 연기법에 대한 의심과 사성제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견해에 회의를 느껴서 이를 의심하는 견해입니다. 세 가지 보배인 불법승에 대한 믿음이 확실한 사람은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정진할 수 있어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특히 12연기법을 공부하면 아직 수다원이 아니더라도 작은 수다원에 이르러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연기법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서 악업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면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에 이릅니다.
수다원이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알아서 더 이상 흔들림이 없고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계절의 변화에도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의 변화를 끊임없이 느낍니다. 그러나 수다원이 되면 무상의 지혜가 나서 계절의 변화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수행을 해도 잘못된 스님이 나올 수 있고 잘못된 수행자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불교가 혼란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흔들리지 않으려면 반드시 수다원의 도과부터 성취해야 합니다. 이러한 수다원의 도과를 얻기 전까지는 누구나 계속해서 의심하고 흔들립니다.
요즈음 유튜브나 sns 등을 통해서 특이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행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다보면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에서 자꾸 멀어집니다. 사람들이 이런 특이한 것을 쉽게 받아들여서 집착하는데 이런 행위는 사성제, 팔정도, 37보리분법에서 멀어지는 행위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가르침이 없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며 불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심리학이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심리학은 심리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불교는 불교의 고유한 법이 있습니다. 이런 색다른 견해를 불교라는 이름으로 소개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일반인들은 이런 잘못된 견해를 모르지만 스님들이나 수행자들은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감각적 욕망으로 까마 라가(kāma rāga)라고 합니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가진 견해입니다. 감각적 욕망이라고 할 때 욕망은 반드시 육체적 정신적 감각기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감각기관에 일어나는 욕망이라는 뜻입니다. 이때의 감각이 바로 느낌입니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누구나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은 바로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악의(惡意)는 악한 의도로 브야빠다(byāpāda)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마음의 분노를 뜻합니다. 이는 반감, 증오, 분개, 적대감 등을 뜻하며 성내는 마음과 동의어입니다. 악한 의도는 다름 아닌 악업입니다. 의도가 있는 행위가 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도가 없으면 업이 아닙니다. 이때 업이 되는 의도는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행위는 업이 아닙니다. 부처님는 깨달음을 얻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셔서 업을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을 과보가 없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상 다섯 가지 족쇄인 유신견(有身見),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 회의적 의심, 감각적 욕망, 악의가 오하분결입니다. 오하분결은 낮은 단계에 존재를 붙들어 맨다는 뜻입니다. 특히 오하분결 중에서 네 번째인 감각적 욕망과 다섯 번째인 악의 2가지는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한 사까다가미(sakadāgami)가 되어야 소멸합니다. 이렇게 사다함이 되어서 죽으면 한 번 더 인간으로 태어나 아라한이 됩니다. 그러나 수다원인 소따빤나(sotāpanna)가 되어서 죽으면 최대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일곱 생을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최대 일곱 생이고 여덟 생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곱 생 이내에는 언제든지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아비담마 주석서에서 사다함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사다함은 애욕인 라가(rāga)와 성냄인 도사(dosa)와 어리석음인 모하(moha)가 미세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라가(rāga)는 애욕이라서 탐욕인 로바(lobha)보다 좀 더 강합니다. 사실 탐욕은 없앨 수 있지만 애욕은 생존에 대한 본능이라서 그만큼 없애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다함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미세하게 있어서 여기에 따른 성적욕구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견은 사다함이 되면 그만큼의 라가(rāga)는 없다고 말합니다.
주석서에서는 감각적 욕망은 아나함이 되어야 끊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나함이 되어야 애욕인 라가(rāga)가 끊어집니다. 수다원, 사다함은 애욕이 남아 있어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지만 아나함이 되면 애욕이 사라져 결혼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나함이 되어 결혼생활을 하면 일주일 이내에 죽음에 이릅니다. 그래서 아나함이 죽으면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색계의 사선정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아라한이 됩니다. 그러나 수다원, 사다함은 애욕이 있어서 욕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상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는 욕계와 연결되었습니다.
다음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다섯 가지 족쇄는 오상분결(五上分結)로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족쇄입니다.
여섯 번째, 색계에 대한 욕망으로 루빠 라가(rūpa rāga)라고 합니다. 색계선정을 수행을 해서 초선에서 사선까지인 색계존재(rūpa bhava)에 대한 욕망입니다. 이는 물질인 몸을 집착하는 견해입니다. 색계 사선정의 세계에는 별도로 네 개의 정거천이 있는데 이 정거천에는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자는 갈 수 있는 천상입니다. 아나함은 이 정거천에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하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무색계에 대한 욕망으로 아루빠 라가(arūpa rāga)라고 합니다. 무색계 선정수행을 해서 이른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라는 무색계존재(arūpa bhava)에 대한 욕망입니다. 비상비비상처 위에 있는 상수멸진정이라는 정신세계가 있는데 이 세계는 열반이 아니고 상온과 수온이 소멸한 상태에서 행온만 있는 최고의 집중력을 가지 정신 상태입니다.
여덟 번째, 자만(自慢), 또는 아만(我慢)으로 마나(māna)라고 합니다.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거나, 남과 동등하다고 여기거나, 남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등의 마음입니다. 우월감과 교만한 마음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아홉 번째, 들뜸으로 도거(掉擧)라고 하며 욷닷짜(uddhacca)라고 합니다. 들뜨고 불안한 마음입니다. 들뜨고 불안한 마음은 10가지 족쇄 중에서 아홉 번째에 해당되는 것으로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지는 장애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누구나 들떠있는 상태로 불안하게 삽니다.
열 번째, 무명(無明)으로 아윗자(avijjā)라고 합니다. 무명은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무명은 12연기의 근본원인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모르는 것으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윤회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서 윤회하는 생명은 모두 무명과 갈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괴로움뿐인 윤회를 끝내려면 역시 무명과 갈애가 소멸된 열반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상의 오상분결(五上分結)은 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에 대한 욕망, 자만, 들뜸, 무명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이들 열 가지 족쇄를 전부 제거합니다. 이때 오상분결이라는 높은 단계의 다섯 가지 족쇄는 욕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생명이 업의 과보에 따라 윤회하는 세계는 모두 31개의 존재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런 31개의 존재의 세계는 다양한 분류가 있습니다. 사악도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가 있고 그 위에 인간계가 있고, 다시 여섯 개의 욕계천상이 있고, 더 위에 있는 색계와 무색계가 있습니다. 또 다른 분류는 지옥부터 인간까지를 욕계라고 하며 색계, 무색계를 범천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악도를 악업보계라고 하고 인간부터 무색계까지를 선업보계라고 합니다.
모든 생명은 과거에 나도 모르게 윤회하는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사악도인 지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사악도는 불행만 있고 행복이 없습니다. 지옥은 등활지옥, 혹승지옥, 중합지옥, 호규지옥, 염열지옥, 대규지옥, 대열지옥, 무간지옥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옥에 위성지옥도 있습니다. 많은 생명이 여기에 모여 있고, 지옥에서 수명이 다하면 다시 지옥에서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상은 상좌부와 설일체유부에서 정리한 존재의 세계입니다. 악처에 태어남을 애기할 때 아귀, 축생, 아수라라고 할 때 상좌부에서는 아수라의 존재를 말하고 대승에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수라는 악처의 아수라가 있고, 웨빠찟따 아수라가 있는데 웨빠찟따 아수라는 인간보다는 높고 신들보다는 낮은 아수라입니다. 사악도의 생명은 수명이 정해지지 않고 과보대로 살다가 다시 태어납니다.
힌두교에서는 신들의 전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하바르따는 천신들과 아수라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아수라는 천신들 밑에 있는 아수라들인데 하지만 대승에서는 이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웨빠찟따 아수라가 경전에 나오는데 이들은 인간세상과 자주 접하는 존재들입니다.
다음은 인간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생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과 불행을 함께 경험합니다. 그래서 인간만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어 해탈의 자유도 얻을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생명에 비해 특권과 같습니다. 이는 그만한 공덕을 쌓은 과보가 있어서 받는 혜택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직 인간에게서만 출현하십니다. 이런 인간의 마음은 31개의 존재의 세계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계를 지킨 과보로 태어납니다. 인간도 수명이 정해지지 않고 과보대로 살다가 다시 태어나거나 유일하게 윤회가 끝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욕계천상은 여섯 개가 있는데 사대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들 세계는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고 천상의 단계마다 수명도 다릅니다. 욕계천상은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고 감각적 욕망을 가진 천상입니다. 욕계천상 중에서 타화자재천이 가장 높은 단계의 천상입니다. 이들은 화생으로 태어나고 무리지어서 삽니다. 욕계천신이 부처님께 와서 내가 누구의 자식이라고 말할 때의 부모는 무리의 좌장을 의미합니다.
욕계천상에 태어나는 형성조건은 믿음과 보시와 지계입니다. 욕계천신들은 육체적 형태가 인간보다 미묘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인간의 평범한 눈으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들 천신도 자시 세계에 따라 수명이 있는데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긴 시간입니다. 이처럼 욕계천신도 수명이 다하면 죽어서 다음 과보를 받아 태어납니다. 이들의 체질, 거주지, 음식들은 인간보다 월등히 낫지만, 일반적으로 지혜는 인간보다 뛰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과 천신들의 대화에서 보면 과거에 수행을 했던 천신들은 일정수준 이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곳의 천신들은 15세에서 16세 정도의 젊음은 남녀로 태어나 살면서 덧없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고 삽니다.
욕계천상에서 가장 낮은 천상은 사대왕천인데 네 명의 천왕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사천왕천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계는 천계의 수호신들이 부하들과 함께 머무는 곳입니다. 하지만 사천왕천의 과보를 받았지만 이 천상에 태어나는 과보가 부족한 4가지 종류의 천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계의 숲이나 바위에 머물러 사는데 첫 번째가 뻬따(Peta)입니다. 이때의 뻬따(Peta)는 사악도의 아귀를 말하는 뻬따가 아닌 천신입니다. 두 번째가 삐사짜(Pisāca)인데 악마, 마귀, 유령, 흡혈귀라고도 합니다. 세 번째가 꿈반다((kumbhaṇḍa)인데 항아리 같은 고환을 가진 야차입니다.
네 번째가 약카(Yakkha)인데 악귀, 귀신, 야차로 불립니다. 이때의 야차는 서양에서 말하는 악마와는 다릅니다. 천신의 과보를 받았지만 공덕이 부족해서 인간계에 사는 야차는 인간의 정신적 발전에 매우 관심이 많아서 인간과 교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상 4가지 종류의 존재는 천신이지만 인간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경전에서 보면 이들도 과보가 다하는 때가 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부처님께서만 이들에게 가르침을 펴서 나무천신이 되게 하거나 도과를 성취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는 도과를 성취할 수 없지만 부처님을 만나서 법문을 듣는 경우에는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보의 조건이 성숙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때가 무르익은 약카(Yakkha)에게 찾아가 기회를 줍니다.
욕계천상 두 번째 세계는 삼십삼천인데 도리천이라고도 합니다. 33명의 천신이 지배하는 세계라서 삼십삼천이라고 합니다. 이 천상은 제석천왕이 지배합니다. 이 천상은 33명의 이타적인 자원자들이 자비행을 해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천상의 천신들에게 3개월간 아비담마를 가르치신 곳이 바로 도리천입니다. 욕계천상의 세 번째는 야마천입니다. 야마천은 고통을 제거한 존재들이 모여 사는 천상입니다.
네 번째는 도솔천입니다. 도솔천은 행복한 거주자들이 모여 사는 천상입니다. 즐거움의 세계며 깨달음을 얻는데 필요한 조건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이 천신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인간세계로 태어날 기회가 올 때까지 이 세계에서 거주합니다. 미래에 출현하실 미륵불도 여기에 거주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출산하신 마야부인도 세상을 떠난 후에 이곳 천신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곳의 천신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이따금씩 이 세계에서 삼십삼천으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도솔천은 주로 불교도들이 거주하는 천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비추어보면 부처님의 출현은 인간계뿐이 아니고 전 우주적인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느 특정한 종교단체의 교주가 아니고 모든 생명의 괴로움을 해결해 주시는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다만 공덕을 쌓은 인연이 있어야 가르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화락천입니다. 이 천상에 태어나면 자기가 보는 대상을 변화시켜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부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가 타화자재천입니다. 이곳은 남의 즐거움을 자신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천신들의 세계입니다. 타화자제천 천신은 부처님이 수행을 하실 때 유혹을 한 천신이기도 하며 죽음을 의미하는 마라(mara)도 타화자재천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상이 여섯 개의 욕계천상입니다.
다음으로 색계가 있는데 이곳은 선정수행을 한 과보로 태어납니다. 이곳 천신들은 감각적 욕망을 포기해서 얻은 선정의 기쁨을 누리고 삽니다. 그래서 욕계천신과 달리 혼자서 삽니다. 이들 색계와 무색계를 범천이라고 하는데 인도의 성직자 계급인 브라흐만은 이 세계가 자기들의 세계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색계는 사선정의 세계인데 선정수행을 해서 받은 과보로 가는 천상입니다. 자기가 선정수행을 한 단계만큼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색계 초선정의 세계는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 3개가 있습니다. 초선정은 감정의 동요가 사라진 상태며 이곳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다른 몸의 조건을 가지고 삽니다. 이들 세 개의 세계 중에서 가장 높은 천상이 대범천입니다. 대범천에 거주하는 존재들은 그들의 정신적 발전의 타고난 공덕 때문에 다른 존재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며 수명도 깁니다.
색계 두 번째 천상은 색계 이선정의 세계입니다. 이선정의 세계는 기쁨이 일어나 마음이 집중이 됩니다. 이선정은 3개의 천상이 있는데 소광천은 빛이 조금 있습니다. 무량광천은 무한한 빚이 있는 세계입니다. 광음천은 빛을 발하는 범천들의 세계입니다.
색계 세 번째 천상은 색계 삼선정의 세계입니다. 색계 삼선정의 세계는 마음의 통일과 선정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물론 이때의 지혜는 통찰지혜가 아니고 삼선정의 지혜입니다. 삼선정은 3개의 천상이 있는데 미세한 영기(靈氣)를 가진 범천들의 세계인 소정천이 있습니다, 무한한 영기를 가진 범천들의 세계인 무량정천이 있습니다. 한결같은 영기를 가진 범천들의 세계인 변경천이 있습니다.
색계 네 번째의 천상은 색계 사선정의 세계입니다. 색계 사선정의 세계는 선정의 지혜로 헤아림도 소멸하여 단지 청정한 마음만 있습니다. 사선정은 3개의 천상이 있는데 이 중의 하나인 정거천은 다시 5개의 천상으로 나뉩니다. 처음에 광대한 과보가 있는 범천들의 세게인 광과천이 있습니다. 다음에 또는 무상천(無想天)이라고도 하는 천상으로 상상하는 마음이 없는 범천들의 세게인 무운천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거천이 있는데 이는 아나함이 되어 윤회를 끝내기 위해서 사는 범천들의 세계입니다. 정거천은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이 있습니다. 각각의 과보에 따라 이곳에 태어나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납니다. 이곳에서도 단계별 세계의 수명이 다릅니다.
이상의 색계천상은 선정수행을 닦았거나 무아경을 닦은 자만이 갈 수 있는 정신세계입니다. 자기가 닦은 선정수행의 상태에 따라 각각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특히 무상천의 천신은 의식이 없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오로지 물질적인 흐름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때의 마음은 선정의 힘이 지속되는 동안 일시적으로 정체됩니다. 보통의 경우는 정신과 물질이 분리될 수 없지만 그러나 명상을 통해서 선정의 힘이 있을 때는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5개의 정거천은 반드시 아나함만 태어나는 천상입니다. 그러나 아나함이 없을 때는 정거천에 천신이 없어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나는데 천신마다 다른 수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해서 정거천에 태어나자마자 아라한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명이 다하기 전에 중간에 아라한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명이 다해서 아라한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나함은 이미 아라한의 도과에 가까이 간 천신이라서 이러한 수명의 차이는 사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단지 자기 과보에 따른 결과만 있습니다.
아나함이 정거천에 태어나면 이 천신을 안따라빠리닙바이(Antarāparinibbai)라고 부릅니다. 이때 안따라(Antarā)는 ‘사이’라는 뜻이고 빠리닙바이(parinibbai)는 ‘번뇌가 다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직 최종적 열반에 이르지 못한 상태의 존재라서 ‘사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안따라빠리닙바이(Antarāparinibbai)라는 말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상좌부에서는 중유(中有)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중유라는 말은 안따라 바와(Antar bhava)라고 하거나 간답바(gandabba)라고 하는데 이 말은 구사론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나 아비담에서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경전에서 간답바(gandabba)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38개의 생명으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죽음을 앞둔 존재의 과보의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상좌부 입장은 ‘만약 간답바(gandabba)가 있었다면 부처님께서 왜 말씀하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상좌불교 경전에서는 ‘생명으로서의 간답바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무조건 49일 동안 머물다가 다음 생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상좌부에서 쓰여 진 아비담마가 설일체유부를 통해서 새로 만들어진 구사론의 영향 때문입니다.
상좌불교인 테라와다(Theravāda)에서는 원숭이에 비유합니다. 원숭이가 이 나무 가지를 잡고 있다가 저 나무 가지를 잡을 때, 이 나무 가지를 놓은 순간 다음 나무 가지를 잡는 것처럼 우리 존재도 마찬가지로 이번 생을 마치면 38개의 생명 중에 어떤 생명으로 태어나서 나무 가지를 잡듯이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순간은 매우 빠르게 결정됩니다. 이렇게 빠르게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하는데 이를 빠띠산디 윈냐나(patisandhi viññāṇa)라고 합니다. 죽음 다음에 일어나는 죽는 순간의 의식은 매우 빠르게 바로 정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마음은 한 순간에 17개가 있는데 이 중에 마지막 9번째 마음부터 15번째 마음까지 7개의 마음을 속행(速行)이라고 합니다. 이 속행을 자와나(javana)라고 합니다. 이는 7개의 마음이 빠르게 다음 마음으로 연결해서 속행이라고 합니다. 이 자와나(javana)나는 생존을 지속시키려는 본능적인 애욕이 있어서 빠르게 다음 존재를 만들고 싶어 해서 잠시도 쉴 수가 없이 속행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안따라빠리닙바이(Antarāparinibbai)는 열반을 증득한 어떤 존재도 아니고 열반을 증득하지 않은 어떤 존재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정거천의 천신들은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겁 동안 살기 때문에 깟사빠 부처님과 그 전 부처님 시대에 계셨던 아나함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정거천에는 지금도 안따라빠리닙바이(Antarāparinibbai)라는 아나함이 계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생명이 사는 31개의 존재의 세계에서 마지막은 무색계입니다. 무색계는 4개의 다른 세계가 있는데 이 천상의 생명은 물질이 없고 정신만 있는 세계입니다. 무색계는 무색계 선정수행을 해서 이르는 천상입니다. 무색계로 색계처럼 남녀의 성의 구별이 없습니다.
무색계에 대해 깟사빠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공중에 떠 있는 철봉이 지탱하는 힘이 있는 동안에는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형상이 없는 존재들도 강력한 마음의 힘에 의해서 나타나 그 힘이 다할 때까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의 일시적 분리이며 보통은 함께 존재한다.”
무색계는 4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공무변처로 무한한 공간의 세계입니다. 끝없는 허공을 대상으로 봅니다.
두 번째, 식무변처로 무한한 의식의 세계입니다. 허공을 보는 마음을 대상으로 봅니다.
세 번째, 무소유처로 무(無)의 세계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마음이 다 없는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상으로 삼아서 봅니다.
네 번째, 비상비비상처로 지각도 지각 아님도 아닌 세계입니다.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봅니다. 이때의 마음은 아주 미세해서 여기에 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상 31개의 존재의 세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실 때 어떠한 우주적인 이론의 설명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러한 세계가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본질은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세계들의 존재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추론적인 내용이지만 이것은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옳다고 인정할 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아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그만이지만 육신통을 가지고 모르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은 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수많은 세월동안 수 없는 윤회를 하면서 나도 이러한 세계에 존재했거나 앞으로 이러한 세계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면 하나의 우주적 세계관이 형성될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10가지 족쇄인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낮은 단계의 족쇄인 오하분결을 발이 묶인 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를 잡기 위해 올가미를 설치하고 새가 올가미에 걸리면 줄로 발을 묶어 날라 가지 못하게 합니다. 새를 잡은 사람은 새를 팔기 위해 산채로 잡으려고 합니다. 이때 올가미에 발이 묶인 새가 아무리 높이 올라가려도 해도 밑에서 발에 묶인 줄을 잡아당기면 결국 밑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하분결이란 5가지를 집착하면 욕계로 다시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높은 단계의 족쇄인 오상분결은 나뭇가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로 향하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기다 놓으면 나뭇가지가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이처럼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은 두 가지가 모두 열반으로 가는 길을 막아서 족쇄라고 합니다. 이런 족쇄는 아라한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 길을 막는 장애입니다. 줄을 잡아당겨서 새를 허공에서 내려오게 하고, 나뭇가지를 잡아당겨도 나뭇가지는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이러한 족쇄를 끊는 것을 친다(chinda)라고 하고 버리는 것을 자하나(jahana)라고 합니다.
이상은 경전의 본문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리고’입니다. 이때 다섯 가지를 끊는 것은 다섯 가지 족쇄로 오하분결이고, 다섯 가지를 버린다는 것은 역시 다섯 가지 족쇄로 오상분결입니다. 그래서 모두 열 가지입니다. 여기서 친데(chinde)라는 뜻의 ‘끊는다’와 자헤(jahe)라는 뜻의 ‘버리다’는 같은 뜻입니다.
이렇게 끊고 버리기 위해서 ‘다섯 가지를 다시 닦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서서 밝힌 열 가지 족쇄인 오하분결을 끊고 오상분결을 버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것을 더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빤짜 쭛따리 바와예(pañca cuttari bhāvaye)라고 하는데 이는 ‘다섯 가지를 닦고 계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와예(bhāvaye)는 ‘닦고 계발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다섯 가지를 닦고 계발해야 한다는 빤짜 쭛따리 바와예(pañca cuttari bhāvaye)는 다섯 가지 기능을 말하는 빤짜 인드리야(pañca indriya)입니다. 그래서 더 닦아야 할 특별한 것이 바로 오근(五根)으로 다섯 가지 기능입니다. 빤짜 인드리야(pañca indriya)라고 할 때 인드리야(indriya)는 감각기능, 근기, 바탕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질이 있다고 말할 때의 자질이 바로 근기입니다.
이처럼 ‘다섯 가지를 다시 닦아야 한다’는 것은 오근(五根)을 닦는 것입니다. 오근을 닦으려면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알아차림의 기능, 집중의 기능, 통찰지혜의 기능이 필요합니다. 이상 다섯 가지 기능은 수행을 하는데 기본이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처음에 믿음이 없으면 수행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이때의 믿음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며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확신에 찬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정진인데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믿음이 있어야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력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믿음이 이끌어야 합니다. 노력은 항상 어느 때나 필요한 것이지만 적절해야 합니다. 지나쳐서도 안 되고 부족해서도 안 됩니다.
이처럼 믿음이 앞에서 이끌고 적절한 노력을 하면 다음에 알아차림의 기능이 강화됩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행위입니다. 어떤 선입관 없이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이며 언제나 가장 필요한 행위입니다. 이 말은 그만큼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알아차림은 처음에는 계속해서 ‘두는 알아차림’을 해야 하며 어느 정도 힘이 생기면 다음에는 알아차리려고 하지 않아도 알아차려지는 ‘있는 알아차림’이 생깁니다.
노력과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다음 단계로 집중력이 생깁니다. 이때의 집중을 삼매(三昧), 또는 정(定)라고도 합니다. 팔정도의 계정혜(戒定慧)에서 정(定)이 바로 집중입니다. 이러한 집중을 사마디(samādhi)라고 하는데 마음이 대상에 고요하게 머무는 상태입니다. 집중은 선정수행의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이 있고 위빠사나 수행의 찰나집중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찰나집중이 없으면 다음 단계인 지혜가 나지 않습니다. 이때의 찰나가 빠르게 변하는 무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찰나집중은 고요함보다는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독특한 집중입니다. 이러한 찰나집중이 성숙되어야 비로소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이와 같이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은 수행의 3대요소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오근 중에서 직접 필요한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 3가지입니다. 이 3가지는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가 많아지면 수행의 균형이 깨집니다. 만약 집중이 많아지고 나머지가 부족해지면 졸음에 떨어집니다. 노력이 많으면 들뜹니다. 오직 알아차림 하나만은 유일하게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이것이 깨어서 대상을 지켜본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근 중에서 알아차림이 모든 것의 균형을 맞추는 조정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조화를 이루면 다음 단계로 지혜가 납니다. 이때의 지혜가 꿰뚫어서 아는 통찰지혜입니다. 통찰지혜를 무상, 고, 무아라고 하며 존재의 성품이라서 가장 값진 진리라서 법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통찰지혜가 열반에 이르게 하여 도과를 성취합니다. 이렇게 생긴 지혜가 다시 앞에서 이끈 믿음과 결합할 때 수행이 완성됩니다. 이렇게 오근이 조화를 이루면 오근이 다시 오력이 되어서 수행을 이끕니다. 이처럼 믿음과 지혜가 앞에서 이끌 때가 정견과 정사유가 앞에서 이끄는 팔정도의 구조와 같습니다. 이상이 ‘다섯 가지를 다시 닦아야 한다’라고 했을 때의 오근입니다.
‘맛지마 니까야’에서 다섯 가지 기능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열 분이 계신다면 열 분이 모두 기능이 다릅니다. 어떤 분은 5가지 중에 5가지를 가졌고, 어떤 분은 3개를 가졌고, 어떤 분은 2개를 가졌고, 어떤 분은 1개를 가졌습니다. 열반을 얻고 싶은 사람은 이 5가지를 저울에 놓고 달았을 때 모두 똑같아야 합니다. 이처럼 다섯 가지 기능이 모두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잘 알고 노력과 집중의 균형, 믿음과 지혜의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영역을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노력과 집중에서도 알아차림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하고, 믿음과 지혜에서도 알아차림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스리랑카에는 나이가 드신 신도들께서 부처님께 꽃을 많이 올립니다. 제단에 불상이 많이 있는데 불단에 올리지 않고 꼭 부처님 손에 꽃을 올립니다. 이것을 보고 스님들이 믿음은 좋은데 지혜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불단에 꽃을 올리는 것이나 부처님의 손에 꽃을 올리는 것이 하등에 다를 것은 없겠지만 애써 부처님 손에 꽃을 올리려는 것은 믿음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믿음은 잘못하면 맹목적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지혜가 있어야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10가지 족쇄를 끊고 버리기 위해 5가지 기능을 계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는 경전 본문 중에 ‘다섯 가지 속박을 모두 벗어나야’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속박을 빤짜 상가(pañca saṅga)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속박으로 탐욕의 속박, 성냄의 속박, 어리석음의 속박, 자만의 속박, 견해의 속박입니다. 이 다섯 가지 속박은 경전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논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모든 구도자는 이 속박에서 벗어나야 해탈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음 경전 본문 중에 마지막 문장은 ‘폭류 건넌 비구라고 한다’입니다. ‘폭류를 건넘’이라는 말은 오가띤나(oghatiṇṇa)라고 합니다. 웃짜띠띠vuccatīti)는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속박에서 벗어나야 폭류를 건넌 비구라고 한다.’입니다.
이때 폭류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의 폭류, 존재의 폭류, 견해의 폭류, 무명의 폭류입니다. 네 가지 폭류를 건넜다는 것은 감각적 욕망과 존재에 대한 집착과 나라고 하는 견해와 사성제를 모르고 연기를 모르는 무명이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소멸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수행으로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이라는 말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되었다’는 뜻입니다. 탐진치는 세 가지 독으로 나를 윤회하게 합니다. 열반은 이러한 삼독을 지혜로 소멸시킵니다.
이러한 소멸도 단계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 열반에 이르면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납니다. 다시 다음 단계의 수행을 하면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한 번 더 인간으로 태어나서 아라한이 됩니다. 다시 다음 단계의 수행을 하면 아나함이 되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색계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그곳에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납니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이 되면 대장정의 막을 내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해탈의 완전한 자유를 얻습니다.
이상이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리고, 다섯 가지를 다시 닦아야 한다. 다섯 가지 속박을 모두 벗어나야 폭류 건넌 비구라고 한다.’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10가지 속박인 오하분결, 오상분결과 4가지 폭류에서 벗어나야 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10가지 족쇄는 끊고 버려서 벗어나는 것이고, 4가지 폭류는 거슬러 올라가서 극복하고, 5가지 기능은 닦아야 하는 것을 천신에게 설법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신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뒤에 사라졌습니다.
이상이 경전의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본문에 나오는 상가(saṅga)는 속박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발음의 단어가 있는데 이것이 상가(saṅgha)입니다. 이때의 상가(saṅgha)는 ‘승가(僧伽)’, ‘승단(僧團)’입니다. 세 가지 보배라는 뜻의 삼보를 말하는 불법승(佛法僧)에서 승(僧)이 바로 승단입니다. 상가(saṅgha)는 ‘많다’, ‘묶여 있다’는 뜻이 있는데 스리랑카에 불교사상이 전해진 과정을 살펴보면, 스리랑카에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가 불법을 가지고 왔을 때 왕이 마힌다 장로에게 물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사상을 보게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리랑카에서 누군가 출가를 하면 불법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아들이 스리랑카에서 첫 번째로 출가를 했습니다.
이때 마힌다 장로가 왕의 아들을 출가를 시켰고, 그 다음에 왕의 아들이 스리랑카 스님들을 출가 시켰습니다. 이렇게 내려온 전통으로 인해서 제가 지금 스님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저에게는 은사 스님이 계시고 저의 은사 스님은 또 은사 스님이 계십니다. 마힌다 장로는 3번째 결집을 하신 목깔리 뿟다 장로로부터 계를 받았고, 목깔리 뿟다는 우빨리 존자의 전통에서 나온 스님께 계를 받았고, 우빨리 존자는 아냔 꼰단냐 존자께 계를 받았으며 꼰단냐 존자는 부처님께 계를 받았다. 이렇게 상좌부 계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승가라고 하는 상가(saṅgha)는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상가에서는 가사를 내 맘대로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입멸 후 5000년이 지나면 불교가 끝난다고 말하는데 불교가 끝나는 게 아니고 승가전통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어갈 수 있습니다. 5000년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주석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무엇이나 영원한 것은 없고 때가 되면 사라지기 때문에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할 내용입니다.
스리랑카를 영국이 150년 동안 통치하면서 당시 스님들이 포살과 안거를 하지 못했습니다. 포살과 안거를 못했으니 스님들은 계셨지만 사실은 비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미얀마와 태국에서 다시 비구계를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 불교가 처음에 미얀마로 갈 때는 가르침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이때 미얀마에 청정도론과 주석서와 경전을 가지고 갔습니다.
스리랑카에는 명상센터가 마하시 전통과 빤디따라마 전통이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전통적인 수행방식은 사념처경 중심의 수행을 하고 있고, 사마타는 까시나 수행을 많이 하십니다. 또 상가(saṅgha)는 많다는 뜻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안거할 때는 한 스님한테 공양을 올려도 많은 스님들한테 공양올린 것과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4명 이상이 모여야 승가입니다. 인도에서는 2명이상 모이면 많다고 합니다.
매월 보름날에 참회의식인 포살을 하려면 혼자는 안 됩니다. 참회하려면 반드시 누군가 계셔야 합니다. 승원에서 안거할 때 옛날에는 스님들이 많이 계실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공양 올릴 때 스님 한 분만 있으면 공양 올리시는 분이 기분 나빠합니다. 다른 사람이 올릴 때는 스님들이 많이 계시고 내가 공양 올릴 때는 한 분만 계시는구나하고 서운해 합니다. 그러나 안거 때는 한 분만 계셔도 공양을 올리면 승가 전체에 올린 것과 같습니다.
현재 상좌부 비구니계는 없습니다. 비구니는 스리랑카에 7, 8세기까지는 많이 있었는데 이후 오랜 가뭄과 전쟁으로 비구니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없어졌습니다. 사미, 사미니는 가뭄과 전쟁 때도 생활할 수 있으나 비구나 비구니는 도와줘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에서 계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미나 사미니에게는 공양을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들은 퇴속했다가 다시 계를 받아도 됩니다. 그러나 비구와 비구니는 한 번 옷을 벗고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는 가족이 있는 집에 가서 1주일 머물 수 있도록 상가에서 허락하는데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비구니가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아 비구니 상가가 없어졌습니다. 비구니 한 분이라도 스리랑카에 남아 있었으면 계맥을 이을 수 있었는데 계를 지키고 지낼 수 없었기에 사미니만 남게 되었습니다. 비구는 미얀마와 태국에 있는 상가에서 비구계를 받아 와서 계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구니는 미얀마와 태국에도 없기 때문에 계맥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비구니계를 줄 수 있는 계단도 사라졌습니다.
지금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 상좌부 스님들이 비구니계를 주는 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중인데 미얀마와 태국은 안 된다고 하고 있고, 스리랑카는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입장이며, 서양에서는 해주자고 합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종정스님 3분이 인정하면 비구니계를 줄 수 있지만 미얀마, 태국, 그리고 캄보디아와의 관계가 있어서 공식적으로는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의 문제입니다.
스리랑카는 10계를 받은 사미니가 있습니다. 8계를 받는 미얀마의 실라신과는 다릅니다. 스리랑카에는 비구니계를 인도와 서양에서 받고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스리랑카에 계신 비구니들과 뜻을 같이하는 비구 스님들이 비구니계를 주고 있습니다. 비구니계를 줄 때는 비구 10명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스리랑카 정부와 원로스님들이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미니는 국가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공덕을 지으려면 비구니가 있어야 합니다. 사미. 사미니는 제자를 만들 수 없고 법을 설할 수가 없으며 10계를 보름마다 한 번씩 받아야 합니다. 스리랑카에는 지금 사미와 비구가 같이 앉아서 공양할 수 있는데 사미는 같은자리의 끝에 앉습니다. 하지만 미얀마와 태국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공양하지 않습니다.
< 질문과 답변 >
(질문 1) 마라(māra)가 죽음이라고 하는데 의인화 된 죽음하고 그냥 죽음하고 차이가 있나요?
(답변 1) 마라(māra)는 죽음의 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라(māra)는 죽음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다른 몇 가지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오온과 타화자재천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데와따 상윳따의 마라 상윳따에서 나옵니다. 죽음의 신이냐? 존재들이 신이냐? 하는 논란이 있습니다. 불교에는 절대적인 신은 없습니다. 대승에서는 지장보살처럼 죽음과 관련된 신으로 생각합니다. 인도는 나무신이나 전문적인 신이 있습니다. 염라대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내려가면 죄를 결정하기 전에 당신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아프지 않았느냐? 생로병사를 보지 못했는가? 늙어가는 것 못 봤는가? 병을 가지는 것 못 봤느냐? 너한테 착하게 살라고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 너는 그것을 다 무시하고 살았으니 벌을 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코로나도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무상하다, 영원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줬는데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압니다. 마라(māra)는 사실 죽음 그 자체인데 의인화해서 얘기해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사회는 신에 대한 얘기가 아니면 아예 얘기가 안 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는 부처님께서도 죽음을 의인화해서 마라 빠삐만이라고 호칭을 붙여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죽음의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대화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어떤 사람과 얘기했는지를 잘 살펴봐야합니다. 색계 천신들에게 말할 때는 짧게 핵심적인 말만 하십니다. 색계천신들은 선정수행을 해서 어느 정도 선정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2) 공덕을 쌓은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답변 2) 공덕을 뿐냐(puñña)라고 하는데 ‘사라져 버림경’에서 천신은 죽음을 직시하면서 공덕을 짓는 뿐냐(puñña)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공덕이라는 뜻의 뿐냐(puñña)라는 말은 법구경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서 웃음으로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공덕이라고 했습니다. 악행은 내가 되돌아볼 때 우울하고 슬프고 눈물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것은 악행입니다. 공덕은 힌두문화에도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신한테 하는 모든 일이 뿐냐(puñña)입니다.
인도에서 힌두교의 뿌자는 동물의 목을 잘라 제사를 지내는데 이것도 뿐냐(puñña)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살아있는 소를 잘라서 피가 있는 생고기를 먹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것을 즐거움으로 행복으로 받아들입니다. 부처님은 살생하는 것은 공덕이 아니라고 잘라버리고 오계와 연결하여 뿐냐(puñña)는 10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10바라밀입니다.
숫따(sutta)에서 보면 ‘전생에 공덕을 가지는 것이 축복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것을 인과응보와 연기적 방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뿐냐(puñña)입니다. 공덕을 지을 수 있는 3가지 방법은 다나(dāna), 실라(sīla), 바와나(bhāvanā)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시, 지계,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공덕을 많이 지으면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공덕이 없으면 행복해 질 수 없고, 늘 불안한 일이 생기고, 아프고 질병을 가지는 것도 공덕의 차이라고 합니다. 선한 마음은 관용, 자애, 지혜인데 이것을 실천하는 행위가 바로 보시, 지계, 수행입니다.
6개의 욕계 천상의 단계도 천신이 쌓은 공덕의 차이입니다. 천신들도 차이가 있는데 어떤 천신들은 빤짝빤짝 빛나고, 어떤 천신들은 광채가 나지 않고 아무 빛도 없습니다. 이런 차이도 공덕의 차이입니다. 법회를 할 때나 공덕을 지을 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한다면 도반들이 많아집니다. 혼자 공덕을 지은 사람은 외로움이 많다고 합니다. 함께 공덕을 지으면 인복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천신들도 마찬가지고 옆에 많은 천신들과 같이 다니는 것도 공덕입니다. 이런 공덕은 아귀, 아수라, 지옥까지 연결됩니다. 그래서 행복은 공덕으로 인해서 온다고 합니다.
열반에 이르지 못하면 그나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보험은 공덕입니다. 열반으로 가는 길은 꾸살라(kusala)입니다. 80명의 아라한은 공덕으로 받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공덕이 으뜸가는 80명의 아라한이 있었습니다. 신통력 제일, 지혜 제일 등으로 구분해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80분이 계셨는데 그 중에 시왈리(Sīvalī) 존자는 항상 공양을 받는 제자 중 으뜸가는 제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먼 길을 가실 때면 시왈리 존자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이 스님의 공덕은 사막에 가서도 공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복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공덕이 없어서 공양을 잘 받지 못하는 로사까띳사 존자도 있었습니다.
로사까띳사 스님은 개처럼 길에서 주워 먹고 살고 있었는데 사리뿟따 존자가 데리고 와서 출가를 시켰습니다. 스님은 항상 허기를 다 채울 공양을 받지 못하고 조금씩밖에 공양을 못 받았다고 합니다. 이 스님이 병이 나서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 사리뿟따 존자는 ‘돌아가시기 전에 공양을 배불리 올려야겠다. 이것은 나만할 수 있는 일이다’고 생각하고 신도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신도는 다른 생각하고 가다가 다른 길로 들어서면서 공양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가 직접 발우에 공양을 준비해 신통으로 로사까 존자에게 보냈는데 음식이 변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되는 공덕이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공덕도 있습니다.
시왈리(Sīvalī) 존자는 공덕이 많은 님 가운데 제일이라고 부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존자가 항상 공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가뭄이 심할 때 개가 새끼를 낳는데 젖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시고 자신이 먹은 것을 토해서 준 공덕으로 세세생생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로사까 존자는 아라한께 공양 올리는 것을 방해한 악업으로 공양을 잘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것도 모두 공덕 덕분입니다. 선(善)하다는 뜻의 꾸살라(kusala)는 열반으로 연결됩니다. 꾸살라(kusala)는 선하다는 뜻과 함께 능숙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자체가 꾸살라(kusala)이고 열반에 필요한 것이 바로 꾸살라(kusala)입니다.
우다나(Udāna)경에 보면 배를 타면서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번 바히야(bahiya)라는 상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배가 부서져서 물에 휩쓸려 어느 섬에 도착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벌거벗고 있어서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다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이 나뭇잎 옷을 입고 다니니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그에게 참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히야는 자기가 아라한인줄 착각하고 지냈습니다. 이 사람 하는 짓이 너무 안타까워 옛 친구인 천신이 하루는 “너는 아라한이 아니다. 아라한이 되려면 저기 사왓띠에 가면 부처님이 계신다. 그러니 바보짓 그만하고 거기 가 보거라”라고 했습니다.
바히야(bahiya)는 이 말을 듣고 빨리 가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고 몇 개월을 걸어서 부처님 계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마침 부처님이 탁발을 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부처님께서 탁발하시는데 “저한테 법을 설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지금은 탁발하고 있으니 안 된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바히야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서 계속 3번을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3번째 청을 듣고 법을 설하셨는데 바로 이 경이 유명한 바히야 경(Bāhiya)경입니다.
바히야 경(Bāhiya,Ud1:10)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히야(Bāhiya)는 이 경을 듣고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바히야(Bāhiya)는 빠르게 최상을 얻은 자 중에 으뜸이라고 부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바히야(Bāhiya)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나도 바히야(Bāhiya)와 똑같이 들었는데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면 아직 공덕이 부족하고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이 공덕과 수행입니다.
따스마띠하 떼 바히야 에왕 식키땁방
Tasmātiha te, bāhiya evaṃ sikkhitabbaṃ-
딧테 딧타맛땅 바위사띠 수떼 수따마땅 바위사띠,
Diṭṭhe diṭṭhamattam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무떼 무따마땅 마위사띠, 윈냐떼 윈냐따맛땅 마위사띠띠.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ī ti.
따스마띠하 떼 바히야 에왕 식키땁방
Evañhi te, bāhiya, sikkhitabbaṃ.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볼 때는 단지 봄만 있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 있고,
인식할 때는 단지 인식만 있고, 알 때는 단지 앎만 있어야 한다.
바히야여, 참으로 그대는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이 법문을 듣고 아라한이 된 바히야(Bāhiya)는 가사를 구하러 거리로 나갔습니다. 바히야(Bāhiya)는 비구계를 받고 아라한이 되는 공덕은 있었으나 가사를 받을 공덕은 없었던 것입니다. 가사를 찾아다니다가 소가 달려들어서 소한테 받쳐 죽었습니다. 불교에 스님들께 가사를 올리는 전통이 있는데 가사를 올리는 공덕은 출가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큰 복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모든 윤회는 공덕과 연결되어 있어서 지금 겪고 있는 행복과 불행은 선업의 공덕과 악업의 공덕의 힘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덕인 뿐냐(puñña)를 많이 닦아야 합니다. 모든 구도자는 항상 뿐냐(puñña)로 시작하는 공덕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 3) 잘못된 견해라고 하는 유신견(有身見)을 사까야 딧띠(sakkāya diṭṭhi)라고 할 때 유아(有我)도 포함됩니까?
(답변 3) 사까야(sakkāya)는 유신(有身)인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가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몸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신견이라고 하면 사까야 딧띠(sakkāya diṭṭhi)가 됩니다. 그러면 몸이 있다는 것에서 의미가 더 보태져 ‘나의 몸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유신(有身)에 딧띠( diṭṭhi)라고 하는 견(見)이 붙으면 나의 몸이라는 견해가 되어서 이것이 잘못된 견해가 됩니다. 유아(有我)라고 할 때는 아(我)가 나를 말하는 것이므로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유신견이나 마찬가지 견해입니다. 내가 있다고 했을 때는 자아(自我)고 내가 아니라고 했을 때는 무아(無我)입니다. 마음은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지혜가 나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무아는 깨달음을 얻는데 필요한 최종적 지혜라서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유신견, 유심견, 유아견 이런 단어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 보이는 것이 몸이기 때문에 몸을 중요하게 여겨서 유신견이 상징적인 언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알기 어려운 마음을 말하기보다 우선 눈에 보여서 이해하기 쉬운 몸을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유신견입니다. 어느 분이 히말라야 산 아래서 영하 10도인데도 자기 악행을 닦아내기 위해서 차가운 물속에 계속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신 부처님께서는 “저렇게 해서 죄가 없어지면 저기 물속에 있는 물고기는 죄가 하나도 없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아트만(Atman)을 해석할 때 나, 나의 것, 자아(自我)라고 합니다. 아트만(Atman)은 호흡, 생명의 근원, 영혼, 자아라는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이런 뜻이 모두 내가 있다는 것에 기초한 내용입니다. 영혼이라고 할 때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신을 믿은 종교에서 가능한 말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 지혜수행에서는 무상, 고, 무아라는 실재하는 법을 알아야 해서 자아라는 말 대신에 무아를 사용합니다.
(질문 4) 수다원도 색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답변 4) 수다원은 사악처를 제외한 삼계 어디에서나 태어날 수 있습니다.
(질문 5) 부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 출현하시기 전에 어디에 계시다 태어났습니까?
(답변 5) 부처님으로 태어나시기 전에 보살들은 도솔천에 계십니다. 다른 욕계천상은 경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욕계는 원래 욕망이 있는 곳이라 욕심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천신들도 누가 더 빤짝 빤짝 빛나는가를 경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솔천에서는 이런 경쟁이 없습니다. 도솔천을 뚜시따(tusita)라고 하는데 이는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족을 아는 천신들이라서 지족천(知足天)이라고도 합니다. 만족하기 때문에 도솔천에 있는 천신들은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도솔천은 많은 수행자들이 계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님이신 마야부인도 계시고, 불교를 믿었던 천신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욕계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종교와 상관이 없이 선한 일을 한 결과로 태어납니다.
10가지 족쇄(dasa saṃyojana) | |||
1 |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 (5하 분결, orambhāgiya -saṃyojana) | 유신견 (sakkaya-diṭṭhi) | 나와 나의 것이 있다는 견해, 중생을 중생이게끔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로, 고정불변하는 자아 혹은 실체가 있다고 국집하는 견해이다. |
2 | 계금취 (sīla-bbata- parāmāsa) | 계율과 의례의식에 집착 형식적 계율과 의례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 | |
3 | 의심 (vicikicchā) | 불.법.승.계율.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것 | |
4 | 감각적 욕망 (kama-rāga) |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 |
5 | 악의 (byāpāda) | 반감, 증오ㅡ 분개, 적대감 등을 뜻하며 성내는 마음 진심과 동의어이다. | |
6 |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족쇄 (오상분결, uddhabhāgiyāni saṁyojjāni) | 색계에 대한 탐욕 (rūpa-rāga) | 색계 초선부터 제4선까지로 실현되는 경지인 색계존재에 대한 욕망 |
7 | 무색계에 대한 탐욕 (arūpa-rāga) | 무색계 선 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로 실현되는 경지인 무색계존재에 대한 욕망 | |
8 | 자만 (māna) |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 하는 마음 | |
9 | 들뜸 (uddhacca) | 도거, 들뜨고 불안한 마음 | |
10 | 무명 (avijja) | 사성제를 모르는 것 |
상좌부 31천 | |||||
세상 | 영 역 | 수명 | |||
무색계 4 | 무색계 세계 | 31. 비상비비상천 30. 무소유처천 29. 식무변처천 28. 공무변처천 | 84,000 60,000 40,000 20,000 | 대겁 | |
색 계 16 | 제 5 선세계 | 정 거 천 | 27. 색구경천 26. 선견천 25. 선현천 24. 무열천 23. 무변천 | 16,000 8,000 4.000 2,000 1,000 | 대겁 |
22. 무상유정천 21. 광과천 | 500 500 | ||||
제4선세계 | 20. 변정천 19. 무량정천 18. 소정천 | 64 32 16 | 대겁 | ||
이선천 삼선천 | 17. 광음천 16. 무량광천 15. 소광천 | 8 4 2 | 대겁 | ||
초선천 | 14. 대범천 13. 범보천 12. 범중천 | 1 1/2 1/3 | 무량겁 | ||
욕 계 11 | 육욕천 | 11. 타화자재천 10. 화락천 9. 도솔천 8. 야마천 7. 삼십삼천(도리천) 6. 사대왕천 | 16,000 8,000 4,000 2,000 1,000 500 | 천상년 (천상의 하루는 인간 50년) | |
5. 인간 | 정해지지 않음 | ||||
악처 | 4. 아수라 무리 3. 아귀계 2. 축생계 1. 지옥 | 정해지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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