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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수호법 거부권 사건 이후, 세 '동지'들은 갈라지고 리더는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실의에 빠진 사람이야 집에서 손주를 돌보건 어쩌건, 남은 이들은 해야 할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그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과연 무엇이 옳은 방향일까요? 아미나트와 알렉세이가 각각 푸틴과 주가노프의 손을 잡으면서 자유파의 10%에 달하는 의원들이 독자 교섭단체를 꾸려 보수파 및 중도파와 협력전선을 펼쳤습니다. 나머지 자유파들은 구심점을 잃은 상태에서 대책회의에 나섰습니다. "인민민주주의와 인권", 소위 "자유파"는 확대의총을 열었고, 안드레이, 알렉세이, 아미나트 역시 참관인 자격으로 회의장에 들어섰습니다.
우선 당외인사이자 람스도르프 전 총리의 복심으로 여겨졌던 안드레이가 발언했습니다. 수호법은 그 이름과 달리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수호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이며,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발언이었죠. 알렉세이는 곧바로 반박했습니다. 연방을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공산당 내 협력전선을 유지하여 법의 개정에 더 힘쓰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치생명의 연장'이라는 당근을 줄 수 있다고도 회유했습니다. 한편 아미나트는 갈 곳 잃은 정보당국 실력자인 푸틴과 함께 수호법 2차개정안을 준비했습니다. 논란이 되었던 테러용의자의 즉결 군사재판 회부는 폐지, 영장 없는 구금은 7일로 단축, 테러용의자 영장실질심사는 내무부가 아닌 국토안보부 장관에게, 무차별 도청을 금지하고 정보감시의 권한을 특별정보통신국이라는 신생기관에 맡기는 등 전체적으로 권한을 분산시키고 꼭 필요한 기능에만 집중시키는 방안이었죠.
자유파에서 추가 탈회가 일어난 뒤, 상황은 명백해졌습니다. 정통파와 유라시아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 등이 모인 '제2혁명전선', 공산당, 그리고 사회당으로 삼분된 좌익세력들은 각자 연정을 맺을 세력들을 포섭하려는 경쟁에 나섰습니다. 공산당의 전략은 철저히 성과와 실리 위주로 전략을 짜며 극좌와 극우를 제외한 그 어떤 정당과도 열린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었고, 그걸 반증이라도 하듯 대중주의 성향인 '전진!', 심지어 중도우파 자유주의 성향의 '통합 연방당'과도 연정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사회당 역시 사회민주주의 '공정사회당', '전진!', 그리고 '통합연방당'에 접근했죠. 그러나 공정사회당은 명예당수인 고르바초프와 관련된 문제로 공산당의 편을, 독립적인 위치 그 자체가 당의 성장동력이던 '전진!'은 최대한 레버리지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채택해 어느 당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통합연방당은 양측의 제안을 모두 받은 뒤 각료진의 절반을 약속한 사회당의 편을 들기로 했죠.
결국 결전의 날이 밝았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개표과정을 거쳐, 최종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총 751석 중 제2혁명전선 101석, 공산당 229석, 공정사회당 11석, 사회당 144석, 전진! 128석, 통합연방당 101석, 자유민주당 37석. 결론적으로 공산당-공정당-전진당 연합도, 사회당-통합당-전진당 연합도 과반을 구성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그렇다면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극좌와 극우를 배제한 거국내각이었습니다. 사회당은 수호법의 대폭 개정을 전제조건으로 거국내각 합류 의사를 밝혔지만, 통합연방당은 거국내각 내에서도 높은 지분을 요구하는 등 잔뜩 강짜를 부리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전진!은 공산당과 사회당이 연합할 경우 야당으로 남겠다는 선언을 첨부했죠. 결국 돌고 돌아 공산-공정-사회 연정이라는 좌익 빅텐트 연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호법이 아미나트-푸틴의 2차개정안으로 합의되고, 총리직은 여론조사를 통해 사회당의 알렉산드르 레베드 전 국방위원장으로 낙점되었습니다. 전직 친옐친파 장성이자 1991년 위기 이후 공수군(VDV) 사령관과 레닌그라드 군구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위원장 직에 오른 '러시아의 나폴레옹' 레베드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외 인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총리: 알렉산드르 레베드(사회)
- 부총리 겸 외무위원장: 알렉세이 메스너(공산)
- 국방위원장: 아나톨리 크바시닌(공산)
- 산업에너지환경위원장: 아나톨리 소브차크(공정)
- 노동복지조합사무위원장: 파벨 그루지닌(사회)
- 금융경제원장관: 아미나트 나가이(공산)
- 내무부장관: 이반 실라예프(사회)
- 재무부장관: 루슬란 하스불라토프(공산)
- 교육부장관: 세르게이 스테파신(공산)
- 국토안보부장관: 세르게이 미로노프(사회)
- 특별정보통신국장관: 블라디미르 푸틴(공산)
결국 돌고 돌아, 1991년의 좌익 인민전선의 복귀라는 평이 중론이었습니다. 다만 그 때와 다른 점은, 서로가 서로를 동지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 또는 잠재적 경쟁자라고 여긴다는 것이었죠. 연방은 한 번의 재점검을 거친 뒤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14. 아랍의 봄
2003년 여름을 전후해 소련 정부가 정치적 혼란과 이합집산으로 제대로 된 외교정책 집행을 하지 못하는 사이, 중동에서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변화의 조짐이 찾아왔습니다. 우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이스라엘 아리엘 샤론의 오슬로 협정 무효화 조치에 반발해 다시금 투쟁을 이어나갔고, 미국은 "이스라엘이 조속히 협정에 복귀하여 양 세력 간의 화합과 평화가 도래하기를 기대한다"는 성명만을 발표한 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약 2주간의 전투와 상호 자폭공격 이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는 암묵적 휴전이 이루어졌으며, PLO 내에서는 친소 사회주의 성향의 파타와 수니 민족주의-이슬람주의 성향의 하마스가 양당체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더욱 깜짝 놀랄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2003년 9월 29일, 바레인의 수니 세속주의 성향 알 할리파 왕가에 대항한 대규모 민중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 등지에서까지 독재정부 타도를 위한 시위가 발생한 것입니다. 시위의 1차적인 요구사항은 빈곤 철폐이나, 문제는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이 대부분 세속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라는 점이었습니다.
백악관은 2003년 10월 8일 이 사태에 대한 첫 입장을 표명했는데, 그 내용은 "중동의 민주주의 확산을 매우 환영하며, 미국은 그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도울 용의가 있다"였습니다. 또한 사우디아람코의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이 승인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새로이 연립내각의 수장이 된 알렉산드르 레베드 총리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우방국 내 소요사태의 해결방안과 범아랍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방침을 수립하고자 했죠. 특기할 만한 사항은, 친소련 내지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가맹한 정부들을 상대로만 유독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 친미진영에서 소요사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 바레인, 알제리, 요르단에서는 실제로 정권에 위협이 될 수준까지 다다랐습니다.
각료진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접견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의 뒤를 이어 젊은 나이에 권좌에 오른 뒤 소련의 리즈코프-람스도르프 정권을 롤모델로 하여 자유화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자유화, 민주화란 곧 샤리아법을 옹호하고 이슬람 근본주의에 친화적이며 여성억압과 각종 악습을 부활시키려는 이들의 영향력이 증가한다는 것을 뜻했고, 그는 이내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바샤르 알 아사드는 자신이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력하게 탄압하고 나서 다음 세대에게 자유화와 민주화의 임무를 맡기는 방안을 검토, 소련에게 정보인력 및 특작부대의 파견 등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중동 지역의 소요에 대해서는 또한 CIS의 의견을 빼놓고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한 급진우익 정권은 중동 지역의 정권들을 수호하기 위한 군사지원안을 꺼내들며 인준을 요청해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학을 떼며 반대했고,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몰도바 역시 파병에 대해서만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죠. 소련 대표단은 중립 입장 및 반대입장 국가들을 규합해 물자지원 선에서 마무리짓는 정도로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시리아에는 비살상 진압장비들을 주축으로 한 각종 도움을, 나머지 국가들에도 지나치게 모험적인 지원안은 삼가자는 결의안이 채택되었죠.
결국 사태는 각 정부들이 약간의 '양보', 즉 몇가지 개혁조치를 도입하는 선에서 대부분 마무리되었습니다. 물론 튀니지에서는 벤 알리 정부가 무너지고 친미 정부가, 이라크에서는 내전 사태에 발발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이라크에서도 알 자르카위의 '유일신과 성전'에 맞서 구 바트당과 친이란 시아파 정부가 소련의 중재로 '입헌 신정제'를 도입한 끝에 사태가 조기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동유럽에서 터졌습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세르비아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의해 악의 축으로 찍혀버렸고, 가뜩이나 오랜 저성장 국면과 실업 증가, 이민자 문제 등으로 소외되었던 일부 청년 계층이 반사회적 사상들에 동화되어 '외로운 늑대'로서 테러리즘에 가담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 폭탄테러, 헝가리 열차 테러 등이 벌어져 각각 수백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태가 발생하자 각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실상의 독재정으로 변화했습니다.
중국에서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의 변종이 나타나 전 세계를 휩쓰는 악조건 하에서 동유럽의 상황은 날이 갈 수록 심각해져 급기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내전에 준하는 사태로까지 번지게 되었고, 미국은 지속적으로 동유럽 민주주의의 위기를 언급하며 소련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급해졌으며, 마치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
<캐릭터 일람>
0.
- 이름: 예브게니 일리치 람스도르프
(Евгений Ильич Ламсдорфф)
- 플레이어: NPC- 생년월일: 1946년 1월 29일
- 클래스: 연방 총리
- 민족: 러시아인+부랴트인 혼혈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약간)
- 배경:
예브게니 람스도르프는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러시아인 지역당원이던 아버지와 부랴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활발한 콤소몰 활동과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1965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인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 람스도르프는 1968년 상부로부터 긴급명령을 받아 그의 소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습니다. 연대장은 그에게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으러 간다"고 전했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이상하게도 사회주의 동지의 나라라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였죠.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끔찍했습니다. 비무장한 노동자, 아이를 업은 어머니, 지팡이를 짚은 노인에게 발포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람스도르프는 그때부터 모종의 신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진압되고 다시 복귀해 남은 복무기간을 마치고 복학한 뒤 대학을 졸업한 람스도르프였지만, 그는 밤마다 울부짖는 체코인들의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1972년 모스크바 지역당에서 교육행정업무를 맡으며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으나, 그와 안면이 있던 중앙당 정치국원 안드레이 키릴렌코와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람스도르프는 '브레먀' 방송에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투서를 남기고 그대로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서독 본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우던 그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받는 존재였고, 어떠한 주제든 성역 없이 토론해야만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논리에 따라 건설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람스도르프는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처절한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보드카, 보르시, 톨스토이, 체호프,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의 조국 역시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원하고 인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진보를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꽤나 많긴 했으나, 그들의 대책없는 개인주의와 인간 소외, 빈부격차의 정당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옹호할 수 없었죠. 람스도르프는 고향에서나, 여기서나 소수파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내 사람'에 집착했습니다. 다행히 문화와 예술, 음주가무를 즐기고 지갑 여는 데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물욕을 경계하는 그의 성격은 꽤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1986년, 새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을 외치며 그간 탄압해왔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석방과 복권을 단행했습니다.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던 리즈코프는 람스도르프를 잊지 않고 다시 연방에 불러들였죠. "개혁은 필수적이나, 미국인들에게 굽혀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만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그대로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종속시킬 것이다"라는 편지 내용이 리즈코프로 하여금 안심하고 람스도르프를 다시 불러들이게끔 하는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작업 지원 과정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눈도장을 얻고 나서, 그는 정치국 중앙위원회와 유류기지건설-가스공업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물론 1990년 리즈코프와 함께 고르바초프-옐친의 "500일 경제재건계획"을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하다가 다시 서기장의 눈밖에 나긴 했지만, 그는 일단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며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람스도르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인권을 중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드높이며 서방과 협력하되 굴복하지는 않는 튼튼한 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고육지책이 필요할 지도 모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상만은 수단으로써 뒤집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조국에서는 그 누구도 무고하게 상처받지 않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1.
- 이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메스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6년 5월 8일
- 클래스:
- 민족: 러시아인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 능력:
지휘(0)/통솔(1)/행정(0)/경영(2)/호신(1)/조사(2)/위조(2)/선전(5)/공작(5)/화술(5)/장악(5)/압박(5)
- 트레잇:
#친절한 미소, 강력한 빠따: 동지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친절을, 적에게는 가차없는 독설과 위협을 날려야 합니다. 영향력 하 국가에 대한 화술에 +2, 압박에 -1. 적성국에 대한 압박에 +2, 화술에 -1. 서방 국가에 대한 화술에 +1.
- 잔여포인트: 0
- 배경:
알렉세이 메스너는 1946년 5월 8일 대조국전쟁 승리 1주년이 되던 해 모스크바에서 소련 최고회의 의원인 니콜라이 메스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메스너는 당시 소련 법무장관을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릴적부터 소련에 대한 애국심을 교육받으며 자랐기에 조국 소련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마음 가득 가지게 되었죠. 아버지 니콜라이는 아들이 자신처럼 법조인의 길을 걷길 바랬지만 알렉세이는 외교관이 되어 조국의 이름을 국제무대에서 널리 퍼뜨리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알렉세이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브라티슬라바 조약, 모스크바 협정, 헬싱키 협정, 전략무기제한협정 등의 냉전 중반기 주요 외교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평판을 쌓아나갔죠.
그렇게 외교관의 일에 열중하던 1980년. 알렉세이는 주영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런던에서의 경험은 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분명 영국은 '지는 태양의 나라'이자 광업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구세대의 실패국가라고 배웠으나, 그런 영국의 인민들마저도 '초강대국'이라는 소련의 인민들보다 훨씬 나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국에서는 국영 백화점(굼) 등에서 길게 줄을 서야 살 수 있던 치약과 비누, 의류, 주류 등이 시골마을의 작은 상점에도 즐비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부임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자신의 조국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자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도입을 지지하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습니다.
1985년, 공산당 정치국원들과 서기장이 직접 참관한 연방 외무부 실무자 전체회의에서 알렉세이는 서방과의 화해, 자유화, 아프간 철수, 군 개혁, 경제개혁 등이 연방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모험적 연설을 함으로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관심을 샀습니다. 외무부 내에서 '인기 스타', 또는 '검은 양'이 된 알렉세이를 고르바초프는 기꺼이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대외교류위원회 서기,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개인 외교안보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등 이른바 '고르비 라인'을 타는 듯 했죠. 그러나 개혁의 향방을 두고 둘의 사이는 극명하게 벌어졌고, 1990년 외무부 서유럽국장직을 끝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휴직계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대학 시절 친구였던 람스도르프가 접근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둘은 의기투합해 조국을 바꿀 마지막 찬스를 잡아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2.
- 이름 :아미나트 잠불라토브나 나가이
(Аминат Джамбулатовна Нагай)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55년 11월 7일
- 클래스:
- 민족 :체첸계 고려인(체첸 3/4, 고려 1/4)
- 모국어 :소련파 북한말(문화어+중앙아시아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러시아어, 북한말, 바이나흐어(체첸-잉구시어), + 제한적으로 망명지 언어
- 능력:지휘(0)/통솔(0)/행정(2)/경영(5)/호신(2)/조사(4)/위조(5)/선전(5)/공작(0)/화술(4)/장악(5)/압박(0)
- 트레잇:
#창조적 파괴: 다방면의 경험은 그녀에게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한 적응력, 선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민간조직의 혁신과 투자에 +2, 관료조직의 평시 관리에 -1.
#현란한 언론플레이: 그녀는 언론을 다루는 데에 상당한 재능을 보입니다. 여론선동 및 전환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0
- 배경:
할아버지는 고려인, 친할머니와 어머니는 체첸인이라는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아미나트는 북한 평양 출신의 여성으로, 그의 아버지 잠불라토프 나가이(나백선)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정권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이주한 소련파 고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대대적으로 소련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자 나백선과 그의 딸인 아미나트는 소련 모스크바로 다시금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나트의 부모는 북한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압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고, 아미나트는 체첸인 할머니와 함께 자라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미나트의 할아버지인 나창만이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때 누명을 쓰고 사망하였으며, 그 후로 나씨 일가는 소련체제에 대한 증오심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모스크바 국립교대에 진학한 아미나트는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탈리아 마그나트, 그리고 알렉산데르 타라소프와 만난 아미나트는 체 게바라와 레프 트로츠키 등의 사상을 공부하며 이윽고 신좌파 비밀결사인 '신 소련공산당(NCPSU)'의 당원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NCPSU의 정체가 발각되고 타라소프가 정신병원에 강제수감되는 동안 아미나트는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아미나트의 11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실현하고 있었고, 아미나트는 유고 시스템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유고의 최고지도자 티토가 사망하며 민족주의자들이 유고 전역에서 득세하였고, 아미나트는 이번에도 망명하여 굴라쉬 공산주의를 실현하던 헝가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노쇠한 야노슈 카다리의 헝가리 또한 쇠퇴기에 있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모델이 완전한 실패를 했다고 판단한 아미나트는 마침내 서구로 향했습니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에서 '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즉 반공 사회민주주의와 코포라티즘 등에 대해 공부하며 망명가 생활을 이어가던 아미나트는 1982년 람스도르프를 만나 친분을 다졌고, 일명 '람스도르프 서클' 내 좌파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 고르바쵸프의 초청으로 람스도르프와 동지들이 소련으로 복귀한 뒤에, 아미나트는 몇 안되는 '복지국가형 자유주의'를 공부한 사람으로써 리즈코프 내각의 각종 경제정책 실무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체첸인-고려인의 이중 정체성을 가졌던 아미나트의 입장에서 체첸인 동지라고 생각했던 소련공군 전략폭격대 사령관 '조하르 두다예프' 소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융단폭격을 했다는 사실이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에 의해 폭로되자, 큰 충격을 받은 아미나트는 사하로프의 국회연설 당시 원내에서 그를 옹호하며 악명과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제업무에서 좌천되어 1990년 12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방문을 담당하는 의전일을 맡았던 아미나트는 1991년 8월인 지금 무너지는 연방을 어떻게든 평등한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개혁하던 재건국하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습니다.
3.
- 이름 :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사사노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Сасанов)
- 플레이어 : dear0904
- 생년월일 : 1955년 8월 20일.
- 클래스: 우크라이나 공화국 총리
- 민족 : 우크라이나+체코인 혼혈
- 모국어 : 우크라이나어
- 구사가능언어 : 러시아어, 체코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능력:
지휘(0)/통솔(4)/행정(5)/경영(1)/호신(0)/조사(5)/위조(1)/선전(2)/공작(5)/화술(5)/장악(4)/압박(1)
- 트레잇: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념과 이상의 차이는 일시적 협력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국내 적대/알력집단의 포섭 및 설득에 +1.
#명품 서포터: 탑, 원딜, 정글러가 빛나려면 누군가는 와드를 박아야 합니다. 각 메인이벤트 당 한번, 타인의 행동에 +2의 버프를 추가 부여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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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사사노프는 1955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당원인 아버지, 그리고 조약 체결 행사때 방문한 체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외가인 체코와 우크라이나 사이를 오가면서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13번째 생일날 우크라이나에 있던 사사노프와 가족은 비보를 전해 들었고, 그때부터 사사노프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을 조장하고, 체코에 피바람을 몰고온 소련을 언젠가는 내 손으로 엎어버리겠다고.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기에 자신의 속내를 깊게 숨기며 가슴속의 칼을 다듬었습니다.
1974년에 그는 키이우 종합 대학에서 법학과-외교 관계 연구소에 진학하여, 군 복무를 거쳐 훌륭한 성적으로 석사학위와 함께 졸업 했습니다. 사사노프는 국제법과 지역학을 배우면서 본인의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굳혔고, 대학 총장의 추천사를 받아 소련 외무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외무성에서 일하는건 상당한 고통이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에 일조한 그로미코. 그리고 소련의 높으신분들. 그리고 그게 어느정도 눈에 띄는 바람에, 사사노프는 1984년 외무성에서 한직인 종교 문제 위원회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더러운 사람 밑에서 계속 있기보다는 낫다 생각하며, 그 좌천을 받아들여 2년동안 버텼습니다.
그리고 1986년,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몇몇 부서들을 개혁 할때, 외무부로 다시 불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람스도르프를 만났고, 같이 술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와의 대화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대로는 안된다."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건 미친일이었다." "부당한 탄압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같은 말과... 계산까지. 이후 람스도르프와 자주 만나면서, 이 호인의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화술과 인맥으로 형님의 아르메니아 행을 지원했고, 사사노프는 공연히 람스도르프 라인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람스도르프가 서기장의 눈 밖에 났을때, 그의 라인인 사사노프 또한 문학 출판국 본부로 밀려났지만, 그는 계속 버텨낼 것입니다.
사사노프는, 소련은 인민을 탄압하는 국가로써, 소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람스도르프가 소련에 칼을 들이댄다면, 그를 절대적으로 도울것입니다. 그것이, 소련을 붕괴 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더 기뻐하며 도울 것 입니다...
- 사회 안정성 : 6(양호함)
: 낮을 수록 극단주의가 횡행하고 급진적 수단이 선호됨.
- 주요국 안정성: 미국(6)/동아시아(6)/EU(5)CIS(3)
- 정권 지지도 : 5(보통)
: 낮으면 인민들이 들고 일어남.
- 국가평판 : 3(무서운 깡패)
: 낮을 수록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국가로 인식됨.
- 주요 대외관계 : 미국(2) / 중국(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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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멜 마끼아또 아니면... 빌재앙을 암살/혁명 해버리고, 코뮌 독일 루트를 찍을수도 있죠. 민주 독일은 힘들거고...
@dear0904 독일에서 민주주의를 시도한다 = 사민당 빨갱이들이 실권을 차지한다 = 마 우리 자랑스러운 프로이센 사나이가 그따위 꼴을 지켜만 보고 있을끼가! = 쿠데타 or 내전 직행버스
대충 이렇게 됩니다.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 뭔 짓을 하던 대전을 거치기 전엔 그 물 안빠지니 민주주의는 요원하네요.
@dear0904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든 구워삷든 해서 러시아 영국과 연대해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오스트리아를 조지는게 베스트?
@931117 ... 그리고 그게 비스마르크죠 ㅋㅋ...
@dear0904 “비스마르크는 8개의 공으로 곡예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나로서는 한두개의 공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 레오 폰 카프리비, 비스마르크의 후임.
@dear0904 그만큼 최선의 수가 생각이 안난다는...
차선으로는 영국과의 연대를 중시하고 오스트리아와의 연대를 강화해 프랑스랑 러시아를 조지는것?
이탈리아는 잘...
@E.E.샤츠슈나이더 도대체 비스마르크는 어떻게 성공한거냐고요...
@카라멜 마끼아또 "여러분들은 낙엽이 지기전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 카이저 빌헬름 2세. 1914년 8월.
(4년 후)
"ㅆㅂ 낙엽이 지고서야 집에 돌아가네..."
(1세기 후 동유럽의 모 나라)
"코미디언이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면 3일 내로 우리가 접수할 수 있다!"
"들어올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때는 아니란다."
“악! 알 렉산드르레베드 총리님, 연방의 경제정책에 대해 건의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것을 묻는 것에 대한 승인을 얻을 수 있을 지 여부를 검토해주실 수 있을 지에 대한 고견을 묻는 것이 오도짜세기합공수군으로서 타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한 문제를 여쭤보는 것이 기열찐빠푸틴같지 않은지를 확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중첩의문문 그렇게 쓰라고 배웠냐? 새끼… 기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