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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설가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플랫폼(PIATFORM)
방영주
시선을 멀리 던져 다도해를 쓱 훑었다. 창해(滄海)에 점점이 널려 있는 섬들이 환상적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저들처럼 하나의 섬이고, 나는 만경창파에 떠 유람을 하고 있다는. 사환이 나의 그것을 깼다. 사환은 교무실 문을 와다닥 열고 무슨 선언이라도 하듯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들, 서무과에 가서 월급을 수령해 가랍니다." 내 옆 좌석에 있는, 나한일 선생이 받았다. "교무실에 와서 주라고 해." 나한일 선생은 학교에 대해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가 하는 말들은 뼈, 아니 가시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와 별 접촉이 없었고, 하여 그가 왜 그러는지, 그가 던지는 저런 요령부득의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또 관심도 없었다. 그는 나보다 10년 연상이었다. 나한일 선생은 영어과 주임이었다. 그는 별 말없이 도서실이나 교무실에서 두꺼운 원서를 보거나,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투덜거리곤 했다. (여러 면에서 다른 교사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외양도 한국인의 그것보다는 서양인을 연상시켰다. 후리후리한 키, 선이 날카로운 얼굴 윤곽이 더욱 그렇게 보이도록 했다. 선뜻 마주하기에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외모였다. 나한일 선생을 도서실에서 몇 번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나에게 호의를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다. 그러나 업무상의 이야기 외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늘 그래 왔던 대로, 서무실에서는 사환을 불러, 나 선생의 월급을 갖다 주도록 조치할 거였다. 나는 서무과에 가서 월급을 수령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왠지 두려웠다. 지금 술집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교무실로 가 내 자리에 앉아 뭉그적거렸다. 그때 나를 찾는 전화가 있었다. 사환으로부터 송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수화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제 음성 기억 안 나세요?" "…… ?"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국어 선생님 맞죠?" "예, 그런데요." "그 학교에 남자 국어 선생님이 한 분뿐이지요." 착 가라앉은 그녀의 음성은 음산하게 들렸다. 왠지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들에 답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예……." "학생과에 근무하는 이절노 선생님이시지요." "……." 점입가경이었다.
나는 올해 이 학교로 왔다. 회색의 도시 서울을 떠나, 가급적이면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본시 촌놈 태생인 나는, 번잡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악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대면은 더욱 그랬다. (물론 수도권에서 교사로 취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면, 이것은 궁색한 자기합리화 내지 자기변명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침, 학과장실에 남해의 한 끝에서 교사채용 의뢰서가 와 있었다. K여자상업고등학교였다. 서류를 갖춰 우송했다. 면접에 응하라는 통보가 왔다. 앞뒤 가리지 않고 남행열차를 탔다. 조그마한 항구 도시가 맘에 들었다. 학교도 그랬다. 학교는 야트막한 산의 중턱에 있었다. 그림 같이 펼쳐진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교탁에서 떠들다 퇴근 후, 선창가에 가서, 낙지 발가락에 소주로 백묵 가루를 씻어 내면 될 거였다. 주말에는 배를 타고 섬들을 떠돌아도 좋을 터였다. 얼마나 낭만적인 직장 생활인가? 나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성실히 면접에 응하기로 작심했다. 학교에서는 선뜻 채용 의사를 밝혔다. 대신 3년 이상 근무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기실 나는 그 학교에 '말뚝'을 박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봄이었다. 아직도 바람에는 냉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K여상으로 가기 위해 서울역에 갔다. 차표를 끊어 개찰구를 나가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육중한 몸을 서서히 움직였다. 회사에서 늦게 퇴근을 하고 입장권을 끊어 플랫폼까지 나온 동거녀 장한숙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손을 저었다. 기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도시의 물상들은 뒤로 휙휙 물러나고 있었다. 장한숙은 하나의 점으로 남았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차는 궤도를 따라 돌다 언젠가 이 플렛폼에 와 멈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플렛폼을 떠날 터이다. 장한숙이나 나와 마찬가지로. 그래, 삶의 족적이 닿는 모든 곳은 그저 하나의 플렛폼일 따름이지. 나는 상투적인 사념을 반추하며 쓰게 웃었다.
나는 학생과에 배속되었고, 2학년 수업을 맡았다. 나는 교무실보다는 주로 도서실에 있었다. 교재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퇴근하면, 하숙방에서 교직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소위 교사를 위한, 의식화 서적도 보았다. 등단작 외에는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한 적이 없지만, 작년 한 문예지를 통해 문단에 나온 나였다. 따라서 소설책과 문예지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여튼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면 많이 알아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외에는 '소설 소재를 찾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홀로 선창가를 찾거나 섬들을 뒤졌다. 당연히 다른 교사들과는 별로 교류가 없었다.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는 도통 모르고 있었다. 또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직이 나의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도를 걷겠다고 작심하고 있었다. 교사로서 틀이 잡혀갔다. 수업도 열심이었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이면, 우욱우욱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시작종이 치기 전에 들어가 끝종이 날 때까지 목청을 돋워 떠들고 있었다.
수화기의 목소리가 나의 생각을 지웠다. "여보세요." "예!" "왜 말씀이 없으시죠?" "모두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어떻게 저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시죠." "그렇담 제가 찾는 분예요. 오늘 7시에 학교 앞 <추억다방>에서 만나요." 여자는 그렇게 선언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자신을 모르냐고 물었던 여자였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들은 또 뭐란 말인가? 게다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해 버린 거였다. 어찌 보면 장난 전화 같기도 했다. 퇴근하여 몇 군데의 술집을 순례하며 외상값을 갚았다. 거기서 답례로 주는 술을 몇 잔씩 걸쳤다. 나는 약간 취기에 젖어 있었다. 7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같은 월급날, 이렇게 취하다 만 상태로, 초저녁부터 썰렁한 하숙방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딘지 '쪼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발걸음은 <추억다방>을 향하고 있었다. 장난 전화가 아닐 수도 있었다. 나를 찾는 그 여자는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가보면 알 일이었다.
다방은 한산했다. 그 한 구석에 여자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일 거라고 짐작하며 다가갔다. 역시 처음 보는 여자였다. 나는 어눌하게 물었다. "혹 이절노 선생을 찾았던 분이 아니신가요?" 여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펴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그곳에 앉았다. 숱이 많은 그녀의 머리는 길었다. 흑발은 어깨를 흘러 유방에서 멈춰 있었다. 나이에 비해 화장이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얼굴의 반은 머리칼이 덮고 있었다. 덕분에 한쪽 눈은 머리칼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그녀의 다른 쪽 눈은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빼어난 미모였다. 그러나 어딘지 그 속에는, 전화의 목소리처럼 음산함이 숨어 있었다. 나는 문득 무녀를 떠올렸다. 께름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나는 뭔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요……헌데, 성함이?"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뭔가를 착각한 모양이군요. 그리고 저는 이진숙이에요." "전화의 내용은 그게 아니었잖아요?" "아녜요. 아무 것도 아니어요." 여자는 울상을 지었지만 어딘지 만든 표정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인상도 그랬다. 누군가가 보살펴 줘야 할 그런 여인으로 보였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런 감정에 나를, 유도하고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 모양인데……." "아녜요." 이진숙은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 쳤다. 그녀는 흑흑 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등으로 정말 눈물이 묻어 났다. 몇 안되는 옆 사람들이 모두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나는 당황했다. 생판 모르는 여자가 체면 불구하고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거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어떤 남자가 사기를 친 것 같았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국어 선생이라고. 그리고 뭔가를 빼앗아 간 것일 터였다. 나는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뭔가 위로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나가시죠. 장소가 좋지 않아요." 여자의 얼굴로 한 순간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희미하게 스쳤다. 여자는 앞장 서 나가며 찻값을 지불했다. 나는 밖에 나가 여자에게 말했다. "따라 오세요." 취기는 싹 가셔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성큼성큼 걸었다. 학교 앞이었다. 학생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몰랐다. 나는 생맥주 집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술을 잘 마셨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의도적으로 말을 자제하는 느낌이었다. 이것저것 물어 봤지만 그녀는 웃거나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나도 그녀처럼 묵묵히 술만 마셨다. 전주와 후주가 섞여 술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갔다. 그녀는 애절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다 한마디했다. "바닷가에 가고 싶어요." 요령부득의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나와 분명, 어느 한 구석에도 인연의 끈이, 닿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전화를 하고, 이렇게 마주 앉아 주책을 떨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바닷가에 가서 바로 그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거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추리해 버렸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나도 지금 하숙방에 가 처박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숙을 하시는군요." "예, 그래요. 총각의 타향살이 별 수 있겠오?!"
이 소도시로 와 하루 종일 헤맨 끝에, K여상 바로 밑에 하숙을 정할 수 있었다. 나는 두세 달은 그것을 계속해야 했다. 장한숙과는 5월 중순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해 둔 때문이었다. 그 동안 그녀는 사무실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인수 인계의 절차를 거친 다음, 퇴직하기로 했다. 출근하려면 아직 며칠이 있어야 했다. 꼭 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주로 해안 도로를 택했다. 다도해가 아름다웠다. 특히 낙조 무렵에 금빛으로 물드는 섬들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폐선을 주점으로 개조한 곳에 들어가 펄펄 뛰는 활어를 회쳐 놓고 곁들이는 소주 맛도 일품이었다. 항구에 면한 술집에 들어가 새(鳥)발 낙지를 통째로 씹는 기분도 괜찮았다. 나는 아주 긴 휴가를 받은 사람처럼 느긋하게 새로 발 딛는 도시의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근무를 하고 월급을 받는다는 게 죄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진숙이 말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숙녀를 앞에 놓고." "아, 아닙니다. 별 생각을 안했어요." 이진숙의 얼굴로 다방에서와 똑같은 웃음이 스쳤다. 그녀는 이어, 그곳에서와 같은 행동으로 일어나,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좇으며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여자는 택시를 잡았다. 그녀가 운전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택시는 해안 도로를 따라 돌다가, 폐선을 이용하여 만든 술집이 늘어선 곳에 멈췄다. 달은 먹구름에 가려 있었다. 주점들은 더욱 환한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검은 바다가 뒤채고 있을 것이었다. 봄바람이 비릿한 바다 냄새를 실어 왔다. 그것은 온몸에 달라붙으며 끈적거렸다. 간간이 여자의 향수 냄새도 섞였다. 관능이 한번 꿈틀했다. 나는 그것을 잠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나를 알고 있는 거였다. 더구나 나는 여학교 선생이었다. 이진숙은 한 주점을 택해 먼저 들어갔다. 그녀는 역시 구석에 앉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모듬회와 소주를 시켰다. 나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눈이 약간씩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말했다. "학교에서 인기가 좋더군요." "아, 뭐 별로. 그런 것은 일종의 바람 같은 거지요."
여학생들은 서울에서 온 총각 선생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주번은 수업 시간이면 홍차나 커피를 끓여서 교탁에 올려 주었다. 하숙방으로 찾아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들은 음식이나 과일, 어떤 때는 맥주도 가져왔다. 나는 못하게 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 것은 바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볍게 스쳐 가는 봄바람같이 믿을 수 없는 거였다. 그냥 놔두면 곧 잠들 것이다. 나는 그런 것보다, 나의 수업을 충실히 들어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실업계 고등학교에서의 국어는 일주일에 두 시간뿐인 교양과목에 불과했다. 그들은 내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국어 시간에 컴퓨터 관련 서적 등을 슬그머니 펴놓고 공부하는 것이었다.
이진숙은 목안으로 술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그녀는 술맛을 음미하는 듯했다. 그녀는 생맥주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한쪽 눈으로 나를 멀거니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거기에 슬픔 같기도 하고, 기쁨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감정이 함께 스며 있는 듯했다. 웬지 그녀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이 여자는 오늘, 자살을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동반자로 나를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나를 술에 취하게 한 다음, 같이 저 바다에 풍덩 빠진다. 어떻게 보면 전혀 엉뚱한 상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에게서는 그런 인상이 짙게 풍겼다. 순간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만 나가시죠. 자정이 다되었는데." 여자의 몽롱하던 눈에 빛 같은 것이 한 번 번쩍했다. 그녀는 잠에서라도 깨어나는 듯 머리를 몇 번 도리질 쳤다. 이윽고 그녀는 정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도 따라 일어났다. 그녀는 내가 계산을 하려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녀는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둬요. 오늘은 꼭 이 선생님을 대접하고 싶어요. 부담을 느끼지 말아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예?" "이유는 묻지 마세요." "오늘이 내 월급날인데……."
오늘이 나의 월급날이며 동시에, 자신에 대해 가장 한심한 생각이 드는 날이기도 했다. 하숙비를 내고 술집을 순례하며, 외상값을 갚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항상 적자 생활이었다. 나는 적은 보수에 불만스런 표정으로 혼자 투덜거렸다. 젠장, 이것도 월급이라고……. 다른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는데 교사 월급은 항상 그 타령이라는 거였다. 교사 초봉은 다른 대졸 사원에 비해 큰 차이가 없지만 해가 거듭되며 엄청나게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력이 많은 교사들일수록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가족을 부양하기에도 버거웠다. 좀 상황이 낳은 교사들은 부업을 하거나 부인이 함께 직업전선에 나선 경우였다. 구제 금융이다 뭐다 하여, 나라의 꼴이 어렵게 돌아가자 이제 그런 분위기가 약간은 잠잠해졌지만, 그들도 언젠가 때가 되면 교직을 뜰 궁리만 할 터였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을 하고 보수를 받은 것이었다. 나는 다소 감격하여 월급 봉투를 한동안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매월 17일이 월급날이었다. 그러니까 근무하고 보름이 조금 지나서 수령한 것이었다. 3월은 상여금이 합산되어 나오는 달이었다. 신임 교사는 그 1/3만 받을 수 있었다. 어물쩍 한두 주 정도를 보내고 내가 받은 액수는 예상했던 것보다 꽤 많은 것 같았다. 집에서 준비해 온 돈도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월급을 거의 은행에 넣어 두었다. 나는 내심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부터는 부모와 장한숙에게 돈을 얻어 쓰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대학 시절 등록금까지 모두 술값으로 날리고 장한숙에게 종종 손을 벌리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아무 불평 없이 요구하는 액수대로 선뜻 건네주곤 한 거였다. 이제 그녀를 위해 뭔가 베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그 달로 끝이었다. 바로 적자 생활로 돌아선 것이었다. 나는 선배 교사들의 불평을 곧 이해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납득이 안 갔다. 돈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 더구나 학생을 지도하는 선생님이 아니던가? 아니었다. 선생도 사람이었다. 아니, 생활인이었다. 생활의 중요한 매개체는 돈이었다. 그것이 없이는 누구도 살아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선생으로서의 최소한 품위는 유지해야 될 터였다. 그러면 그 이상의 돈이 필요했다. 월급은 이제 나 혼자 쓰기에도 부족했다. 곧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면, 나도 그 꼴이 될 게 뻔했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입장에 서게 된 거였다.
이진숙은 나의 말을 무시하고 대금을 치렀다. 그녀는 앞장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엉거주춤 그녀의 뒤를 좇았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방파제를 걸어요." 이진숙은 방파제를 향해 걸었다.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조금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여인은 성큼 방파제 위로 올라섰다. 나는 께름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따라 했다.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박았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 둘 꺼져 가고 있었다. 여자는 갑자기 걸음을 딱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이었지만 꽤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여자의 얼굴은 달빛을 반사해 부옇게 떠올라 흔들렸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한쪽 눈이 괴기스럽게 보였다. 어쩌다 감추어진 눈도 드러났는데, 그것은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것은 부옇게 떠오른 얼굴과 어울려 '전설의 고향' 한 대목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남자는 살결이 아무리 희어도 달빛에 반사되지 않아 검게 보인다. 여자는 그 반대였다. 검은 살결도 달빛에 희게 보이는 거였다. 그래서 심약한 사람은 달밤에 한적한 곳에서 여자를 만나면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거였다. 그런 것을 알고 있어도 웬지 그녀가 무섭게 보였다. 방파제의 중간쯤 왔을 때였다. 나는 여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만 돌아갑시다." "그러죠……." 이진숙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할 수 없었다. 나는 먼저 방파제를 내려갔다.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따랐다. 그녀는 내 옆으로 다가 와, 머리를 나의 한쪽 가슴에 기댔다. 무심중에 나는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나는 걸음을 빨리 했다. 그녀는 나에게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어기적거렸다. 할 수 없이 그녀와 보조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연인처럼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나는 그녀 몰래 긴 한숨을 쉬었다. 모두 쓸데없는 기우였었던 것이다. 긴장이 풀리자 술기운이 한꺼번에 오르고 있었다. 이진숙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눈길로 따라가 보니, 여관 간판의 불빛이 있었다. "저를 저기에 데려다 줘요.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요. 집안에 무슨 일이 있거든요. 헌데 여자 혼자 저런 데 들어가기가 좀 뭣하군요." "……?!" 나는 이진숙을 데리고 여관에 들었다. 내가 객실을 나가려 하자, 그녀는 나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물기에 촉촉이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오늘 같이 있어 줘요. 혼자 있으면 내가 나를, 꼭 죽일 것만 같아요. 그 이유는 묻지 마세요. 너무 복잡하니까요. 몇 마디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 못돼요. 알겠죠?" "……?!" 이진숙은 전등을 껐다. 방안은 훤했다. 복도의 불빛이 객실문의 창을 타고 넘어왔고, 구름을 벗은 보름 달빛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다. 여자는 욕실 앞으로 가, 등을 돌리고 섰다. 그녀는 옷을 훌훌 벗었다. 나는 이 모든 게 무슨 일인가 싶어 멍청히 서 있었다. 그녀를 만나서 겪은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되짚어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다시 긴장감으로 신경이 팽팽해졌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되나? 이대로 도망칠까? 이제 와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잖는가? 이는 남자의 체면에도 관계되는 일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진숙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 독이 올라 내 제자들에게 뭐라고 지껄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순간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터였다. 나는 부지간에 그녀의 육체를 보고 있었다. 몸 전체가 방파제에서 본 얼굴처럼 부옇게 보였다. 검은머리는 등에 흘러 있었다. 깊게 패여 들어간 잘록한 허리와 오목오목한 관절 부위가 아름다웠다. 팽팽하고 투실한 허벅지는 아주 육감적이었다. 내 몸 구석구석에서 관능이 심하게 용트림하고 있었다. 머리끝으로 취기가 억수로 치솟고 있었다. 긴장이 풀풀 풀어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상체를 굽히고 마지막 남은 팬티를 벗는 중이었다. 그녀의 엉덩이 사이로 뭔가 거뭇한 것이 보였다. 푸짐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뛰어가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때였다. 그녀는 욕실로 한 마리의 뱀처럼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는 취기와 피곤함으로 몸을 가누고 있기가 불편했다. 속옷만 입고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었다. 이진숙의 나체가 어른거렸다. 아무래도 이 밤을 곱게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찾아 물고 불을 붙였다. 이진숙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담배 연기 사이로 한 학생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래, 이영숙이었다. 이름마저 비슷했다. 그러나 흔해빠진 여자 이름들이었다.
문예반 모집을 했다. 신청자가 거의 없었다. 이영숙과 몇 명의 학생들뿐이었다. 나는 3학년인 이영숙을 문예반 반장으로 임명해 놓았다. 영숙은 학업성적도 좋았고, 문학에 남다른 관심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지방신문의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가작으로 입선한 경력도 있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서글한 눈, 또랑또랑한 얼굴로, 학생조회 시간에도 툭 튀어나와 보이는 학생이었다. 나는 녀석의 그런 면들을 높이 샀고, 때문에 아끼는 편이었다. 영숙도 나를 따랐다. 녀석은 혼자서 하숙방에 찾아와 아무 소리도 없이 앉아 멀거니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 시선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침묵의 강은 더욱 그랬다. 그럴 때면 영숙이 나가 주길 바랬다. 그러나 녀석이 오지 않는 날이면 방문을 보며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런 영숙은 문예반의 활성화를 위해 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열성이었다. 하지만 문예반은 명맥만 유지할 뿐 거의 활동이 없었다. 학교와 학생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컴퓨터반만 와글거렸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목에 힘줄을 세웠다. "여러분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우선 취업이 급선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여 컴퓨터 등을 열심히 익혀야 한다. 그래야 취업에 우선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학교는 취업을 위한 학원이 아니다. 또 직장만 잘 갖는다고 인생의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어려운 많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컴퓨터 등으로 풀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려면 남의 경험을 많이 배워 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이었다. "그 핵이 책이다. 특히 교양서적을 많이 읽어 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과목을 열심히 해 둬야 한다. 살아가는 데 필요하니까 교육과정에 포함시킨 것이다. 너희들은 졸업하면 거개가 막바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때문에 인문계 학생보다 그런 것이 더 필요한 것이란 것을 명심해야 된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넣어 떠들었다. 그 시간은 컴퓨터에 관련된 서적들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녀석들은 나의 수업을 듣는 척했다. 그러나 다음 시간이면, 원상태로 돌아갔다. 한마디로 마이동풍이었다. 나는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다. 피곤했다. 어떤 때는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무가치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서서히 도서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거였다.
이진숙은 알몸으로 침대에 다가왔다. 그녀는 내가 덮은 이불을 슬그머니 들치고 옆에 누웠다. 그녀는 나의 몸에 밀착해 들었다. 따뜻하고 묵직한 유방이 나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드디어 나는 그녀의 위로 올라 2층을 만들었다. "아, 최 선생님……." 여자는 신음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한 소리로 낮게 부르짖었다. 나는 최 선생님이 아니었다. 이 선생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샅께의 그것은 갑자기 식어 버렸다. 나는 눈을 떴다. 바로 누운 그녀의 얼굴이 모두 드러났다. "앗!" 나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머리카락에 감추어져 있던 그녀의 한 쪽 눈이 드러났다. 푹 꺼져 있는 그것의 주위는, 화상에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도저히 못 봐 줄 모습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옷을 꿰었다. 그리고 여관 밖으로 나가 달렸다. 한편, 그녀가 안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죄를 범했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다음 날이었다. 나는 숙취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 나한일 선생이 나를 보며 웃었다. "이 선생, 차 한 잔 할까? 매점으로 가지!" 나 선생은 말을 마친 후,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교무실 출입구 쪽을 향해 걸었다. 나는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매점에 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나 선생은 커피를 두 잔 시켰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한 쪽 안면만 일그리고 웃는 그의 얼굴은 인상적이었다. 서부 영화의 한 주인공과 닮아 있었다. 그를 크린트 이스트우드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와 흡사했다. 커피가 날아오자 나 선생은 계속 히죽거리다 말했다. "이 선생, 어제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봤지." 나 선생은 계속 반말이었다. 그런데도 웬지 거부감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 "우리 학교 졸업생이야. 그 애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 한 국어 선생을 끔찍이 좋아했어. 최 모라는 선생이었지. 최 선생은 그 애를 피했어. 그는 선생이었거든. 그 녀석은 밤에 최 선생의 하숙방으로 숨어들어 방화를 했어. 아마 최 선생이 수업 시간에 나도향의 '벙어리 삼용이' 이야기를 한 날이었을 거야. 이 선생도 소설가이면서 국어를 가르치니까 무슨 말인지 짐작할 거야. 현실 저편에서 불가능한 사랑을 이룬다는, 아마 뭐 그런 다분히 감상적인 소설 내용이 아니겠어? 다행히 최 선생은 가벼운 화상을 입었지. 그는 전근을 갔어. 그 애는 퇴학을 당했고." "……!" "녀석은 작년에 정신병원에서 퇴원을 했어. 녀석은 이 선생의 전임에게 전화를 하여 유인해 낸 거야. 그는 아마 이 선생이 어제 밤에 당한 일과 비슷한 일을 치렀을 게야. 그 애는 거의 매일 학교로 전화를 했어. 전임 선생이 만나 주지 않자 학교로 찾아오기도 했지. 녀석은 자신이 그 선생의 부인이라는 거야. 결국 그 선생도 이 학교를 떠나고 만 거지. 그래서 당신이 여기에 오게 된 것이기도 하고." "……!!" 나 선생은 웃음을 거뒀다. 그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헌데, 선은 지켰지?" "예?"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냐고?" 나는 불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나한일 선생은 안도의 얼굴이 되었다. "다행이야.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심하라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학생들한테 얼굴도 못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여기는 여학교야. 아무튼 그만 일어나지. 조회 시간이 다가오는군." "알겠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언제 술이나 한잔하지. 나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거든." "그래요? 저도 그래요. 잘됐네요!" 나한일을 따라 교무실로 가 담배를 태워 물었다. 이제야 이진숙의 어제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담배 연기를 서서히 빨아들였다가 토해 내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오늘부터 전화가 온다면, 혹 퇴근 시간에 교문에서 기다린다면, 혹시 결혼 후에도 우리 집에 찾아온다면, 혹시나 어제 그녀가 충격을 받아 자살이라도 했다면, 또 그리고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담배 연기 사이로 떠돌았다. 그러다 흉한 한 쪽 눈만이 확대되었다. 나는 담배 연기를 확 내뿜어 그것을 지워 버렸다.
쉬는 시간이 되어 교무실에 있으면 전화통에 신경이 쓰였다. 그것의 신호음이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하면서도 은근히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다. 오히려 그녀의 침묵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든 때문이었다. 3일이 지난, 퇴근 무렵이었다. 나를 찾는 전화가 있었다. "예, 이절노입니다." "위선자, 가만 두지 않겠어." 이진숙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짤막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 소리에는 저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는 송수화기를 든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보았다. 한동안 그대로 멍청히 있다가 힘없이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만취되어 밤늦게 하숙방에 들어갔다. 영숙이 와 있었다. 나는 녀석의 앞에 앉았다. 영숙은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둥그스름한 어깨, 교복 위로 솟은 봉긋한 가슴을 바라보다 소스라쳐 놀랐다. 나는 학생을 한 여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영숙을 잡아 일으켰다. 순간 녀석은 이진숙으로 보였다. 고개를 흔들며 다시 보았다. 이영숙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진숙과 닮았다. 녀석의 얼굴에 이진숙의 얼굴이 다시 덮었다. 나는 영숙을 우악살스럽게 방문 쪽으로 밀고 갔다. 나는 녀석을 밖으로 밀어 버리고 소리쳤다. "다시는 여기에 오지마!" 영숙은 나를 한동안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지척지척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담 모퉁이로 뭔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긴 흑발의 꼬리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꼭 이진숙의 모습 같았다. 나는 그녀를 뇌리에서 지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끈질기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숙방에 학생들의 출입을 일체 금지시켰다. 한편으로 가슴을 졸이며 이진숙의 다음 전화를 기다렸다. 그날 있었던 일이나 그녀의 전화 내용, 또는 나한일의 언질로 보아 필시 그냥 말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녀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서서히 잊어 갔다. 아니,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5월이었다. 천지가 활기찬 기운으로 충만했다. 산야는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물들어 갔다. 따뜻한 양광이 온 대지에 쏟아져 내렸다. 우리네와 장한숙네는 때맞춰, 우리의 결혼식을 고향 하만시에서 올리기로 결정했다. 피차에 혼수 준비는 생략하기로, 그녀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미 그 돈으로 나의 근무지에 아파트 전세를 얻어 놓았던 것이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동거할 때의 세간만 옮겨오면 되었다. 사실 나는 결혼식도 생략하자고 했다. 여태까지 함께 살다시피 하다가, 결혼을 한다고 남을 부르고 어쩌고 하며, 법석을 떠는 일 자체가 어딘지 좀 웃기는 것 같아서였다. 장한숙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통과제의예요." "때문에 요식행위이지." "내 입장을 생각해 줘요. 혼례복 입은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그녀의 집안에서는 나와의 동거를 완강히 반대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앞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주위에서 그녀를 보는 눈초리도 곱지 않았다. (아니, 저 애가?) 하는 시선이었다. 게다가 나는 어떤 편인가? 사실을 밝히자면 자유분방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쪽이었다. 또 술꾼이었다. 누가 선뜻 딸을 맡기겠는가? 그녀는 입장이 달랐던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졸이며 나를 기다려 온 여자였다.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신혼 여행을 생략하고 바로 K여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방안에 이삿짐을 풀어놓은 채로, 아내를 데리고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가본 곳을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다음 날도 그랬다. 그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날 밤 이삿짐을 마저 정리하고 나니, 내일부터는 출근을 해야 했다. 아내는 볼이 부어 있었다. "학교측에서는 결혼 휴가에 너무 인색했어요! 더구나 직장에서는 아무도 안 왔어요! 어디 그럴 수가 있어요?" "하루에 다녀올 수 없는 곳이니까…… 더구나 학교잖아…… 나 때문에 학교가 휴교령을 내릴 수는 더욱 없는 일이고……." "평교사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교감과 교직원 친목회장쯤은 왔어야죠. 겨우 떠나는 당신에게 얄팍한 봉투 하나만 건네고 말았잖아요." "내가 부덕한 탓이지. 그만두자고." "어쨌든 기분 나빠요." 아내는 정말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나한테는 관대했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안았다. 나와는 반대였다. 그래서 둘은 죽이 맞아 붙어살고 있는 지 모를 일이었다.
아내와 나의 말을 간간이 소음이 먹어 치웠다. 우리는 싸우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파트는 맨 끝, 가장 위층이었다. 옆에는 산업 도로가 있었다. 밤이면 짐을 가득 싫은 화물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질주했다. 아내는 말을 하면서도 그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잠시 후였다. 빠방-! 화물차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내가 듣기에도 굉장했다. 아내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애 떨어지겠어요." 나는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애는 무슨, 임신도 안하고. 조금 있으면 익숙해질 거야. 오히려 이런 소리가 안 들리면 잠이 안 올지도 몰라. 왜, 전에 내가 사다 준 소설책 있잖아. 거기에 그런 대목이 있었지, 아마?" "전 여기가 싫어요. 고향으로 돌아가요. 고향에서 일찍 터를 잡는 게 여러 면에서 유리해요."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아내는 한동안 나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의혹의 눈빛을 띄었다. "자기,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 "무슨? 아니!" "우리가 함께 바닷가를 걸을 때, 따라오는 여자가 있었어요." 아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되살리는 눈치더니 확신에 찬 어조였다. "아냐, 그냥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틀림없는 미행이었어. 거기에다 어제 그녀는 우리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나는 베란다에서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보았던 거야. 한 쪽 눈은 긴 머리에 가려져 있었어. 그녀의 다른 한 눈은 증오로 이글거리는 것 같았어. 그리고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거였어." 나는 화살에라도 맞은 듯 훔칠 놀랐어. 나의 머리로 이진숙의 형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틀림없는 그녀였다. 이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인가? 왜 신혼 초부터 우리의 중간에 끼여들어 훼방을 시작했단 말인가? 그녀와는 아무 일도 없었다. 하긴, 있긴 있었다. 거기에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다. 그것이 값싼 감상이었든, 또는 그녀의 표현대로 위선이었든 말이다. 이런 모든 것을 아내에게 밝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알아 봤자, 아내에게 병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의심을 한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서로에게 유익하지 못하다. 함께 살기가 불편해지는 것이다. 나는 둘러댔다. "단순히 미친 여자야. 우리 학교 선생들도 여러 번 당했어." 아내는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결론지었다. "아무튼 올해만 채우고 고향으로 가는 거예요." 이진숙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날 믿어. 그러나 꼭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지. 거기 한 고등학교 교장의 아들이 내 친구니까. 언제든 오고 싶으면 오라고 했어." "우리 오빠도 고향에서 교감을 하고 있잖아요." "알았어. 그만 자자."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내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뒤척이더니 내 손에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제 잔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잠에 들면 항상 그랬다. 아내는 악몽을 꾸는지 신음 소리를 냈다. 손이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떠나야 할 모양이었다. 아내는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이미 읽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아내는 속아 주고 있었던 거였다. 오랫동안 만나 온 여자였다. 나 또한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내일 출근을 위해 잠을 자 둬야 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이진숙의 얼굴이 허공에 맴을 돌았다. 나는 새벽까지 뒤척이다 설핏 잠이 들었다. 이진숙이 우리 집에 불을 질렀다. 아내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허연 이를 들어내고 깔깔 웃었다. 나는 아내에게 달려들어 불을 끄려고 허둥거리다 잠에서 깼다. 다음 날, 학교에 출근했다. 그리고 인사 받기에 바빴다. 그들은 축하한다고 말했다. 못 가서 미안하다는 말도 첨가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반응이 달랐다. 교실 밖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수업 시간에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 바람이었던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나에 대한 관심은 그들로부터 날아갔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축하 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진숙이었다. "결혼 축하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러나 전화는 이미 끊어지고 난 뒤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담을 타고 오른 수세미외가 탐스럽게 익어 가고 있었다. 주위로 잠자리들이 비상하여 한가롭게 원을 그렸다. 그 위로 청자 빛 하늘이 드높았다. 여름 날 푹푹 쪄 댔던 태양은 제 힘을 잃었다. 서늘한 기운은 온 몸으로 파고들며 심회를 쓸쓸하게 했다. 이진숙한테서는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지금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한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툭 튀어나와 나를 당황스럽게 할 것도 같았다. 나는 거리를 거닐다, 뒤쪽의 예감이 이상하여 돌아보곤 했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였다. 마음이 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안쓰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그녀와 만나 진지하게 대화를 갖고 싶었다. 그것이 어쩌면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 선생이나 나의 전임 국어 선생, 그리고 나, 이들 모두가 그녀의 병을 만들고 깊게 한 장본인들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대로 학교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동료들과 가끔 술자리도 함께 했다. 주로 나한일 선생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과 였다. 그들은 처음에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고 말도 삼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달라졌다. 나한일들은 나를 자신의 아류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주석에서 학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한일은 오늘도 거의 흥분된 목소리였다. "이 학교는 이사장의 측근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 그들은 학교 편제에도 없는 상무, 전무 등의 자리에 앉아 학교를 좌지우지하고 있지. 게다가 그들은 시내에 대형의 컴퓨터, 부기 학원 등을 타인 명의로 개설해 놓았어. 그리고 실과 선생들을 선동하여 학생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 가며 자격증 따기 경쟁을 시키는 거지." 나는 잘 납득이 안 갔다. "위기의식? 자격증 따기 경쟁?" "실과 선생들은 그들의 학원에 학생들을 반강제적으로 보내지. 그러면 그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밖에 없어. 그들은 실과 선생들에게 정기적으로 약간의 떡고물을 줘. 그러면 실과 선생들은 수업 시간에 가르칠 게 없지. 때문에 그들은 알 먹고 꿩 먹는 게 아니겠어? 다른 과목은 들러리에 불과할 뿐이야." "학생들이 내 시간에 컴퓨터나 부기 공부 등을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군요." "맞아. 원래 학교에서 3년 동안 제 수업 시간에 수업만 충실히 들으면 필요한 급수를 따고도 남지. 허나 그들의 장난으로 교육이 엉망으로 되어 가고 있는 거야. 가난한 학생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 것이지. 그 총지휘를 하는 사람이 교감이야. 그는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자청하여 맡아 솜씨 있게 처리하는 인물이지." "왜죠?" "이유는 간단해. 교장은 임기가 다 되었어. 따라서 그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지. 교감이 그 자리를 노리고 있는 거야. 이런 것은 한 예에 불과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구석구석이 썩어 들고 있는 데, 아무도, 아무 소리 안하고 있다는 점이야." 나한일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말해야 한다. 그래서 바꿔야 한다. 즉 불알 값을 해야 된단 말이다." 나한일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선생이야. 학생들로부터 등돌림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돼. 우리의 존재는 그들만을 위해서 있는 거야. 하면은 이사장이나 관리직과는 당연히 적이 될 수밖에 없어. 선생은 학생들에 둘러싸여 있는 한 그 누구도 어떻게 못해. 꼭 명심하라고." "무슨 뜻인지요." "학생들은 항상 이 선생 편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지금 학생들은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그것을 결혼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한일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돌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약점을 건드리며 약을 올리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은근히 부아가 났다. 나는 빈정거렸다. "학생들을 그렇게 만들어 두라는 말이군요. 그리고 어떤 목적에 그들을 이용하겠다는 뜻이고요." 나한일의 말은 단호했다. "옳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학생을 다치게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이든 선생으로서 옳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들을 보호하는 쪽에 서야 하잖아요." "선생들의 그런 보수적인 생각 때문에 우리 교육이 이 모양이 된 거야. 하여 우리 사회가 이 꼴이고." 나한일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를 가지고 놀기 위해서 이런 말들을 지껄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동안 그의 주장을 다시 음미해 보았다. 누가 옳은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한일은 술로 목을 축이며 계속했다. "물론 월권행위지만, 아니 이 선생을 아끼는 마음에서, 난 학생들에게 이 선생의 수업에 대해 물어 보았지. 나는 그들의 말을 종합하여 어떤 결론을 얻었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사실 기분이 나빴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는 나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마음대로 휘젓고 있었다. 좀 지나치다 싶었다. 그러나 참기로 했다. 나는 뭔가에 목이 막힌 소리가 되었다. "예, 말씀하세요." "알다시피 이 학교 국어 책은 인문계 고교의 책을 채택하고 있어. 실업계의 국어 수업 시간은 인문계의 반밖에 안돼. 헌데도 이 선생은 인문계의 수준에 맞춰 학생을 지도하고 있지. 한마디로 피차에 무리를 하고 있다는 뜻이야." 나는 목이 더 잠겨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교양과 문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라고. 학생들 중에는 혹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도 있을 수 있지. 그들에게는 입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만 가르치면 돼. 어차피 그런 공부는 그런 방법이 이 학교 학생들에게 유리해. 더구나 교육은 소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냐. 대학교에 들어갈 생각이었으면 인문계를 택했어야지. 이 학교의 대다수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사회인이 되어야 하는 거야.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어?"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자신에 대한 진로가 수정될 수도 있잖아요." "말했잖아. 그건 소수라고." 나한일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는 곧 장광설을 폈다. "더구나 이곳의 인문계 학생들은, 서울의 유수한 대학에 많은 합격자를 내는 것으로도,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어. 때문에 실업계 학교인 여기는 이곳 인문계 학생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지. 여기는 예향이야. 어느 곳보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곳이지. 인문계 학생들은 입시에 정신이 팔려 있어. 실업계는 취직에만 혈안이 되어 있듯이. 학생들 모두 문예 같은 것은 여가가 있을 때 하는 취미 정도로만 알고 있는 거야. 때문에 지금, 우리의 문학은 고사(枯死) 직전에 가 있는 것이고." 나한일은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실업계는 곧 생활인이 되어야 해. 따라서 우리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예술 같은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이 글솜씨를 닦아 놓는다면, 그 삶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을 기획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 그래서 무료하고 단조로운 사무실 같은 곳에서도 자신만의 풍성한 삶을 획득해 갈 수 있겠지." 나한일은 이제 아예 웅변조였다. "대학만이 학교는 아니잖아. 사회에서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이상의 것들을 배울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초등학교를 졸업했거나 대학원을 나왔거나 즉, 학력과는 무관하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비슷해지는 것을 왕왕 목격하게 되지. 아니, 오히려 식자들의 비현실적인 관념이나 현학적인 자기 포장에 역겨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야. 실업계 학생들이 이 점을 인식하여 자기 연수에 게을리 하지 안는다면, 현실에 발을 딛고 굳건히 서, 거기서부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돼." 나한일은 술을 입안에 탁 털어 붓고 이었다. "나는 그 방법 중의 하나로 문예를 권장하라는 셈이지. 더구나 이 학교의 대다수는 섬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잖아. 그 소재 또한 무시할 수 없어. 평범한 가정에서, 또 그렇게 자란 인문계 학생들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지. 섬은 그들의 정신적 고향이요, 동시에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들의 장점을 살려 잘 지도해 봐. 뭔가 결실이 있을 것으로 믿어. 그러다 보면 그들의 관심은 이 선생에게 집중되겠지." 나는 문득 영숙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다른 영숙들이 그 주위에 있었다. 뭔가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한일 선생은 나를 희롱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사실을 밝히면, 나도 그런 생각들을 진작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나한일 선생이 확실하게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나한일은 뭔가를 도모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나를 그 한가운데로 끌어들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한일 선생의 조언에 따라 수업의 방향을 달리했다. 학생들은 흥미를 갖고 수업에 임했다. 나의 책상 위에는 결혼 전처럼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싱싱한 꽃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나 선생은 나에게 의미 있는 웃음을 보냈다. 나는 민망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교내 백일장에 입상한 학생들을 상대로 문예반 학생을 더 뽑았다. 그들 저마다의 장점을 살려 집중적으로 지도했다. 이제 문예반 거의 10여 편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10월은 각종 문화 행사가 많은 달이었다. 문협 지부와 시 문화원에서 문예백일장과 토론대회가 있었다. 나는 문예반 학생들에게 토론 지도도 병행했다. 그들을 양쪽에 모두 출전시키기로 했다. 백일장을 위해서는 1:1 첨삭식으로 가르쳤다. 토론대회를 대비하여 원고를 직접 써 주어 연습시켰다. 특히 백일장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 미리 당부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갑자기 제목이 주어지면 당황하게 된다. 습작을 했던 작품을 가지고 가라. 거기에 제시된 제목만 붙이면 된다. 가을이란 제목이면 시간 배경만 가을로 정하면 된다. 엉뚱하게 징소리 같은 것이라면 작품의 끝에, 어디선가 징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정도로만 해 두면 된다. 그러다 보면 서로 비슷할 결말이 될 수도 있다. 서로 모여서 써라. 함께 검토하며 각자 세심한 배려를 해야 된다." "그래도 되요?" 영숙이 비웃는 투로 물었다. 그날 하숙방에서 쫓겨난 이후로 둘은 서로 서먹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던지는 말이 그랬다. 그래도 말 자체가 반가웠다. "백일장이 가진 문제점을 내가 보완해 주는 거야. 글은 평소에 많이 써 두는 것이 중요해. 헌데 백일장의 형식은 그런 것보다 잔재주 같은 게 돋보일 수 있거든." 반장의 지적이 옳았다. 나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형식은 형식이 갖는 나름대로의 이유나 그에 따른 정당성이 있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백일장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보다 다른 곳에 더 의미를 두고 있었다. K여상 학생들의 입지를 높여 주고 문학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 주고 싶었다. 특히 인문계 학생들의 실업계 학생들에 대한 편견을 시정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입상을 하고 안 하고는 나중의 일이었다. 다행히 학생들은 문예백일장과 토론대회를 휩쓸었다. 단체상, 최우수상, 우수상, 게다가 지도교사상까지 덤으로 따라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편법을 썼으니까. 아무튼 학교에서는 나를 위해 이사장 표창까지 상신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좀 웃긴다 싶었다. 영숙은 웃는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녀석은 당연히 산문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나는 녀석의 등을 토닥거렸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요즘은 각 학교의 문예반에서 만나자고 들 야단이어요. 이재야 선생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숙은 뭔가를 내밀었다. 선물인 모양이었다. 나는 선물을 받아 들면서 웬지 녀석의 말에 쑥스러워졌다. 학생들을 실험 도구로 내 몰은 게 아닌가 하는 자책도 들었다. 영숙이 나가고 나자 선물상자를 뜯었다. 거기서는 다행히 여자의 속옷들과 아기 젖병이 나왔다. 나의 아내와 아직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자식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마음놓고 웃었다. (녀석은 나의 교사로서 부적합한 모든 행동을 익살로써 감싸줬던 거였다.)
삭풍은 온 도시를 휩쓸고 다녔다. 그에 따라 떨어진 나뭇잎들은 불안하게 거리를 우왕좌왕했다. 나는 나목이 된 가로수를 보며, 그 을씨년스러움에 몸을 웅크리곤 하였다. 아내는 복어처럼 배가 불러 갔다. 그녀는 남편의 늦은 귀가에 무서움과 불안감으로 밤을 밝혔다. 또한 화물 자동차의 굉음에 흠칠 흠칠 놀라곤 했다. 꿈에 이진숙이 보인다고도 했다. 나는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아내는 완강히 고개를 도리질 쳤다. "며칠 전이었어요. 시장을 가다 옆이 이상하여 보았어요. 바로 그 여자가 나의 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거예요. 소름이 끼쳤어요. 눈에 저주 같은 것이 가득 배어 있었던 거예요. 맞아요. 당신의 말대로 정상적인 여자가 아니었어요. 해서 더 무서운 거예요." 이진숙, 너는 왜 나한테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고 아내를 괴롭히는가? 허공에 그녀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름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 방에 기름을 흘려 넣었다. 이어서 성냥불을 지익…… 등줄기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나는 임신한 아내를 고향에 보내고 싶었다. 시가이든 친정이든 말이다. "고향에 당분간 가 있는 게 좋겠어." "나도 그러고 싶어요. 밤새 무서워 못 견디겠어요. 알아요? 내 마음?" "미안해." 이어서, 아내는 무엇인가 생각해 낸 듯, 어이가 없다는 투로 웃기부터 했다. "그런데, 그 마담이 누구요?" "?" "어제 일, 생각 안나요?" 나는 아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제 어쨌다는 것인가? 나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튀어나온 배를 끌어 않고 낄낄 웃었다. 그리고 빈정거렸다. "자정에 벨 소리가 들렸어요. 귀하신 우리 서방님께서 오늘도 무사히 오셨구나, 하고 반갑게 문을 열어 주었죠. 그런데 당신은 나를 낯선 사람처럼 한동안 바라보는 거예요. 하더니 손가락에 침을 묻혀 허공을 가르며, 오늘 외상,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손을 펴 흔들며 뭐랬는지 알아요. '마담, 바이 바이' 했어요.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어요. 다시 올라오겠지 하고 기다렸지요. 헌데 30분이 지나도 안 오는 거지 뭐요. 나는 내려가 볼 수밖에 없었죠. 하나밖에 없는 우리 귀하신 서방님이니까." 아내는 분명 나를 놀리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화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삭이었다. 나는 뭔가 큰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3층을 지날 때였어요. 당신의 노래 소리가 나는 거예요. 문을 열었어요. 그 집은 늦게까지 회갑잔치를 치르고 있었어요. 잔치 집에서는 처음에 당신을 하례객으로 착각하고 들여보냈대요. 헌데 그와는 무관한 5층에 사는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죠. 선생님 체면도 있고 하여, 할 수 없이 그대로 즐기게 놔뒀다는 거지 뭡니까." 아내는 한숨까지 후우 내쉬었다. "당신은 모인 사람들을 차례로 노래를 시켰다고 해요. 아파트 아녜요. 주위를 생각하여 모두 거절했더니, 당신이 손수 한 열 곡을 연달아 뽑더래요. 그때 내가 가 모셔 온 거지요. 당신, 생각이 안나요?" 나는 도통 기억에 없었다. 그녀는 창작력이 부족하다. 절대 이런 허구를 만들어 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여자는 더욱 아니었다. 아내는 정색을 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허송 생활을 할 거예요. 이젠 정신을 차려야지요. 게다가 당신은 선생님이잖아요."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거의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어떤 때는 나한일 선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학교의 부조리를 안주 삼아 밤을 세웠다. 그만큼 직장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했다.
학년말로 접어들고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곧, 고3이 될 터였다. 문예백일장과 토론대회의 열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학생들에게는 취업이 우선 시급한 문제였다. 나의 수업 시간에 다시 정보처리 기능사, 또는 사무 자동화 자격 수험용 책 등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내가 지껄이는 말은 모두 헛소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문계는 어떨까? 나는 문득 인문계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과목이 대접받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교감이 사환을 시켜 매점에서 나를 찾았다. 나는 왜 하필 매점인가 싶었다. 나는 매점으로 갔다. 교감은 겨울방학 동안 독후감 숙제를 하도록 권했다. 아니, 명령했다. 그는 그 자료로 한국문학전집 한 질을 보여줬다. 제본, 지질, 맞춤법 모두 엉망이었다. 숙제용으로 그 책들을 학생들에게 권하라는 거였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매점을 나갔다. 교감이 내 뒤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그러면 곤란할 텐데……." 나는 속으로 크게 답변했다. "마음대로 해보셔!" 교감은 나를 빼놓고 다른 국어 교사들을 설득하여, 기어코 그 책들을 숙제용으로 추천하게 했다. 물론 교감은 업자들로부터 촌지를 챙겼을 테고, 그 나머지는 위와 나 이외의 국어 교사들에게, 적당히 배분했을 거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독후감 숙제를 내지 않았다. 대신 아무 글이나 쓰고 싶은 대로 한 편씩 써 오도록 했다.
나날이 근무 기강이 풀어지고 있었다. 숙취로 거동이 용이치 않아 결근하는 날도 생겼다. 꼭이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직장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일요일에 배를 타고 섬으로 나가 일부러 월요일 저녁에 돌아온 날도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하여, 교감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제미, 그만 두려면 그만 두든지……." 평소에 불만이 많던 나는, 교감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그는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나를 경계의 눈길로 보고 있었다. 나한일 선생과 어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보내어진 시선이었다. 이사장 표창은 부지불식간에 어디론가 꼬리를 감췄다. 교감은 슬금슬금 나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그의 태도는 나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 그의 시선은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대했다. 피차에 어떤 형태로든 터져야 할 시한폭탄을 내적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내는 이곳 사람들과 웬일인지 잘 사귀지 못했다. 잊어버릴 만하면 부딪히는 이진숙과의 상면도 마음에 쓰이는 것 같았다. 새벽에 귀가하는 남편, 그리고 화물 자동차의 굉음, 악몽 등을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떤 때는 잠에서 깨어나, 꿈에 여학생들이 나타나, 나를 끌고 가면서 자신을 놀리더라고 훌쩍이기도 했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의 신경이 아주 쇠약해진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렇다면 태아에게도 좋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를 서둘러 고향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곳에 가 장모, 그리고 처형들과 어울리다 보면 괜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정에 가는 게 좋겠어." "당신 밥은?" "해먹지." "자기가?" "아님, 사 먹든지." "그래요. 여기에 조금만 더 있으면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당신도 그곳으로 아주 가요. 자기는 직장의 첫발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무질서해요. 처음에는 낯선 곳에 익숙해지기 위한 연습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자기의 문학적 토양을 일구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어요." "……." "그게 아니었어요. 순전히 맹목, 바로 그 자체였어요. 표현은 안했지만 난 무척 실망스러웠어요. 삶의 항로를 잘못 잡았다는 마음도 들고요. 때문에 고향에 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요. 내가 오빠나 당신 친구에게 자리를 알아보겠어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나도 현재 근무하는 학교와 이 도시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내의 말대로 꼭이 고향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가 새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나도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교정은 세월이 흐를수록 용이치 않았다. 비끗했을 때 바로 바로잡아 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미루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곳에 서 있기 마련이었다. 우선 아내부터라도 친정에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순순히 응했다. 게다가 그녀는 고향으로 가면서 이곳을 아주 떠날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언니들을 불렀다. 처형들은 차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필요한 물건을 모두 챙겨 갔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읽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고 따라오라는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여기서 뭔가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 적절한 계기가 조만간에 찾아 주길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퇴근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어이, 이 선생!" 나한일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았다. 나한일과 가정을 가르치는 김 선생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김 선생은 가끔 우리와 어울려 막걸리도 마셔 줬던 여자였다. 지금은 만삭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술자리 같은 데에 어울리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췄다. 나한일이 말했다. "혼자 퇴근할 셈인가? 함께 가지!" "언제는 안 그랬나요. 헌데, 나 선생님이 안보이더군요." "음, 김 선생과 도서실에서 이야기를 좀 했어." "밀담?" "밀담…… 허허 그렇지."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술 생각은 별로 없어. 다방 같은 곳이 좋겠군." 우리는 다방에 가 앉았다. 추운데 있다가 난방이 잘된 곳으로 들어가자, 곧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한일과 김 선생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나는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김 선생 문제야. 산달이 가까워져 휴가를 내려 하자 사표를 종용하고 있는 거야. 학교측에서는 여선생들이 결혼할 경우, 사임하겠다는 서약서를 미리 받고 채용하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나도 이제 이 학교의 돌아가는 꼴새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선생들이 많이 남아돌고 있었다. 여선생은 더했다. 특히 여자들만의 전공과목인 가정은 교원 적체가 말이 아니었다. 학교측에서는 특히 그런 과목들에 대해 월급을 덜 주는 신임 교사를 선호했다. 그래서 만든 장치였다. 물론 학교측에 잘 보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김 선생은 처음의 결혼 문제에서는 그랬다. 그녀는 실력도 좋고 성실했다. 학교의 모든 일에 솔선 수범이었다. 한마디로 학교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와 어울려 준 게 탈이었다. 꼽고 있다가 밀어내는 것이었다. 김 선생은 울먹였다. "억울해요. 더구나 방학을 얼마 앞두고 미리 사직을 하라는 거예요." 나는 나한일을 바라보며 거의 신음처럼 뇌까렸다. "몇 달 치의 월급마저 갉아먹겠다는 소행이군요." "그래, 맞아." 나한일은 김 선생을 보았다. "집으로 먼저 가요. 내가 이 선생하고 방안을 마련해 보겠어요." 나한일은 김 선생에게 눈길로 재촉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녀는 먼저 나갔다. 나한일은 카운터로 갔다. 그는 열심히 번호판을 두들겨 댔다. 잠시 후, 동료 몇 사람이 다방으로 왔다. 우리는 학교측의 이런 야비한 조치, 그리고 그간의 비리와, 그 시정 방안에 대해 문서화하기로 했다. 나한일이 말했다. "문안의 작성은 소설가인 이 선생이 하지." "좋습니다. 오늘 집에 가서 만반의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나는 아주 흔쾌히 답변했다. 그 어떤 계기가 예상외로 빨리 찾아 주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이상의 일도 불사할 심산이었다. 나는 그간 보고 들었던 것을 토대로 문안을 작성했다. 관리직의 비리와 그들의 옳지 못한 교육 관행이, 그 주가 되었다. 다음 날이었다. 우리는 교장실로 갔다. 나는 복사한 문안을 교장에게 내밀었다. 교장의 얼굴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교장은 이번 학기만 잘 넘기면 명예로운 정년 퇴임을 할 수 있었다. 괜한 소용돌이에 휩쓸려 오점을 남기고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교감도 교장이 되려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때를 잘 택했다고 생각했다. 교장은 경직된 얼굴로 우리의 의견을 읽고 있었다. 나는 교장의 시선이 문안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리다, 말했다. "방학 전까지 교무회의에서 공식적인 사과와 동시에 시정 방안을 내놓지 않으면 각계 요로에 건의하겠습니다. 물론 교장 선생님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교장은 우리를 무시한다는 눈초리로 한 번 쓱 훑어봤다. 그러나 그는 내심 당황한 눈치였다. "아, 알았으니, 그만들 나가 봐요." 교장은 즉시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며칠 동안 교무실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하여 간부회의가 열렸다. 물론 그들의 회의 내용은 우리에게 차단되어 있었다. 교무실은 항상 무거운 기류가 꽉 찍어누르고 있었다. 나한일 이외의 주임급 이상은, 우리를 아주 무시하고 말도 걸지 않았다. 나는 대어가 걸린 낚싯대를 잡은 것처럼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흥분감으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 뭔가 터져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훌훌 털고 이 학교를 떠날 생각이었다.
방학식 날이었다. 퇴근 무렵에 기다리던 임시 교무회의가 소집되었다. 교장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교장은 우리가 상정한 문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퇴임이 가까워 오자, 그간 교직 생활에서 보고 느꼈던 일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문집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거기에 매달리다 보니 학교 일에 잠시 등한히 했습니다." 나한일 선생은 나에게 고개를 돌려 한 쪽 안면을 일그리며 속삭였다. "웃기네. 전부 거짓말이지. 교감보다 한 수 더 떴던 친구야." 교장은 나한일 선생과 나를 한동안 쏘아보더니 말했다. "물론 나에게 찾아온 몇몇 선생들의 주장이 모두 맞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작성해 온 문안에는 나를 협박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상당히 불쾌하다는 심정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교장의 얼굴에 정말 불쾌한 표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말씀을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씀하시죠. 퇴근해야 할 시간이 이미 지났습니다." "앉아요. 헌데 이 선생은 경력이 얼마나 되지요." "1년도 안됐습니다. 경력이 얼마 안되니 말할 자격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여기에 앉아 있을 필요도 없으니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제 혼자의 힘으로라도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그럴 땐, 경력이 짧다는 것이 강점이 되겠지요." 나는 교무실 문을 향해 걸었다. 교장의 얼굴은 창백하게 바뀌었다. 교감이 뛰어 와 나의 팔을 잡았다. "아니, 자네 왜 이러나?" 교감을 노려보았다.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교감, 반말하지 마세요. 여기는 학교입니다. 나는 선생이고요." 교감은 못 들은 척 나를 끌어안아다 내 자리에 앉혔다. 교장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했다. "허, 교직 40년에 처음 당하는 봉변입니다. 아무튼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무 경솔해.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지." 교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 내고 있었다. 당장 요절을 내고 싶다는 저의가 눈에서 번뜩였다. 그는 이윽고, 쇳소리를 냈다. "아무튼 가정 선생의 퇴임은 일단 유보하고, 일부 선생들이 주장하는 시정에 대한 건은, 다음 학기부터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시정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교장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교무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교감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읽고 있었다. 내년이면 이 건은 유야무야가 되고 만다. 나는 교장이 되어 있다. 너희들이 각계 요로에 진정을 하겠다고 협박했지만, 나는 안 당한다. 기껏해야 도교육청 같은 곳에서 시정명령서 한 장 접수하면 그만이다. 이 세상은 모두 강자 편이다. 너희들은 학교 명예훼손으로 파면감이다. 특히 이절노, 나한일, 너희 두 놈은 이제 건만 잡히면 끝장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알겠냐? 이 멍청한 놈들아! 교감은 다시 허부죽 웃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선생들을 의식해 억지로 만들어 낸 웃음이었다. 동시에 허약한 자의 그것이기도 했다. 교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들에게 퇴근해도 좋다고 선언했다. 모두 부리나케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가정 교사 김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무실에는 나한일 선생과 나만 남았다. 그와 나는 퇴근을 하여 술집에 마주 앉았다. 나는 볼멘 소리였다. "오늘은 함께 모여 마시고 싶었는데……." "순진하긴. 세상사, 인간사 다 그런 거야. 그런 것 신경 쓰지 말라고. 오늘 잘했어. 내 교직 시작할 때를 보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기분이 좋아. 자, 술이나 마셔." 나는 나한일이 따라 주는 술을 거푸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의 불길이 좀 잠드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여기 계속 있을 건가?" "글쎄요. 특히, 아내는 고향으로 갔으면 해요. 아니, 아예 갔는지도 모르지요." "고향이 어디라고 했던가……" "하만시, 안개가 충만한 곳이라는 뜻이죠. 원래 늪지였어요. 바다에 면해 있죠. 버려져 있었던 땅입니다. 일제가 경부선을 만들며 거기에 역을 설치했어요. 그때부터 갑자기 커진 겁니다. 한마디로 급조된 도시이죠. 게다가 미군 기지촌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그곳에 모여들었다가, 그것이 성취되면 곧바로 떠나는 곳이죠. 따라서 애향심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그런 것이 없어요. 요즘은 전국 어디를 가나 그렇지만…… 아무튼 내 마음에 안 드는 곳입니다." "하만시는 서울 근처이지?" "한 시간 거리예요." "가라고!" "예?" "조직의 악순환이란 말 아나?" "예?" "썩었어. 있다 보면 함께 썩게 돼." "어디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가 가라는 이유는 대학원에 진학을 하든지,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는 말이야. 하려면 먼저 서울 가까운 곳으로 가야 돼. 이 선생은 나처럼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아." "저는 몰라도 나 선생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 데요." "그렇게 말하면 거꾸로 이지. 오히려 이 선생 같은 사람이 필요해." "에이, 전 아녜요." "내년엔 꼭 가라고." "하면, 나 선생님 혼자 남게 되잖아요." "그렇지 않아.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함께 모이게 되어 있어. 물론 그것을 차지하거나 자신이 얻으려는 것보다 위험이 더 크면 다시 흩어지지만…… 하다 보면 언젠가 나는 쫓겨나겠지, 아니면 스스로 물러나거나, 그렇게 되겠지." 나는 웬지 나한일이 교직을 떠날 것 같았다. 나한일은 술을 손수 따라 마시며 이었다. "세상 사람들을 선민, 평민, 우민, 원민으로 나눌 수 있지. 선민은 선택된 자들, 평민은 평범한 사람, 우민은 우려할 만한 사람, 그리고 원민은 원한이 있는 사람이야." 나한일은 한동안 뜸을 드렸다. 나한테 잘 들어 두라는 뜻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것도 뭔가 복선이 깔린 말로 들어야 했다. "우민은 먼저 원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그리고 평민을 선동해 선민을 공격하게 돼. 선민은 잘못하여 한 번 당하면 헤어나기가 힘들어. 그것을 우리 역사에서는 혁명이라고 부르지. 물론 성공했을 때의 경우야. 그렇지 못하면 반란이 되고 역적이 되는 것이야. 개국 왕과 공신들이 전자에 속하고 망이·망소이, 녹두장군 등은 후자에 속하지. 임꺽정, 홍길동 등은 그 중간이라고나 할까? 제일 비겁한 경우가 김삿갓, 즉 김병연 같은 경우지. 세상을 저주하며 뒤에서 욕이나 하는……그것도 말장난으로……." 나는 웃으며 받았다. "그럼, 전 어느 쪽인 가요?" "우민 정도가 되겠지." "전, 그렇지 못해요. 아마 김삿갓 정도가 되겠죠. 아니 그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죠. 그래도 그는 천재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름대로 세상의 부조리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었고요." "난, 가능성을 놓고 하는 소리야. 전에는 전혀 못 느꼈어. 그런데 오늘 하는 걸 보니 그래. 뭔가 반골 기질이 있어. 이 선생 앞길이 심상치가 않아. 내가 괜히 이 선생을 끌어들인 것 같아.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줬다는 말이야." 나한일은 걱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거기에 애정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가 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들어요." 나한일은 심각한 얼굴을 풀었다. 그는 소탈한 술꾼의 모습으로 돌아 가 있었다. "동생, 그거 좋지. 오늘 몇 집을 순례하며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시자고. 교장과 교감을 위해서. 그들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야. 어쩌면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고. 자, 교장과 교감을 위해서 건배!" "건배!" 우리는 비틀거리며 거리에 서 있었다. 바다를 낀 도시의 겨울밤은 매섭도록 찼다. 술기운 속으로 한기가 파고들었다. 이가 으다닥 떨려 왔다. 차들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했다. 택시를 잡았다. 나한일을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내 귀를 잡아끌었다. 그는 속삭였다. "너, 꼭 고향에 가. 안 가면 내가 쫓아 버린다." 나는 얼결에 대답했다. "알았어요." 나는 집으로 가며 예감했다. 내가 이곳에 남 건, 다른 곳으로 가든, 그는 항상 내 곁에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며 간섭을 할 것이다라고.
방학이 되어 하만시로 갔다. 아내는 심신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음식도 잘 먹었다. 아이를 가진 사람 특유의 자긍심과 만족감이 얼굴 가득 피어올라 있었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배를 쓰다듬곤 했다. 보기 싫은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풍토병을 알았던 모양이지." "농담하지 말아요. 내게는 신혼이 지옥이었어요. 참, 부친이 교장인 여기 당신 친구에게서 오늘 연락이 왔어요. 내가 여기로 오자마자 전화로 당신의 뜻이라며 부탁을 해 두었거든요." "……?!" "마침 국어 선생이 유학을 가게 되었대요. 내일 이력서를 가지고 학교로 나와 아버지를 뵈래요." 막상 자리가 생기자 망설여졌다. K여상의 일이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 새 학기를 지켜보며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일의 중간에 도망치는 기분이었다. 나한일 선생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아내는 학교에서 나의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직장에서의 일에 관하여 전혀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것들을 알고 싶어했다. 아내로서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지껄여, 아내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참 후, 어눌하게 말했다. "좀 더 생각해 보자고." "난, 절대 그곳에 가지 않겠어요. 한 번만 내 의견에 따라 줘요." 아내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빛났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날 밤,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내가 권하는 학교에 가 봐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서 초임 벽두부터 갈등을 겪어 온 내가 아니던가? 현재 나의 입장으로서는 우선은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무엇보다 아내를 위해서…… 그러나…… 하긴, 나한일 선생도 이해할 거였다. 그 또한 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문제는 내 자신이 떳떳치 못하다는 데 있었다. 게다가 3년 근무의 약속을 채우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경우가 달랐다. 그들은 이제 내가 한시 바삐 떠나 주길 고대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튼 머리가 복잡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밝자, 이발과 면도를 했다. 옷도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친구 아버지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야 했다. 어쩌면 교직을 그곳에서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친구네 학교니까. 택시로 학교에 도착했다. 서무실을 통해 교장실로 가니, 교장과 교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이력서를 내놓았다. 교장은 이력서를 쓱 훑어보고 말했다. "아들 녀석한테 모두 들었어." 교장은 교감에게 말했다. "씁시다." 교감은 불만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는 볼멘 소리를 냈다. "제가 말씀드린……" "무경력자는 곤란해." "그래도 형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형님?" 그렇다면 진작에 알고 있었다시피 부인은 이사장, 동생은 교감, 집안끼리 다 해먹는 학교인 모양이었다. 교장과 교감의 의견 불일치에도 뭔가 교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만 같았다. 봉투 같은 것을 미리 챙기고 누군가를 천거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다. 아마도 이 학교 역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닐 것 같았다. 잘못하면 친구와의 사이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마음이 켕겨 들기 시작했다. 나는 어눌하게 말했다. "추천한 다른 선생님이 있으면 그를 채용하는 게 좋을 듯 싶군요. 전 현재 근무하는 곳이 있고요." 교감은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교장 선생님, 그렇게 하세요." 교장은 한 마디로 잘랐다. "채용하겠어. 서무과장에게 서류를 준비해 주라고 해." 교장은 나를 보며 말했다. "나가 봐요. 서무과장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예." 나는 얼결에 대답을 하고 서무실로 갔다. 서무과장이 축하한다고 말하며 서류제출 목록을 인쇄한 종이를 전했다. 역시 얼떨결에 그것을 들고 서무실을 나갔다. 나는 한동안 운동장에 멍청히 서 있었다. 채용 당한 것이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만 것이었다. 친구 부친에게, 아니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번복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 자신을 향해 쓰게 웃었다. 반면 아내는 잘되었다고 좋아했다. 나는 필요한 서류들을 만들고 건강진단서를 첨부하여 서무과에 제출했다. 경력증명서는 K여상에서 학년을 마치고 갖다 줘야 했다. 나는 당분간 그곳에 갈 필요가 없었다. 이제 개학이 되면, 가서 반 달 정도를, 그 학교에서의 마지막 정리만 해주면 되었다. 시원하고 섭섭했다. 그리고 찜찜했다.
개학이 되자, 다시 하숙을 시작했다. 전에 하숙을 들었던 집은 방이 모두 차 있었다. 할 수 없이 그 근처의 한 집을 택했다. 아내는 방학 동안에 이미 아파트 전세금을 빼내고, 남은 이삿짐을 모두 옮겨갔다. 내가 마음이 변할까 봐 선수를 친 거였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도서실로 나한일을 찾아갔다. "학교를 고향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학교는 정해졌나." "예, 인문계 남학교입니다." "그래…… 잘됐군……." 나한일의 얼굴에는 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이 선생, 덫에도 치이지 말고 함정에도 빠지지 마. 그러면서 이 선생 자신을 지켜 가도록 노력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사직서를 써 교장실로 갔다. 교장과 교감이 앉아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교장이 인상을 팍 구기며 말했다. "이 선생, 또 뭐요?" "사직원입니다." 교장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아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거였다. "이거 섭섭하게 되었구먼. 고향으로 가나요?" "예." 교장은 잽싸게 나의 사직원을 채어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그래야지요. 여러 면에서 이 선생에게 좋은 일이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멀뚱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안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볼 일 다 봤으면 나보고 이제 나가라는 뜻이었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끝말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은 가끔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곳에서의 끝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자주 들리던 술집에 가 보았다. 그간의 추억을 반추하며 해안도로도 돌았다. 막상 떠나려니 꽤 정든 곳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몇몇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스쳐 갔다. 그 끝에 이진숙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한 번 만나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수소문하여 찾았지만 알아낼 수가 없었다. 떠날 날짜가 임박해서야 그녀의 소재를 알 수 있었다. 퇴근하여 귀가를 하는 데, 이진숙이 어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집은 학교 밑,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숙을 하고 있는 바로 옆 골목이었다. 영숙의 집도 그 근처로 알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어이가 없었다. 일면 이해도 갔다. 그녀는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집의 문패를 보고 주소와 성명을 따 두었다. 나는 전화번호부에서 전화번호를 알았다. 전화를 걸었다. 곧 끊었다. 그녀의 아버지로 짐작되는 남자의 쉰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 온 때문이었다. 다음 날이었다. 그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음성이 튀어나왔다. "누구시죠?" "이절노입니다. 저 모르시겠어요?" "……."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숨소리만 들렸다. 그녀가 틀림없었다. "이제 여기를 떠납니다. 오늘 저녁, 처음 만났던 다방에서 7시에 만났으면 합니다." "……."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시간에 맞춰 약속한 장소로 갔다. 그녀는 없었다. 1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출입구에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다가 와 내 앞에 앉았다. 색안경을 착용한 것 외에는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얼굴의 반쪽을 가렸던 머리가 많이 비켜선 것이었다. 그녀는 전과는 다르게 머리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의 눈을 정시하며 말했다. "왜 날 찾았어요?" 나는 그녀를 자세히 봤다. 어디에도 정신이 이상한 여자라는 흔적은 없었다. 나는 어눌하게 말했다. "사과를 하고 싶어서요. 전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모두 잊었어요.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 나올까 말까 한동안 망설였어요. 그런데 혹, 전임 선생님처럼 나 때문에 떠나는 건 아녜요?" "사람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겠지요." "부정은 안하는군요. 나도 언젠가 한 번은 선생님을 뵙고 싶었어요. 해서 나오기로 작심한 거지요." "그건 왜죠?" "나름대로 자신이 섰던 거죠. 저는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지요. 선생님의 부인이 임신을 했을 때였죠. 나는 그 분을 최 선생님의 사모님으로 착각했어요.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화상의 부분도 정형했고요." 이진숙은 침착했다. 전혀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소문은 부풀기 마련이지요. 그것은 본시 그런 것 아네요. 아무튼 나가요. 선생님과의 첫 추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이진숙의 표정은 밝았다. 나도 마음에 드리워졌던 구름이 벗겨져 가고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는 처음 만났던 날처럼 생맥주집과 폐선으로 만든 주점을 순례했다. 이어 방파제를 걸었고, 결국 여관에 들었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제의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진행된 일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 둘은 서로와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진숙은 색안경과 옷을 벗었다. 그녀는 속옷 차림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곧 샤워를 하고 나왔다. 큰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였다. 첫날 그녀의 행동을 의식하여, 나는 전등을 끄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을 손짓으로 완강히 저지했다. 나는 그녀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한쪽 모서리로 몸을 옮겼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언젠가 선생님 댁에 한 여학생이 밤늦게 간 적이 있었지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전에 거처하던 하숙방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찾아온 학생이 어디 하나 둘이던가. "누구?" "선생님은 화를 내며 그 학생을 밀어냈어요." "아, 이영숙." "만약, 그때 선생님이 다른 짓을 했다면 난 정말로 당신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 "최 선생님은 시인이었죠. 난 그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어요. 최 선생님 역시 그랬지요. 선생님은 날 임신시켰어요. 겁이 더럭 난 선생님은, 저를 다른 도시의 산부인과에 억지로 끌고 가, 낙태 수술을 시켰지요. 나는 반대했어요. 아이를 낳고 싶었던 거예요. 알겠어요? 그때의 제 마음을?" "……!" "선생님은,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 아니냐. 나를 좀 봐줘라. 아니다. 이것은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네가 졸업을 하면, 나는 학교를 옮겨 가 너와 결혼식을 올리겠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라.'라고 저를 설득했어요. 그때, 그 말을 믿었던 거지요." 이진숙은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계속하며 이었다. "오래지 않아 거짓말임이 곧 드러났지요. 선생님은 약혼을 한 상태였던 거예요. 최 선생님의 하숙방에서, 바로 그 선생님의 결혼 청첩장을 발견했던 거예요. 나는 순식간에 홱 돌아 버렸죠. 어렸으니까요. 감당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진숙의 목소리에 비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는 나의 팔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날 정면에서 안을 수 있어요?" "그러고 싶어." "자, 이래도?" 이진숙은 나의 앞에 섰다. 그녀는 양손을 들어 머리칼을 뒤로 넘긴 채 나를 바라보았다. 정형을 했다지만 샤워에 화장이 지워져서인지, 아직 흉터가 거무스레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전처럼 그 부위가 흉한 모습은 아니었다. 게다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전체적으로 애상적인 아름다움을 풍겼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덥석 안았다. 그녀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 절, 노, 선생님……."
학교에서 나의 송별식을 해주었다. 교장 이하 전 직원이 모이는 회식이 되었다. 나는 건네는 술잔마다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나한일은 나와 교장을 번갈아 보며 이죽거렸다. "평교사가 1년만에 떠난다고 이렇게 교장까지 참석해 주는 송별식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걸. 내가 갈 때도 그럴지 모르겠어. 그러니 이 선생, 다른데 가서 이 학교에 대해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 그리고 군말 없이 잘 가라고." 교장은 인상을 찌푸리고 나한일을 노려보았다. 나한일은 그것을 묵살하며 껄껄 웃어 버렸다. 자리가 파하자 나한일은, 외톨이가 될 뻔한 나를 끌고 가 술을 억수로 퍼 먹였다. 그리고 여관에 함께 들어줬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여관을 나가며 나한일에게 말했다. "꼭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그래, 방학 때 놀러 와." "예, 그래야지요." "내가 기차역까지 함께 가 줄께." "그럴 필요까지는……." 나한일은 택시를 잡아 나를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는 매표구에 달려갔다 와, 나에게 기차표와 흰 봉투를 내밀었다. "가면서 속 풀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한일의 여러 가지 세심한 배려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개찰구를 빠져나가 잠시 기다렸다. 기차가 플렛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에 오르려는데 누군가가 불렀다. "선생님!" 돌아보니 영숙과 나한일이 승객들 사이에 서 있었다. 나는 놀랐다. 영숙이 어떻게 내가 떠나는 시간까지 알고 있었을까? 나는 곧 또 한 번 놀랐다. 영숙의 뒤에 이진숙이 보였다. 원래부터 둘은 아는 사이였던가? 나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이진숙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그것을 내밀었다. "우리 자매는 오늘 새벽부터 여기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가 주는 선물이에요.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빌겠어요." 무엇에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얼결에 이진숙이 내미는 것을 받아 들고, 나는 멍청히 있었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열차에 올랐다. 뒤를 돌아보았다. 나한일, 그리고 이진숙들이, 이 도시로 올 때 장한숙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듯이, 또 그네들도 나에게 손을 저어 주고 있었다. 나는 눈알이 쓰려 와 고개를 돌렸다.
기차는 힘차게 내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차창에 펼쳐지는 경관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친구네 학교의 교장실에서 면접을 볼 때, 이미 파악한 것이 아니던가? 그 학교의 교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물어뜯을 것이다. 형의 아들 친구를 바로 옆에 놓고 하는 수작이 그 모양이라니…… 어쩌면 그 교감은 자신의 형인 교장에게, 나에 대한 모함도 불사할 것이다. 그는 K여상의 교감보다 한 수 위면 위지, 그 이하는 절대 아닐 터이다. 게다가 내 마음을 잡아끄는 고향도 아니다. 나는, 어차피 그들과 갈등을 겪다, 또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저 플렛폼에서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