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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45
요한계시록 12:1-6
여자와 아들과 용
일곱째 나팔에 대한 말씀이 끝나고 일곱 대접에 대한 말씀이 주어지기 전에 심판의 본질과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혀준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1절).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해를 옷으로 입고, 달을 밟고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극히 권세 있고 영광스러운 다스림의 모습을 말씀한다. “이적”의 헬라어 ‘세메이온’은 ‘표적’으로 구약에서 언약의 표로 나타낸 ‘오트’의 역어이다. 즉 하나님 언약을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어떤 표시를 하늘에 나타내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여자”는 하와나 마리아와 같은 어떤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창 37:9-10)
해와 달은 요셉의 부모이고 열한 별은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이라면 열두 별은 요셉까지 포함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해와 달과 별의 이미지로 이스라엘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20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19-20)
“해”와 “달”을 빛에 비유하여 그것을 능가하는 여호와의 영광이 백성들에게 비출 것을 말씀한 내용이다. 시편에 보면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시 104:2)라고 하였는데 “빛”을 입으신 것을 “해”와 동일시한 것으로 본다면 오늘 본문의 이미지를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창세기에서 큰 광명, 작은 광명 그리고 별에 대한 창조의 말씀(창 1:14-18)으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반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씀하는 “여자”란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담겨진 존재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할 메시아를 이 땅에 오게 하는 통로로 사용된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2절)라고 말씀한다. 여자가 낳는 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5절에서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밝혀준다. “철장”이란 (헬, ‘라브도 시데라’) ‘철 막대기, 쇠 지팡이’라는 뜻으로 심판의 권세를 상징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7-9)
다윗의 시에서 말씀하는 “아들”은 당연히 ‘다윗’이다.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한다(삼하 7:13-14, 시 89:27-28). 여자, 즉 이스라엘이 해산한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해산의 고통을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라고 묘사한다. “아파서”의 ‘오디노’는 단순히 아픈 것이 아니라 ‘출산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이다. 여자의 출산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전하였다.
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사 26:17-18)
이사야 선지자의 이 선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포로가 되는 이스라엘의 고통과 고난을 잉태와 출산으로 비유한 것이다. 즉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데 그것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고통과 고난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다루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후손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할 것이라는 뜻으로 보여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여자가 낳는 아들에 대해 이미 예언하였고,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마태는 선언하였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1-23)
여자가 낳은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 약속이 지향하는 바대로 살아야 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여자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로 한정하여 여자라고 지칭한 것이 아니라 출산의 고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교회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단순히 어떤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환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해산하는 하늘의 교회를 말씀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교회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과 고통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시는 이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여기서 “의지하게 하심이라”라는 말의 헬라어 ‘페이도’는 ‘설득하다, 신뢰하다, 복종하다’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뢰, 복종 아래 들어가게 하심을 의미한다. 결국 환난,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심으로 그 믿음, 복종이 되게 만드신다는 뜻이다.
이제 여자의 출산이 고통 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3절 이하에서 밝혀준다. 여자에 대한 큰 표적이 요한 사도에게 환상으로 보여진 순간 또 다른 표적의 환상이 펼쳐진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3절). 여자에게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큰 붉은 용”이 여자가 해산하는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 성경에 “큰 붉은 용”이라고 하였는데 문자적으로 ‘불타는 용’이란 말이다. 즉 살의로 가득한 포악성을 표현한 말이다.
“머리가 일곱”이라는 말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이 드러낸다는 뜻이고, “뿔이 열이라”라는 말은 완전한 힘과 권세를 지니고 승리하는 존재라는 뜻이고, “왕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이 세상의 임금”(요 12:31, 14:30)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헬라어 ‘디아데마’는 ‘왕이 쓰는 관’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관을 성도가 쓰는 면류관(헬, ‘스테파노스’, 2:10, 3:11, 4:4,10, 6:2, 9:7, 12:1, 14:14)과 용이 쓴 왕관(헬, ‘디아데마’, 12:3, 13:1, 19:12)을 다른 것으로 구분하면서 ‘스테파노스’는 좋은 의미의 관이고 ‘디아데마’는 짐승이 쓰는 나쁜 의미의 관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헬라어 자체에 그런 의미는 없다. ‘스테파노스’는 당시 경주에서 이긴 자에게 씌워주는 ‘월계관’이고 ‘디아데마’는 왕이 쓰는 ‘왕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 면류관”(14:14)이라는 ‘스테파노스’와 “많은 관들”(19:12)이라는 ‘디아데마’를 썼다고 둘 다 표현하였다.
“큰 붉은 용”의 정체를 9절에서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라고 하였다. “큰 용”이 “옛 뱀”(헬, ‘호 오피스 오 아르카이오스’)이라면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선악의 나무를 취하도록 한 그 존재를 의미한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불뱀”(민 21:6)을 보내 심판하시고 불뱀을 “놋뱀”으로 만들어 장대에 매단 것을 쳐다보면 살려주는 은혜를 입히셨다(민 21:8-9).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라고 말씀하셨다.
광야의 불뱀으로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지 않고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불타는 용은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이요 그리스도로 가장하여 드러내는 자이기에 많은 사람이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뱀이 간계에 의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고후 11:3-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4절). 용의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추종 세력을 일컫는다. “삼분의 일”은 성막 뜰, 성소, 지성소로 구분된 성막을 생각한다면 하늘 성전과 구분된 성막 뜰, 즉 이방인과 같은 존재의 삼분의 일이고, 출애굽 여정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애굽과 광야, 가나안의 구분에서 애굽에 속한 삼분의 일로 세상에 속한 자에 불과한 존재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거짓의 아비에 속하여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자들이 용이고 옛 뱀이며 마귀요 사탄이다(요 8:44).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은 하늘로 올리셨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5절).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삼키고자 했던 용의 계획은 좌절된다. 그러나 여자는 광야로 도망할 수밖에 없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6절).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을 지낸다. “광야”란 양육하는 곳이다. “양육”이란 말의 ‘트레포’는 ‘기르다, 먹이다, 양육하다’라는 뜻이다. 광야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장소로 언약으로 먹이고 기르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현장이다. 교회요 성도는 그렇게 용에 의해 고난과 환난이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먹이심으로 하늘의 양식을 확인시켜 주신다.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7-12)
(202307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