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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승리 124 ❏배향인물: 홍남립(洪南立) 유 화(柳 俰) 홍이장(洪以槳) ❏창건연도: 정조연간 ❏향 사 일: 3월 중정(中丁) |
이 사우는 처음 구이면 학천리 학천동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26년 현 위치에 이건한 것이다. 현재 이 사우에는 홍남립(洪南立)을 주벽으로 하여 유화(柳俰), 홍이장(洪以槳)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주벽-홍남립(洪南立)
자는 탁이(卓爾)고 호를 화곡(華谷)이라 하였다. 그는 김장생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활동하면서 군량을 모아 조달하기도 하였다. 그의 저≪화곡집≫ 5권이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1606년(선조39년) 2월26일 완주 구사리에서 남양홍씨 22세 예사공파 강경공계의 洪澤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그의 자는 탁이(卓爾)이고 , 호를 華谷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봉곡 김동준과 교우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사계(沙溪) 金長生에게 나아가 六經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1633년(인조11년) 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그는 벼슬길에 올라 議政府司祿을 거쳐 忠勳府 經歷 ․ 成均館 學諭 ․ 學正 ․ 博士 ․ 典籍 등을 역임한 뒤 임금의 특별배려에 의해 자기의 집에서 쉬면서 책을 볼 수 있는 賜暇湖堂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通訓大夫의 작위를 받았으며 延曙道察訪을 거처 光陽縣監 ․ 萬頃縣令 ․ 平安道事 ․ 咸興判官 ․ 鍾城復使 寶城 ․ 瑞山 ․ 德山 ․ 郡守 등의 외직을 거처 刑 ․ 兵曹佐朗 ․ 禮曹正朗 ․ 通禮院 相禮 ․成均館 司藝 ․ 春秋館 編修官 ․ 通禮院 佐通禮 ․ 司諫院 大司諫 ․ 承文院 判校 등의 내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결국 화의가 이루어지자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면서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는데 그의 부모가 돌아가자 묘소 옆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복(服)을 이 여막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친구와도 우의가 매우 깊었다. 그는 친구 白石 柳楫과 함께 과거를 보러가서 시험 답안지를 일찍 쓰고도 柳楫이 미쳐 답안지를 작성하지 못함을 보고 답안지를 완성할 때까지 가지고 있다가 함께 제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형제간의 화목이 유별나게 돈독하였다. 그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들이 밖에 나가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렸다고 하며, 이들 동생들이 일찍 죽자 그들이 낳은 아들들을 자신이 낳은 아들처럼 돌보아 주었으며, 항상 똑같이 대해 주었다 한다. 또한 그의 계모 모시기를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똑같이 하였다하며, 계모가 돌아가심에 어머니와 똑같이 3년 동안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상례를 마쳤다고 한다. 그는 또한 그의 문인들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의 문인들이 시와 문장을 지을 때에는 항상 그들의 글을 읽어보고 잘못된 곳을 고칠 수 있게 지적해주고, 잘된 곳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완주군 대승사를 짓고 여기에 그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진내고 있다. 현재 저술한 문집이 전해지고 있다.
전북 완주 대승사 앞에 세워진 “公心銘” 돌비
“공심명(公心銘) 돌비를 생각한다.” 라는 기사가 전북 도민일보 2006년 4월12일(수요일) 19면에 기사화됨으로 오늘날 세인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뭉클하게 한 사적을 소개한다.
지난 9일 완주군 소양면 대승리 대승서원(大勝書院) 앞에 한가(基)의 돌비가 세워졌다. 사적비도 아니고 서원비, 신도비 ,송덕비 유허비 기공비도 아니다. 일종의 유훈비라고 할까. 보기드믄 돌비다. 비면에는 일심공자시심명비(壹生公字是心銘碑)의 여덟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일생동안 사사로움엔 등 돌려 버리고 오직 공(公)이라는 글자 하나만을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다. 이 돌비의 이름이 된 “일생공자시심명”의 유훈은 대승서원의 주벽으로 모신 홍남립(22세손 洪南立1606~1679)선생의 말씀이다. 그것도 임종 때에 제자들에게 한 유훈이었다.
홍선생의 자는 탁이(卓爾), 호는 華谷, 본관은 南陽으로 1633년(인조11)문과 급제 후 여러 내외 직을 역임하여 벼슬이 사간원 대사간, 승문원 판교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완주 고향에서 오직 후학 문인들과의 강학에 힘썼다. “화곡유고(華谷遺稿)”가 전한다. 당대의 봉곡(鳳谷 金東準), 만암(晩庵 李尙眞), 문곡(文谷(金壽恒) 등 명공들은 평소 화곡의 인품을 우러러 “태산처럼 높으심이여 대하처럼 넓으심이여/ 달과 같이 밝으심이여 물과 같이 맑으심이여/진솔하신 성품이시여 고결하신 조행이시여” 로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이들 찬사의 원 한문은 비의전면 왼쪽에 새겨져 있다.
화곡은 벼슬길에 나가서나 향리에 물러나 있거나 후학문인들이나 자여손에게 교훈하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공심(共心), 공지(公志) 였거니 싶다. 率先垂範하였을 뿐 아니라 임종에 이르러서도 좌우 자여손과 문인들에게 공(公)자 하자만을 마음에 새기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공”의 한자는 사사로움을 배반한다는 회의(會意)에서 이뤄진 글자다. 公正, 公的, 公公然, 公道, 公論, 公平의 뜻이 담겨저 있는 회의 문자인 것이다.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에 종사하는 사람”을 공무원 공직자라 한 것도 공에 담긴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컬은 것이 된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공무원들은 어떠한가? 마침 돌비가 선 다음날에 발표된 2005년 정부업무평가에 의하면 미흡판정의 기관이 7곳이나 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조직을 격상시키고 공무원 수를 늘린 부처들이 가장 일을 못한 기관이라 했다. 국민의 수임자로서 임무수행에 성실해야할 공직자는 어디로 간 것인가? 대승서원의 저 돌비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2)유화(柳俰)
호를 수졸재(守拙齋)라 하였으며 홍남립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덕행이 뛰어났으며, 현재 그의 저서≪수졸재집≫ 3권이 전해오고 있다.
3)홍이장(洪以槳)
홍남립의 종손으로 권상하의 문인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채 성리학의 연구에만 열중,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고 한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강당은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참고-완주군지1996, 전라북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