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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산신령으로 불린 ‘마용기 스님’
海矸 김승범
해안동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날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들었다. 처음 해안동에 들어섰을 때는 행색이 남루하여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구변이 화려하고 병자를 보아 흔쾌히 낳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하였는데, 오갈 데가 마땅치 않아서인지 풍류끼가 베여있어서인지 지인으로 알게 되는 사람의 집에서 며칠 혹은 몇 달씩 머무르면서 먹을 것을 얻어먹거나 산 터를 봐주거나 하다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는 한 참후에 해안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이집 저집 신세를 많이 졌는데 그 중에도 특히 현재 생존해 계시는 김원집(98세) 할아버지 집에 장기간 투숙하기도 했다. 내가 살았던 본가에도 며칠씩 머무른 기억이 있는데 부모님들이 음식을 후하게 차려서 대접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제주도에 말을 기르는 구역으로 1소장부터 5소장까지 구역을 나누어서 말을 생산 관리하여 군마, 또는 역마, 생필마를 상납하는 관리들이 있었는데, 4소장은 해안동 위쪽 광령교를 중심으로 좌측이었고 5소장은 광령교를 가름으로 서측이었는데 살았던 곳이 이 5소장 광령교 바로 아래쪽이다.
아래의 기록에 보면 산방산에는 아들인 마성공 스님이 수덕암의 명맥을 잇고자 1951년 안덕면 사계리 산 15-2번지에 수덕암을 창건하고, 이후에 사명을 영산암으로 개명했다. 고 했는데 이 도한 명확치는 않다. 나의 부친 김병문의 전언에 따르면 살아있을 때 산방산 절에도 가서 며칠씩 머물다 왔다고 한다.
문수왓에 마용기 스님이 갈아먹던 땅이 있었고 주로 권자리왓을 가로 질러서 거주지로 통행을 하였다고 한다. 주거지에는 마용기의 형도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주로 걸어 다녔기 때문에 아마도 성안에서 해안동까지 걸어오면 지쳐서 꼭 들러서 쉬고 가는 데가 있었는데 현재 해안동의 중심에 있는 강씨 어른과도 친했다고 하고 동네 유지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특히 우리집안 할아버지인 김기석, 인석(증조) 할아버지와도 친하였는데 특히 인석 할아버지와 더 친해서 해안에 오면 꼭 집에 들려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 먹고는 한숨 자고 가곤 하였는데 먹는 양도 어마어마하여 두말 뚜기 솥에 콩죽을 쑤어서 주는데도 혼자서 그걸 다 먹어버려 보는 사람들이 혀를 차게 만들곤 했었다고 한다.
보통 식구들이 7명에서 11~12명까지 많이 자식을 낳던 시대라 쇠솥으로 한말 뜨기, 두말 뜨기라고 하면서 밥을 짓고 죽을 쒀서 먹는데 두말 뜨기면 약 11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러나 머리 걸어 다니다 오면 배가고파 솥 위에 올라앉아서 그 많은 양을 혼자서 다 먹어치웠다고 한다. 언변도 좋아서 한번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현재 내가 자란 본가의 바로 옆집이 인석 할아버지 집이라 우리 부친도 가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자정이 넘기도 하였다고 한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는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우리 집 이사를 약 30년 전에 했는데 모친이 살아계실 때 모셔다가 음식을 차려서 성주풀이를 했다고 하고 그 후에 큰 아들을 낳아 현재 25세가 되었으니 대략 30년 전 쯤에 해안동에 많이 출몰하였던 것 같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충화 삼촌도 마용기에 대해서 듣고 보았다고 하니 꽤 영향력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스님의 나이 30세 전 후에 왔다는 사람과 40세 전·후에 왔다는 사람이 있는데 30세에서 40세 사이에 해안에 온 것은 확실한 것 같고 큰 덩치에 등에는 전대를 메고 다녔는데 그 행장 안에는 먹을 것 조금, 돌, 나침판 등을 넣고 있는 것을 우리 부친은 보았다고 한다. 주로 산터를 봐주고 액을 막는 경을 읽어주기도 하고 길흉화복을 막아주는 방을 하였다고 한다.
나중 그가 살던 곳에는 가옥이 없어지고 그 아래쪽에 아들 마두기가 집을 지어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집과 수덕사 터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살던 집터 주변에는 대나무가 둘러져 있고 밭은 갈아먹는 흔적이 있다. 수덕사 터는 며칠 전에 가보았더니 촛불자국도 있고 누군가 치성을 최근까지 드린 흔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약 500미터 가량 내려가면 허름한 기와집이 나오는데 거기가 아들 마두기가 기거했던 집이라고 한다. 아들 마두기는 해안에 자주 다녔으며 부친과도 친했고 나중 우리집안 먼 친척과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광령 일뤳당은 ‘마씨당’ ‘마씨 미륵당’ ‘마용기당’으로 불려
풍수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키가 육척이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는 신화 같은 존재, 바로 ‘마용기 스님’이다. 마용기 스님은 ‘스님’ 이외에도 ‘한라산 신령’, ‘하르방’‘도사’, ‘심방’, ‘법사’라는 말들이 뒤따랐다. 하지만 마용기 스님을 연구하는 ‘당 학자’와 ‘불교 학자’가 바라보는 시각은 전혀 다르다. 이번호에는 당을 연구하는 시각에서 ‘마용기’ 스님을 바라보고자 한다.
한라산 기슭을 관통하는 1100도로에서 평화로를 잇는 제1산록도로에는 제2 광령교가 있다. 그 인근의 넓은 초지에 신비한 기운이 서린 듯 우뚝 솟은 소나무가 외호신장처럼 서있고, 주변으론 당을 감싼 나무들이 영험함을 더하는 곳이 바로 ‘광령 일당’이다. 이처럼 일당은 한라산 중턱에 자리해 길이 험하고 찾아가기가 힘들다. 이 일당은 미륵부처님을 모시는 미륵당으로 동네 사람들은 ‘마씨당’, ‘마씨 미륵당’, ‘마용기당’으로 부른다. 이 당을 지키던 마씨 하르방이 죽어서 이 당의 당신(堂神)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마용기 스님의 아버지 마희문은 헌종 무신년(1848)에 전라도 강진 비자동 집에서 태어나 의술과 점술, 주력 등에 능통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무자년(1988) 봄에 정의현감에 임명돼 제주도로 들어온 마희문은 190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 자료는 한라산 민대가리 동산에 봉안된 마희문의 묘 비석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이 비석은 1944년 아들인 마용기 스님이 쓴 것으로 돼 있다. 특히 민대가리 동산은 한라산 어리목코스로 등산을 하다가 만세동산을 지나 윗세오름 가기 직전 북쪽으로 보이는 오름으로 제주에서 손가락에 꼽는 명당 묘 자리다. 이 또한 마용기 스님이 이 험한 한라산에 묘 자리를 쓴 이유는 뭘까. 풍수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산신의 기운을 받고자 했던 마용기 스님의 의지로 엿보인다.
의술과 점술, 주력 등을 아버지로 전수받은 마용기 스님은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로 아이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여인들에게는 ‘산신령’같은 존재였던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 이 일당은 마용기 스님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인들은 이 당에서 아이를 잘 길러달라고 기원했다. 스님이 당 인근에 집을 짓고 살면서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이 당에만 갔다 오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당으로 바뀌게 되어다는 것이다.
당을 연구한 학자의 증언에 의한 기록을 보면 “아들을 낳기 위해 기도하러 간 여인이 이 마 씨 하르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게 되면서부터 이곳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말이 퍼져나간 것이다. 마 씨 하르방이 지금까지 낳아준 아들은 400~1000여명에 넘는다”라고 말했다. 이는 구술 증언을 채록한 듯 신화적인 면이 짙다.
그리고 주민들은 방목하던 소를 잃어 버렸을 때는 마용기 스님에게 부탁하면 귀신 같이 찾아 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거칠게 굴던 소일지라도 양 뿔을 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한 다음 고삐를 묶어 주었다고 한다. 한라산의 산신들 중에는 테우리가 찾아가 빌면 잃어버린 소를 찾아 준다는 신들이 많다. 마용기 스님도 살아 있는 산신령으로 불리만 했다.
마용기 하르방의 마지막 행적은 다양하게 구술되고 있다.
“마씨 하르방은 나이 칠십이 되었을 무렵 미륵당 옆에 초가를 짓고 살았는데 어느 날 술을 먹고 잠자다가 집에 화재가 나서 불에 타 숨졌다”는 설과 “70세가 되던 해 한라산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서 기도생활을 하다고 죽어 민대가리 동산에 묻혔다”는 설이 전해지는데 불교계는 이와 전혀 다른 행적을 말하고 있다.
마용기 스님 만덕사·수덕암·영산암 창건주
마용기 스님은 당에 치성을 드렸던 사람들에게는 ‘심방’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불교와 민속신앙이 자연스럽게 융화되면서 그 경계가 지금처럼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마용기 스님을 ‘법사’라 칭했다. 그만큼 학자들도 스님의 그동안의 행적을 본다면 불교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짙다.
현재 제주시 회천동 화천사 터는 예로부터 절동산으로 유명했다. 현재도 이 절동산 인근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기와 및 도자기 파편 등이 출토되면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암자가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으로 인해 제주불교가 법난을 겪으면서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천사 창건연대는 1912년으로 전신인 ‘만덕사(萬德寺)’가 마용기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이처럼 화천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연이 이어져왔다.
화천사 창건 당시의 상황은 1973년 봄 화천사 주지 김운공 스님이 세운 ‘화천사 창건기’에 잘 드러나 있다.
“대저 이 사찰은 자고로 석가세존을 숭배해 오던 곳으로 과거 수백 년 전부터 이곳에 존재하였다. 조선 연산군 당시 제주 목사에게 명령하여 소각한 후로 본동 인사들이 석불암을 창건하여 숭배하였다. 서기 1912년 임자년 봄에 마용기가 사찰을 창건하여 김보관·송재술·현갑생 스님 등이 여러 해 동안 온 힘을 다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오고가는 사람들마다 안타까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화천사 창건기에서 보듯 마용기 스님이 화천사를 창건한 후 후임 스님에게 사찰을 이양하고 한라산 기슭을 관통하는 제1산록도로 인근의 광령에 수덕암(修德庵)을 창건한다. 마용기 스님은 화천사에서 떠나 왜, 머나먼 한라산 기슭에 와서 수덕암을 창건했을까? 마용기 스님은 잃어버린 소와 말을 찾아주는 능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특히 잃어버린 소와 말을 찾아주면 그 보수가 엄청났다고 한다. 제주 풍토기에 의하면 말을 잃어버린 테우리는 솥과 농기구를 팔고 모자라면 일가친척에게 나누어 징발했다고 전해진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말을 잃어버린 테우리가 그것을 배상하기 위해 부모를 판 자가 5명, 처자를 판 자가 8명, 자신을 팔아 머슴이 된 자가 11명이고, 동생을 판 자가 26명으로 자기 재직 간 총 96명이 패가망신을 했다”고 적혀있다. 이를 보더라도 말을 찾아주는 능력을 봤을 때 테우리들에게는 한라산 산신령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편 당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4·3 당시 마용기 스님이 불에 타 죽었거나, 한라산 깊숙한 곳에 평생을 살다 죽었다고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전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마용기 스님의 아들인 마성공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시 광령리 산 173번지에 수덕암을 창건, 30평 가랑의 초가 법당을 짓고 15평의 요사채 등을 갖췄다고 한다. 하지만 1948년 4·3이 발발하며 1949년 2월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던 시기에 수덕사도 함께 불태워졌다고 한다.
마용기 스님과 가족들은 소개령에 의해 안덕면 산방산으로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스님은 수덕암의 명맥을 잇고자 1951년 안덕면 사계리 산 15-2번지에 수덕암을 창건하고 이후에 사명을 영산암으로 개명했다. 특이한 것은 당시 광령보다는 해안동을 통해서 이동을 하였기 때문에 광령 사람들은 마용기 스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아마도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 않고 걸어서 다니던 시절이라 주 생활지가 해안동인 것 같다. 그러므로 해안동의 스토리텔링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보아진다.
<해안동 주민 김병문 구술과 제주불교신문사 이병철 기자의 조사자료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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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꾸욱!
내용이 현지 주민이 아니면 결코 쓸 수 없지요.
내용이 특이하고 가치가 있기에 독자인 저는 벌써부터 욕심을 냅니다.
책으로 나오기 전인데도..
정말로 빼어난 향토문학, 문화유산을 지닌 작품이 될 겁니다.
거듭 칭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