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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일 : 불가피한 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5:26)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한 “하나님이 당신에게 유죄의 확신을 주셨을 때 당신이 어서 나와서 용서의 판결을 받기를 촉구하신다.”는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성도에게 현재 하시는 사역은 바로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는 새 본성으로 변화시키시는 재 창조사역입니다. 하나님 은 사람을 거룩한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하나님처럼 거룩한 존재인 사람을 자녀 삼으셔서 사랑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속목적도 타락한 자녀를 하나님처럼 거룩한 존재로 회복시키시는 ‘사랑’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구속목적은 같습니 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시고 사람에 대한 재창조사역을 하십니다. 각각의 사람에 대하여 전인격적으로 재창조사역을 하십니다. 어떻게 하실까요?
(A)하나님의 재창조사역 = 유죄선고를 수용하게 하시는 사역: 첫째로 사람 에게 유죄의 확신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사람의 자아(self)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분리되면서 생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전에 사람은 “하나님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불순종 으로 이 세상에 사단으로부터 시작된 ‘죄’를 불러들이고 나서, 사람은 늘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을 통해서 일하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아로부터 나온 일들은 자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하나님과 분리된 일들입니다. 그래서 이 자아(self)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부인(deny)되어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자아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유죄(guilty)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것들입니다. 자아(self)로부터 나온 것들은 아무리 외형적으로 선해 보이는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헛된 것 들입니다. 전도서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자아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결국 “헛되고 헛되다!”라고 고백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이 땅의 모든 위대한 지혜, 지식, 명예, 권력, 부와 풍요가 모두 다 헛되고 헛된 것들이고,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의 법으로는 ‘유죄‘를 선고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아(self)로 시작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 행해진 것들이기에 이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유죄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용서의 판결받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바로 자기 권리를 붙잡고 버티는 옛 사람의 본성의 잔재 때문입니다. 자기를 어떤 식으로든 성취하고, 성공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자기 권리 주장 때문에 한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회복사역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자기 권리를 다 내어드린 사람입니다. 마치 사랑 하는 신랑, 신부가 상대방에게 자기의 마음과 몸을 다 내어주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사랑 때문에 ‘자기 권리’를 기꺼이 내어드린 존재가 바로 성도 입니다. 자기 권리를 완전히 포기함으로 옛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늘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만 하나님의 재창조사역이 시작됩니다.
둘째, 자기 방법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상식(common sense) 과 자기 노력(effort), 그리고 자기 경험(experience)으로 자기 자신을 성공적 인 존재로 만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온전히 성공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성령님의 터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방법으로 자기 성취를 향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성령님께서는 그러한 자기노력, 자기열심, 자기 경험, 자기상식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리시고, 성도가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가지 기다리십니다. 자기 방법 으로 자기 삶을 만들어가려는 시도가 유죄선고를 받고 나아만 하나님의 방법 만을 추구하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온전히 살수 있습니다.
셋째, 자기 자원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원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성취해 나가고, 실현해 나가는 도구들을 말합니다. 즉 돈, 명예, 권력, 그리고 숭고한 도덕적 행위등을 말합니다. 특히 성도들은 바리새인들처럼 탁월한 도덕적 행위를 자기 자원으로 삼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성도를 넘어뜨리는 가장 수준 높은 방법이 바로 성도가 탁월한 도덕적 행위를 자기 자원으로 삼아 자아(self)를 사람들 앞에서 우월한 존재로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선교로 교회가 세워진 곳마다 계속 쫒아 다니면서 영적 가라지(잡초)를 뿌린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퍼드리는 거짓 형제(거짓 사도와 선지자)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는 유일한 길-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99%로 만들고 자기 자원을 1%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상은 1%의 자기자원인 할례를 더 집중 (focus)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생각하기를 “내가 거룩해 지려면 O O 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의식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의 능력을 99%이기 때문에 부족한 1%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 1%인 O O 을 자기자원삼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바리새인 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기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시도도 하나님께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는 회개의 행위때문에 죄용서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원으로 거룩해 지려는 시도는 모두 다 유죄선고를 받아야만 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회개하는 것도 성령님의 터치를 통해서 은혜로 부어주시는 것이지 성도들 스스로가 어떤 거룩한 자기 자원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이미 얻은 구원(중생)과 이루어가는 구원(성화), 그리고 이루어진 구원(영화) 도 모두 사람의 어떠한 자기자원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이 1%도 없고 오로지 구원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임을 깨달을 때, 성도는 죄사함 받은 은혜를 경험함으로 늘 십자가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구원 얻고, 거룩함을 덧입습니다. 십자가는 하늘 지성소가 되어줍니다.
7월 2일 : 제자의 조건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6~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A)제자의 조건 = 자기존재기반을 부정: 누가복음 12:26-27에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목숨은 이 세상에서의 자기 존재기반 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아(self)가 실현될 수 있는 존재기반을 말합니 다. 그리고 자기 목숨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의미를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자기 존재)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고, 지식을 쌓고, 명예를 쌓고, 또 권력까지 가지려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목숨의 존재기반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어야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월한 도덕성이 있어야지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를 쌓으면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아(self)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랑 후보자들이 있어 도, 결국 신랑이 한 명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는 죽고 하나만 살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사랑은 배타적(exclusive)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도 이러한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이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것, 죽는 것과 맞바꾸게 됩니다. 즉 옛날의 연인 - 자기 (self)는 미워하게 되고, 새로운 연인 - 예수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원리입니다. 자기(self)가 삶을 살아가는 존재기반인 “자기 목숨”을 사랑 하면서 예수님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맞닿을 수 있다 는 말처럼, 영적으로 모순된 말입니다.
(B)제자됨을 방해하는 요소 = 자기존재기반을 확장하려는 시도들: 자기 목숨 을 미워하지 못하는 요인 중에는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한 ‘자기 신조’ 와 ‘자기 신념’에 집착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신념과 신조에 따라 살면 대의명분을 따지게 되고, 인격적인 존재로 예수님께 헌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 역시 인격적인 존재인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자기 목숨을 더 소중 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다니면서 마치 자신이 세상의 찌꺼기 같은 인생처럼 되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경주를 승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찌꺼기 같은 존재처럼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 지식,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처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바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의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 해서, 자기 존재기반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번민과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번 돈을 지키기 위해서 번 것만큼 더 많이 걱정하고, 또 자신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열등감까지 가지게 됩니다. 지식과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지식이 많을수록 행복한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자기 존재기반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큰 공허감과 허탈감을 경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며, 인격적인 예수님보다 자기 생각 에 사로잡혀 자기 공상으로 살아가는 길을 더 넓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늘 먹고 마시고, 또 창고를 잘 지어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저축 또는 포트폴리오를 잘해서 자기가 모은 재산을 잘 관리한다고 한 부자는 음부(지옥)에 떨어졌고, 거지 나사로는 낙원에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기 존재기반을 잘 확대, 확장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이 땅에서 인정받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영적인 원리에서는 지옥가는 길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정말 이 세상의 찌꺼기 처럼 살았지만 자기 자신(self)의 존재기반을 쌓을래야 쌓을 여지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누추하게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았으나 그는 낙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self)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self)는 마귀가 인간을 유혹해서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생긴 존재형태 입니다. 따라서 ‘돈’을 통해, ‘지식’을 통해, ‘명예’를 통해, ‘탁월한 도덕성’을 통해서 자아(self)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하나님과는 더욱더 분리되어져 가는 것 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지옥 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자아(self)를 실현하기 위해서, 즉 자기 성공과 성취를 위해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하나님과 더 분리되는 지옥가는 길을 선택 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찌꺼기같이 보일지라도 자아의 존재기반인 자기 목숨을 미워함으로 인해서, 자기 목숨이 지탱되는 기반인 돈, 지식, 명예, 권력, 탁월한 도덕성을 미워해야만 합니다.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새 삶의 존재기반이 되시게 해야 합니다.
7월3일 : 응고된 죄의 노출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이사야 6:5)
*성령님은 왜 성도의 내면에서 응고된(굳어진) 죄를 노출시키려고 하실까요?
(A)회심의 출발 = 하나님 관점으로 ‘죄’를 인식: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성령에 의해 깨닫게 되는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성도의 마음에 심어두고 일을 시작하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죄에 대한 불투명한 인식이 사라지고 뚜렷하고 분명한 죄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내면 깊은 곳에 죄의 세력과 흔적이 자리 잡은 곳 을 다루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야 제자로의 출발이 가능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 제일먼저 “나의 부정함=죄악됨“을 인식했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하였습니다. 그러고 나니 하나님의 스랍천사가 그의 입술에 숯불을 대며 “이사야의 부정함과 죄악됨”이 사함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는 음성을 듣고 대답하기를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합니다. 마침내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죄의 깊은 인식을 한 후, 하나님의 선지자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B)회심의 삶=응고된 죄의 소멸되는 역사: 오스왈드 챔버스는 “죄가 응결된, 응고된 곳은 정화의 불이 지져져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성령님은 우리의 응고된(굳어진) 죄의 근원을 태우시는 불이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브리서 12:29)고 합니다. 성령님 은 바로 성도의 내면에 있는 정욕과 탐심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소멸하시고 태우시는 불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의 문제 를 해결하시려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또 하늘로 부터 사람의 마음가운데로 오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과 성도(하나님의 자녀)의 거리(distance)를 완전히 없애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거리감을 없애기 위하여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 3:11) 성령님이 성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은 바로 “마음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자기 정욕과 탐심을 가지고 살던 자기중심적 삶을 청산하도록 성령님은 소멸하고 불태우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성도가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도록 계속 거룩함을 옷 입혀 주십니다. 거룩함과 의로움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계속 옷 입혀 주시는 것 입니다. 즉 성령님에 의해서 성도들은 매순간 영적 할례를 받게 됩니다. 할례를 살의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도 같은 굳은 살을 잘라 내는 것입니다. 영적 할례를 거하시는 성령님은 내 살이지만 썩은 살과도 같은 응고된 죄의 부분에 할례를 거하시고 새 살-새 본성과 새 마음을 덧입도록 마음의 근본적인 영역을 흔드십니다.
7월4일 : 초조함의 극복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시편 37:8)
*성도의 삶과 생각에 염려와 근심이 많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A)자기중심성의 결과물 = 염려와 근심: 오스왈드 챔버스는 “염려와 근심이 많다는 의미는 영적, 정신적 안정이 없는 것이고 이러한 염려와 걱정은 결국 ‘죄’를 초래한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염려와 걱정은 초조함을 가지게 합니다. 이 초조함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어 하게 됩니다. 자기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결국 죄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근원은 살인도 아니고, 간음도 아니고, 도둑질도 아닙니다. 근본적인 ‘죄’의 근원은 “자기중심성” (self-centered way)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나 스스로 선하게 살아보겠 다!”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 하나님 중심적 삶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최초로 자기중심적 삶을 통해서 ‘죄’를 창조한 존재가 바로 ‘사단(마귀)’ 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초조함 때문에 자기 방법대로 일을 처리하여 패가 망신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왕입니다. 사울왕은 전쟁터에서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리고 싸워야 하는데, 선지자-사무엘이 오는 것이 계속 늦어지자 군사들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 초조함에 빠집니다. 설상가상 탈영하는 군사들마저 생기면서 더욱 초조함에 빠집니다. 결국, 사무엘 선지자 없이 자기 단독으로 자기 방법으로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왕은 자기중심적인 길을 본격적으로 걸어갑니다. 예배를 드린 것이 잘못입니까? 예배드린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 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드린 예배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중심적인 예배입니다. 초조함, 노여움, 격분을 하게 되면 결국 자기중심적 표현인 ‘죄’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죄는 점점 커지면서 마치 사울왕이 자살한 것처럼 영적 사망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 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시편 37:8)합니다. 염려와 근심을 가득안고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는 수백번 드려도 소용없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것은 그 무엇이든지 영적 사망을 불러오는 것들입니다.
(B)자기중심성의 영향 = 주님사랑의 표현을 왜곡: 하나님은 아벨처럼 자신 에게 ‘복’을 부어주지 않는다고 격분한 가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를 지배하려는 죄를 잘 다스려라!”라고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제사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 중심적으로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니 었고, 자기중심적으로 예배를 드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인도 성도였고, 아벨도 성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라고 해도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성도가 있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삶은 그것이 무엇이 됐던지 간에 소용이 없습 니다. 예배를 많이 드려도, 헌금을 많이 해도, 많은 봉사를 해도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관점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는 “너를 지배하려는 죄를 잘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도를 지배하려는 죄는 염려와 근심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동안에 겪는 많은 어려운 현실과 환경은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중심적 삶을 살 것인가? 를 테스트하는 시험무대입니다. 그 시험무대에서 사울왕과 가인같은 사람도 나오고, 또 다윗과 아벨같은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7월5일 : 하나님없는 계산대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시편 37:5)
*성도의 삶에서 염려와 근심을 온전히 없앨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A)세상염려에서 해방되는 길 = 모든 일에 하나님 포함된 생각: 오스왈드 챔버스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빼놓고 계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이 빠져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생명-하나님의 능력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일을 하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인 선택을 하고나서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바로잡으려고 해도 안 됩니다. 단추를 다시 다 풀고 새로 단추를 잠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길을 구해야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거짓된 속담을 가지고 자기 방법대로 일을 해버리고 나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거짓된 마귀의 소리에 속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을 하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갈 때 염려와 근심 없이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B)세상염려없는 자유의 길 = 하나님의 생각을 최우선: 예수님은 한번도 초조함으로 사역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 수많은 사람들이 따를 때, 또는 수많은 제자들이 자신을 떠나갈 때에도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는 “성도는 악(evil)도 계산에 넣지 말고, 어려운 환경도 계산에 넣지 말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악한 것을 계산에 넣거나, 어려운 환경을 계산에 넣으면 성도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쓸데 없는 생각들에 사로잡히고, 그런 생각들이 영적인 파도가 되어 염려와 근심 으로 마음가운데 쏟아 붓게 됩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더 깊이 알려고 힘쓸수록 세상염려로 인한 초조감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마음에 계시되어지면 될수록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소망있는 믿음가운데 자유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7월6일 : 비전과 실제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이사야 35:7)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work)인가? 성도 자신인가?
(A)하나님의 비전 = ‘일’이 아니라 ‘관계’: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의 비전 은 성도에게 바라시는 성도의 모습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도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져 가는 것이라는 의미 입니다. 하나님은 사역(work) 자체에 관심을 두시는 분이 아니시고 사람 (person)에게 관심을 두시는 분이십니다. 성도의 문제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일’에 관심을 두는 방향으로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형성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하루속히 성공적인 크리스천으로 보이고 싶어서 온갖 종류의 제자훈련과 집회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떠나서는 아무리 많은 활동을 해도 거기에는 영적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영적 운동력이 없고, 영적 운동력이 없기에 영적인 형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나오는 생명력에서만 오로지 영적 운동력이 생겨서 영적인 형제인 믿음, 거룩, 온유, 겸손등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맺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B)하나님의 비전 = 성도를 자기형상데로 빚어가심: 하나님은 비전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비전 자체인 성도들 자신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일로서의 비전 자체를 이루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충분히 담아내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그릇으로서의 성도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 형상데로 살아 가는 왕이 되도록 다윗을 13여년을 다루셨습니다. 특별히 악한 도구-사울왕을 사용하셔서 다윗을 다루셨습니다. 그 다루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의 비전이 실제로 드러났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만 천하에 이름을 드러내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비전이 실재화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마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습니다. 마귀가 역사해야만 성도는 나의 참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의지해야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온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세상에 살아도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자기 형상데로 다듬어가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다루심을 즐거워하십시오!
7월7일 : 고상한 일을 다 어렵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마태복음 7:13~14)
*하나님의 고상한 일을 하기 위해서 성도는 무엇이 필요한 존재입니까?
(A)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지는 곳 = 십자가의 길: 하나님의 영적 생명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생명은 충만해질 수도 있고, 소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지배아래 더 깊이 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좁은 길”을 걸어갈 때에만 가능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도 “좁은 길”을 걸을 때만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쉽고, 영광스럽고, 손쉬운 길을 걸어가면서도 믿음이 성장하고, 영적 생명이 충만해 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좁은 길”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생명을 더 충만하게 부어질 수 있고, 하나님의 충만하심 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좁은 길에 예수님이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고상한 일은 인간적인 보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십자가 길에서만 경험되어지고 성취될 수 있습니다.
(B)하나님의 생명 공급의 원리 = 심은 데로 거둔다!: 성경은 늙은 여인들은 젊은 여자들을 잘 훈련시켜서 가정을 온전히 지키고, 남편과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디도서 2:4) 나이 많은 남자성도들 역시 젊은 사람들을 신앙의 교훈으로 다스리고 가르 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그러한 영적 자질이 저절로 갖추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젊어서부터 자신을 무엇으로 충만하게 채우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고상한 일과 영적 생명에 관심을 두기 보다 자기성공과 자기 성취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아(self)'가 오히려 더 강해지고 확대돼 오히려 자기 고집과 아집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젊어서는 별 볼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영적 생명에 점점 관심을 가질수록 하나님으로 부터의 고상한 지식과 지혜로 충만해져서 나이가 먹을수록 사람들을 온전히 다스리고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나이 를 먹을수록 ’믿음‘으로 살아갈 때, 예전처럼 자기상식으로 살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살지 않고, 자기 고집으로 살지 않고, 점점 하나님의 의지와 생각 으로 충만해지는 삶을 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젊어서부터 자신이 무엇으로 충만해져가면서 살아왔는지가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일(work) 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려고 한 사람은 점점 일(work)을 창조적 으로 하지 못하고 뒤쳐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실현 하기 위해서 시작한 자원(source)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자신을 허무하고 공허하게 만들고, 자신을 영적으로 넘어뜨리는 꺼리가 됩니다. 돈을 통해서 자기 실현하려고 한 사람의 영은 점점 ’돈‘으로 충만해져 갑니다. 그렇게 되면 나이가 먹더라도 젊은 사람들을 다스리거나 가르칠 영적 생명과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고집과 자기 아집이 더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교제로 충만해지면 충만해질수록 범인(평범한 사람)이었던 사람이 점점 비범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마치 오순절 이후, 성령 세례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권세있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 이 생각하건데, 사도들에 대해 “이들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생각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면 자기 자신이 바라지 않아도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것 은 내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만 됩니다. 나의 가는 길이 나의 미래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늘 공급됩니다.
7월 8일 : 충성의 의지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여호수아 24:15)
*예수사랑 & 하나님 경외하는 것에 대한 성도의 실제적 증거는 무엇입니까?
(A)주님사랑의 증거 = 행함있는 순종: 순종은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입으로만 사랑과 존경을 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생각 으로만 하는 것은 실제 사랑과 존경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포도원에 나가서 일을 하라고 하니까 첫째 아들은 Yes라고 대답하고는 가서 일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No라고 말했 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다고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순종의 의지표현이 있는 것이 예수님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증거입니다. 말로만 ‘아멘’하는 것은 전혀 순종하지 않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아도 내 신앙은 늘 평소의 수준 을 유지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영적 세계는 진공상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영적 생활은 “앞으로 전진”아니면 “뒤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삶은 늘 하나님을 택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택하거나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에 대하여 여호수아는 말하기를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현재적으로 “오늘" 섬길 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돈’을 섬기면 나의 영을 ‘돈’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섬기면 나의 영을 ‘지식’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섬기면 나의 영을 ’사람들로 부터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명예와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방종교를 숭배하는 것이 아닐찌라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있으면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B)주님 사랑의 삶 = 종교생활이 아닌 신앙생활: 현재 나 자신의 영적 상태 (spiritual status)는 하루아침에 또는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선택의 길 - 나의 의지의 표현을 통해서 만들어져 온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는 데도 결핍감과 공허감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까지 내가 섬겼던 존재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좀 더 열심히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섬길 분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적으로 선택해 나가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신앙생활(faith-life)이 되지 않고, 종교생활이 되어버립니다. 종교생활인은 입으로는 Yes라고 말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하 지 않은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생활은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갈 수 없는 토양 그 자체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없는 종교의식과 예식을 따라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두 아들의 비유로 책망하셨던 종교생활의 대가들인 바리새인처럼 종교화되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현재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가?”아니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7월 9일 : 당신 자신을 점검하라! (탐찰)
그러나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주님을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24:19)
*하나님의 ‘능력’과 성도의 ‘믿음’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A)믿음의 증거 = 하나님의 능력만 전적으로 의지: ‘믿음’은 순종의 의지가 시작되는 접점입니다. 참으로 믿음 있다는 것은 의지적인 순종을 표현하게 되어있습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히브리서11장은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꺼이 하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좁은 길-십자가 길을 때에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 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신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58절에서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많은 능력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우리는 믿지 못하게 됩니까? 아직도 비빌 언덕이 많아서입니다. 아직도 나 자신을 믿을 만한 구석이 남아있어서 온전히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 안에 어떤 ’불신‘의 영역이 남아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만큼은 나의 뜻대로 하겠다!”라고 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전 삶의 영역을 터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라고 생각하는 것 은 하나님의 터치를 거부하는 불신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B)믿음의 점검 =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 점검: 성경은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고린도후서 13:5)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지, 안계신지를 인식할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은 실격자라고 말씀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분명히 움직이고 나타나고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살아있다면 성도는 그 생명을 인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삶을 이끌어가시는 예수님의 손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회개의 마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사람은 영적 지각력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지각으로 그리스도 가 내 안에 존재하시는 것을 알 수 없다면 믿음의 실격자입니다.
7월 10일 : 영적 게으름의 죄 (조용히 사는 죄)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히브리서 10:24~25)
*성도의 자기실현의 길과 예수 그리스도 실현의 길은 어떻게 다릅니까?
(A)성도의 자기실현의 쇠퇴 = 그리스도의 생명충만: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 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몸을 던지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양떼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주셔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셔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몸을 통해서 예수생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로 성도 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영적 원수는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가기 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에도 예수님을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가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셔서 늘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행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자기실현의 길을 포기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하는 길을 늘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실현을 하려면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실현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1서 2:16) 그래서 자기실현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에 더 나아가게 되고, 세상을 더 추구하게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길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실현은 자기 사랑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웃사랑’을 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설사 이웃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하는 선행과 구제라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바리새인이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는 수단을 삼은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실현하는 삶을 사는 성도는 ‘이웃’에게 사랑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자기 존재기반’인 돈과 지식, 시간, 그리고 능력을 이웃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예수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 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자아(self)의 존재기반인 돈, 학벌, 지식, 시간, 그리고 어떤 능력들을 기꺼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내어놓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이 말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 존재기반을 버리면 버릴수록, 예수님은 더 풍성한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자기(self)를 버리면 버릴수록, 그리스도(Christ)는 성도의 내면에 더 풍성해집니다. 반대로 자기(self)가 더 잘되면 잘될수록 그리스도는 내안에서 더 약화됩니다. 자아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멸하는 통로 입니다. 자아가 처리될 수록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7월 11일 : 영적으로 강건한 성도 (영적 성도)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
*자기(self)실현의 길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A)십자가의 본질 = 자아가 죽는 것: 자아가 실현되는 곳은 세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자아(self)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가운데서 에덴동산에 있었던 상태처럼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one)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공생애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셔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선언하시기를, "아버지 와 아들은 하나(one)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운데서는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라는 의식이 없어지고 오로지 "우리"라는 의식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을 걸으려면 세상 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장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같이 너희도 미워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실현을 위해서 돈을 쫓고, 지식을 쫓고, 육신적 사랑과 쾌락을 쫓고, 명예와 권력을 쫓으면 그 사람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갈수록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점점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자리인 반면에, 세상의 본질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기 때문 입니다. 세상의 본질과 십자가의 본질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같은 공간과 시간안에 있어도 물과 기름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마귀적인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십자가의 길을 질수록 자아가 점점 죽어가고 하나님의 생명이 점점 더 충만해져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B)십자가의 목표 = 보혈흘리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기를, 영적 성도의 모든 삶의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려는 것”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 영적 성도가 되는 길은 무엇을 하던, 언제든지, 어디서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알아감으로 성도의 몸과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실현하고, 자기실현은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와 목회와 사역을 통해서 조차 ‘자기실현’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서 신앙생활하고,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실현을 통해 자기자신에게 보람을 주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 성공과 자기 성취를 통해서 자기 보람을 가지게 되면 외적으로는 하나님 을 위한 일을 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자기 의로움(self-righteousness)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성전' 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것처럼 하나님의 공동체에 '세상'을 가지고 들어 오는 것입니다. 즉 성도가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 내고, 자신이 높임을 받고, 자신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방향으로 모든 것 을 해나가려고 신경을 집중하면 바로 그것이 '자기실현'을 하고자 하는 세상적 욕구에 사로잡혀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실현을 하려고 세상으로 나갈수록 예수 그리스도는 실현되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게 됩니다. 단지 자신의 열심, 자신의 헌신, 자신의 지혜가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을 강화시켜주는 마귀의 도구가 되게 됩니다. 성도 가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마귀의 도구 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월 12일 : 영적으로 강건한 교회 (영적 사회)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에베소서 4:13)
*이 땅의 교회가운데 ‘영적인 교회’와 ‘육적인 교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A)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기준 = 순결한 신부인가?: 요한계시록 2,3장은 예수님이 사도요한에게 직접 계시해주신 말씀으로써 예수님이 교회들을 어떻게 판단하실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들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모든 판단기준들은 마치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과도 같은 느낌을 줍니다. 즉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어떠한 생산적 결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의 존재 상태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만큼 내 이름과 내 교회이름을 남기며 살았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얼마만큼 영적 사회로써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신랑이 신부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순결한 마음'인 것처럼 교회와 성도에게 바로 예수님은 '영적 순결성'을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회복이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관계속으로 전인류를 되돌려 놓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서 교회와 성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복은 오로지 예수님의 구속에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의 구속을 통한 회복을 위한 존재목적과 존재가치를 얼마만큼 순결하게 지키고 사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는 경고하기를 "교회가 그 자체 기관의 발전과 성취에 신경을 쏟으면 영적 사회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 한다."라고 했습니다. 자기실현을 하려는 의도를 가진 성도는 "내 교회"라는 의식으로만 충만합니다. 성도에게 '소속감'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소속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지, 사람들 간의 인간관계 (social relationship)에서 나와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교회"만이 하나님의 전인류에 대한 회복의 의도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지 못합니다. 즉, 자기실현 욕구를 담고 있는 공동체와 개인은 하나님의 도구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B)자기실현의 동기가 역사하는 교회 = 육적인 교회: 교회와 성도는 현재 자신이 그리스도를 실현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실현하려고 하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교회는 자기 조직의 발전을 추구 하는 교회가 아니라 육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교회입니다. 육적인 교회는 외적으로는 파워풀한 교회일지 모르지만 예수님 이 드러나는 것보다 교회의 발전과 개인의 성취가 늘 앞서는 교회 입니다. 그런 교회는 육적인 교회요, 영적으로 간음한 교회라는 예수님의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교회는 교회의 외형과는 별개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성령을 따라서 늘 행하려고 힘쓰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가 실현됩니다. 자기실현을 위해 나아가는 교회와 성도는 어떤 대의명분을 가지던지, 즉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사역할지라도 예수님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실현을 통해 교회 안에 세상을 불러들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해도 세상을 불러들이는 모든 동기는 육적본성에 따른 것이기에 교회를 육적으로 만드는 것이요, 마귀에게 이용당해 성령을 훼방하는 교회도 될 수 있습니다. 육적인 것은 그 무엇이라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광돌릴 수 없습니다.
7월 13일 : 비전의 댓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이사야 6:1)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한 "하나님은 우리 친구들을 제거하신다"라는 뜻은?
(A)영적 아버지와 스승이 없어지는 때 = 예수만 의지하는 출발: “하나님이 나의 친구들을 제거하시는 이유는 나에게 있어 영웅과도 같은 친구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다”라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은 이야기가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이사야가 부름 받은 때는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바로 자신에게 신앙적으로라도 영웅과도 같은 존재가 육신의 생명을 다하고 사라 질 때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부름 앞에 서는 사람이 있고, 낙심하며 주저앉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도 다 죽게 되어있습니다. 성도는 마음가운데 늘 하나님을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있어 어떤 영웅같은, 친구같은 신앙의 선배들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과만 대면하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만 대화할 수 있는 육적으로 외로운 시간과 공간이 성도에게는 축복의 시간이요, 장소인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저에게는 신앙의 대선배님이시자 스승과도 같은 목사님이신 고인이 되신 심관섭 목사님이 계십니다. 심관섭 목사님은 영국에서 사역하시고 계셨기에 직접 만나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님이 갑자기 병환이 생겨서 한국에 들어갔을 때, 어머님 병환이 회복되고 미국으로 돌아올 날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제 마음에 심목사님 생각이 떠올라서 이메일을 드렸는데, "한국에 와 있으니 당장 찾아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바로 다음 날 찾아뵈었는데, 그 해 초에 위암이 발견되셔서 병 치료를 위해서 한,두달전에 한국에 와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그날 심목사님은 유언과도 같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요약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목사로서 자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성도에게 화내고, 다그치고, 용서하지 않고, 목적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스트레스를 받고 하는 일을 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라고 하는 말씀이셨습니다. 즉 자기비전을 이루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려고 하라는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심목사님은 자신이 병중에 있지만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당신께서 목회하시면서 자기비전을 위해서 살던 것을 다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진실로 감사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문제는 성령을 따르지 않고도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성경말씀조차 100%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설교를 합니다. 당연히 복음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없는 설교, 기도, 예배등은 사람들을 어두움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이유로 바리새인들 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영적 스승이요 아버지라고 자처하면서 자기들만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영적 소경들이었기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심각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B)영적 아버지와 스승되는 것 = 더 큰 심판을 받는 자리: 목회사역자, 평신도 사역자는 사람들에게 ‘선생’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의 철저한 판단기준을 적용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선생이 되려고 힘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도 “한 영혼을 실족시키는 자는 연자 맷돌을 지고 물에 뛰어드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예를 들자면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교인에게 세례의식을 행하고 천국시민이 됐다고 선언한다면 바로 그것이 한 영혼을 실족시키는 행위 입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사역자들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생활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설교하는 것이야 말로 영혼을 실족시키는 심각한 죄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부르심 을 받은 사람이라면 비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특히 목회사역자, 평신도 사역자는 유명 해지고 싶은 욕구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자기를 세상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이름을 날리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에게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자기실현을 위한 길로 나아갔다면 3년 동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옷과 신발을 벗고 다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역자는 목회사역자이던 평신도사역자이던 하나님의 영을 따라서 살면서 사람에게는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며 만족하겠다는 의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명하고 하늘에서 유명하기를 소망하는 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내가 영웅처럼 생각하는 누구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성도의 삶에서의 최우선인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7월 14일 : 산상수훈의 참 뜻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태복음 5:39)
*산상수훈은 ‘상식’에 근거한 삶을 통해서 실현가능한 말씀입니까?
(A)십자가의 길 = 상식을 넘어선 길: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은 '상식'에 어긋나는 말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람은 당연히 무시를 당하거나 해를 입으면 분노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조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상식적이고 건전한 도덕과 윤리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는 죄인이 죽는 곳 이었습니다. 성도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유는 매일 죽는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장소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돈 없는 자들을 업신여깁니다. 독재자들이 국민을 압제합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그러한 세상의 불합리와 불공평을 발견했다고 진술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십자가 복음으로 전인류에게 공평하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세상에서 자기상식으로 살아가고자 하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 자기 상식에 근거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 때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프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즉 성도는 자기실현을 위한 수단들을 매일매일 버려야 합니다. 예수 사랑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돈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재능을 사용하고, 자기 지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자기실현을 위한 삶은 버리는 것조차도 더많이 가지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즉 헌금하는 것도 더많은 물질의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더많은 시간을 드려서 봉사하는 것도 더많은 인정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받기 위해서 크레딧을 쌓으려고 하는 것이기에 하늘에는 전혀 쌓이지 않는 헛되고 헛된 일입니다. 세상으로 부터 온 수많은 자기상식으로 사는 삶은 성도에게 저주 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으로부터 온 수많은 영적 지혜만 성도에게 축복 입니다. 자기 상식과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하십시오. 자기상식으로 사는 삶을 살면서 지혜롭게 살고 있다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다 아시기 때문에 절대 속지 않으십니다.
7월 15일 : 영적 명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14)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명예롭게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A)영혼구원사역에 동참 = 성도를 명예롭게 하시는 길: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진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전 삶을 드렸다는 마음으로 충만할 때에 오히려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됩니다. “성도의 영적 명예는 구원받지 못한 모든 영혼들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영이 그렇게 채무자의 입장을 절감케 하신 것이다”라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명예로운 존경과 추앙을 받을지라도 하나님 앞 에서 명예로운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빚진 마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한 사역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있어서 한 영혼을 살리 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는 사람 이 예수님의 온전한 종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나는 남보다 더 나은 존재 가 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종이 되는 것이 나의 삶의 존재이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자기 스스로를 남보다 더 나은 존재 로 만들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스스로를 거룩한 존재로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주인되신 예수님의 뜻만 성취하는 종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거룩한 존재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실현을 위한 헛된 욕구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자기실현은 설사 긍정적으로 보이고, 영적으로 보이는 방향이라고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만을 실현하는 십자가의 길과는 정반대의 것들입니다.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동기에서 나온 경건훈련은 헛된 경건이고 자기를 의롭게 여기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 자체가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로 부터는 오히려 멀어지는 길입니 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명예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명예로운 것은 고사하고 외식하는 자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명예를 추구하는 만큼 하나님으로 부터의 영적 명예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영적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몸종으로 철저하게 성령을 따라 살 때에 예수님의 살(떡)과 피(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해지게 됩니다.
7월 16일: 거룩한 지배에 대한 개념 (만사는 하나님 손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마태복음 7:11)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말씀은 누구에게 가능합니까?
(A)’종’이 아닌 ‘자녀’에게만 유업을 주신다! :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늘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구하는 사람입니까?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는 자녀를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또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야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좋은 것을 받는 사람은 ‘종의 의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녀의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종은 자신이 일한 댓가를 받으려고 노심 초사합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합니다. 더 열심히 일할수록 하나님께 더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내 열심의 댓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댓가를 얻으려고 힘씁니다. 그런 마음상태는 결국 자기 뜻데로 하나님 아버지가 움직여주지 않으시면 실망하고 떠나가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와 표적만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에수님이 육적으로 자기들을 배불리 먹여주실 왕이요, 로마의 압제에서도 벗어나게 해주실 왕이 되어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육적으로 구원하시는 일에 제한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시고 죄값=사망의 값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데로 예수님이 자기들을 위한 왕이 되어주시기를 바랬 습니다. 종의 마인드로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녀의 마음으로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면 좋은 것으로 받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종의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녀는 아버지 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일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이 곧 나의 일이기 때문에 일합니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무엇을 받고 안 받고는 관심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녀인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내가 구할 때마다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타이밍에 주시기 때문입니다.
(B)’종’은 댓가를 바라지만 ‘자녀’는 신뢰하며 최상의 것을 기다린다!: 다윗은 13여년이 지나서 아버지께 받았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통체증 (traffic jam)이 있을 때는 기다려야 합니다. 샛길로 빠져서 다른 길을 찾아 빨리 가려하면 오히려 더 오래 걸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엇인가 앞에서 교통체증을 일으키시면서 일(work)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최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서 교통체증과 같은 느낌이 드는 기다림의 상태가 있습니다. 자녀는 언제 하나님이 예배하신 것을 받는가 보다는 어차피 자녀가 받을 것은 이미 하나님의 길위에 다 놓여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는 것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일한 댓가를 지불받으려는 종의 마인드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때문 입니다. 즉 기도를 많이 해서 축복을 받겠다는 마음의 동기로 하는 ‘기도’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예배를 많이 드려서, 금식을 많이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기도응답을 받겠다는 마음의 동기는 종의 마인드에서 나온 예배의식은 가인의 예배와 같이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예배입니다. 성도는 자녀로써 아버지께 구하며 거룩한 길을 달려야 합니다. 아버지의 거룩한 길을 달리다보면 아버지가 하신 일들을 발견하게 될 것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대신 일을 성취하려고 하면 아버지가 하신 일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그 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에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지도 않고 부어지지 않습니다. 자녀는 아버지가 가시는 길에 같이 서야 만 자녀로서 인정받고 하늘의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7월 17일: 믿음의 기적 (설교자의 자세)
1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 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 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 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1~5)
*어떤 설교가 영적 설교입니까? 그리고 어떤 설교가 육적 설교입니까?
(A)사람의 지혜에서 나오는 설교 = 육적 설교: 영적 설교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 사람의 영혼이 진실로 변화 받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이 변화 받아 회개하고 구원을 얻고, 한 사람의 ‘혼’(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설교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사람의 설득력 있는 ‘말’과 아름다운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지식자요, 지혜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현학적인 지식과 지혜의 말로 설교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기초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기초하여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전 2:1-5) 수많은 지혜의 책과 사람의 인간적 이해에 기초한 책들에서 나온 지혜롭고 현학적인 말을 구사해서 사람을 설득하는 설교는 사람들의 믿음을 사람의 지혜에 기초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설교자 자신의 지혜에 기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실족시키는 ‘죄’입니다. 그런 설교는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노력, 사람의 고귀한 희생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보다 더 우월하게 증거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런 설교는 감동적이고 위안을 주지만 사람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죽은 설교입니다. 바로 이런 죽은 설교가 ‘육적 설교’입니다. 사람의 희생적인 모습이 사람의 눈으로 위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위대한 위인들의 그 어떠한 선행과 희생도 자신들의 죄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보배로운 피와 예수의 이름만이 죄와 어두움에 빠져 있는 인생들을 유일하게 구원할 능력이요, 성화시키시는 능력이요, 영화롭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하는 것이 영적인 설교입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를 하던지 최상의 결론은 “그리스도 예수안에”로 결말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B)사람의 ‘의’를 자극하는 설교 = 육적 설교: 이러한 육적 설교는 사람의 긍정적인 노력과 열심을 자극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입니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의 능력되신 주님만을 바라봅니다!”라는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능력되심을 고백함으로 영혼의 변화를 일으키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영적 설교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한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원(Resource)이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사람의 마음을 자극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삶의 변화로는 이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설교는 공자와 맹자 같은 사람들이 말한 건전하고 합리적인 삶을 설득하는 말과는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으로 성도들을 더 나아가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마음을 향하게 하는 말씀 이어야 합니다. 영적 설교는 설교자가 죽고, 설교를 듣는 사람도 죽고 오로지 모든 성도의 삶의 자원이 되신 예수님이 사시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설교자 자신도 영적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드러내지 않는 설교, 예수의 보혈과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중심의 설교는 설교자 자신을, 성도자신을 메마른 상태에 빠뜨립니다. 귀에 듣기 좋은 설교와 말씀 을 추구하다보면 영적 어두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영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사모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실상은 세상에서 높임을 받는 것들(돈, 명예, 권력 등)을 추구하고 육신의 만족을 주는 것들(간음, 오락, 술취함, 방탕함 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와 노력을 자극하는 말씀에 근거해서 상식적으로, 열심으로 살려하다보니 오히려 성령이 소멸되고 영적 암흑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 내가 이르는 말(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6: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말씀을 영적으로 알지 못하고, 육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듣고, 말하고, 추구하면 영은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육신의 귀를 즐겁게 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영이 임하면 성도는 “마음의 할례”를 받게 됩니다. 할례(표피를 자르는 일)을 받는데 고통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굳은 표피를 잘라낼 때, 당연히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십자가의 길에서 얻는 자유와 해방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받은 후에 말씀을 증거할 때,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서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며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말씀은 마음에 할례를 받는 ‘회개의 마음’이 되게하고 그리고 나면 성령의 기륾부음이 충만하게 임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하게 하게 만듭니다. 육적인 설교는 “그래! 더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겠다!” 라고 하는 동기부여는 줄지 모르지만 온전히 회개하는 마음까지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게으름과 부족함이 문제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설교는 “내가 그 무엇도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구나! "라는 자기 무능함과 무기력함을 고백하는 마음이 되게 하여 오직 예수보혈과 이름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예수만이 생명이요, 능력임을 고백하고 그의 도우심만을 구하여 죄와 세상, 그리고 마귀를 이기게 됩니다. 사도요한은 이것에 대해서 “우리의 동료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말씀을 힘입어서 그 악마를 이겨 냈다” (요한계시록 12:11)라고 말합니다.
7월 18일 : 신앙의 신비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도행전 9:5)
*성도의 삶가운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일으키는 바탕은 무엇입니까?
(A)하나님의 신비 = 종교생활이 아닌 십자가 생활에서 출발: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바로 ‘순종’은 성도의 삶을 하나님의 신비로 채우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왔다는 증거는 바로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없는 ‘순종’을 주님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와야만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많은 영혼들이 종교적 행위에 불과한 신앙 테두리를 벗어날 때 하나님께 비로소 나아오기 시작한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행위의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충분히 열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열심’이 없는 것이 종교적 행위 수준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어떤것을 하던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을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전에는 유대교를 지키려고 자기 열심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강팍한 바리새인에서 겸손하고 충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성도들 이 종교적 행위 수준의 신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온전히 십자가 앞에 나오기 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불순종하며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사랑과 영원 을 보증하신 예수님의 부활소망으로 인하여 ‘순종’의 길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면 더 예수님의 빛으로 충만해져서 신령한 것을 더 발견하게 됩니다. 불순종하면 현재의 신앙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종교적이고 되고, 더 어두움에 처하게 되며 신앙이 퇴보하게 됩니다. 신앙의 영적 선택의 여정입니다. 빛을 선택하면 선택할수록 하나님의 신비에 대하여 더 마음이 밝아지고 열리게 되지만, 어두움을 선택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숨으면 더 썩어질 것에 대하여 마음이 밝아지고 열려서 헛된 것을 더 쫓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심던지 다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육체로 심은 자는 육체의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이요.”(갈 6:8)라고 말합니다. 순종을 심으면 예수님의 빛이 더욱 충만하게 임합니다. 불순종을 심으면 육신을 따라 산 삶으로 인해 생기는 어두임이 더욱 충만하게 됩니다. 입술로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아무리 외쳐도 마음이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신비가운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적 목마름과 결핍으로 허덕이게 됩니다.
(B)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감과 목마름의 원인: 우리의 삶에서 왠지 모를 갈증과 목마름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삶이 아닌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난 예전보다 더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새벽예배까지 드리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왜 이런 이유모를 공허감과 갈증이 있는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종교생활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생활을 한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그렇게도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적도 없고, 그래서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가 보내신 자를 믿지 않는다.” (요 5:37~38)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불순종하면 주님의 임재가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즉 그 불순종은 자신을 사막 한가운데 내어던진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자기 길-자기 상식에 근거한 자기 방법으로 살아갈 때에는 늘 영적 사막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중심이 아니면 모든 것이 다 종교활동입니다. 수많은 종교활동을 할지라도 말씀의 영과 같이 살며 말씀을 생명처럼 순종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면 영적 사막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요, 영적 생명을 죽이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죽는 현상이 공허감과 갈증으로 나타납니다.
7월 19일 : 믿는 자의 복종 (신자의 주인)
13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14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복음 13:13~15)
*성도가 불순종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A)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은 절대로 성도에게 순종이나 복종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도들이 불순종할 때 아무 일도 안하시고 기다리시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기를 합당하신 주님(계 4:11)에 대하여 순종할 때까지, 불순종 하는 합당하지 않은 자녀의 모습에 존재하는 ‘무가치’를 계속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실현을 위해서 세상으로 나아간 탕자가 그가 가지고 있던 재물이 모두 무가치 하게 되어버린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도 무가치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눅 15장) 그래서 불순종하며 세상으로 나아간 탕자가 경험한 것처럼, 불순종하는 자에게 남는 것은 돼지의 쥐엄열매 밖에 없다는 것을 때로는 뼈저리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때 당하는 고통은 불순종의 댓가입니다. 피할 수가 없는 댓가지불입니다. 그러나 순종할 때 겪는 고통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겪는 고통”이기에 값진 것이요, 상급이 되는 고통인 것입니다. 성도가 겪는 고통을 영적으로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순종으로 겪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불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자녀들이 자기들이 의지한 것들이 전부 무가치한 것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집트에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도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은 사람들이 의지 하던 이집트의 신들이 모두 무가치한 거짓 형상들임을 증거 하시려는 의도 에서 나온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재앙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모든 불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은 억지로 순종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 길(self-centered way)과 선택의 ‘무가치함’ 은 철저하게 드러내십니다. 또 주님은 순종함으로 겪는 십자가의 길은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입증하십니다. 불순종하는 자녀에 대해 하나님 은 아버지로써 포기하지 않으시고 징계를 하시면서 까지라도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사랑을 베푸십니다. 현재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무엇에서 비롯됐습니까? 불순종입니까? 십자가 입니까?
7월 20일 : 하나님의 실존에 의지하라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0:31)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A)영적으로 건강한 사람 = 매순간을 성령을 따라 행함: 오스왈드 챔버스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매순간을 걸어가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매일 매일 나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한 살례로,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더 큰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고자 하셨나요?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 =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세례요한에게 엘리야의 사역을 시키시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통해서 오실 메시야-그리스도를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또 더 중요한 세례요한의 사역은 오신 메시야 - 그리스도가 성령 으로 세례를 주는 분임을 증거 하게 하시기 위하여 미리 하나님의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 “어떤 이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줄 자 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 은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현장에 걸어 나가신 것입니다. 주님이 성도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주시는 길은 매순간 성령을 따라살 때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마치 매일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을 하면 살듯이, 성령을 따라 매일 매순간을 사는 삶이 하나님의 생명이 활발하게 운동하고 성장하는 길입니다.
(B)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 = 드라마틱한 순간만을 기다리는 사람: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매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 에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틱한 영적 스릴을 바라는 사람이다”라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높이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영적 비상을 꿈꾸며 스릴을 추구하면 영적 파산을 피할 수 없다”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매일 매순간 영적으로 안정된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삶가운데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부분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안정적으로 하나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드라마틱한 영적 스릴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제자훈련을 받고, 또 많은 은사집회도 참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영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령님이 영적으로 부담을 주시는 부분을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 나가고 있는가가 나의 영성의 수준입니다. 성령님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길을 매일 걸어가도록 영적 부담을 주십니다. 바로 내 옆의 어떤 사람에게 물질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마음도 주시고,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라는 마음도 주시고, 주변의 누군가를 위해 중보 기도하라는 마음도 주십니다. 성령님이 구체적으로 주시는 영적 부담은 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제자훈련을 하고, 자기 나름의 봉사를 해도 “성령으로 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계수(count)받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받은 제자훈련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 이었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과는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산다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양은 늘 목자의 음성을 듣고 차근차근 걸어 나가는 양입니다.
(C)영성의 대가가 되는 길 = 매 순간 십자가의 길로 가라!: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영성의 대가’를 보면서 자신도 하루아침에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영성의 대가들이 쓴 책들은 모두 읽어서 지식으로 충만하려고 하고, 열심히 영성집회도 참석합니다. 영적인 복을 사모하는 마음은 야곱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영성의 대가처럼 되려는 마음의 동기는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 해도 그 영성의 대가들처럼 되지는 못합니다. 왜 일까요? 영적 성장은 ‘지식’ 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성의 대가 처럼 되고 싶으면,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한 믿음의 선배 들의 삶처럼, 자신도 그렇게 순종의 길로 매일 걸어 나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많은 일을 한다고 영적 성장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십자가를 매일 매순간 지는 순종으로 나아가는 길에 서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7월 21일 : 왕국에 이르는 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3)
*하나님의 왕국에 이르는 성도의 복된 마음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A)하나님 나라의 시민되는 길 = 세상과 나에 대해 가난한 마음: 오스왈드 챔버스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이 하나님 왕국의 제 1원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지반은 가난이지 풍요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세리, 창녀, 병든 자들과 같이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내가 저 죄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 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치며 드리는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 이 받으시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성도의 마음은 늘 가난해야지 풍요로와서는 안됩니다. 즉 성도의 마음은 늘 “나는 예수님의 명령인 산상보훈의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의 기초를 이루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의 교훈을 건전하게 잘 실행 하며 살 수 있다!”라는 풍요한 마음은 착각에 빠져있는 마음이며, 아직도 나 자신(self)의 무가치함을 발견하지 못한 마음이기에 하나님은 이런 마음의 무지가 폭로될 때까지 장애물이 놓인 곳으로 계속 끌고 가십니다. 베드로가 절대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따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풍요했을 때, 주님은 육신적 의지의 무가치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할 수 있는 상황가운데로 베드로를 끌고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여지없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적 의지의 무가치함과 무능함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그저 “사랑합니다, 주님!” 이라는 고백만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B)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출발 = 자기 자원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 예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왕국의 기초인 가난한 마음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산상보훈대로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성도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함을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이 땅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self)의 힘으로는 살 수 없으나 내게 능력주시는 자-예수님 만이 나의 자원(Resource)이 되셔서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성령님의 인도따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원으로는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생명되신 그리스도 예수만을 추구하는 마음에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즉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이 성도의 삶가운데서 구체화 되고, 실재화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추구하며 살던 자기 자아(self)가 죽고 하나님의 의(God's righteousness)되신 예수님만이 내 자아(self)를 대신해서 내 안에서 사실 때, 성도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온전히 거룩한 자가 되어갑니다.
7월 22일 : 거룩 ( 죽음 편 )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 하여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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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하나님의 생명주시는 출발 = 죽음을 선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34절에서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하여 성도가 어떤 댓가를 치러야 하는 지를 철저하게 비용계산을 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냥 나를 믿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 해서도 안되고, 자기 목숨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도 안된다고 하십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하는 자아(self)를 부인하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26절에서 “자기 목숨 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 과도 같은 가족, 자기 목숨과도 같은 돈, 지식, 명예, 권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삶의 존재기반이었던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자기목숨의 존재기반인 것들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존재기반위에 삶을 새롭게 세우라고 하십니다.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은 한국에서의 삶의 기반을 포기하고 온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새롭게 미국에서 삶의 기반을 세우기 위해서 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자기의 삶의 기반이었던 ‘돈’을 떠나 ‘예수님’께로, ‘자기 지식’을 떠나 ‘예수님’께로, ‘자기 보람’을 떠나 ‘예수님’께로 자기 목숨의 존재기반을 옮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신 성령의 검으로 자기 존재기반인 가족의 도움을 잘라내고, 돈을 잘라내고, 자기 경험과 지식을 잘라내고, 하나님의 도움과 하나님의 자원과 지혜로 계속 충만하게 새로운 존재기반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바로 자기목숨의 존재기반이 죽음에 처해져서 내가 알몸이 된 것처럼 존재기반이 다 죽고, 내 안에 예수님만이 생명되어주실 때 이루어집니다.
(B)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 = 옛사람의 마인드의 죽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충만하게 생명되시려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는 더 무감각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는 더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으로 부터 듣는 말이나 평가에 대해서는 점점 더 개의치 않고 주님이 생각하시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나는 자신을 다 벗기고 내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나 친구들이 나를 생각하는 것에 개의치 않고 순전히 알몸으로 돌아가서 벗은 몸을 하나님께 그대로 바칠 용의 가 있는가?”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나를 온전히 거룩하게 해주셔서 내 생애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사물로 부터 해방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옛사람은 세상과 사람들로 부터 듣는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하는 사람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무엇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거룩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 의 생명 그 자체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7월 23일 : 거룩 ( 생명 편 )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30)
*성도의 거룩은 경건훈련으로 성취될 수 있을까요? 거룩은 훈련에서 옵니까?
(A)거룩해지는 길 = 그리스도와의 친밀함: 오스왈드 챔버스는 “거룩한 생활의 경이로운 비결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완전함이 내 육신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거룩은 “너희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27).”라고 말합니다. 즉 ‘거룩’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인격이 물 붙듯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 인내, 사랑, 신성, 믿음, 겸손은 개인의 경건훈련으로 배워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에 예수님 자신의 성품을 부어주시도록 나 자신을 내어드릴 때 ‘거룩’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만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은 거룩의 뿌리요, 나무입니다. 개인이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건은 실체(Reality)가 아니고 허상(false image)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경건 훈련에서 나온 경건의 모양은 결국 죄 앞에서 무기력하게 쓰러집니다. 어려운 상황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마치 모래위에 성을 쌓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비가 나고 홍수가 나면 자기가 세운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7:25-27) 오스왈드 챔버스는 “거룩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을 부여받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본성을 부여받으려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에 서야만 ‘육신의 본성’에 온전히 죽음을 선고하고 새로운 성령의 열매인 새 본성=예수님의 본성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본성이 점점 죽음을 선고하는 일과 새 본성인 예수님의 성품이 점점 부여되는 것은 비례하는 일이며 이 일을 성령님은 동시에 해나가십니다. 즉 자기실현을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정욕과 자랑이 죽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성품이 부어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B)예수안에 있는 삶 = 십자가의 길을 가는 거룩의 길: 예수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성도의 삶을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룩을 옷입히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같이 걸으십니다. 성도들이 매순간 걸어 나가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길’이기에,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기 위해 십자가 길에 서있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충만히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신비하고 놀라운 것이라서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더디고 느려서 답답하게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성도를 확실하게, 질서있게, 건전하게, 거룩하고 영적인 삶을 살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은 십자가의 길에서만 얻어 지는 보배로운 생명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7월 24일 : 주님의 본성과 우리의 동기 ( 제자의 특징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어떤 의미입니까? 실제 가능한 일입니까?
(A)제자의 특징 = 선을 행하는 동기자체가 선함: 오스왈드 챔버스는 “제자의 특징은 선을 행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 인해 선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동기 자체가 선하다는 것이다. 옳은 행위를 초월하는 것은 옳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거룩‘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거룩‘은 사람의 본성과는 정반대의 성질입니다. ‘선’(goodness)을 행할 때 조차도 선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맨하탄의 노숙자(homeless)들이 1불을 구걸할 때, 우리는 1불 짜리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불짜리를 하나 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몸이 멀쩡한 사람이 왜 저렇게 한심한 인생을 사는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즉 겉으로는 선을 행하면서도를 속으로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남으로 인해 생긴 선한 양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회개하고 율법에 정한 것(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은 4배 / 가난한 자들에게는 10분의 1의 소득)보다도 더 많이 선을 행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10분의 1이 아닌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을 행하는 동기 자체가 선한 사례이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B)제자의 특징 =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삶: 오스왈드 챔버스는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정화시키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규범이나 수칙들을 주시지 않는다. 그의 교훈은 진리이지만 오직 그가 넣어주신 신의 성품을 받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커다란 경이는 그가 우리의 유전형질을 바꾸신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오직 사람이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자신이 정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모순된 생각입니다. 본성이 ’거룩‘과는 정반대인데, 행위는 거룩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서 성도의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영적 유전형질을 바꾸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성공하셨습니다. 아담은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만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서 실패했는데, 예수님은 끝까지, 못 박혀 피 흘리시는 십자가상에서 조차 하나님 아버지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녀들을 회복시키시는 두 번째 아담이 되신 것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인류(new race)입니다. 성도는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거룩의 씨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요 1:13)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신 모든 동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받던 광야에서도, 그리고 피 흘리시는 십자가상에서도 계속 하나님 아버지만을 추구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늘 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셨나요? 하나님의 영광만이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할 때만 성도들이 영화롭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을 하던지 그 마음의 동기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외적으로는 의롭게, 거룩하게 보였지만 그 마음의 동기만큼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의로운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마음의 동기가 예수님의 본성-하나님께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이었던 것처럼, 마음의 동기조차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의롭게 변화되는 존재들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새로운 거룩의 DNA를 받은 사람으로 마음의 동기부터 선하고 의로워지게 됩니다.
7월 25일 : 나는 복이 있는 자인가? ( 산상보훈 )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3~10)
*성도는 언제 자신이 산상보훈에서 말한‘복이 있는 자’임을 깨닫게 될까요?
(A)성도의 새로운 영적 삶의 방식 = 산상보훈의 가르침: 오스왈드 챔버스는 “산상보훈은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그저 매끈하고 멋있는 교훈으로만 들린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복잡한 세상 일과에서는 아무 실용성이 없다. 그렇지만 조만간 우리는 산상보훈이 성령의 다이나마이트를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산상보훈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게 되면 엄청만 폭발력을 낸다”라고 말했습니다. 산상보훈은 거룩한 본성으로 사는 복된 자들의 새로운 생활방식입니다. 이 세상의 생활방식은 자기실현을 위한 열심과 정욕으로 사는 것이기에 산상보훈의 생활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런 성도들의 생활방식을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 보훈의 생활방식으로 사는 성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대변동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영적 대변동은 바로 성도들 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면서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B)성령의 열매맺는 씨앗 = 산상보훈이 말하는 마음들: 오스돨드 챔버스는 “산상보훈은 규범이나 조례가 아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속에서 역사할 때에 우리가 누리게 되는 삶의 진상을 진술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산상보훈은 바로 성령의 열매를 낳은 씨앗입니다. 죄의 씨앗이 욕심 (정욕)이었던 것처럼, 성령의 열매의 씨앗은 산상보훈에서 열거하는 가난한 심령, 핍박을 기꺼이 수용하는 마음,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마음 등입니다. 이러한 거룩의 씨앗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적 대변동을 이루는 성령의 씨앗입니다. 바로 성령의 씨앗은 성도의 마음가운데서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성도의 마음가운데 거룩의 씨를 만들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셔서 영적 대변동의 역사를 만드시는 근원이 되십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대변동의 도구로 내가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때 나는 참으로 복된 자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 있는 자의 생활방식의 깊이를 체험하게 됩니다.
7월 26일 : 순결을 향한 길 ( 바보의 낙원 )
18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 힌다. 19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마태복음 15:18~20)
*예수님의 영적 진단과 나의 영적 진단이 불일치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A)영적 진단의 대상 = 마음 : 모든 치료에 우선하여 선행되는 것이 바로 ‘진단’(Diagnosis)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순결(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가시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먼저 진단을 내리십니다. 그 진단은 바로 “마음으로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이다.”라는 말씀처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결론내립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단은 “부모를 마음으로 한번이라도 미워한 자는 부모를 살인한자요, 자녀를 미워한 자도 자녀를 살인한 자다.”라고 선고를 내립니다.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진단에 대하여 반감을 가집니다.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순진한 무지를 신뢰하면 예수님의 진단에 반감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도에게 순결을 향한 거룩의 길은 바로 예수님의 진단앞에 자기 마음의 실체가 발가벗겨져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진단을 수용할 수 밖에 없고, 순진한 무지를 신뢰하는 바보의 낙원에서 탈출하여 참된 주님의 낙원에 들어가는 예복입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죄된 상태에 있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전까지 낙원에 들어갈 예복을 입을 수 없습니다. 그 예복은 바로 성령님이신데,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에게만 낙원에 들어갈 신령한 예복인 성령님을 옷 입을 수 있습니다.
(B)영적 치유의 길 = 성령을 선물로 주심: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죄때문에 몸부림을 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이길 능력이 없음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객관적인 측면에서 사울왕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간음자요, 살인자요, 가정불화의 원인 제공자였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이랬습니다.
“그래서 행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로마서 4:6~8)
사람의 힘으로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가 없기에 주님의 은혜로 죄용서받은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죄용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가능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13) 예수님은 우리 마음가운데 영적 진단을 내리시고 정화시켜 주시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내면가운데 세상 으로 나아가 자기실현하려는 정욕과 탐심을 불태우는 소멸하는 불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거하심은 은혜요 축복 그 자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심령가운데 거하시고, 직접 각 사람을 인도하시고 치유 하시는 능력되어주시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살 때에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기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신 성령님이 바로 ‘선물’되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받은 신령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다윗 역시 다윗의 장막을 만들어 24시간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찬양과 기도로 예배를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받은 자들만 누리는 영적 축복이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7월 27일 : 앎(knowledge)의 길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 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요한복음 7:17)
*성도가 영적으로 전진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A)하나님의 다루심에 대한 지속적인 거부 = 불순종: 영적 전진과 성장의 장애물은 ‘열심의 부족’이 아니라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취사선택해서 하는 부분적인 순종도 사실 불순종입니다. 하나님 은 성도의 삶 가운데 구체적인 순종의 내용을 주십니다. 순종의 내용은 다름 이 아니라 자꾸 자기목숨의 존재기반인 것들(돈, 시간, 지식, 재능 등,,)을 사용해서 사랑을 행하고, 용서를 행하고, 화해를 행하라는 것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기 전에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 이 생각나거든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나서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행위보다 나를 원망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자는 마음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분명히 마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도록 지속적으로 감동을 주시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불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 영적 전진과 성장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분적 순종을 포함한 불순종의 장애물이 나의 목구멍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영적 어두움을 가져옵니다. 어떤 부분에 계속 먹구름이 끼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순종을 원치 않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가정에 자꾸 먹구름이 끼면 그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형제와 형제의 관계에서 뭔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지 않으려는 불순종의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열심히 기도한다고 무마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성령님은 성도의 내면 안에 역사하는 불순종하려는 자기변호의 정신을 들추어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에 대하여 나 자신의 마음이 계속 찔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왠지 그 말씀은 읽고 싶지도 않고, 그 말씀에 관련한 설교말씀은 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나의 불순종의 내용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성도에게 인간적인 위안을 주려오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찔림을 통해 참 평화를 알게 하시고 참 기쁨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순종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참 평화입니다.
7월28일: 하나님의 목적인가 나의 목적인가?(순종 다음에 오는 것)
49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고 소리쳤다. 50 그를 보고, 모두 놀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51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랐다. 52그들은 빵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뎌져 있었다 (마가복음 6:49~52)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은 목적이라 부르신다.”라는 뜻은?
(A)믿음의 열매 = 결과가 아닌 과정: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의 관심은 성도들의 순종하는 과정이지 특정한 결과가 아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정한 종착지를 위하여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착역은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파도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끝가지 잘 걸었다는 결과를 위하여 베드로를 파도 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파도 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과정에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착역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종착역까지 이르는 과정을 목적으로 두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어느 날 예레미야 에게 엉뚱한 일을 시키십니다. 아무런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시고 예레미야의 허리에 띤 띠를 유프라테스 강가의 바위틈에 숨기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이유도 설명하지 않으시고 다시 가서 찾아오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그대로 합니다. 예레미야가 섞은 허리띠를 찾아오고 나서야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현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많은 경우에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대로 따라가는 ‘과정’을 하나님은 믿음으로 한 의로운 행위라고 여겨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 자체가 의롭다고 인정받은 믿음이 아니라 노아가 방주를 짓기 위해서 드린 순종의 과정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감수하면서 드린 순종의 과정이 믿음입니다. 방주 짓는 것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순종의 과정가운데서 주님과의 친밀한 동행이 있습니다. 에녹이 주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주님께로 갔습니다. 에녹이 한 특별한 행적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하다가 죽음없이 주님께로 갔습니다.
(B)믿음생활의 적 = 결과중심의 신앙생활: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의 목적은 지금 현재 내 삶의 혼돈 위에서 주님이 걷고 계신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당면한 현재에 충분한 관심을 쏟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종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면 다가오는 순간들이 모두 귀한 것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일을 이루라고 성도들을 내모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도의 삶의 과정가운데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나를 위해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단은 자기실현을 하고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멋있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실현을 위해 순간순간 세상으로 나아갈수록 예수님을 증거 하는 영적 지혜로 부터는 멀어집니다. 설사 자기성공을 통해서 ’간증‘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에게서는 멀어진 영적 상태이기에 결국 자기노력, 자기 열심, 자기 지혜를 증거하게 됩니다. 헛된 간증이 되어버립니다. 나의 성공이 곧 하나님 의 성공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성공‘은 삶의 과정자체가 간증이 됩니다. 현재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되지 않으면서, 나중에 내가 성공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자기 방법데로 영광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자기 방법데로 영광을 돌리는 것을 주님은 ‘순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7월 29일: 당신의 구름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
*하나님이 성도에게 모든 구름(고난들)을 가져오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이 구름(고난들)을 때로 몰고 오시는 이유는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구름을 몰고 오시는 이유는 모든 고난들을 통하여 성도들이 더 이상 그릇된 것들을 배우지 않고, 오히려 점점 믿음이 단순해져서 하나님을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대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욥이 고난을 끝자락에 고백하기를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라고 합니다. 욥은 고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귀로 듣던 관계에서 눈으로 보는 관계로 성장했고, 더욱 단순한 관계가 됐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는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어린 아이처럼 단순해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순종을 할 때도, 예전에는 왜 순종을 해야 하는지 꼬치꼬치 따졌지만, 모든 구름(고난들)가운데서 나와 같이 계시고, 역사하시고, 보고 있기 때문에 더 단순하게 반응하고, 단순하게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7월 30일: 환멸의 훈련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증언도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2:24~25)
*인간적 관계의 결말과 하나님 중심의 관계의 결말은 무엇이 다릅니까?
모든 인간적 관계 - 부성애, 모성애, 우정, 애정을 통한 관계는 모두 실패하여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베푼 사랑만큼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안 믿어야지 하면서도 또 사람을 신뢰하다가 환멸을 경험함을 인해 사람에 대해서 냉소적이게 되고 악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을 환멸하시면서 악감을 가진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바래서 ‘왕’으로 삼으려고 했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그 몸을 의탁(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 2장)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확신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절망을 느끼지 않았다”라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이 우선하지 않고 행해지는 모든 인간적 사랑의 관계는 성도를 절망감, 배신감, 억울함에 빠뜨립니다. ‘예수님’이 빠져있는 모든 인간관계는 필연적 으로 실패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은 사람에게서 받을 수 없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무한하게 사랑을 베푸시면서도 결핍과 부족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관계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세워져야 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도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지 부성애와 모성애로 양육해서는 안됩니다. 부성애와 모성애로 양육하는 것이 자녀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능력을 빼앗아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지 않고, 부모를 의지해서 살게 될 때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탓하지 마십시오! 만약 우리가 베푼 사랑과 헌신이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관계가운데 예수님의 주인되심과 생명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결국 나에게 ‘환멸’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된 하나님이 중심된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관계가 되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귀한 영적인 관계가 됩니다.
7월 31일: 온통 그의 것이 될 때까지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야고보서 1:4)
*주님은 언제까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성도들을 다루어가십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어두운 부분이 해결되어 온전해 질 때까지 구석구석을 다루십니다. 자기실현의 욕구가 모두 정리될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충만해서 인내가 완성될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루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인내가 성도가운데 충만해질 때까지 다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온 삶이 주님께 속하여 인도함을 받을 때가지 하나님의 다루심은 계속될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삶의 모든 부분이 온통 주님의 것이 되게 해드리는 사람입니다. 어느 한 부분 이라도 자기 것이 아닌 주님에게 속하게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