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사들의 대부분이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어도 에드워드 정을 거의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를 알지 못한다 해도 모두 들어본 일이 있다는 것이 옳다. 심장내과 전문의로서 그가 닦아 놓은 학술적 업적은 당대의 의학도들에게 교과서적인 필요필수의 일가견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서적들도 많이 출판되었지만 한동안 심장병 진단을 위해선 그의 책을 꼭 참고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세계에서 알아 주는 心臟學의 大家로서 E.C.G(심전도) 판독과 부정맥의 권위자로 알려진 그의 업적은 100권의 책과 650편이 넘는 논문으로 남았고, 12개국에서 번역판을 내는 괄목할 만한 것이다. 미국 명 「에드워드 정」으로 명성을 날리는 鄭求榮(정구영·72) 박사는 올해 100번째의 책을 출판했다. 지금까지는 의사들을 위한 학술서적이었으나 처음으로 일반인을 위해 심장질환에 관한 100문 100답이라는 책을 썼다. 이번엔 이례적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가까운 친지와 동문, 제자를 초대해 큰 잔치를 베푼 이유는 그가 의사로서 걸어온 업적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지만 최근에 환자가 되어 겪게 된 어려움을 통과한 자축의 의미가 깊다. 여행으로 축하연에 참석할 기회를 잃었지만 파티는 大저술가의 엄숙한 출판회라기보다는 歌舞(가무)를 즐기는 鄭박사의 취미가 참석자를 흥겹게 만드는 자리라는 상상이 가능했다.
자랑스러운 아시아계 미국인 필자는 수년 전 鄭박사가 자랑스러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뽑혔을 때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 이외에도 서너 번 만나는 기회가 있었지만 대할 때마다 「인생의 돛배는 내 마음의 노가 젓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당당한 자신감을 읽어 왔다. 허나 지난 여름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鄭박사가 肝移植(간이식) 수술을 그것도 두 차례나 받았다는 이야기다. 심장 의사의 간 이식수술은 특별한 소감을 남겼을 것이라 여겨져 그를 기다렸다. 35년간 봉직하던 필라델피아의 제퍼슨 의과대학을 떠나 플로리다로 이주해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는 鄭求榮 박사가 뉴저지의 아들집을 방문하는 날을 맞추어 그를 만나러 갔다. 鄭박사를 찾은 날은 태풍 후의 고요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조용하고 청명한 날씨였다. 버지니아 지방을 휩쓸고 워싱턴 공항도 폐쇄시킨 막강한 태풍이 그동안 재난에 시달린 뉴욕을 슬쩍 비켜 가는 선심을 베푼 탓에 이곳은 잔가지가 부러지는 정도의 심한 바람으로 그쳤지만 그래도 어리둥절하게 평화로웠다. 鄭박사의 아들이 살고 있는 마와(Mahwah)는 내가 사는 곳에서 30분이면 도착하는 동네이고 위치도 짐작이 가는 곳이었다. 鄭박사의 아들 집은 안에서 대문을 열어주면 구불구불 본채를 찾아가야 하는 상당한 저택이었다. LA에 사는 작가 시드니 셀든의 집 쇠빗장을 통과한 이래 빗장 걸린 저택은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34세에 이렇게 살 수 있는 아들의 성공이 더 궁금한 기분이 든다. 이사한 지 두 달이 안 돼서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鄭박사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 두 번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이젠 활동하는 데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않는다는 鄭박사는 예전 모습과 다름없었다. 평생 같은 체중을 유지한다는 72세의 체격도 바르고 곧다. 8개월 전에 큰 수술을 치른 것 같지 않은 밝은 얼굴이다. 『이젠 모든 수치가 완전 정상으로 돌아왔어. 식욕도 좋아지고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어. 이식된 간의 거부반응에 예비하는 프로그라트 이외엔 먹는 약도 없지. 그건 평생 날마다 먹어야 하는 약이야』 어느 장소에서나 윗사람에 속하는 鄭박사는 사적인 자리에선 반말을 했다. 집안에선 7남매의 장남이고 동창회에선 대선배이고 대학에선 디렉터에 앉아 있었던 위치 감각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이 아닌가 싶다. 병은 자기 관리를 잘못했다는 수치심도 동반해 現시대는 병 자랑을 하라는 옛말을 뒤물리는 현상인데 먼저 의사로서 환자가 되었던 기분부터 물었다. 처음 병을 알게 되니 불쾌한 기분이 앞섰다고 한다. 왜 이런 병이 생겼나 화가 나지만 간염이란 40∼50%는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병이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간염은 잠복기간이 길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 주사 바늘을 다시 소독해 쓰고 장갑도 안 낀 채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던 때 감염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해보았다고 한다. 『병든 사람을 나와 다른 부류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야. 직업의식 이외에 환자의 입장에서 감정을 가질 수 없었으니까』 그는 7년 전 간 검사를 하게 된 경위부터 설명했다. 『처음엔 위암으로 죽은 친구가 있어서 나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검진차원에서 위와 장검사의 스케줄을 잡았어. 엉뚱하게 간이 비대하다는 보고가 있었지. 자각증세가 전혀 없었는데 C형 간염이라는 진단이 나왔어』
멋있게 살기 鄭박사가 재직하는 제퍼슨 대학에는 간염 예방과 퇴치에 앞장서서 뛰고 있는 대학후배이자 동료인 한혜원 교수가 있다. 韓人사회를 순방하며 간염 예방을 홍보하고 검사와 연구에 앞장서고 있는 병리학자다. 韓박사의 지시대로 수술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 일단 레지스터를 했다. 간이식 수술이 불가피한 경우를 대비한 간이식 신청 등록이다. 그리고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자기공명영상법) 검사를 계속하면서 사태를 주목하기로 했다. 그러나 병의 별다른 악화나 변화 없이 鄭박사는 2년 전 은퇴하기에 이른다. 『그 사람이 멋지게 살았다는 결과는 은퇴가 멋이 있어야 하는 거야. 「활발하게 일할 수 있는데 왜 벌써」라고 생각할 때 은퇴해야 돼. 다른 사람의 눈에 아직 떠날 필요가 없는데 싶을 때 떠나야 해. 그게 멋있는 태도야』 鄭박사의 인생에서 멋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내적, 외적으로 늘 멋이 있어야 한다는 철칙을 지키며 멋있는 삶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고 이루었다고 봐도 좋다. 이야기 중간에 섞이는 『아주 멋있어. 아주 멋진 사람이야』 하는 대목은 그래서 특유의 칭찬이고 감탄이 된다. 멋진 은퇴로 대학을 떠난 그는 역시 의사이며 郵政局(우정국) 의료센터의 동부 디렉터로 재직하던 아내 李相仁(이상인)여사의 은퇴를 기다려 1년 후 동창이 살고 있는 올란도로 이사했다. 『작년에 대학병원에 정기 검사를 하러 갔는데 처음으로 간에 골프 공 크기의 럼프가 나타났어. 즉시 입원해서 조직검사로 들어갔지. 키모를 해서 매스를 파괴하는 방법을 시도했는데 혈소판이 너무 낮아 출혈이 심해서 조직검사를 못하고 끝내야 했어』
간이식 수술 肝移植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병원 물색에 나섰다. 이 계통의 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으로 결정을 하고 위치를 찾았더니 마침 플로리다의 잭슨빌에도 이 병원이 있는 걸 알았다. 살고 있는 올란도에서 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위치다. 메이요 클리닉에 외래환자로 등록을 한 鄭박사는 수술에 앞선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병원 옆 호텔에서 지내며 열흘에 걸친 정밀 검사와 인터뷰를 치렀다. 테스트는 다른 모든 기관의 검진도 포함된다. 다른 臟器(장기)들이 건강하고 회복할 체력이 되는지를 알아보는 검사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간을 기다리는데 우선 순위가 있어. 다른 오르간(Organ)에 병이 들어 있는 환자는 아무래도 뒷전으로 물러나지. 건강하고 젊은 사람을 먼저 살리는 것이 당연하잖아. 70이 넘으면 성공의 확률이 낮아지니까 간을 안 주려고 해』 鄭박사는 혈압이나 당뇨 등의 성인병이 없는 것도 유리했다고 하지만 우선 순위에는 국가와 사회에 업적을 세우거나 인류에 공헌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예외가 있다. 鄭박사는 당연히 그 카테고리에 속한다는 것이 주위 사람의 의견이다. 의학계에 이룬 그의 공적은 당연히 0순위에 오른다는 거다. 『메이요 클리닉에 가보니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수두룩해. 각 科(과)에 열두 명이나 있었어. 제퍼슨에서 가르친 제자들인데 얼마나 성심껏 내게 잘해 주겠어. 정말 가르친 보람을 느꼈고 사회 봉사의 代價는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싶었지』 테스트를 통과하고 간 이식 수술을 결정한 후는 대기하는 일만 남았다. 언제 간이 준비될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다.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몇 週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하나의 생명이 스러져야만 얻을 수 있는 살아 있는 장기를 기다리는 일은 누군가의 사고를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감회가 엇갈리면서 기다리는 나날이 계속됐다. 연락이 오면 세 시간 이내로 병원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트렁크에 짐을 미리 싸놓고 먼 외출도 삼갔다. 운전을 해 줄 사람도 부탁해 놓았다. 『운전해 줄 사람이 술을 즐기는 사람이었거든. 헌데 언제 부를지 모르니 술을 마실 수 없는 거야. 음주운전을 할 수 없잖아. 참 그 사람 고마워. 좋아하는 술도 한 잔 못하고 날 위해 참으면서 고역을 치러야 했지』 지난해 12월 중순경이다. 골프를 치고 저녁도 잘 먹고 돌아온 8시경인데 전화벨이 울렸다. 무심히 받으니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간이 준비됐다는 짧은 말을 아득한 심정으로 들었다. 반갑다거나 가슴이 철렁한다기보다 그저 막막했던 것이 당시에 느낀 이상한 기분이다. 밤 12시 병원 도착, 절차를 밟고 병실로 들어갔다. 시술 전에 샤워를 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샤워가 아닐까 하는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지품을 건네고 수술실로 들어갈 때 눈물겨웠다는 표현을 썼다. 『자서전을 영어로 쓰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눈물겨웠던 당시의 심정을 영어로 표현하지 못하겠어. 학술적인 영어는 쓰지만 우리말의 생각과 감정은 영어로 정확하게 옮길 수가 없어』 간이식 수술의 경우 미국은 95%의 성공률을 자랑한다. 허지만 5%의 예외가 있다. 인간과 과학이 해내는 범위가 95%의 큰 數値(수치)라 해도 神의 영역인 5%의 미지수가 존재한다. 그래서 가장 과학적인 증명을 마칠 때는 가장 피상적인 G.O.K.(God Only Knows)의 종지부가 찍히며 神의 영역을 선언하게 된다. 의사인 그는 어쩔 수 없는 5%의 위력에 눈물겨운 무력함을 느꼈을 것이다. 『2시30분에 수술을 시작해서 세 시간 만에 끝냈어. 수술은 성공했고 유동식 음식을 먹으면서 계속 양호했지. 기분도 좋고 빌리루빈이나 엔자임 수치도 높아져서 회복이 잘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황달이 오고 나빠지기 시작했어. 6주 만에 갔더니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 안 되겠다며 2차 수술을 받자고 하더군』 그는 안 하겠다고 거절을 했다. 끔찍하고 공포스러워 무조건 다시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기력이 떨어져 혼자 설 수도 없었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아예 죽거나 살거나 판가름을 내야 한다는 심정이 들어 재수술을 받기로 했다. 결정을 내린 후 48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간을 구할 수 있었다.
수술 전 본 여자들이 예뻐 보였다
 이번에는 수술실로 들어가는 데 처음 느꼈던 비감의 심정이 전혀 안 일어났다. 다시 수술받는 것이 솔직히 기뻤다. 그만큼 절실하게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십여 명의 스태프들이 둘러 선 수술실에 실려 들어가면서 둘러 선 젊은 여자들이 예쁘다는 감탄까지 나왔다.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여자들, 참 뷰티플하다는 생각을 했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고픈 기분이 들더라구. 내 몰골도 워낙은 이렇게 한심하지 않다고 얘기하고픈 마음이 들었어』 마취로 정신을 잃어가면서 여자들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는 환자는 참 흔치 않을 것이다. 수술실에 들어오기 전에 거울을 다시 한번 보고 들어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환자는 더욱 흔치 않을 것이다. 세 시간 만에 2차 시술을 끝냈다. 경과도 좋았다. 첫 번째 수술 때는 간으로 이어지는 핏줄 연결관이 죽어 버려 이식된 간의 회생이 불가능했는데 이번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닷새 후 퇴원해서 병원 소속의 아파트에 기거하며 조리를 했다. 식욕도 돌아오고 나날이 기력이 생겨 3주일 후에는 완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이식받은 간은 적출할 때 상처를 냈거나 운송과정에서 데미지가 생겼던 것이 아닌가 싶어. 어려운 경험을 두 번씩 했지만 처음 실패 때문에 건강을 찾은 것에 더욱 감사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좋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살아야지. 평소 해 온 노력의 결과가 수술 이후의 삶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鄭박사는 48시간 내에 간이 구해진 건 슈퍼 파워의 도움이라고 믿는다. 미국은 장기 이식수술을 받을 경우 제공자와 접수자의 신분을 서로에게 알리지 않는다. 법적으로 밝히지 않게 되어 있다. 젊은 여자의 간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고 한다. 『여자를 좋아하니까 내 몸에서 이식 거부반응이 없을 거라고 친구들이 놀리지. 하하. 내가 참 人德이 있나봐. 은퇴 후에 알게 된 주변의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극진히 도와주는지 정말 호강했어. 잭슨빌에 있는 동안 수없이 찾아주고 날마다 음식해서 나르고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어. 관대하게 살면 나 역시 죽을 때까지 은혜를 받는 구나 싶더군』 鄭박사는 그때의 감동과 감사를 잊지 못해 수시로 도와줬던 사람들을 초대하고 대접하는 일이 요즘의 일과다. 심심하면 초대를 하고 음식을 나누며 건강해진 삶을 즐긴다. 鄭박사 평생의 知己(지기)이며 세상사에 큰 도움(?)을 준 노래와 춤으로 친구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큰 낙이다. 『더 즐겁게 더 관대하게 살아갈 것, 사소한 일에 신경쓰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미루지 말고 생각나는 건 그날 하자는 것이 좌우명이야. 우리는 가톨릭인데 신앙심도 높이고 감사하며 살지』 그는 새 삶을 살게 된 기쁨으로 「새 생명의 선물(A Gift of Life)」이라는 우리말 타이틀을 붙인, 한 의사의 간이식 두 번 받은 눈물겨운 이야기라는 책을 준비중이다. 鄭박사는 남들이 운이 좋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 듣기 싫었다고 한다. 운은 공짜로 얻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고 본인은 치열한 노력의 결과로 오늘의 자신을 성취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취도 운이 따라야 하는 건 부인하지 않는다. 『그건 그래. 「당신 참 운이 좋다」고 말해 주면 칭찬으로 들리지 않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으면 순조로울 수 없겠지』
한국 사교춤의 선구자 남들이 왜 운이 좋다고 말하는지는 출생부터 시작하여 알아볼 수 있다. 광복 이후의 어지러운 政局에서 서울高를 졸업하고 서울의대에 진학한 그는 6·25 전쟁을 만나지만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부잣집 아들을 미국에선 이런 표현을 한다) 풍족한 행운아였다. 부친은 京醫專(경의전) 출신으로 최초의 의학박사인 鄭一千(정일천) 박사다. 서울의대의 해부학 교수이며 부산의대와 가톨릭의대 설립에 참여하여 학장을 지낸 부친은 자식들에게도 최고의 자긍심을 요구하는 의학발달의 선구자였다. 鄭박사의 7형제 중 4형제가 의사가 되었다. 鄭박사를 선두로 해서 鄭求明 박사(병리학교수), 鄭求孝 박사(정형외과), 鄭求忠 박사(성형외과)는 부친의 뒤를 따라 의학을 전공했고 나머지 세 형제는 음악을 전공하기에 이른다. 『집안 내력이 모두 노래를 잘하고 음악을 좋아해. 막내 남동생은 줄리아드에서 공부를 한 테너 鄭光(정광)이고 큰 여동생 鄭樂榮은 독일서 피아노 공부를 한 후 교수가 됐지. 은퇴해서 LA에 살아. 작은 여동생 鄭和榮은 바이올리니스트야. 형제들이 모두 음악에 소질이 있어. 나도 노래라면 누구한테 지지 않아』 鄭박사는 자신의 음악적 소양이 심장병 전문의가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을 편다. 음을 읽는 귀가 심장의 박동과 리듬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했다. 音感의 남다름이 남이 못 듣는 불규칙한 음까지 놓치지 않게 해서 심장의 진단을 체계화하는 데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노래뿐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춤쟁이(?)다. 춤과의 인연은 젊은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 전쟁이 발발하던 해 청년 鄭求榮은 무조건 육군에 지원 입대했다. 의대 1년을 다니던 중이라 위생장교로 일선에 배치되어 동두천에서 8개월 반을 근무했다. 그리고 재대하기 전까지 마산 육군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 바로 춤 실력을 연마하게 되었다. 『한국에 사교춤이 들어와 한창 시작하던 때야. 일본에서 춤을 배운 사람한테 교습을 받았어. 학교건물을 빌려 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교실 칠판에 스텝을 그려가면서 열심히 춤 연습을 했지. 밤에는 앰뷸런스를 타고 통행금지도 없이 월궁이라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을 추며 지새웠어. 1년 동안 춤을 추니까 춤도사가 되더군. 내가 한국 사교춤의 선구자야』 그는 누구에게나 춤 자랑을 한다. 진지한 춤쟁이였다는 것을 꼭 내세운다. 그의 이력서에 활자화하지는 않지만 口頭(구두)로 이 말을 풍긴다. 그에게 있어 춤은 일생을 통해 빠지지 않는 주요활동 3박자의 동반적 위치에 있다. 그는 자신의 춤이야말로 그를 미국 땅에서 성공시켜 준 비결이며 무기였다고 추어올린다. 춤을 통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조용한 동양의사가 흥미의 대상자로 즉각 탈바꿈되던 경험 때문이다. 군대 제대 후 학업을 계속한 鄭박사는 서울의대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오기에 이른다. 교환비자를 발급받아 들어오는 의사 이주가 시작된 초기 이민세대다. 1959년 펜 암 프로펠라 비행기를 타고 와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첫 기착지는 센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병원이었다. 말 서툴고 낯선 곳에서 시작하는 미국생활의 처음 6개월은 힘들고 어려웠다. 평생 처음으로 기가 죽어서 지냈다. 멋쟁이 춤 선생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특히 중부의 하버드로 일컬어지는 고된 대학병원에서의 트레이닝이라 무척 어려웠다. 헌데 무명의 동양인을 일약 인기 만점의 레지던트로 바꿔준 것이 바로 춤이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혼자 외롭게 앉아 있는 것이 안됐던지 누군가가 춤을 추자고 청했어. 당시 유행하던 아더 머레이의 스윙을 연주하는데 선뜻 일어나서 춤을 추었어. 고기가 물을 만난 거 아니겠어? 내가 워낙 노는 데 귀신이니까 얼마나 잘 놀았겠어. 이튿날 당장 병원에 춤쟁이로 소문이 나게 됐지. 남들이 아는 체를 하고 알아주니까 기가 서더군. 어디서든 사람은 기가 죽으면 안 돼』 춤과 노래를 잘하는 것이 기를 세워주었고 그것이 자신감을 일깨웠다는 진단이 그의 굽힐 수 없는 성공의 비결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연구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유명해지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평범하게 머물지 않겠다는 야심이 집안 내력인 탓이다. 『사실 내가 책을 좋아하지도 않고 별로 읽지도 않아. 그래서 아내를 만났을 때 공부 잘하고 글 잘 쓰는 데 반했어. 집에 놀러 갔더니 책장에 책들이 그득해. 책을 많이 읽는구나 싶어 좋았고, 이화여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금메달을 받는 것에 감동했어. 집안에선 장남이 간호장교들이랑 어울려 춤추고 놀기만 하니까 어떤 며느리를 맞을지 걱정이 많았었지. 아내와 결혼한다고 하니까 집에서 안심하고 무척 좋아하셨어. 1958년에 결혼한 후 내가 먼저 渡美하고 아내는 이듬해에 왔는데 그때가 가장 외롭고 힘들었던 거 같아』
30년간 100권의 책 출간 춤으로 유명해지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었다. 의사로서 업적을 세워 명성을 얻으려면 글을 써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논문을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병원 학술지에 발표하기 위해 열심히 썼더니 저널의 에디터로 위탁을 받게 됐다. 이제는 자꾸 써야 할 의무도 생겼다. 레지던트 학술지의 에디팅도 맡으면서 12개의 논문이 나가자 책을 쓰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래서 자신감을 갖고 써내려 갔다. 트레이닝이 끝난 후 조교 1년과 부교수 2년을 거쳐 3년 만에 제퍼슨 대학의 正敎授(정교수)로 초청을 받았다. 정교수가 되기엔 파격적인 37세였다. 1969년 강심제 중독에 대한 최초의 책을 출판했고 그후 30년간 100권이 출판됐으니 해마다 3권 이상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처음엔 목적을 위해 썼지만 그 후는 원고 청탁을 받아 계속 출판했지. 책을 낼 때는 출판사에서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엔 내가 원하는 대로 계약도 바꿔서 했어. 저자에게 주는 책도 100권으로 올리고 인세도 올려 받았지』 절판된 책도 있지만 아직도 꾸준히 나가는 책들이 많다. 심장병 환자의 사례에 대한 책이 많아 아직도 의사들이 진단을 위해 많이 읽는다. 인세로 들어오는 돈은 아낌없이 사치를 위해 사용했다. 아내가 원하지 않아도 보석을 사서 하나씩 선물하는 것이 큰 즐거움의 하나다. 공들여 쓴 책의 인세를 사치를 위해 할애하는 습관은 멋지게 살겠다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비롯한다.
동양인으로 학술회의 미국대표 鄭박사의 책은 손에 쥔 방망이를 한 번씩 두드리면 나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책을 써서 출판하는 걸 하도 쉽고 간단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흘려 보내는 말 속에 저술가의 노고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鄭박사는 아주 친한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고 있다고 했다. 놀기만 좋아하면서 언제 글을 쓰나 의아해 하는 친구들도 물론 주위에 있을 것이다. 『논문을 수백 편 발표하고 책을 쓰고 하니까 각 곳에서 강연 의뢰가 오는 거야. 내 나이 40代인데 심포지엄의 연사로 초빙 받아서 가보면 심장학계의 大家들이 앉아있어. 그들과 토론해야 하니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어. 세계 학술회에 가게되면 미국대표로 참석하는 거야. 동양인이 미국 대표라는 자존심의 싸움도 한 몫을 해. 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온갖 질문에 대비한 준비를 하면서 잠을 못 잤어. 내가 좀 생각이 많아. 그래서 지금도 이런저런 생각을 골똘히 하다 보면 늦도록 잠을 못 이뤄』 鄭박사가 업적과 성취를 말할 때는 그것이 쉽고 간단하게 보인다. 세상일을 마음대로 원하는 모습으로 주무르고 만들며 산다는 인상을 받는다. 별 것 아닌 듯이 말하는 낙천적인 설명 때문이다. 그래서 운이 좋다는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노력 없이 운만 따를 수 없다는 세상사의 진실을 흘려 버릴 수는 없었다. 『누가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듣기 싫었어. 헌데 간 수술을 두 차례 받으면서 내가 정말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지. 슈퍼파워의 도움은 운이 아냐? 이젠 운 좋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여』 첫돌을 지낸 친손녀 글로리아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소리가 들려왔다. 메릴 린치의 시니어 부사장으로 일하는 외아들에게서 얻은 손녀다. 유난히 집안에 의사들이 많고 부모도 의사라 그 길을 걸을 줄 알았는데 아들 크리스는 비즈니스를 택하고 대신 家業은 딸이 이었다. 피부과 의사인 딸 린다와 사위는 디트로이트에서 개업해 살고 있다. 『심장은 자동차의 엔진이야. 자동차의 다른 기관은 고쳐 쓸 수 있지만 엔진이 나가면 그만이잖아. 심장이식도 하지만 성공률이 낮고 힘들어. 미국에서 가장 큰 사망원인은 암 다음으로 심장마비야』
심장병 예방법
 심장에 관한 강의는 며칠 후 부인이 관여하는 美洲 이화대학 총회모임에서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심장병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지를 설명하는 강연이다. 심장병의 대표적인 증세가 호흡곤란이나 가슴에 뻐근한 통증 또는 강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한 鄭박사는 심장병의 예방을 위해선 규칙적인 운동과 체중조절, 늘 즐겁게 사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짤막한 강의를 했다. 『스트레스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공 지향적이고 매사를 자신이 해결하려고 집착하는 완전주의자들은 심장에 당연히 부담을 줘요. 시간 낭비를 안 하려고 철저하고 남이 시간을 안 지켜도 격분하고 충동적인 사람, 성취에 대한 야심이 크고 경쟁적이고 성취욕심이 큰 사람들의 심장병 발병률이 높아요. 내성적인 것도 안 좋아요. 마음에 맺힌 걸 풀지 못하고 참고 쌓는 성격도 심장부담을 유발해 병을 만들 수 있지요』 현대인 가운데 鄭박사가 열거하는 캐릭터 중 어느 것 하나쯤 갖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鄭박사 자신도 유명해지려는 야심과 성취욕으로 그 많은 책을 썼다고 하는데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鄭박사에게 스트레스 해소법을 물어 보았다. 『우리는 담아두지를 못해. 할 말은 모두 다 하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아. 별 말을 다 한다고 옛적엔 아내한테 잔소리도 좀 들었지. 낙천적이고 항상 즐거운 마음이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낙심하고 슬펐던 기억이 없어』 모임에서 잘 놀기 위해 신곡 준비에 바쁜 鄭박사는 아주 기분이 좋다. 간이 안 좋았던 먹구름도 가셨으니 평시의 즐거움을 찾아 매사에 낙천적이다. 힘든 역경을 뚫고 어렵게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의학박사. 두 번의 간이식 수술로 사경을 헤맨 고통스런 시간, 굴곡을 거쳐 승리에 이르게 된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을 다루려 했던 필자는 풍족하고 넘치는 그래서 평탄하고 순조로웠던 행운의 삶을 설명하는 일 이외엔 털어 낸 것이 없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