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기면 당리唐里 유래
영양에서 봉화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여 있다. 일월산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찰당골로 이어져서 당리 앞으로 흐른다. 다시 행화(杏花)앞으로 흐르는 내와 함수하는 곳으로 보아 그위에 있다.당리 북동쪽으로 일월산이 있으며 여기에 황씨부인당이라 하는 서낭(성황당)이 있으므로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영양군 청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당리라 하였으며 청기면사무소 당리출장소가 있었고 청북지서와 청북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당동의 당(唐)은 황씨부인당을 이르는 뜻이니 사당이란 의미가 강하다.
[마을의 특징]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찰당골 북쪽의 부인당과 지프레기 고개에 있는 산령각(山靈閣)과 대답바위를 들 수 있겠다. 부인당에는 일월산의 황씨부인의 신위(神位)를 모셔 놓았고, 산령각은 6.25전쟁에 희생당한 영혼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한때 우리 국군이 인민군에게 많이 피살되었다. 해서인지 그 뒤로 자동차를 운전하여 이 고개를 넘으면 기사 눈에 헛것이 보여서 사람을 피하려다가 잦은 교통 사고를 내고는 했다는 것이다. 유엔군과 동네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합하여 떠도는 외로운 영혼들을 달래기 위하여 신당을 세우고 위령제(慰靈祭)를 지냈는데 그 뒤로는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대답바위는 석문 서쪽에 있는 바위로 굴이 있다.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 울려서 메아리가 지니 마치 대답을 하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찰당골에 가면 황씨부인당을 세운 이명존 선생의 손자인 일초 이제만 선생이 아름다운 일월산 청계(靑溪)의 경관을 사랑하여 찰당골 아홉굽이에 손수 바위에다 구곡을 새겨 놓았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나 앞으로 일월산을 찾는 이들에게 한층 일월산의 멋을 더하여 줄 것으로 본다. 잠정적으로 이를 일월구곡(日月九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간동(澗洞)
일월산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찰당골에 이어져서 당리 마을 앞으로 흐르게 되고 행화에서 흐르는 내가 합수되는 곳 바로 위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물줄기 사이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간동이라 불리어지고 있다(김영진(72) 제보)
찰골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것이 간동으로 보인다. 찰골이라 함은 사이를 의미하는 살골-찰골로 이어지는 뿌리말을 떠 올릴수 있다.중세어로 찰은 샘은 새다에서 다시 새다의 '새'는 사이란 말이 줄어져서 이루어진 형태이기도 그러하다. 찰골의 '찰'은 중세어로 보아서 샘을 뜻함이니 그리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곳집마ㆍ고사(庫舍)
초상이 났을 때 시체를 운반하는 상여를 보관해 두는 곳집이 마을 앞에 있다 하여 고사(庫舍)혹은 곳집마라고 한다(정석봉(72)제보)
고사는 곳집을 한자로 뒤쳐 적은 것이다.
*돌문이ㆍ석문(石門)마을 앞 개울가에는 돌이 많다. 이 돌을 이용하여 석문을 쌓아 올려 동네의 문을 만들었다. 마을 입구에 돌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석문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돌문을 쌓았던 큰 바위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최상정(55) 제보)
돌문이를 한자로 뒤쳐 적으면 석문이 된다 돌문이가 본래의 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물갈이ㆍ수곡(水谷)
마을의 통로가 대부분 물길을 따라 나 있기에 물이 갈라지는 곳, 물이 흩어지는 마을이라 하여 동명을 수곡이라 불러오고 있다(주유석(71) 제보)
물갈이를 한자로 뒤쳐서 적으면 수곡이 된다.
*자시목ㆍ사항(沙項)
마을 뒷산의 지형은 흡사 사자 머리 모양을 연상케 할 정도로 사자와 머리와 흡사하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을 사두(獅頭)라고 칭하여 오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자시목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 나는 황색 담배는 전국 제일의 명품이다.(주광석(71)제보)
사목(항)이라 함은 새로이 생긴 길목의 뜻을 드러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땅 이름의 분포로 보아 그리 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항의 '사(沙)'는 새롭다는 우리말을 한자의 소리로 적은 것이며, 항(項)은 목이란 우리말을 한자의 뜻을 적은 것이라 하겠다. 자시 또한 옛말로 보면 자의 지읒이 아직 소리로서 뜻을 가름하는 기능이 약한 시절로 거슬러 오르면 자-사로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면 자시-잣이-삿이-사이로 이어져서 사이 곧 새와 같은 계열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찰당골(察唐谷ㆍ察唐洞)ㆍ찰당(察唐)
당골 북동쪽 맨 위에 있는 마을이다. 동리 어귀에 있는 큰 당나무는 노인들의 시름을 잊게하고 신선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참으로 멋진 당나무라는 뜻으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황씨부인당이 있는 산 아래에는 천화사(天華寺)란 절이 있었다.(권중도(55) 제보)
조선 왕조 헌종 때의 선비였던 일초(一樵) 이제만(李濟萬)이 선생이 찰당골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손수 바위에다 구곡(九曲)를 새겨 놓고 오며 가며 일월산의 자연을 음미하였다 이에 대한 글도 남겼으나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글은 찾아 볼 길이 없다.(강용희(63)제보)
영천 이씨(永川李氏) 가보를 찾아보니 손수 벼랑에다 구곡을 새겨놓고 글을 남겼다(手刻丹崖九曲有遺詩)고 하였는데 현재 남아 전해 오는 글은 확인할 길이 없다. 일초 선생은 황씨부인당을 세운 이명존(李明存) 선생의 손자요, 조선왕조 정조때에 전의를 지냈던 단곡(丹谷)이진태 선생의 후사이다. 한자대로 풀이를 하자면 당을 잘 살피는 골, 그래서 찰당골(察唐谷)이어야 하는데 당나라 당(唐)을 씀으로 하여 여기서 조차도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 의식이 드러나보인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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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역사 알고 가시더/창태129, 207) 청기면 당리(唐里)가 궁금니껴?
※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그랑, 이까, 엄체, 쬐메, 돌삐, 맹글게, 꼭띠, 당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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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리(唐里)는 영양서 봉화로 가는 길맥이고
1600년경 신안주씨들이 마실을 맹글었니더.
일월산서 발원한 샘은 그랑이 되가꼬
찰땅꼴캉 마실 중심지(구.당동시장)를 지나
무진리까지, 쭉 이까 지니더.
글코, 당리(唐里)의 당(唐)은
황씨부인당을 일컫는 것 이외에도
서낭당 마실이라는 뜻또 있니더.
(간동, 관동)
당리에서 가장 서쪼구에 위치하고 있꼬
관동경노당이 있는데시더.
찰땅꼴서 내려오는 그랑캉 행화서
내려오는 그랑이 엄체지는 데서
쬐메 우(위)쪼구 물줄기 새(사이)에 있따꼬
간동(澗洞)이라꼬 카기도 하고.
마실 뒤쪼구 산의 모습이
탕관(탕건)가꺼러 생겼따 케가 관동이라
카기도 하니더.
간동(澗洞)은 찰골을 한자로 쓴거시더.
(곳집마ㆍ고사)
초상이 났을 때 시체를 옮기는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이 있었떤 데라꼬 곳집마라 카니더.
곳집마는 당리 중심지 마실이지만
우에서 부터 곳집마, 장터, 석문, 수곡으로
이사져 있니더.
고사(庫舍)는 곳집을 한자로 쓴거시더.
(돌문이ㆍ석문)
당리새마을 회관이 있꼬
당리 중심지 마실로 1970년 말까지는
5일 장이 열린 장터마실로
영천이씨들이 많이 살았니더.
마실 앞 그랑 가세는
돌삐가 쌔배가꼬 이 돌삐를 싸가(쌓아 올라서)
마실입구에 문을 맹글게 되가꼬
석문이라 카니더.
석문는 당리 중심지 마실이지만
우에서 부터 곳집마, 장터, 석문, 수곡으로
이사져 있니더.
석문(石門)은 돌문이를 한자로 쓴거시더.
(물갈이ㆍ수곡)
장터(석문) 아래쪼구에 있는 쪼메한 마실로
그랑이 두개로 농갈라지는
그 그랑따라 마실이 맹글어져 있따꼬
수곡이라 카니더.
신안주씨 집성촌으로
당리에서는 맹 먼저 맹글어진 마실 이었꼬
당리 중심지 이지만 우에서 부터
곳집마, 장터, 석문, 수곡으로 이사져 있니더.
수곡(水谷)은 물갈이를 한자로 쓴거시더.
(자시목ㆍ사항)
풍수상, 마실 뒷산이 사자머리 가타꼬
사두(獅頭)라꼬 켔니더.
그후, 새로 맹글어진 길맥이에 위치한
마실이라꼬 자시목이라꼬 카게 된니더.
사항(沙項)은 자시목을 한자로 쓴거시더.
(찰당골)
중심지 마실(구 시장)로 부터 북동쪼구
맨 꼭때에 있는 마실이시더.
당(唐)을 잘 보살피는 골짜기라 케가
찰당골(察唐谷)이라 카기도 하고
교회가 있었떤골이라꼬 찰당골(刹堂谷)
이라 카기도 하니더.
과거 마실 어귀에 있떤 큰 당낭(당나무)은
누구나 마카다 신성시 켔꼬.
이 세상의 최고의 당낭기라 여겼찌만
2000년경에 저수지가 맹글어지면서
수몰되고 말았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