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반만년 뿌리를 찾아서
1. 선사시대 강성의 원류를 찾기까지
2) 역사를 만든 문자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동물은 저마다 고유한 소리를 가지고 의사를 전달합니다. 갓난아기는 울음으로 의사 표시를 합니다. 그것과 비슷하게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은 소리로 의사 표시를 했을 겁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정교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란 다섯 가지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원시인은 감각의 소리를 4만 5000년 전에 언어로 진화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언어를 시각화하여 눈에 보이는 사물에 이름을 지었습니다. 종족의 언어에 따라 한 사물의 이름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후세에 문자가 발명되면서 “나무”, “木”, “tree” 등이 그 예입니다. 원시인은 단어와 단어를 결합해 다양한 의미를 나타내는 문장을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소통 방식이었던 물리적 의사 표현은 구체적이지 못해 불편했지만, 서로 간의 대면 대화는 동일한 세계를 상상하게 하여 협동하는 방법을 알게 했습니다.
조선시대 10%도 안 되는 사대부들이 독점했던 한자(漢字)는 지금으로부터 4300여 년 전 창힐이라는 사람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자의 초기 문자가 상형문자(象形文字)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창힐이 전부 만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문자를 한자 부수 214가지를 조합하여 두고두고 만들었을 겁니다. 부수란 글자를 찾기 쉽게 하려고 한문자전에서 각 부의 글자로 색인에 나와 있는 자형을 말합니다. 한자는 주로 형성(形聲)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형(形)은 의미를, 성(聲)은 음을 나타냅니다. 한자에서 부수가 형(形)을 나타내므로, 팁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214가지 한자 부수의 뜻만 알게 되면, 수만 자 한자 절반의 기본적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은 문자가 발명된 후에 역사가들이 지은 혈족의 이름입니다. 역사가들은 그 혈족에서 가장 먼 조상님의 업적과 대대로 살아왔던 곳의 태생지와 그들의 특징을 살려 작명한 것입니다. 대체로 지명이나 산과 강 이름 중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명이나 산, 강 이름이 없었을 때는 어떤 종족의 몸에 밴 생활 속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성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3) 우리 성이 왜 姜인가?
나라 이름이든, 종족이든, 성에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아주 옛날에는 성은 어머니에 의해 정해집니다. 모계사회 사람들은 어머니만을 알고 아버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란 개념이 없던 시대입니다. 종족 번식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사람이 무기이고 재산이었습니다.
주나라가 성(姓) 제도를 처음 도입할 때 성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비롯했기에 여(女)를 부수로 사용하여 ‘어머니를 섬긴다는 희(姬)’를 성으로 하였습니다. 모계사회의 풍습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포유동물 대부분 모계사회입니다.
姜자에 있는 羊은 유목민에게 중요한 단백질을 공급하고, 양모는 추위를 막아주는 옷입니다. 양들에게는 우두머리가 제일이지만, 유목민에게는 양의 개체 수를 늘릴 수 있는 암컷 양이 중요합니다. 우리 조상님은 양과 함께 생활하였으므로 암컷 양으로 씨족을 상징하고자 羊자와 女자를 상하로 배열하여 姜으로 한 것입니다. 물론 후세 조상이 성을 지었는지, 역사가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나라 은공(隱公)은 신하 중중(衆仲)에게 서를 내리는 제도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고사입니다. 은공은 우공의 장서자입니다. 중중이 대답했습니다.
"천자는 덕이 있는 이를 세우고, 태어난 곳에 따라 성을 내리고, (제사지낼) 땅을 나누어주고, 씨를 정해줍니다. 제후는 자(字)를 가지고 시호를 삼으며, 후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씨족을 삼습니다. 字는 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본이름 외에 부르는 호칭입니다. 관직을 맡아 대대로 공로가 있으면, 관직명으로 씨족명으로 삼기도 합니다.
씨를 정하는 것은 위에서 보듯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각각의 지연(地緣)을 토대로 표시합니다. 강성(姜氏)도 지연에 의해서 금천 강씨. 진주 강씨로 불립니다. 지연은 본관에 해당합니다. 본관은 씨의 시조가 태어난 곳입니다.
고려 때 여성의 경우 지명에 부인(夫人)을 붙여 사용했습니다. 영가군부인하면 안동 권씨라는 뜻입니다. 영가는 안동의 옛날 지명입니다. 공목공 배위를 ‘정신택주(貞愼宅主) 진주 하씨’라 합니다. 택주는 정2품의 정헌제군(正憲諸君)과 종2품의 가정제군(嘉靖諸君)의 처(妻) 작호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의 이름은 성 다음에 씨를 붙여 대신했습니다. 예를 들면, 실은 청주(淸州) 한씨(韓氏)라 했습니다.
거꾸로 성이 그 지역의 산이나 강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몇몇 서가 그렇습니다. 중국 감숙성 위하(渭河)의 지류에는 강성(姜姓)을 이끄는 부락이 있어 강수(姜水)가 된 것입니다. 하남성 신정시를 지나는 지금의 이수(潩水) 헌원 언덕에 황제(黃帝)의 후손 공손(公孫)씨가 이끄는 부락이 있었는데, 성을 희(姬)씨로 바꾸었기에 그 지류를 희수(姬水)라 합니다.
후대에 가서 성이 나라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趙), 정(鄭), 한(韓), 오(吳), 송(宋) 등입니다.
4) 강씨 본관(本貫)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강씨 본관(本貫)은 금천(衿川 : 옛 시흥)과 진주(晉州)로 대별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위의 두 지역이 관향(貫鄕)으로 칭하게 된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려사에 강감찬을 금주인(衿州人), 강민첨을 진주 진강인(晉康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향(貫鄕)은 본관(本貫)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공신(功臣) 칭호에 포함되어 있는 봉지(封地)의 지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지방의 유력한 호족 세력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일정한 역할을 함에 따라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살던 지역 명에서 연유한 군호(君號)와 식읍(食邑)을 내리고 성씨를 하사한 사례가 많았다.
귀주대첩에서 대승한 인헌공 강감찬 장군의 공신 작호는 검교(檢校)...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검교(檢校)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이다. 천수군(天水郡)은 봉지(封地)에 해당하고 개국(開國)은 공신의 종류이며, 후(侯)는 작위(爵位)이다. 봉지(封地)는 제후(諸侯)를 봉하여 준 땅이지만, 공신 호칭 앞에 검교(檢校)를 붙인 것으로 보아 명예직으로 실질적인 봉지가 없다는 것이다. 인헌공은 금천(衿川) 혹은 금주(衿州 : 옛 시흥, 지금은 서울 봉천동) 출신이기 때문에 금주군개국후(衿州郡開國侯)로 봉해져야 함에도 염재 신농씨가 살았다는 중국에 있는 섬서성(陝西省) 천수군(天水郡)을 봉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당시만 해도 아직 성씨의 본관이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5) 고려시대 봉작(封爵)의 등급
봉작에는 크게 왕(王)으로 봉해주는 왕작(王爵)과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5등작이 있었다. 고려의 경우 종친이나 일반 신하에게 실제 봉작해 준 것은 5등작이었다.
다만, 종친의 5등작은 공후백(公侯伯) 3단계까지만 수여되었고, 일반 신하는 공후백자남 5단계를 다 수여하였다. 그리고 일반신하의 5등작은 종친과는 달리 봉지(封地)에 해당하는 군현(郡縣)의 명칭과 개국(開國)이 덧붙여서 호칭되었다.
예를 든다면 ‘○○군개국남(○○郡開國男)’ ‘○○현개국남(○○縣開國男)’과 같이 되었다. 이것은 ‘○○군남(○○郡男)’ ‘○○현남(○○縣男)’ 혹은 ‘○○남(○○男)’으로도 호칭되었다. 그런데 드물게 그냥 ‘개국남(開國男)’으로도 호칭되었던 것 같다.
실례로는 보이지 않으나 ‘개국후(開國侯)’나 ‘개국백(開國伯)’이 한 차례씩 나오고 있고 ‘개국자(開國子)’가 봉작규정에 나오고 있어 그렇게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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